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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꿈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극

은바리라이프 2010. 1. 25. 17:01

아바타- 꿈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극 


 도저히 안 보려고 해도 안 볼 수 없는 영화가 있다. 너도 나도 잘 됐다하고 엄청난 흥행에 성공했다는 영화는 ‘또 허리우드 식 때리고 부수는 컴퓨터 그래픽 영화의 일종이겠지.’ 하고 그런 영화를 안 보는 소수의 오만한 사람의 쪽에 서고 싶지만 이번 아바타는 3D 영화의 신기원을 이루어냈다는 극찬과 함께 뒷말이 너무 무성하여 도대체 어떤 영화이기에……도저히 참을 수 없어 드디어 지난 주말 꽃님이와 함께 코리아타운 영화관에서 한글 자막이 딸린 영화 아바타를 보았다.(미국 산 지가 20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림으로만 보아도 이해되는 영화가 아니라 만만치 않은 메시지가 담긴 영화는 아직도 한글 자막이 없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2시간 40분이나 되는 긴 영화였지만 지루하지 않고 그야말로 정신없이 보았다. 대부분의 경우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지만 이 영화는 소문대로 잘 만들었고 먹을 것도 많았다. 사실 남의 작품을 좀 삐딱하게 보는 습성이 있는 평론이라는 불손한 작업을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십여 년전에 이 감독이 만든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보고 조금은 속았다는 좋지 않은 기억이 남아 있었기에 이번에는 안 속는다고 눈에 잔뜩 비판의 각을 세우고 이 영화를 보았지만 이 영화는 잘 만들었다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래의 허리우드 액션영화가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단순한 구도로 만들어져 너무 상투적이라서 하품만 나오는 것에 비하여 이 영화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풍부한 스토리를 지닌 점도 맘에 들었다. 이 영화에 대해 뒷말이 무성한 것도 영화의 이러한 다의적 해석 때문인 지도 모른다. 


 스토리의 구조가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다. 최첨단의 컴퓨터와 막강한 군사장비로 무장한 기계문명을 숭상하고 물질숭배를 믿는 인간족과 모든 동식물에는 영혼이 있고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애니미즘을 숭배하는 나비족과의 전쟁 이야기이다. 2154년 인류는 자원의 고갈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여 대체에너지를 찾고 있던 중 지구로부터 4.5 광년 떨어진 지구와 매우 유사한 환경을 지닌 판도라 행성에서 대체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는 언옥타늄이라는 광물질이 엄청나게 매장된 것을 발견한다. 인류는 기업체와 과학자 그리고 이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전직 해병대 대원들이 주축이 된 보안업체 등으로 구성된 아바타 프로젝트를 구성하여 판도라 개척에 나선다. 영화 속에서 기업체의 간부는 이 프로젝트의 최고책임자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지휘한다. 그가 사무실에 앉아  언옥타늄 한 조각을 어루만지며 이 언옥타늄 한 덩어리면 몇 천만불에 달한다며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미국의 대외전쟁이 결국 군산학복합체의 합작이라는 암시를 강하게 받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 아니 것 같다. 왠지 이 장면에서 한편으론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이라크의 석유자원에 침 흘리는 석유재벌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이 영화가 반전반미 영화라는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이 무성한 것은 영화의 이러한 점 때문이다. 그런데 이 광물의 이름이 재미있다. un-obtain을 연상시키는 언옥타늄이라는 단어는 결국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으려는 인간의 헛된 욕심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간략히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해 보자.

