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1)-개관
2007.7.22 주일 오후
성경: 욘 1.1-4.11
서론
지난 주일로 야고보서 강설을 전부 마치고 오늘부터 오후 시간에 요나서를 강해하겠습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요나서가 가르치는 거룩한 교훈도 잘 이해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요나서에는 우리의 통념에 잘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것과 같은 사건을 두고 요나서를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능력을 믿는다면 요나서에 기록된 기적적인 사건들을 믿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저항하는 선지자라는 측면도 낯선 현상입니다. 물론 선지자들도 인간인지라 때로 실망과 좌절을 겪으며 때로는 비탄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선지자는 최후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기본 조건이며, 말씀을 맡은 여호와의 종으로서 그 말씀을 신실하게 그 백성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의 이야기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저항하는 선지자라는 사실이 그 이야기의 필수 요소가 되어 있습니다. 요나서의 메시지는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에 저항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까닭입니다. 요나의 모습은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신앙의 맹장이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인 선지자의 그림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도 요나서는 특별한 관심을 끌만합니다.
혹자는 니느웨에서 일어난 대규모 회개를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더욱이 오늘날 한 사람 전도하기도 어려운 시대의 눈으로 보자면, 당시 앗수르의 대도시였던 니느웨 시민이 먼 변방 팔레스틴 땅에서 온 생면부지의 한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위로부터 아래까지 전부 회개했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요나서를 역사가 아닌 우화로 간주합니다.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고안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서의 역사적 사실성을 믿는 사람들은 오늘날도 이와 유사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믿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기도하기도 합니다. 혹은 교회사의 부흥 속에서 그와 유사한 일이 발생한 경우들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이런 일은 모두 심사숙고를 요하는 문제들입니다.
한편 그런 문제점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어떤 사람들에게도 요나서는 대단히 흥미 있는 책입니다. 우선 요나서는 다른 선지서들과 현저한 차이가 납니다. 요나가 받아서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니느웨가 망하리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은 다른 선지자와 크게 대비됩니다. 요나서는 순전히 요나라는 한 선지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나서는 특이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나서에서 발견되는 문학적 힘이 또한 사람들의 관심을 끕니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요나의 이야기가 기독교계에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지를 보면 압니다. 주일학교의 단골 메뉴의 하나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이야기입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같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요나서의 메시지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메시지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나서에 나타나는 유머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합니다. 요나의 성격과 그 하는 일, 요나의 행동에 대응하는 하나님의 처분에 유머의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끕니다. 어쨌든 요나서는 문학적으로 대단히 완성도가 높은 글입니다. 그 기승전결이 보여주는 탄탄한 구성과 글의 묘미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끕니다. 요나서는 자세히 읽으면 읽을수록 독자를 감탄하게 만드는 문학적 우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요나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한편으로는 통념을 뛰어넘는 요소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의 문학적 취향에 강력하게 호소하는 힘이 있지만, 그런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들입니다. 그런 모든 요소들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거룩한 교훈을 베풀기 위하여 사용하신 재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문제들에만 집중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습니다. 거기서 거룩한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나서에 대해서
요나서는 이른바 십이 소선지서 중의 다섯 번째 책입니다. 구약 히브리 성경을 분류하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히브리 성경을 세 가지 곧 토라, 느비임, 케투빔으로 나누었습니다. 토라는 ‘율법’이고, 느비임은 선지자라는 단어 나비의 복수로서 ‘선지자들’이라는 뜻이고, 케투빔은 ‘글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셋으로 나뉩니다. 그 중에서 선지자들은 전선지자와 후선지자로 나뉩니다. 토라는 모세 오경으로 이루어집니다. 전선지자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이고 후선지자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입니다. 그리고 글들에는 시편, 욥기, 잠언, 룻기, 아가, 전도서, 애가,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상하가 포함됩니다.
이에 비해서 우리 한글 성경이 따르는 영어 성경은 다르게 분류합니다. 우선 모세 오경은 율법이라고 해서 유대교의 분류와 동일합니다. 다음으로 여호수아부터 에스더까지를 역사서라고 합니다. 욥기부터 아가까지는 시가서와 지혜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을 대선지서,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를 소선지서라고 합니다. 이렇게 다른 분류 체계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히브리인들이 구약을 보는 독특한 관점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영어 성경의 역사서에 속하는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는 ‘선지자들’에 포함되는 반면에 역대기서는 ‘글들’에 포함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사무엘서나 열왕기서 같은 글을 선지자들에 포함시키는 것이 정당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 글들을 읽어보면 그것을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까닭입니다. 어쨌든 이것이 구약의 분류법입니다. 요나서는 유대교의 분류에서는 ‘후선지서’에 속하고 영어의 분류에 따르면 소선지서 열 두 권 중의 한 권입니다. 요나서는 구약의 선지서의 하나인 것이 분명합니다.
요나에 대해서
다음으로 요나에 대해서 살펴 보십시다. 요나서에 등장하는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입니다. 그가 요나서의 저자인지는 불분명합니다. 그가 이 글을 썼을 수도 있고 쓰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서가 선지자 요나에 관한 글인 것을 분명합니다. 요나는 열왕기하 14장에 여로보암 왕에 대한 기록 도중에 등장합니다. 14장 25절에 보면 ‘2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로보암 시절에 요나가 이스라엘 영토의 회복을 예언했는데, 그 말대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북조 이스라엘에서 여로보암 치세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요나의 출생지는 가드헤벨이라는 곳입니다. 나사렛에서 북동쪽으로 약 5km 되는 지역으로 추측됩니다. 그곳에 가면 요나의 것으로 전해 내려오는 무덤이 지금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거 니느웨로 알려진 곳에도 요나의 무덤이라는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요나의 무덤일 가능성을 별로 없습니다. 요나의 부친은 아밋대입니다. 요나라는 이름은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이름과 실제 요나의 활동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당시의 사회상
요나가 활동하던 시기의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통상 여로보암 2세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북조 이스라엘을 세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과 동명이인입니다. 여로보암 2세는 대개 주전 793년부터 753년까지 41년 동안 북조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재위했습니다. 예후 왕조의 4대째 왕으로서 국제 정세가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결과 북조 이스라엘을 크게 부흥시킨 인물이었습니다. 이것은 남조 유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위에서 읽은 왕상 14.25의 말씀에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이렇게 회복했다는 말은 솔로몬 시대의 영토를 회복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로보암 2세 치하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은 남북조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국가를 이뤘습니다.
하지만 왕하 14.23-24은 ‘23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십 오년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 일년을 위에 있으며 24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예후는 아합 왕조에 대한 심판의 막대기로 쓰임 받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역할을 충실히 했고 그 결과 그의 왕조가 4대를 내려갈 것이라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왕하 10.30). 그의 아들인 여호아하스도 그 길을 따랐고(왕하 12.2), 예후의 손자인 아하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왕하 13.10-11). 그러더니 예후의 증손인 여로보암 2세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똑 같은 악을 범한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그 뒤를 이었으나 그도 역시 동일한 악을 행한 결과 6개월 재위 후에 살룸에게 암살 당하고 맙니다. 그렇게 해서 예후 왕조가 끝나고 맙니다. 이렇게 역사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비록 이스라엘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으나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우상숭배와 그로 말미암는 사회적 불의로 인해서 악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호세아와 아모스가 요나와 동시대 선지자로서 여로보암 2세의 치세에 활동한 선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와 아모스의 글에 여로보암 2세 치세의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거기에 나타난 대로 당시에 극심한 빈부격차, 약한 자에 대한 강한 자들의 착취, 사회적 불의로 인해서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호세아는 당시 북조 이스라엘의 죄악을 폭로하기 위해서 고멜이라는 여인을 아내로 취합니다. 고멜은 여러 번 호세아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갑니다. 그럴 때마다 호세아는 고멜에게 정성을 기울여 붙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호세아의 노력도 소용이 없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끼고 사랑하였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 가서 절하고 있었습니다.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호 2.8).
당시 북조 이스라엘의 이런 종교적 타락은 그에 따르는 정치 사회적 타락을 수반했습니다. 선지가 아모스가 그것을 타매했습니다.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8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암 2.7-8).
