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학원 좀 보내주세요” 재활단체 설득한 당찬 소녀
2009년을 보내며
서울 발산동 아파트 거실로 들어오는 볕이 이으뜸(14)양과 어머니(41), 동생 서원이(3)의 환한 얼굴을 비추고 있다. [김성룡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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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이는 또래처럼 그룹 2PM과 슈퍼주니어를 좋아한다. 이들의 노래를 MP3 플레이어로 듣는 게 바람이다. 초등학교 졸업 때 샀던 브랜드 운동화는 뒤꿈치가 다 낡았다. 여행 경험이 없어 아직 바다를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으뜸이에겐 이런 문제가 ‘결핍’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사춘기 소녀, 으뜸이에게 중요한 건 미래고 꿈이며, 그래서 공부가 필요했다. 초등학교 때는 반에서 1~2등을 놓치지 않았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막 뛰어다니기 시작한 동생을 돌보는 것을 ‘성적이 떨어진 이유’로 변명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으뜸이는 계속 뒤처지는 자신을 두고볼 수 없었다. 으뜸이는 학원에 다닐 방법을 찾아 나섰다.
지난 10월, 한국장애인 재활협회에 여중생이 보낸 ‘지원 신청서’가 접수됐다. 여중생은 장애인이 아니었다.
“부모님 모두 장애인이고 맏딸인 제가 동생을 챙겨야 합니다. 열심히 하는 데도, 이게 제 한계인 것 같아요. 부모님을 봐서라도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학원 보내주시면 안 되나요. 공부할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잘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장애인이지만 그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되지요. 약속 드릴게요. 만약 저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성적표를 모두 보내겠습니다. 발전하는 모습도 보여드리겠습니다. 사회의 기반이 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으뜸이는 결코 숨지 않는다.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 부모님에게 인사도 시키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 말하는 걸 꺼리지 않는다. 그러기까지 으뜸이는 어린 시절 상처를 견뎌야 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입학식 때 휠체어를 타고 온 아버지를 놀렸다. 4학년 때는 기초수급 대상자 가정이라며 쌀과 김이 으뜸이 앞에 놓였다. 아이들은 으뜸이의 등에 대고 “너 영세민이냐”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으뜸이는 숨어서는 안 된다는 걸,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5학년 때부터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기 시작했다. 부모도, 친구도 놀랐다고 한다. 으뜸이는 더 이상 놀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화이트 데이 때면 남자 친구에게서 받은 선물을 집으로 한아름 들고 왔다.
그의 꿈은 ‘헤어·메이크업 디자이너’다. 올여름엔 서울 영등포에 있는 전문학원들을 돌아다녔다. 지금 다니려는 게 아니라 어떤 곳인지 보고싶었다. 으뜸이는 자신의 꿈을 선명하게 유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수강 한 번 안 한 학원의 강사와 지금도 연락을 주고 받는다. 그래서 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 수학은 괜찮은데 영어는 영 자신이 없었다. 나중에 해외에 나가 공부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은 으뜸이가 학원에 다니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영어 때문이었다.
이것저것 사달라고 조를 나이에,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혼자 길을 헤쳐 나가는 으뜸이를 보면서 어머니는 마음이 아팠다. 목이 늘어난 티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있는 딸, 세 살짜리 동생을 딸처럼 어르고 달래는 딸이 으뜸이었다. 부모는 혹시 딸이 다쳐서 자기처럼 살까 봐 그게 가장 걱정이다. 그래서 두 아이를 위해 20만원이 넘는 보험을 들었다. 아파서 지금처럼 부모처럼 어렵게 살지 말라는 뜻이라 했다. 으뜸이는 어머니가 기자에게 귀띔으로 말해준 그 모든 걸,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글=이정봉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