해병대 복무 중 부상을 입고 하반신이 마비된 전직 해병대원인 제이크라는 주인공이 아바타 프로젝트의 아바타를 조정할 적임자로 선정되어 판도라 행성 기지에 온다. 여기서 아바타는 나비족과 인간의 DNA로 합성한 생명체로 꿈을 꾸는 동안 인간의 뇌파로  조정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제이크는 계속된 훈련을 거쳐 꿈을 꾸면서 아바타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게 되자 나비족을 언옥타늄이 매장된 장소로부터 소거하라는 임무를 받고 나비족의 DNA로 만든 아바타가 되어 나비족의 마을에 들어간다. 그러던 제이크에게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꿈속에서 아바타가 되어 나비족 마을에서 활동하던 제이크는 나비족 추장의 딸인 네이티리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네이티리의 지도하에 서서히 제이크는 자연과 교감하는 나비족의 삶의 방식에 공감하게 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나비족이 숭배하는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족의 무자비한 폭거를 목격하고 제이크는 심한 충격을 받는다. 인간족과 나비족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던 제이크는 드디어 나비족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하고 언옥타늄 발굴에 혈안이 되어 나비족을 학살하는 인간족과의 전쟁에 선봉장이 되어 나비족을 구출한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백인 주인공이 토벌대를 이탈하여 원시종족의 일원이 되어 토벌대와 싸우는 스토리는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늑대와의 춤을>이란 영화도 이러한 스토리를 갖고  있으며 인디안 추장의 딸과 사랑에 빠진 백인 선장의 이야기를 다룬 <포카혼타스>나 통역을 해주던 마리코와 사랑에 빠져 중세 일본의 사무라이가 되는 백인 선원의 이야기인 <쇼군> 또한 동일한 스토리의 구조를 지닌다. (이처럼 백인이 결국 미개 인종을 구원한다는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영화에 대해 교묘한 인종주의라는 비판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한 대로 <모든 새로운 것은 단지 망각의 결과일 뿐>이다. 지구상에 새로운 스토리는 없다. 새로운 것으로 가득 찼다는 영화 <아바타>의 스토리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해서 나는 실망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스토리보다도 내가 영화를 보기 전 궁금했던 것은  힌두교에서 지상에 내려온 신을 뜻하고 사이버 공간에서는 사이버 캐릭터로 쓰이고 있는 아바타란 단어가 영화의 제목으로 설정된 데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아바타를 컴퓨터상의 사이버 세계에서 주인공의 아바타가 싸우는 내용을 그린 사이버 공상영화로 생각했는데 영화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영화에서는 판도라는 사이버 상의 가상공간이 아니라 실재 외계의 행성이다.(실재라고 하지만 영화 속 미래에 나오는 세계이기 때문에 상상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이 판도라 행성에 사는 나비족의 DNA를 복제하여 만든 아바타를 인간이 꿈을 꾸는 동안 조정한다는 것이다. 주인공 제이크는 평소에는 불구의 퇴역군인이지만 꿈속에서는 건장한 나비족 남성의 모습을 지닌 아바타로 변신한다. 차츰 꿈속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교차하면서 제이크에게는 의문이 생긴다. 나는 현실 세계의 제이크인가? 나비족의 아바타가 된 제이크인가? 이 점에서 유명한 장자에 나오는 '나비의 꿈'(胡蝶之夢)이 연상된다. 어느 날 장주가 한낮에 잠깐 잠이 들었다. 장주는 꿈을 꾸었는데 나비가 되어 세상을 마음껏 날아다녔다. 깨어나 보니 꿈이었다. 허망한 생각이 들어 세상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가?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지금 나는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계속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나비의 꿈을 연상시키듯 우연으로 보기에는 신기하게도 영화 속의 판도라 행성에 사는 종족의 이름은 나비이다.


 어느 날 제이크의 행동에 변화가 생긴 것을 눈치 챈 마일즈 대령은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아마 이 질문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일지도 모른다. 제이크는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라캉은 말한다. 인간은 욕망하는 주체이다라고. 제이크가 만약 라캉을 읽었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나는 욕망하는 제이크입니다. 나비족의 일원이 되어 좋아서 날뛰는 저 아바타가 바로 납니다.”