요나의 활동
그런데 이런 사회 속에서 활동한 요나가 여로보암의 종교적 실패와 우상숭배에 대해서 비난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도리어 그는 여로보암 2세의 성공을 예언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의 영토를 회복하되 솔로몬 시대의 영광에 이르도록 회복하리라는 예언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여로보암 2세의 온갖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그 이유가 2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26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27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하여 천하에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여기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다’는 표현은 일종의 관형적 표현으로서 비극과 고통이 모든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보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넘친 나머지 비록 여로보암 2세가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졌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이용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고자 하신 것입니다. 요나는 이 사실을 예언하였습니다. 이 예언은 응해서 실제로 여로보암 2세 치하에 이스라엘은 크게 부강해졌던 것입니다.
요나가 경험한 하나님의 자비
요나에게는 이것이 중요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여로보암 2세가 우상숭배의 죄에 빠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크게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망하기를 원하시지 않고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깊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바로 이런 이해 때문에 요나가 하나님을 불순종하고자 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을 쳐서 외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 요나는 자기가 그 명령에 순종하면 자기의 활동의 결과 니느웨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짐작했습니다. 4장 1-2절에서 요나가 직접 그렇게 말합니다. ‘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로보암 2세의 모든 악행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이라면 어찌 니느웨를 불쌍히 여기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요나의 생각이었는데 그 생각은 과연 적중한 것입니다.
요나는 그 자비가 이방의 니느웨에게 적용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왜 그러했을까요? 그것이 편협한 국수주의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강대한 적국이 하나님의 자비의 은택을 입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일까요? 요나의 내심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내심을 정확하게 모른다고 해서 요나서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나서는 요나의 그런 마음을 배경으로 하여 하나님이 품으신 전혀 다른 마음을 보여 줍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그것을 보아 나가겠습니다.
요나(2) 1.1-3
2007.7.29 주일 오후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서론
지난 시간에 요나가 활동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요나서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보았
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아닙니다.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린 문제로 보입니다. 요나서는 엄밀하게 말하면 요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요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가르치는 글입니다.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어떤 일을 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은 그가 새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입니다. 보통 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하면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의 진면목이 더욱 드러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자주 경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보통 때는 양순하고 성격도 조용하던 사람이 운전대만 잡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그런 식입니다. 사람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 그의 감춰진 면목이 나타납니다.
요나의 경우에도 우리는 그와 유사한 점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다루시는 방식은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니느웨에 보낼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요나를 보내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요나보다 훨씬 순종적인 사람을 얼마든지 들어서 니느웨에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서에 보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뿌리치고 도망하는 선지자를 굳이 큰 물고기를 보내서 다시 잡아와 일을 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특정한 관념을 형성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대단히 이상한 일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복음주의자들 조차도 요나서를 사실이 아닌 가공의 이야기로 보려는 유혹을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야기의 진행
오늘 읽은 본문의 진행을 보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사건의 발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면 그는 선지자입니다. 우리는 열왕기하 14.25에서 요나가 여로보암 2세 당시에 선지자로 활동하던 인물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나가 언제 어떻게 선지자로 부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지자로 활동한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다는 표현은 요나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인물이었고,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표현은 곧 그가 그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습니다. 그는 그 일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하고 그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따라서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 요나가 가서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니느웨의 운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요나는 일어나야 하고, 가야 하고, 쳐서 외쳐야 합니다. 요나가 가서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니느웨의 죄를 탄핵하는 내용입니다. 그 탄핵의 내용은 3장 4절에 등장합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이것이 요나가 맡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마 선지자가 맡은 말씀 중에 가장 간명한 내용일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다섯 단어에 불과합니다. `tk,P'(h.n< hwEßn>ynI)w> ~Ayë ~y[iäB'r>a; dA[…
이렇게 주의 말씀이 임했다면 당연히 어떤 행동이 뒤따라야 할까요? 요나는 두 말 없이 일어나 가서 외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 가장 예기치 않은 사태가 벌어집니다. 요나가 일어나서 가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가 일어나서 간 목적이 그 명령을 수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행하지 않으려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하나님 앞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고 생각하다가 요나는 다시스로 가기로 작정합니다. 다시스는 오늘날 스페인 남쪽 연안 정도로 짐작됩니다. 그러니 지중해 반대편인 셈입니다. 그리로 도망하기로 작정하고 욥바로 내려가서 뱃삯을 지불하고 배에 올랐습니다.
욥바는 요나의 이야기와 관련하여 생각케 하는 일이 있는 도시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오면 베드로가 욥바의 피장 시몬의 집에 있다가 환상을 봅니다. 그 환상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15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행 10.9-16). 이 환상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어졌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환상이 그런 의미라는 것은 잠시 후에 베드로를 찾은 고넬료의 사람들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요나가 이방인에 대한 전도를 피하기 위하여 욥바로 내려간지 약 800년 후에 그 욥바에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어졌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의 의미
요나는 2절의 주의 말씀을 듣는 순간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구원하려 하신다는 사실을 짐작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방 도시에 굳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을 멸망시킬 요량이라면 그대로 멸망시켜 버리면 되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여로보암 2세 치하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경험한 요나로서는 자신에게 느닷없이 주어진 주의 말씀이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려는 것이었음을 눈치챈 것입니다.
혹은 요나가 신명기 32.21의 말씀을 상기함으로써 니느웨의 구원을 예측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이것이 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했을 경우 하나님께서 취할 방도의 하나를 보여줍니다. 즉 이스라엘이 한 대로 갚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는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다른 백성 더욱이 우준한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시기나게 하며 분노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오로지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효과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이 행동은 미묘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베풀지 않는 자비와 은혜를 이방인, 우준한 백성에게 베푸십니다. 이스라엘은 그 특권을 빼앗기고 백성이 아닌 다른 민족이 그 특권을 받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것은 심판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은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질투를 느끼게 할 것입니다. 질투를 느낀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질투란 반드시 사랑에 따라오는 감정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질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를 이방인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행동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일으키는 수단이 될 것을 또한 의도하신 것입니다.
