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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의 덫에 걸린 어거스틴

은바리라이프 2009. 11. 25. 17:42

마니교의 덫에 걸린 어거스틴



 

이규철
육군 군목(소령), 계명대 Ph.D, 『어둠에서 빛으로: 하나님을 향한 어거스틴의 회심』의 저자


 

흔히 어거스틴이 탕자의 생활을 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마니교(Manichaean Religion)에 심취했던 9년간(AD 373-386)의 기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훗날 『고백록』의 기록을 통해 “그들의 입은 당신의 이름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의 위안자이시고 보혜사이신 성령의 이름이 뒤섞인 말들로 재잘거리는 악마의 덫이었습니다”라는 말로써 9년 동안 그가 이단 종파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에 가장 깊은 후회를 하였다.

마니교의 창시자는 마니(Mani)이다. 그는 214년 4월 14일, 바벨론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중간지점인 아브루미아(Abrumia)에서 태어났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마니의 부친은 기독교 신자였다. 그러기에 마니는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마니는 12세 때부터 신적 계시를 받아서 자기 스스로를 신적 진리의 해석자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마니는 자기 자신을 하늘로부터 인간세계에 보내진 사자라고 자처하였고, 그 자신이 아담으로부터 시작한 조로아스터(Zarathustra), 석가, 예수로 이어져 내려오는 긴 줄기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마니교는 빛과 어둠의 두 본질을 축으로 한 이원론적 구조 속에 고대 조로아스트교와 미스라교 그리고 영지주의적 우주론을 혼합한 신비주의적 종교체계를 갖고 있는 환상적인 자연철학의 형태로서, 빛과 어둠의 두 본질의 공존을 인정하는 비타협적인 이원론의 신비적 혼합종교이다. 이 마니교는 그 시초부터 선교적 이상에 심혈을 기울여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미쳐 14세기에는 아시아와 유럽의 일부 그리고 아프리카 지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런데 마니교가 중점적으로 문제삼는 것은 어둠이 사람의 시각과 청각, 미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을 막아 빛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니교는 인간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물욕을 억제하고, 안에서 나오는 정신의 광명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이를 위해 철저한 금욕주의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거스틴 같은 당대의 지성인이 마니교와 같은 신화적 혼합주의 이원론인 마니교에 빠지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역사신학자 하르낙에 따르면, 마니교가 자연종교의 토대 위에서 영적인 유익들 즉 계시, 구원, 도덕적 덕목을 제공하였으며, 동시에 선과 악이라는 문제에 단순하지만 심오하고도 편리한 해답을 어거스틴에게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고백록』에 따르면,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입교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접하게 되면서이다. 곧 키케로 철학의 영향으로 어거스틴의 가슴속에 불같은 지혜 추구의 열정이 일어났지만 그는 전적으로 키케로의 철학을 수용할 수 없었다. 이는 키케로의 철학 속에 어거스틴의 어린 시절부터 내재해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록 어거스틴의 눈에는 성경이 단순하면서도 지루하게 느껴져 성경 밖의 철학으로 눈을 돌려 지혜를 열렬히 추구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영적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목마른 새’였다. 마니교는 바로 이런 어거스틴의 영적 갈망을 해소시킬 수 있는 답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마니교에서의 청문자로서 머물던 마음의 또 다른 한구석에는 유년 시절부터 그의 영혼에 잠재해 있었던 악의 문제에 대한 강박관념이 그를 계속 압박하였고 이에 악으로 인한 갈등이 젊은 어거스틴의 삶에서 계속 진행되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마니교를 ‘악마의 덫을 가진 입’이라고 혹평했다. 더욱이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교훈을 ‘찬란한 환상을 통한 공허한 찌꺼기’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마니교에 대한 어거스틴의 평가는 왜 먹는 음식과 관련돼 언급되는 것일까? 그것은 어거스틴이 『마니교도의 도덕에 관한 논문』(De moribus Manichaeorum, 388)에서 밝힌 것처럼, 마니교가 입을 통해 먹는 음식의 규정과 아주 깊은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마니교의 모든 신자들은 채식만 먹어야 했는데, 왜냐하면 고기는 그것을 생산해 내는 성교(sexual intercourse)에 의해 더럽혀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마니교의 성직자들은 그들이 먹기 위해 열매를 따거나 혹은 나무나 식물을 해하는 행동을 금지했다. 특히 마니교 성인들이 음식을 먹으면 뱃속에서 소화시켜 숨을 내뱉을 때 천사를 내놓는다는 억설로 인해,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성직자에게 음식을 나르는 일을 9년간 계속했다. 훗날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입을 통해 나오는 비진리를 자신의 배로 추구하였음을 고백하면서 “배(腹)의 탐욕을 나에게서 제거해 주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마니교에서의 오랜 세월의 방황을 회개와 함께 고백한다.

또한 어거스틴은 마니교가 불타는 환상의 음식을 그에게 먹게 했다고 고발한다. 여기 ‘불타는 환상’은 해와 달에 관련된 것인데, 당시 마니교도는 해와 달 그리고 하늘의 천체가 신성한 빛의 요소를 분리시켜 빛의 왕국에 되돌려 보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직접적으로 276년(또는 277년)에 죽었다고 추정되는 마니의 순교 100주년에 출현하는 ‘헬리 혜성’과 일식 사건을 마니교의 전유물로 연관지음으로 그 환희의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마니교의 신비적 환상주의는 어거스틴에게 회의를 일으켰다. 이와 함께 어거스틴이 마니교의 지도자 파우스투스를 만났지만 그로부터 신통한 답은 듣지 못한 채 오히려 파우스투스의 무지함만을 발견하게 되고, 더불어서 일식이라는 자연현상을 신화적 사건과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해석하는 마니교의 주장이 허구적인 신화적 주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떠나게 된다.

어거스틴이 마니교로부터 받은 영향은 무엇일까?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마니교와의 접촉으로 기독교와는 멀어지는 외형적 특성을 보였지만, 마니교에서의 사상적, 신앙적 방황은 도리어 그에게 신학적 질문을 다시 불러일으키게 하는 역설적 반작용의 기능을 하였다고 술회한다. 곧 마니교에서의 방황 가운데서 가졌던 어거스틴의 마니교적 사상은 그가 마니교를 버림으로써 완고하게 굳어 있던 마니교의 사유체계가 어거스틴의 내면에서 허물어졌는데, 이 여백은 하나님의 빛이 그를 향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따라서 그 마니교의 허물어진 공간을 통해 들어온 진정한 인식의 빛은 어거스틴의 어두운 영혼을 깨우치고 인식의 전환을 가능케 했다.

결국 마니교의 허구적 사상은 어거스틴을 혼미케 했지만, 그 마니교의 허구적 사상이 어거스틴에 의해 허구적인 것으로 인지될 때,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사유체계를 거꾸로 뒤집어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 대한 질문’ 곧 신학적 질문을 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마니교는 결과적으로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진정한 실체인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 질문을 던지는 신학적 물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도록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영향을 미쳤다.

결국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로 ‘절제 없는 욕심의 덫’인 마니교에서 간신히 빠져나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