이 조직이 전직 해병대원으로 부상을 입고 불구가 된 제이크를 아바타를 조정하는 대원으로 선정한 것은 대실수이다.(영화에서 여박사가 제이크가 불구인 것을 보고 실망하는 장면은 여박사는 이 점을 미리 우려했기 때문이 아닐까?) 조직은 연금으로 받는 돈으로는 자신의 다리를 고칠 수 없는 제이크가(백년 후에도 여전히 돈 없는 사람은 불구인 다리도 못 고친다?)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면 다리를 고쳐주겠다고 유혹한다. 제이크는 임무에 따라 꿈을 꾼다. 임무의 첫날 꿈속에서 제이크는 건장한 나비족 남자가 된다. 첫 꿈속에서 걸을 수 있게 된 아바타가 되어 기뻐 날뛰는 제이크를 보라. 그는 꿈속에서 이미 자신의 제일 큰 욕망을 성취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이것은 꿈이 아니다. 프로이드가 말하는 인간의 꿈은 수퍼에고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욕망의 변형이지만 영화에서의 제이크가 꾸는 꿈은 꿈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이다. 실재로 나비족의 일원이 되어 사랑하는 대상이 생긴, 비록 아바타이지만 제이크 자신인 것이다. 따라서 다리를 고쳐주겠다는 조직의 제의는 더 이상 유혹적인 것이 못 된다. 제이크는 희망이라는, 인간에게 마지막 소망이 담긴 판도라 행성에서(그리이스 신화에서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으로 튀어 나오는 것이 희망이다.) 나비족이 되어 마음껏 욕망하는 것이다. 욕망을 욕망하고, 타인을 욕망하고,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자연과 내가 교감하고 주체와 타자가 구별이 없는 세계에서 이크란를 타고 날아다니며 마음껏 욕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이 실현되는 세계가 꿈이 아니라고 한다면 누구인들 주체와 욕망이 대립하고 인간과 자연이 대립하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타자를 학살하는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겠는가? (라캉에 의하면 수퍼에고란 것이 결국 아버지의 이름으로 된 세계의 억압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러한 아버지의 이름으로 된 남근중심사회인 부계사회 인간족과 어머니의 이름으로 된 모계사회인 나비족과의 대립구도의 설정은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제이크는 나비족의 일원이 되어 신화 속의 영웅이 되어 봉황(토럭막토는 길조의 새인 봉황을 연상시킨다.)을 타고 인간족과 싸우는 선봉에 선다. 제이크가 결국 인간족을 배반하고 나비족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비극은 이미 기병대에서 낙오된 케빈 코스트너가 사막에서 <늑대와의 춤을>추며 자연과의 합일의 황홀한 경험을 한 후 인디안 토벌의 명령을 무시하고 인디안 수족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재현이다.


 영화는 결국 나비족이 승리하고 인간족은 나비족의 포로가 되어 판도라 행성을 떠나고 제이크는 인간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아바타의 모습대로 나비족으로 영원히 남는 것으로 끝난다. 저 패잔병이 되어 판도라 행성을 떠나는 인간들의 초라한 모습들을 보라!  어찌 보면 통쾌한 것 같지만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는 나의 발걸음이 무거운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족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러한 인간족의 패배를 선뜻 받아드리기 거북한 탓인가? 그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이처럼 영화에서는 항상 인간의 꿈이 승리하지만 극장을 나오는 순간 부딪히는 현실에서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홈 트리라는 나비족이 숭배하는 거대한 나무를 파괴하는 인간족처럼 현실에서는 오늘도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서서히 거대한 자연을 파괴하고 있고 자원 획득이라는 숨은 동기가 감춰진 전쟁들이 지속적으로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보호라는 진보진영의 메시지를 담았다는 이 영화를 만드는데 5000억의 제작비가 들었다는 소식은 또 다른 씁쓸함을 남긴다. 현실의 세계는 불변적인 반면에 가상의 세계에서만 대리만족을 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위안물을 제작하는 코스트가 나날이 상승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위안을 찾는데 지쳐서 갈수록 비용이 많이 드는 특별한 것을 원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결국은 이 영화 역시 우리가 사는 세계는 결코 변화할 수 없으며(150년 후의 세계 또한 그러하듯이) 인간은 오로지 꿈꿀 뿐이다는, 리얼리즘의 세계와 이상적인 세계를 영원히 분리해 놓으려는, 자본에 물든 인간의 세계를 고착화시키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이 반영된 그런 영화중의 하나일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