물론 신명기의 문맥에서는 심판이 전면에 드러나며 거기에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가 의도되었다는 것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거기 ‘시기가 나게 하며’라는 표현에 착안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신의 이방인 선교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이야기했습니다.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롬 11.13-14). 여기서 사도는 신명기 32.21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요나의 행동의 의미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무한한 자비를 배경으로 보았든 아니면 신명기 32.21을배경으로 보았든 그는 니느웨의 구원을 직감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피해서 달아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배경으로 그 명령을 보았다면 그는 니느웨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적용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신명기 32.21을 배경으로 그 명령을 보았다면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가 되기를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다시스행 배에 승선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표현입니다. 여기 여호와의 낯을 피한다는 표현은 주의 앞에서 도망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요즘 말로 하면 하나님을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요나의 이 행동을 근거로 요나의 신관을 문제 삼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바다로 갔다면 그가 하나님을 땅의 신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요나의 행동을 드러난 것만으로 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정당화되기 힘듭니다. 요나 1.9에 보면 요나가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하나님을 천지의 창조주와 통치자로 알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요나가 바다로 감으로써 하나님의 영향력을 벗어나고자 했다는 생각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요나가 향해서 가던 다시스도 역시 바다가 아닌 육지였습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행동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을 순종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순종의 표시로 니느웨로 간 것이 아니라 바다 건너 지중해 반대편을 향해서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기가 탄 배가 큰 풍랑에 휩싸이자 그것이 자기 때문인 줄을 금방 알았습니다. 그 풍랑 속에서도 배 밑창에서 태평하게 잠이 들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자기에게 닥친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을 알아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요나의 행동의 의미
요나서 전체에서 독자를 또한 의아하게 만드는 것은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관대한 처분입니다. 이것을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에 비교해 보십시오. ‘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레 10.1-3). 그들은 단순히 향로에 관한 율법의 규칙을 어겼다가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서 즉사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명확한 명령에 저항한 이 요나는 백번 죽어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우리를 의아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나의 이런 행동을 정당한 빛에 비추어 보아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만약 나답과 아비후와 동일한 조건에서 요나를 본다면 그는 즉시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요나에 대해서는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와는 다른 빛에 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요나의 경우와 고멜의 경우에서 더욱 유사성을 발견합니다. 호세아에 등장하는 고멜은 애초부터 음란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취하였습니다(호 1.2-3). 그런데 이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남자가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겠습니까? 혼인한 이후에도 고멜은 음란을 버리지 않고 여러 번 호세아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갑니다. 고멜의 이런 행동이 모세 율법에 의해서 어떤 처분을 받아야 합니까? 당연히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멜을 데려다가 다시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 모든 진행은 우리에게 낯설 뿐 아니라 율법의 원칙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 2세 치하 북조 이스라엘 사회에 대해서는 이런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와 고멜의 경우는 통상적인 윤리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는 성질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위한 일종의 공연이라고 할만합니다. Performance의 성경이 훨씬 강합니다. 영화나 연극에서 발생하는 어떤 일들이 현실을 상당히 반영하고 현실에 대해서 어떤 메시지를 던지지만 그것이 현실 그 자체는 아닌 것과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가 실제가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에게서 발생한 일이 하나의 퍼포먼스와 같은 성격을 가지므로 율법의 잣대를 거기에 들여다 대서는 그 사건에 대한 바른 평가를 내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요나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서 어디 가서 무슨 말씀을 대언하라는 명확한 명령을 받고서 그것이 싫다고 도망가는 선지자의 존재라는 것은 구약의 일반적인 선지자의 기준으로 보아서는 언어도단입니다. 그런 사람은 즉시 선지자의 자격을 박탈 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요나에게서 선지자의 임무를 박탈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이해할 수 없는 자비로 요나의 모든 결점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그를 이끌어 결국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것은 확실히 퍼포먼스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래서 요나서는 요나의 말이 계시가 아니라 요나의 행동과 그것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행동이 계시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요나의 불순종의 의미
요나의 이 불순종을 전체적인 문맥 속에서 보면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북조 이스라엘의 상황은 전체적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시작한 우상숭배는 북조 이스라엘 백성의 골수까지 파고들어서 그들의 살을 썩어 들어가게 하고 있었습니다. 나라는 계속해서 역성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국민의 도덕적 기상도 저하되어 있었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사회가 도덕적인 힘을 갖출 수 없습니다. 그 사회가 이미 강탈한 정권을 근거로 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역성 혁명이 반복된 이스라엘이 도덕적 국가가 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또한 요나 자신의 시대를 보더라도 당시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답습했습니다. 국가로서의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당시의 여로보암 2세도 역시 치명적인 우상숭배의 죄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스라엘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여로보암 2세 때에 활동한 선지자인 아모스의 글을 보면 그는 이스라엘만을 타매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인근의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죄를 통렬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팔레스틴 인근 지역의 상태는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마땅한 지경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팔레스틴 인근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멀리 있는 큰 성 니느웨까지도 역시 그 죄악이 한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법을 저버리고 죄악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요나 자신은 어떠합니까? 그도 역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리고 있습니다. 북조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니느웨도 죄악의 한계에 도달했으며, 그 사이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 선지자 요나도 하나님의 명령을 대항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요나 개인의 불순종과 저항은 이스라엘의 저항과 인근 땅의 저항과 니느웨의 저항의 작은 규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도 이런 배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 2세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종교적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백성을 불쌍히 여겨 살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가 부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제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서 니느웨를 또한 건지고자 하십니다.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그들이 멸망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데 그 일을 담당한 요나가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그 요나를 향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시기 전에 먼저 깨우침을 주십니다. 그의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 하나님의 생각은 요나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나아가서 요나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를 또한 깨우쳐 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은 한편으로는 요나의 암매한 정신을 깨우쳐 가는 과정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저항하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또한 가르쳐 주시는 방편이 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요나의 불순종이 열방의 죄악의 축소판이 되는 것처럼,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또한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의 반항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이 하나님의 자비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겠습니다.
요나(3) 1.4-16
2007.8.5 주일 오후
4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5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6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서론
지난 시간에는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전할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실과 그에 대한 요나의 반응을 보았습니다. 요나의 반응은 전대미문의 반응이었습니다. 구약의 어떤 선지자도 요나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모스는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암 3.8). 또한 이사야는 이렇게 했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예레미야는 요나와 거의 근접한 경험을 했으나 그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그런데 선지자의 이런 일반적인 태도와는 정반대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하나님 앞에서 피해 달아나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정말로 하나님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을 보면 그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음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겠다는 불순종의 의사표시였던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기를 진정 싫어했습니다. 자기의 선포로 인하여 그들이 건짐을 받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호의는 이스라엘 백성의 전유물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방인이 그 혜택을 누린다는 것이 요나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혜택이 주어지는 도구로 자신이 사용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자기가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다른 선지자를 사용해서 그 일을 하리라고 생각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은 그 일에 사용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북동쪽에 있는 니느웨와 거의 반대 방향인 서쪽의 다시스로 가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분
그러자 이제 하나님의 행동이 시작됩니다. 요나는 자신의 불평이나 항의를 말로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도 다시 요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아무 말 없이 행동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방은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요나서의 힘은 이 단순함에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려운 신학적인 개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난해한 단어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스토리 라인이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대화가 많지도 않습니다. 사건도 간단명료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 이야기는 그렇게도 힘이 있고 그렇게도 많은 사람에게 그렇게도 깊은 인상을 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나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요나를 다시 불러 들여 원래의 일을 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원래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불순종에 대해서 일체로 꾸짖거나 문제 삼거나 거론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일련의 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가장 분명하게 전달하고 계십니다. 그 과정에서 물론 요나는 호된 회초리를 견뎌야 했습니다. 요나는 산 채로 죽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대풍의 초자연성
짐작컨대 폭풍이 일어난 것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로 보입니다. 13절에 보면 사공들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지금 그들이 육지에서 과히 멀리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아마 욥바 항을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서 갑작스런 폭풍을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지중해의 기후와 바람을 잘 알 것이 분명한 선원들이 폭풍우를 무릅쓰고 항해에 나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나가 배 밑창에 들어가 잠든 것은 승선 직후였을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기로 작정하고 다시스로 가기로 했을 때 아마 내적으로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선지자로서 내리기 힘든 결정입니다. 게다가 그런 먼 항해를 하려면 상당한 준비를 했어야 합니다. 옆집 가듯이 집을 나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내내 요나는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반복해서 생각했을 것이고, 그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그는 심신이 지쳤을 것입니다. 배에 승선한 요나는 바로 배 밑창의 객실로 들어가서 깊이 잠이 든 것입니다. 그런 요나가 아직 잠들어 있다면 배는 항구를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 속에서 갑작스럽게 광풍을 만났습니다. 그 광풍이 얼마나 센지 배를 때리는 파도에 배가 깨어져 나갈 것 같이 보였습니다. 사공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자기들의 신들을 불러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면서 배에 실었던 물건들을 바다에 던져서 배를 가볍게 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승선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즉시 그 사람의 생사를 확인하게 됩니다. 혹시 풍랑에 휩쓸려 갔다면 그를 구하는 것이 다른 모든 일에 우선되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선장이 그를 찾다가 배 밑창에서 깊이 잠든 그를 발견했습니다. 선장이 요나에게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합니다. 여기 ‘일어나 구하라’는 두 개의 히브리어 동사 ~Wq 과 ar'q' 는 2절에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맡기신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입니다. ‘일어나 외치라’는 두 단어가 여기 선장이 말하는 ‘일어나 구하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만약 요나가 비몽사몽 간에 들었다면 꿈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같은 명령을 반복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요나에 대한 선장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다신론자임이 분명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신들이 있고 그 신들은 다 각각 추종자들과 어떤 형태의 관계를 가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를 향해서는 요나의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리 나라 상황을 놓고 말한다면, 불교신자, 한국의 전통 종교인 무속인, 기독교인이 타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자 신의 존재를 믿는 선장이 그 사람들을 전부 불러다가 각각 자기 신들에게 구원을 호소하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제비뽑기
폭풍이 초자연적으로 임한 것임을 확신한 선장과 선원들이 자기네 신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짐을 바다에 버리는 등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도 폭풍은 잠잠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 폭풍이 신의 분노의 표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신의 분노의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서 신을 분노하게 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제비를 뽑기로 했습니다. 구약에는 제비를 뽑아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선례가 있습니다. 제사장의 우림과 둠밈도 그런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잠언에 보면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잠 16.33). 이와 같이 제비뽑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신약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24-26에 보면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기 위해서 제비를 뽑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선장도 이런 믿음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비를 뽑은 결과 요나가 문제의 인물로 지목되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폭풍이 자신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피하고 있는 까닭에 발생했다고 실토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다가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는 점점 더 흉용해졌습니다. 마치 죄인을 던지지 않으면 그 배를 마침내 부숴버리고 말겠다고 으르렁거리는 듯합니다. 이제 선원들은 무엇인가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나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자기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라고 말합니다. 왜 직접 뛰어들지 않았는지가 궁금합니다.
