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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가는길/이야기식 설교를 만들어가는 실례

은바리라이프 2009. 11. 25. 17:25

이야기식 설교를 만들어가는 실례

 "어렴풋이 알겠지요"(누가복음 24:13-35)

(Eugene L. Lowry의 설교 만들기)  

 

허도화(복음신학대학원 교수)



제1단계 Oops!(평형을 뒤집어라)

보통 이야기가 지니는 가장 멋진 부분은 누군가에 의해 아직 이야기되지 않았거나 아직 나누지 못한 중요한 순간이 아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아직 주어지지 않은 한 순간이다.

본문을 통하여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부활주일 오후에 이 두 명의 제자들(또는 예수님의 친구들)이 길을 걸으며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었는가? 그들이 고향을 향하여 엠마오로 가고 있었는가? 확실히 그들은 그날 밤 저녁 식사를 위해 낮 익은 곳에 머물었다. 그러나, 모든 일들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여인들은 무덤 돌문이 굴려졌으며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전하였다. 심지어 그 여인들은 빛난 옷을 입은 두 천사들과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제자들은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충동적인 시몬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갔다. 물론 그는 직접 보아야 속이 후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덤을 향하여 달려갔던 베드로와 요한과는 다르게, 엠마오로 가던 이 두 제자들은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제2단계 Ugh!(모순을 분석하라)

두 제자는 빈 무덤과 사라진 시체에 관한 이야기로 새로운 희생자들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염려되었는가? 아니면 혼돈스러워 먼길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그들은 분명히 그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들은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다--글로바와 이름 모를 또 다른 제자가 말이다.

그들은 한 낮선 사람과 합석하였다. 그 분은 예수임이었으나 그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들은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슬쩍 모른척하고 물었다: "당신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을 받고, 그들은 마을에서 만난 이 낮선 사람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친구(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아직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제자들은 처형당한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일 것이라고 믿었었다. 내가 처음 이 본문을 읽고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어떻게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을까? 어떻게 그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지 못하였을까?

제3단계 Aha!(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라)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주된 이유는 내가 25년 전에 경험한 일 때문이다. 나는 친구들(Samples부부)이 자신들의 집에서 나를 위해 준비한 생일축하 파티에 참석하였다. 페기(Peggy)는 잘 나가는 화가이었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내 얼굴을 어릿광대처럼 그려서 그 그림을 화로가 외벽 위에 걸어 놓았다. 그 부부는 그 날 저녁 생일파티가 진행되는 동안 나에게 그 화로가 옆을 지나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그림을 결코 보지 못하였다.

결국, 그녀의 남편 텍스(Tex)가 나에게 그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그림을 쳐다보고는 정말 멋있는 그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그림 속에 있는 인물이 바로 나 자신인 것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그 그림 속의 얼굴에서 슬픔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당시에 자주 계곡을 거닐고 있었다. 다시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은 항상 그 그림의 얼굴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나만은 예외이었다. 여하튼 나는 알아 볼 수 없었다. 나는 그 잘 나가는 화가 페기가 내 얼굴을 그렸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알아 내지 못한 것이었다. 그 그림의 얼굴이 무척 낮 익게 보인다고 생각하였으나 그 그림이 내 얼굴을 그린 것이라 생각하기에는 너무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런 일이 바로 본문의 두 제자들에게 일어난 것이다. 여인들이 아침 일찍이 무슨 이야기를 전해주었든지 자신들 앞에 계신 분이 바로 부활하신 분이 예수님일 것이라고는 너무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상상하기에는 너무 무리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대신, 그 사람에게 지난 몇 일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에 관하여 "가르쳐 주었다."

결국, 낮선 사람은 그들에게 지난주에 일어난 사건들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그들이 엠마오에 도착하였을 때, 제자들은 대접하기 위해 그 분에게 저녁 식사를 나누며 밤을 지내도록 요청하였다. 그 분은 마치 더 가야하는 것처럼 앞으로 움직였다. 제자들이 함께 머물기를 부탁하였다--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그 분을 초청하였다.

제4단계 Whee!(복음을 경험하라)

그래서, 그 분은 빵을 취하여 축복하시고 그 빵을 나누었다--크래닥(Fred Craddock)이 설명한 것처럼, 이것은 분명히 성만찬 식사이었다. 빵이 부서진 것처럼, 그들의 무지의 덮개도 부서졌다. 그들은 그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들과 함께 걸었던 분이, 길을 걸을 때 줄 곧 성경을 설명해주시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그 분은 그들 앞에서 사라졌다. 뿅! 그렇게 사라지셨다.

나에게는 이것이 마치 하나님의 유모어처럼 보인다. 우리가 거룩한 것을 손으로 만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 거룩한 것이 뿅하고 우리의 손이 닿지 않은 곳으로 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렴풋이 보는 것 이상 볼 수 있는 능력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능력이 이 세상에는 없다. 너무 그 이상을 추구하지 말라. 붙들려고 하지 말라. 소유하려고 노력하지 말라. 그런 것은 오토(Rudolf Otto)가 말한 초월적 신비, 전적으로 타자의 경험이다. 신적인 경험을 계속 누린다고 입 발린 소리를 하는 자들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만일 모세가 하나님의 뒷모습이나 어렴풋이 보도록 허락을 받았다면, 왜 우리가 그보다 더 큰 능력을 경험하려고 하는가? 쇼핑몰 주차장에서 예수님과 멋진 대화를 조금 나누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믿을 수 없다.

어렴풋이 알게되는, 그럼에도 놀라게 하는 경험이 아닌가? 제자들은 "그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던가?"라고 서로 물었다. 이 말은 영혼을 사로잡는 순간적인 섬광 같은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제5단계 Yeah!(결과를 기대하라)

그 경험이 제자들의 몸까지 사로잡았다. 그들을 180도 완전히 돌려놓았다. 본문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이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이 때는 분명히 어둠이 까려 있었다. 그들은 어두울 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잠시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그들은 낮에 엠마오를 향하여 걸으면서도 마치 어둠 속을 걷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비록 밤이었지만, 그들은 빛 가운데 걷게 시작하였다.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를 위해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어렴풋한 경험을 하였다하더라도--우리의 생각에 잠깐 동안의, 순간적인, 아주 작은 경험이더라도--바로 그것이 여러분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