선원들의 태도
그러나 선원들은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 선뜻 그를 바다에 던지려 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육지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이 무위로 끝나자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지기로 작정하고, 자기들의 행위를 탓하지 말 것을 기도한 후에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그러자 즉시 바다가 잠잠해집니다. 이 일을 경험한 선원들은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 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짐을 다 바다에 던진 그들은 일단 출발지인 욥바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거기서 일을 수습하고 배를 점검한 후에 다시 항해에 나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욥바로 돌아온 그들은 아마 여호와를 섬기는 곳을 찾아간 것입니다. 어떤 학자의 추측처럼 일부러 예루살렘까지 올라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적절한 여호와 신전을 찾아서 예물을 드리고 서원을 올렸습니다. 그 서원의 내용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추측컨대 그들이 여호와 종교로 귀의했다기 보다는 앞으로 여호와를 존중하겠다는 정도의 서원이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은 여호와를 잘 알지 못하여 합당한 예를 갖추지 못했지만 이제 그의 능력을 직접 경험한 마당에는 그에 대해서 합당한 예를 갖추고, 마음 속으로 생각이라도 바로 해야겠다는 깨달음이 생겨서 그렇게 하기로 서원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선원들의 태도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나를 대하는 태도, 이 전체 문제를 접근하는 선원들의 태도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선장이 취한 태도는 그런 상황에서 합리적인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요나를 찾은 후에는 그에게 자기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희생양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태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 모든 사태가 신의 진노인 것으로 점점 느껴지자 비로소 죄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제비가 요나에게 떨어졌을 때의 그들의 태도도 침착했습니다. 다짜고짜 요나를 붙잡아 희생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사태의 진상을 알기 위해서 요나에게 자초지종을 상세히 묻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욘 1.8). 이 질문은 마치 제비뽑기의 결과가 제대로 된 것인지를 확인이라도 하려는 태도로 보입니다.
다음으로 요나가 자신의 죄를 명확하게 밝히고 그 해법으로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한 후에도 선원들은 선뜻 요나를 희생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요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자 이제 어쩔 수 없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도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고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비로소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그 다음에는 육지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서원한 것입니다. 요나가 기록했든, 다른 사람이 기록했든 이 부분의 기록이 선원들에 대해서 대단히 호의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저자가 선원들에 대해서 호의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나의 태도와 대비
선원들의 이런 신사적인 태도는 요나의 태도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는 국수주의적인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는 지금 이방인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비로 멸망에서 구원 받을 것을 원치 않아서 하나님 앞에서 도망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가 보이는 완고한 고집은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명확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났고, 명확한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선지자는 민족적 우월감과 민족적 자기 중심주의에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의 갈등과 죄의식에 지쳐서 배 밑창에 들어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무죄한 선원들과 선장은 요나로 인해서 일어난 폭풍 속에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 생명의 위협 속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는 신들을 부르고, 자기들의 최선을 다해서 폭풍우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폭풍우의 원인이 된 요나 자신은 배 밑창에 들어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 미묘한 대비가 이 글을 읽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혹은 요나서의 저자는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이 부분의 이야기를 이렇게 상세하게 이방인들에게 호의적으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요나가 취하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태도는 아마 당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태도를 대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요나 당시 이스라엘 왕은 여로보암 2세였습니다. 그는 무려 41년이나 재위한 임금입니다. 아마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재위 기간에 태어나서 그의 재위 기간에 죽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경험한 유일한 왕이 여로보암이었다는 말입니다. 역성혁명이 끊이지 않던 북조 이스라엘에서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재위했다면 그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그는 이스라엘 주변 민족을 점령하여 과거 솔로몬 시대의 국가적 영광을 재현한 인물이었습니다. 국내외의 정세를 두루 정확하게 읽고 그에 합당하게 대처함으로써 국가를 부강하게 만든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여로보암의 악을 떠나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그렇게 부흥시킨 이유를 열왕기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불쌍히 여긴 데서 찾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 자비는 여로보암을 유능한 왕으로 만든 데에서 드러났습니다. 비록 그가 우상을 숭배하는 왕이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유능한 왕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인근 이방인을 점령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쉽게 그들에 대한 우월감과 적대감을 쌓아갔을 것입니다. 제국을 이루려면 무수한 피를 흘려야 합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승자에게는 그 죽음은 값지고 자랑스러운 법입니다. 그런 전쟁의 분위기에서는 민족적 자긍심과 외국인에 대하 혐오 혹은 멸시가 팽배하게 마련입니다. 혹시 요나의 태도가 그런 사회적 분위기의 일부였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계속되는 성공적 전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민족적 자긍심에 들떠 있었을 것입니다. 이방인에 대한 적대감과 무시하는 태도가 사회적 분위기를 이끌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편입니다. 그와 함께 자기들이 그 모든 신성한 축복을 독차지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요나의 태도는 당시 이스라엘의 어떤 백성이 그런 명령을 받았더라도 취할 만한 태도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요나의 태도는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태도의 전형 혹은 대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대놓고 거부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도망하는 것 밖에 안됩니다. 그에 비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선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다신교를 신봉하고 신이 여럿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면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놓고 보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선지자라고 하는 요나보다 훨씬 신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인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암매하고 어리석은 백성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인간의 보편적인 도덕률의 기본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안하기를 바라는 일은 자기도 다른 사람들에게 안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자기도 다른 사람에게 해주어야 합니다. 지금 이방인 선원들은 요나에게 그렇게 해주었습니다. 이 이방인 선원들이 요나에게 그 이상 어떻게 더 해줄 것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습니까? 자기들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기들은 어려움이 생기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자기들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하나님의 선지자가 일어서서 진리의 길로 인도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그런 은혜를 내리는 것은 원치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암매요 어리석음입니까?
이 모든 것이 왜곡된 특권의식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말할 수 없는 특권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와 제사제도 등 다른 어떤 민족도 누리지 못한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 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더 나아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원래 다른 모든 민족보다 못한 민족이었습니다. 훨씬 열등한 노예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건져서 큰 특권을 주시고 자기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들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복을 받는 것은 그 복이 이방인을 움직이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복을 보고 이방인도 하나님의 복을 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을 위한 복의 기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특권은 이방인을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명확한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이스라엘에게 부어질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 자비가 이방에게도 부어지기를 원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자기들에게 주어질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 진리가 이방인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도해야 했습니다. 자기들에게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 통치가 온 세상 모든 이방인들에게 미치기를 기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온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치명적인 실책의 하나였고 그 실책이 요나라는 선지자의 행동 속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요나는 수치를 당하고 선원들은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 있을 그와 유사한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곧 니느웨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회개입니다. 어떤 연구자는 요나의 항해와 사도 바울의 항해를 비교했습니다. 모든 시대의 교회는 자기들이 누구의 배를 타고 있는지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요나(4) 2.1-10
2007.8.12 주일 오후
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5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8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두 항해의 비교
지난 시간 마지막에 요나의 항해와 사도 바울의 항해의 차이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현저하게 대비되는 두 개의 항해가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던 항해 중에 큰 폭풍을 만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27.9-2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앞 27.7-8에 보면 지금 사도 일행은 그레데 섬의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해 있습니다. 그레데 섬은 요즘 말로 크레타 섬으로서 그리스의 영토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랜 미노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유럽 문명의 요람’이라고 불리웁니다. 이 그레데의 남쪽 해안에 있는 미항이라는 항구에서 사도 바울은 배가 바로 출항하려는 낌새를 눈치채고 경고합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행 27.10). 그러나 백부장은 사도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하고 출항을 강행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배가 폭풍우를 만나 다 죽을 지경에 도달합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23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1-25).
사도 바울의 항해와 요나의 항해가 이렇게도 대비될 수가 없습니다. 요나는 이방인에게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기 위해서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요나 때문에 그 배의 선장과 선원은 죽을 위기에 속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항해를 했습니다. 그 결과 그와 함께 배를 탄 사람들은 폭풍우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얻은 것은 그들이 사도 바울과 함께 한 까닭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사람과 불순종하는 사람에게 닥치는 일이 이렇게도 명확하게 대비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로마 군인의 보호 하에 로마에 도착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요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고래 뱃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다른 행로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지에 도달한 것은 순종한 사도 바울만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도 결국 니느웨에 도착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이룬 것은 순종한 사도 바울만이 아니었습니다. 불순종한 요나도 역시 결국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이루고야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요나도 결국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서 심판을 선언하여 니느웨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는 아이러니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실 자를 끝까지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할 자를 끝까지 구원하십니다.
본문 개요
이제 오늘 읽은 본문을 보겠습니다. 요나서의 이 부분에서는 히브리 성경과 한글 성경이 장 절이 서로 다릅니다. 우리 성경의 1장 17절이 히브리 성경에는 2장 1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글 성경 2장 10절이 히브리 성경에서는 2장 11절이 됩니다. 그러다가 3장에서는 다시 일치합니다. 이 부분에 관한 한 히브리 성경의 장절 구분이 타당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 성경의 구분에 따르면, 2장 1절은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킨 사실을 이야기하고, 2장 11절은 요나를 토해낸 사실을 이야기하므로 수미일관된 구조를 가지게 됩니다. 그 사이에는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한 내용입니다.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이 일으키는 여러 의문들에 대해서 호기심을 품었습니다. 가장 큰 호기심 중의 하나는 이 물고기가 어떤 물고기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그냥 다그 가돌(lAdêG" gD"ä) 곧 큰 물고기라는 말입니다. 그 뱃속에 사람이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생존해야 할 정도가 되려면 당연히 큰 물고기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큰 물고기가 어떤 물고기일까요? 어떤 사람은 고래일 것이라고 추정했고 어떤 사람은 큰 상어의 일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순간에 그 목적을 위해서 큰 물고기를 창조하셨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호기심들이 반드시 일어나기는 하지만 실은 무익한 호기심입니다. 우선 성경이 그 물고기에 대해서 전혀 가르쳐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물고기가 어느 것인지를 안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 유익이 안되는 까닭입니다. 요나서는 물고기와 관련된 사실적 지식, 혹은 사람이 어떻게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이나 생존해 있을 수 있는가, 무엇을 먹으며 호흡은 어떻게 했는가 따위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요나서는 그런 문제들을 일일이 대답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바다에 폭풍을 마음대로 일으키거나 잠재울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사람을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생존하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익한 호기심을 버리고 본문이 가르치는 것에 충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노래한 감사의 찬송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고기 뱃속에서 무슨 감사 찬송을 하느냐고 하면서 이 시는 원래 요나서의 일부가 아니었으며, 후대에 어떤 편집자가 거기에 삽입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다 쓸데 없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요나는 죽다가 살았으니 물고기 위 속에 있든 내장 속에 있든 마땅히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시의 내용이 실제로 그러합니다.
시의 구조에 대해서 간단히 보겠습니다. 이 시는 전형적인 시편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보편적입니다. 죽음에 임박한 고난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살아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시편입니다. 여기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심상들은 실은 시편에서 고난을 표현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시 69.1-2),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시 88.7) 같은 표현들은 사람이 당하는 고난을 파도와 급류에 휩쓸리는 것으로, 혹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 표현이나 심상이 기존 시편의 내용과 매우 유사한 까닭에 어떤 해석자들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존의 시를 인용하여 자신의 심정을 노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시가 요나 자신이 지은 시였든 아니면 요나가 기존의 시편을 사용한 것이었든 중요한 것은 이 시가 요나서 전체에서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형식에 있어서 각 절은 두 개의 연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절에서는 두 개의 연이 동일한 심상을 반복으로 표현하고 어떤 연에서는 사상의 발전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서 2절을 보면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이 구절은 동일한 사상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3절, 5절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5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그에 비해서 4절, 6절, 7절에서는, 첫째 연은 자신의 고난을 이야기하지만 둘째 연은 소망과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것은 동일한 상념의 반복이 아니라 고난에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발전을 노래합니다.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8절과 9절은 결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구원의 경험이 가져다 주는 결과가 이 두 절에서 표현됩니다.
8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요나의 고난
2절은 이 시 전체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선언하는 역할을 합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첫째 연과 둘째 연은 동일한 사실을 다른 말로 표현합니다. 첫째 연에서 ‘내가 받는 고난’은 물에 빠져 죽어가던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 보입니다. 그는 배에서 던져져 큰 파도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서 죽음을 직감했습니다. 물에 빠져 들어간다는 것은 두려운 경험입니다. 더욱이 자기에 대한 형벌로 예정된 광란의 바다 속으로 던져진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 그 난폭한 물결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더 이상 어떻게 할 길이 없이 되어 물 속으로 빠져들어가면서 느끼는 죽음의 공포는 강렬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요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을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아마 죄를 회개할 여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하는 한 마디 밖에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글쎄요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하는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요나의 성격으로 보았을 때, 마음 속으로 ‘니느웨에 가는 것만은 빼고요’ 하고 말했을지 알 수 없으나 지금 상태는 그런 꼬리를 달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오로지 살려달라는 호소만을 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주께서 대답’ 하셨습니다. 대답하셨다는 것은 그 호소를 듣고 그 구하는 것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연은 같은 심상이지만 거기서 조금 나아간 상태 곧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것과 같은 경험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스올의 뱃속을 큰 물고기의 뱃속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에 요나는 이미 자기 생명이 보존되고 있음을 느꼈을 것인 까닭입니다. 그 안에 삼일 낮 삼일 밤을 있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을 지낸다는 것이 그렇게 상쾌한 경험이 아니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럴지라도 그것이 스올의 뱃속 곧 죽음의 뱃속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시편이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한 내용이므로 거기서 그는 구원을 확신한 것입니다. 따라서 ‘스올의 뱃속’이라는 표현은 자기가 죽음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이제 살 소망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느끼는 심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거기서 요나는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주께서 요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2절은 이 시편 전체의 내용을 요약합니다.
익사의 경험
이어지는 시에서 요나는 자신의 익사의 경험을 생생하게 그립니다. 배에서 바다에 던져졌을 때에 살기 위해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에 떨어진 사람은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된 사람이 평안한 심정으로 파도에 자기를 맡기고 죽기를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거의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 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물을 마시고 몸에서는 힘이 빠지고 마침내 의식이 몽롱해지면서 물 속으로 가라앉아가는 것입니다.
3절이 흉용한 바다 속에서 나뭇잎처럼 흔들리는 요나의 모습을 그립니다.
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물에 던져진 요나는 사방 어디를 둘러 보아도 폭풍이 대작하는 바다 밖에 없었습니다. 그 물속에서 요나는 계속해서 자기 위에 덮쳐오는 파도를 받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 중에 요트를 즐기는 사람이 있었는데 한번은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요트를 몰고 오던 중 큰 파도를 만났다고 합니다. 파도는 너울 모양을 하고 있어서 높은 지점과 낮은 지점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탄 배가 파도의 골에 있을 때에는 바로 옆에 있는 파도가 높은 산처럼 보이더라고 했습니다. 마치 계속에 들어가 있으면 양쪽의 산이 높이 보이는 것처럼 물의 계속에 들어가 있으면 양쪽에 물의 산이 서있는 것과 같은 양상입니다. 그런 파도가 위에서 덮쳐오면 그는 별 수 없이 물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해서 수면으로 머리를 내밀면 다시 파도가 그를 덮칩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사람은 호흡을 못하게 되고 의식을 잃고 물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빠져들어가는 모습이 5절과 6절 상반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5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그 물이 어떻게 자기의 전 존재를 지배했는지 심지어 영혼까지 물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훌륭한 표현입니다. 몸이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 바다 풀이 자기의 머리를 쌀 정도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몸이 바다 밑 바닥에 도달한 것입니다. 6절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데까지 자기의 몸이 내려갔음을 표현합니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물론 우리는 요나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바다 속으로 빠져들어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주 짧은 시간에 발생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심리적으로는 굉장히 길게 느껴질 수 있고 마음 속으로는 무수한 상념이 스쳐갈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요나의 이 시는 그가 흉용한 파도 속에 빠져서 익사하는 사람의 경험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완전히 죽은 것과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헤어날 길이 없이 바다 물 속에 수장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나의 의식
4절은 그런 속에서도 요나의 머리 속에서 일어난 생각을 보여줍니다.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는 죽어가는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의 목전에서 쫓겨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아마 요나는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에 승선할 때에도 자신이 이런 식으로 죽어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자기가 다시스로 도망하면 하나님이 다른 선지자를 들어서 니느웨로 보내실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시 북조에는 이스라엘을 타매하는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호세아와 아모스가 모두 그런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요나는 아마 그들만큼 이스라엘에 대해서 비판적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그들보다 더욱 국수주의자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나 아모스가 이방인의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자기는 다시스로 도망하면 그것으로 문제는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태는 전혀 자기가 예상치 못하던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쫓겨난 처지로 해석했습니다. 그럴지라도 요나의 소망은 성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나는 역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라는 것, 죄인의 죽음보다 구원을 원하시는 분이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신이 지금 비록 하나님의 목전에서 쫓겨났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소망은 성전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국 어떤 상황에서라도 피할 곳은 하나님뿐입니다. 이런 생각은 7절에서 더욱 생생하게 표현됩니다.
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여기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표현은 의식이 점점 가물가물해가는 상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몸부림도 끝나고 복잡한 생각도 끝나고 몸은 바다 밑 바닥에 도달하여 바다풀이 그의 머리를 감쌀 즈음 이제 그의 의식이 점점 가물가물해지고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도 그는 여호와를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한 것입니다. 어쨌든 요나의 생각은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결국 요나와 하나님 사이에 발생한 일이며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도로 이루어진 까닭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선지자로 불러 일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이를 말을 일러주셨습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에 승선했을 때에 파도를 대작케 한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제비를 뽑아서 요나에게 걸리게 한 분도 하나님이었습니다. 선원들로 하여금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을 수 없게 한 분도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요나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아마 그 자비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삶을 마감하는 모든 사람은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할 것입니다. 죽음에 임해서 자기의 영혼을 의탁할 수 있는 영원한 하나님을 가진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자기의 죽음에 임해서 영혼을 의탁할 데가 없음을 느끼는 사람은 진정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지우지 못할 것입니다. 어쨌든 요나는 의식이 가물가물해져 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이 모든 일의 시작과 과정과 끝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시간만큼 요나를 그런 상태에 두셨다가 기뻐하시는 때에 큰 물고기로 하여금 그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이제 큰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자신이 구원 받은 사실을 깨닫고 이 시로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사람을 이런 시련 가운데 두십니다. 요나의 경우에는 그로 깨닫게 하려는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요나의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요나의 경우와 유사한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데가 있습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 1.8-10). 사도는 자신이 당한 고난의 목적을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 고난을 받을 때에 자기를 의뢰하고 있었는지를 모릅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죄 있는 사람인 이상 자기를 의뢰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사도가 자고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도의 몸에 사단의 가시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우리 주님도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히 5.8-9).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때로 고난을 주십니다. 그 기간이 얼마나 길지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요나에게 충분히 고난을 당하게 하고서 마침내 그를 죽음에서 건지신 것입니다.
요나의 고백
이 구원의 경험은 요나에게 8절과 9절과 같은 깨달음에 도달케 했습니다.
8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8절은 우상 숭배의 악을 지적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입니다. 그는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서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은 그 은혜를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요나는 그런 자들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런 자들의 뒤를 따르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감사함으로 제사를 드리고 서원한 것을 반드시 이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그 뒤에 따라오는 충성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마땅한 바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말할 수 없는 감사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 제사는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모든 것과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건강과 병 무엇이든지 전부 하나님께 남김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그 처분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 받은 자에게 마땅한 것입니다. 진정 구원을 받았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요나는 구원을 너무나 생생하게 맛보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죽음의 문턱까지 갔습니다.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런 경험 직후에 그 감사도 최고조에 달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그런 것을 자꾸 잊어버립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자기를 죽음에서 건져준 사람이 있을 때, 건짐을 받은 그 순간에는 그를 위해서 무엇이나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조금씩 바뀌기 쉽습니다. 당시의 고마움이 조금씩 잊혀져 갑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경험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처음 믿었을 때에는 구원의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워서 정말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살라고 해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고 무슨 일을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 감사가 점점 시들해져 갑니다. 그래서 이것도 따지고 저것도 생각하고 어느 만큼의 생활 수준은 유지해야 되고 등등 세속적인 일이 자꾸 중요해져 갑니다. 그것이 신자에게서 자주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지금 구원의 감사의 최고조의 순간에 도달해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시키시더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죽음에서 돌아왔는데 무엇을 못하랴 하는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자기가 물고기 뱃속에 불편하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에서는 건짐을 받은 까닭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물고기를 명하여 요나를 육지에 토하도록 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무엇을 시키시더라도 순종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요나(5) 3.1-10
2007.8.19 주일 오후
1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4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6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7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의 처지
하나님은 요나를 사흘 밤낮 큰 물고기 뱃속에 두셨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비로소 정신이 들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이제 스올에 들어왔는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에 빠져서 거의 정신이 가물가물하던 지경까지 갔다가 다시 의식이 돌아왔다면 분명히 처음에는 자기가 이제 죽음의 강을 건너 죽은 자의 세상에 도달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의식이 점점 분명해지면서 자기의 목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자기가 물고기 뱃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혹시 그 큰 물고기가 삼킨 다른 작은 물고기들에 둘러 싸여있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의 뱃속을 호텔처럼 편안한 곳으로 만들어주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마련에 의해서 생명은 유지되었으나 뽀송뽀송한 물고기 뱃속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꼬빡 사흘 동안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두셨을까요? 충분히 혼이 났으니 즉시 요나를 땅으로 돌려보내도 되지 않았을까요? 아마 하나님은 요나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사흘 동안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있으면서 자기를 거기까지 이끌어온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불순종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죄라는 사실을 다시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죽음에서 건짐을 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난 시간에 본 시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했습니다.
요나의 깨달음의 부족: 유대 민족주의를 벗지 못함
하지만 요나의 기도에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 잘못된 국수주의의 결과였으므로 이제 생각을 바꿔야겠다든지 하는 암시는 거기에 없습니다. 그는 오로지 죽음에서 건짐을 받은 사실을 감사하고 그 하나님께 충성을 다시 다짐하는 정도에까지만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가 거의 죽음에 도달하는 고난을 당했다가 지금 극적으로 건짐을 받아 물고기 뱃속에 있게 된 그 모든 과정이 시작된 근본적인 원인 곧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유대민족 중심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나의 암매가 실은 당시 이스라엘의 암매였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나서 자체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타매하는 선지자들의 전통에 명확하게 서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타매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직설법으로 그 잘못을 고발했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암매를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개인의 암매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고발합니다. 요나서가 취하는 방법은 참으로 우수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요나서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나와 니느웨가 무엇이 다릅니까? 요나는 끈질기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정신이 암매하여 자기의 전통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롭고 명확한 명령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마치 니느웨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그 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된 상태와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요나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것이 죽어 마땅한 죄라는 것을 요나에게 알리셨습니다.
요나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완고 속에서 자기가 지금까지 해왔던 그것이 전부이고 유일하게 바른 일 인줄 알고 거기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다면 요나는 그 명령의 의미를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 명령의 정당성을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크게 깨닫는 것이 있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은 사상의 높이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전혀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나서를 읽으면서 그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와 무엇이 다른가? 그들은 똑 같이 완고하고 깨달음이 더디고 하나님 앞에서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큰 자비로 죽음을 면제 받고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니느웨가 건짐을 받는 것에 대해서 불평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바다를 지으신 신이실 뿐 아니라 니느웨 백성을 지으신 신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니느웨 백성도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큰 물고기 뱃속의 요나는 이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 의식이나 깨달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두번째로 임함
물고기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었을 때 요나는 그 정도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는 죽음에서 건짐 받은 강렬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것은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낸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그곳을 마른 땅이라고만 말하는 까닭입니다. 사람들은 여기 저기를 제안하지만 아마 요나가 하나님을 피하여 떠났던 욥바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것이 요나에게 강력한 메시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네가 여기서 나를 거역하고 떠났으니 여기서 다시 시작해라 하는 메시지입니다. ‘만약 네가 여기서 다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네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천만번을 다시 배를 타도 결국 너는 이 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하는 명확한 메시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육지로 나온 후 얼마나 지나서 하나님의 명령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즉시 임했을 수도 있고, 요나가 정신을 가다듬을 시간을 가진 후에 임했을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요나가 그 자리에서 니느웨를 향해서 떠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팔레스틴에서 멀리 떨어진 대도시입니다. 그곳까지는 여러 날 걸려서 여행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만한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물고기 뱃속에서 건짐을 받은 후에 어느 정도의 준비 기간을 거친 후에 요나는 이스라엘을 떠났을 것입니다. 요나서는 이런 내용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런 내용들은 이미 거기에 전제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니느웨에 대해서
니느웨에 대해서는 창세기 10.6-1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7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군이로다 하더라 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성이라)을 건축하였으며.’ 여기 기록에 보면 니느웨를 세운 니므롯은 함의 아들인 구스의 자손입니다. 지하 25미터까지 파내려 가서 발굴된 결과에 의해서 보면 그 지역은 선사시대인 주전 4500년경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주전 2400년 경입니다. 오늘날 이라크 북부에 있는 도시 모술이 과거 니느웨가 있던 곳입니다.
니느웨는 고대 앗수르의 4대 도시 중의 하나로서 전쟁과 사랑의 여신인 이쉬타르를 수호신으로 모셨습니다. 니느웨에 대한 고대 역사는 이 신전의 건축 및 재건과 관련하여 등장합니다.
그러나 니느웨가 역사의 중심에 떠오른 것은 앗수르의 후기입니다. 앗수르의 왕 앗슈르나시팔 2세와 사르곤 2세가 그곳에 왕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산헤립이 그 도시를 재건하고 성벽, 성문, 수로를 건설했습니다. 앗슈르바니팔(669-627 BC)이 다시 니느웨를 자기 거처로 삼았습니다. 당시 그의 왕궁 입구의 대문으로 사용되던 거창한 문이 현재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사자 사냥 장면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이 큰 니느웨는 나훔과 스바냐의 예언대로 주전 612년 8월에 멸망되었습니다.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한 나훔이 그 멸망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8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9 은을 노략하라 금을 늑탈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10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무하였도다 거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나 2.8-10).
요나 3.3에 보면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표현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니느웨의 지름이 사람이 걸어서 사흘을 가야 한다는 말이라고 해석하고, 어떤 사람은 니느웨의 둘레가 사람이 걸어서 사흘을 가야 한다는 말이라고 해석합니다. 이 두 가지 해석은 발굴된 니느웨의 크기에 의해서 성립되지 않습니다. 실제 발굴된 결과에 의하면 도성 니느웨는 둘러싼 성벽의 길이가 약 12.5km 정도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니느웨는 그렇게까지 큰 성읍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고대의 어떤 학자의 기록에는 니느웨의 크기가 걸어서 지나가는데 사흘 정도 걸렸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은 많은 학자들이 그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날의 어떤 대도시도 걸어서 사흘을 걸려야 도시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갈 수 있는 도시는 별로 까닭입니다. 서울도 동서의 가장 먼 지점을 재보니까 약 36km가 됩니다. 이것도 사흘 길은 아닙니다. 혹자는 니느웨 성내와 성읍 바깥 지역을 합쳐서 그 정도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일 것으로 보입니다. 혹은 어떤 학자는 여기 삼일길이라는 표현이 니느웨 외곽에서 니느웨 성읍으로 들어가서 사업을 마치고 다시 나오는 데에 삼일이 걸린다는 관용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요컨대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확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소선지서 중에서 나훔은 전체가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 내용은 나훔을 배울 때에 살펴볼 것입니다. (전원길 51.5, 한석희 30.2, 김상범 30.2, 김도섭 25.4, 안태범 22.9, 양여진 22.4, 주갑식 17.6, 이재환 11, 배유찬 8).
두번째 명령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육지로 나온 후에 처음에 받았던 것과 똑 같은 명령을 다시 받습니다. ‘내가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는 말씀은 1장 2절에서 받았던 말씀을 그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려 도망하려고 했으나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는 원래의 자리에서 다시 그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달아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요나의 경우 달라진 것이라고는 시간과 정력을 낭비한 것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명령을 들었더라면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입니다.
요나의 이 이야기를 신자의 삶의 전형으로 삼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요나의 그것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계속 거역했으나 마침내 하나님이 자신을 꼼짝 못하게 해서 결국 그 명령을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그런 해석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요나의 이야기가 모든 신자에게 경고가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암매와 고집입니다. 요나에게서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암매와 고집은 당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암매와 곧은 목은 그 이후 교회 역사에서도 무수히 반복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요나의 이 이야기에서도 좀처럼 교훈을 받지 못합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신자에게 해당되는 교훈입니다. 우리도 요나의 이 암매와 고집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요나를 다루시는 방식은 모든 신자의 전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오래 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여러 번 기회를 주시고 회개하기를 오래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 후에도 여전히 회개가 없으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밖에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은 오늘이라는 동안, 아직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에 자기의 잘못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요나의 경우를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는 전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처럼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마치 무대 위에 연극을 올려서 현실보다 더욱 생생한 현실을 재현해 내듯이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선지자와 바다의 폭풍과 큰 물고기와 큰 성 니느웨의 초자연적인 회개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잘못을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의 경우는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로 보아야 합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불순종했지만 하나님이 끝까지 자기를 쫓아와서 불러 내셨다는 식으로 요나의 경우를 자기에게 적용하는 사람의 심리의 저변에는 혹시 자신에 대한 큰 평가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어쨌든 두 번째 명령을 받았을 때에 요나는 두 말 없이 순종했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Google Earth에서 측정해 보니까 욥바에서 니느웨까지의 직선거리가 약 860km 정도 되었습니다. 직선거리가 그 정도였다면 길을 따라서 갔다면 아마 1000km 이상의 먼 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여러 날 걸려서 니느웨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까지 긴 거리를 여행하면서 무엇을 생각했을지는 분명치 않으나 적어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지속적인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이후의 이야기를 통해서 추론할 수 있습니다.
니느웨의 반응
4절에 요나가 니느웨에 들어가서 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요나는 그 성에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요나가 어떤 방식으로 그 메시지를 선포했을지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이 있으나 그 세부 사항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요나가 그 메시지를 전했을 때에 사람들은 자기네 성읍이 왜 무너진다는 말이냐 하고 질문했을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요나는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으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욘 1.2). 즉 그들의 도덕적 악이 하나님의 주목을 받을 정도에 도달했으므로 온 세상의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심판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경우를 소돔과 고모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서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전달했을 것입니다.
요나의 메시지에 대한 니느웨 백성의 반응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5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6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7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욘 3.5-9).
요나의 메시지가 사람들 마음 속에 전대미문의 찔림과 양심의 가책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했다는 두려움을 사람들 마음 속에 불어넣었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일어났으며 그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위해서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를 입었습니다. 이 일이 백성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결과 소문이 왕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그러자 왕까지 그 회개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국민적인 회개를 선포하고 심지어 가축까지 회개의 표시에 동참하도록 명했습니다. 그렇게 하고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고 성의 멸망을 피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이런 대규모 회개에 대해서 한 두 가지를 생각하겠습니다.
집단적 회개에 대한 몇 가지 고찰
성경에는 집단적 회개와 회심의 기록들이 때때로 나타납니다. 니느웨의 경우 이외에도 구약과 신약에 걸쳐서 몇 번 이런 집단적 회개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가지 예가 사도행전 앞 부분에 등장합니다. 하나는 오순절에 발생한 일입니다. 오순절 성신 강림의 의미를 설명하는 베드로의 설교와 그 결론 부분에 등장하는 죄에 대한 지적을 듣고서 찔림을 받은 결과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행 2.41). 또한 그로부터 얼마 후에 성전 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친 일이 계기가 되어 다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고 그 결과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행 4.4). 여기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다면 남녀의 숫자를 합치고, 그 남자로 인해서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가정하면 그 한 번의 설교로 인해서 복음을 받은 사람이 수 만 명은 될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괄목할 만한 일입니다.
사도행전 앞 부분의 경우는 그 회개한 사람들이 전혀 불신자가 아니었음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들 중 상당한 수는 이미 예수님의 지상 사역 동안에 직간접적으로 그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목격자도 많았고(고전 15.6) 그것을 소문으로 들은 사람들도 상당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요한과 베드로의 용기와 그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이적을 보고서 나사렛 예수가 억울한 죽음을 죽었으며 그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을 것이고 마침내 제자들의 말을 믿을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대규모 회개는 불신자들이 대중 집회에서 대규모로 회개하는 것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요나의 경우는 더욱 극적입니다. 우선 니느웨 사람들은 사랑과 전쟁의 여신 이쉬타르를 수호신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 신전에서 상시적으로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해서 무슨 특별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별로 없습니다. 앗수르 사람은 함족의 후예로서 민족적으로도 셈족과 달랐습니다. 또한 그들은 쐐기문자를 사용하였으므로 언어도 달랐습니다. 요나가 앗수르에 가서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했다면 아마 요나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앗수르어를 익혔든지 아니면 그 언어를 공부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니느웨 백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들과 종족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신도 다른 이방인이 와서 자기들은 알지 못하는 이방의 신으로 심판을 선언할 결과 밖에 안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루 동안 외친 요나의 이야기를 듣고 온 백성이 회개에 이른 것입니다.
이 비상한 현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여러 의견을 내지만 해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성신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큰 능력으로 역사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우고 죄에 대한 회개의 심정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요나가 그 하루 동안에 니느웨의 모든 백성에게 직접 메시지를 전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만난 일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했을 것이고 그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마음의 죄책과 고통으로 회개하면서 그 기운이 다른 사람들에게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요나의 메시지를 직접 듣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그 도시 전체에 점점 퍼져나가는 사람들의 회개와 임박한 진노의 소문을 듣고 자기들도 어쩔 수 없는 마음의 두려움을 가지고 그 회개에 동참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온 백성과 심지어 왕까지 그 회개의 기운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요나의 이 이야기는 부흥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전범을 제공해 왔습니다. 실제로 부흥을 연구하고 역사적으로 고증해온 사람들은 어떤 마을이나 일정 지역에 이런 대규모의 회개가 일어난 경우들을 찾아서 소개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례들이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보고되어 왔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이른바 평양 대부흥이라고 불리는 집단적 회개를 그런 경우의 하나로 보고 있는 듯합니다. 최근 평양 대부흥 일백 주년을 맞아서 대규모 학술 발표회도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의 생각으로 제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취향이나 우리의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시는 많은 경우들을 보는 까닭입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자칫 자기의 취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규정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부당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은 반드시 이렇게만 일해야 한다고 제한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사람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잘 배우고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것이 정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서에서 하나님께 신비한 능력으로 역사하여 니느웨 백성을 짧은 시간에 대규모로 회개시키는 기적적인 일을 일으키신 사실을 읽을 때에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일을 일으키기도 하시는 분임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요나의 경우를 모든 신자의 일반적이 규범으로 확정하는 것이 무리한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니느웨에서 발생한 일을 기독교 전도자가 항상 기대해야 하는 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한 일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앞부분에서 발생한 일은 확실히 예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 이후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그렇게도 위대한 사도 바울의 전도를 듣고 많은 사람이 대규모로 회개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에베소의 큰 신앙 부흥은 적어도 사도 바울이 여러 해 거기서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한 결과입니다. 사도 바울을 포함한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의 생애는 그런 대규모적이고 기적적인 부흥으로 점철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람들에게 성실하고 충성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때로 신앙의 큰 부흥을 일으키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느웨의 이 대규모적인 회개도 요나의 경험처럼 performance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것은 결국 당시의 북조 이스라엘에 대한 선지자의 타매였습니다. 만약 요나가 이 글을 기록했다면 그는 후에 자신에게 발생한 그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에게 발생한 기이한 일들과 니느웨의 기적적인 대규모 회개가 이스라엘 백성의 암매와 완고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임을 깨달았음이 분명합니다. 요나는 그것을 직설법으로 쓴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보고서 혹은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했을 뿐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요나(6) 4.1-11
2007.9.2 주일 오전
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심판의 선언의 이중성
3장 마지막 절인 10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니느웨 백성은 진노에서 건짐을 받았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무리 악한 상태에 있었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언제나 용서하시고 내리리라 하던 재앙을 거두시는 분임이 드러났다. 하나님께서 어떤 백성을 위협하고 심판을 선언하실 때에는 언제나 그들의 회개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은 회개의 촉구이다. 예레미야 18.7-8에 그것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이 말씀대로 니느웨는 심판의 선언을 듣고 회개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았다.
그러나 성경에는 확정된 심판의 선언이 자주 등장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되었는데 그 선언을 들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계속 완고한 태도를 취하다가 그 심판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확정된 심판인지 회개를 촉구하는 심판의 선언인지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은 그것을 미리 아시겠지만 우리는 결과를 보고 알 수 밖에 없다. 니느웨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말하자면 니느웨가 회개하지 않았다면 요나의 선언은 확정된 심판의 선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니느웨가 회개했으므로 그것은 회개를 위한 선언으로 드러났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편에서 보자면 모든 심판의 선언은 양면성을 가진다. 그것이 실행될 심판의 선언일 수도 있고 회개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확정된 심판의 실례: 확정된 심판의 한 가지 실례로 요시야의 아들 요호야김의 경우가 있다. 니느웨 왕이 자기의 죄를 버리는 태도는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태도와 얼마나 대비되는가. 렘 36.1-3에 보면 주의 말씀이 다음과 같이 예레미야에게 임한다. ‘1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사년에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너는 두루마리 책을 취하여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열방에 대하여 나의 네게 이른 모든 말을 그것에 기록하라 3 유다 족속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한 모든 재앙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킬듯 하니라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사하리라.’ 그래서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불러 자기가 불러주는 말을 기록하게 했다. 그 후에 예레미야는 바룩에게 그 글을 백성에게 읽어 주라 했다. 자기는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바룩이 그 글을 백성에게 읽어주자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오년 구월에 예루살렘 모든 백성과 유다 성읍들에서 예루살렘에 이른 모든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금식을 선포한지라’(렘 36.9). 이렇게 백성은 회개했다.
그래서 이제 바룩은 그 글을 유다의 방백들 앞에서도 읽어 주었다. 그러자 방백들이 놀라면서 그 글을 왕에게도 알려야겠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은 니느웨의 회개와 비슷하다. 백성이 선지자의 말을 듣고 회개하고 그 기운이 방백들에게 도달하였으며 이제 그 소문이 왕에게까지 도달한 것이다.
여호야김이 그 두루마리 낭독하는 것을 듣고 어떻게 했는지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20 그들이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두고 뜰에 들어가 왕께 나아가서 이 모든 말로 왕의 귀에 고하니 21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방백의 귀에 낭독하니 22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23 여후디가 삼편 사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24 왕과 그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그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25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사르지 말기를 간구하여도 왕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26 왕이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를 명하여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렘 36.20-2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을 선포하시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여호야김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그에게 다윗의 위에 앉을 자가 없게 될 것이요 그 시체는 버림을 입어서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 또 내가 그와 그 자손과 신하들을 그들의 죄악을 인하여 벌할 것이라 내가 일찍 그들과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에게 선포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한 그 모든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다 하라’(렘 36.30-31). 이런 재앙의 선언은 회개의 기회를 주는 선언이 아니라 재앙을 확정하는 선언이다. 그러나 이것이 확정되는 것은 동시에 여호야김이 회개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렇게 어리석고 완고한 왕 여호야김과는 달리 니느웨는 온 백성 뿐만 아니라 방백과 왕까지 잘못을 회개하고 구원을 얻었던 것이다.
요나의 분노
그러나 니느웨의 회개가 요나에게는 가장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벌어진 것이었다. 하나님에게는 기쁨이 될만한 일이 요나에게는 우려할 만한 일이었던 셈이다. 요나는 니느웨의 구원을 목격하고서 극도의 혐오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요나가 극히 싫어하고 노하여’라는 표현은 그가 니느웨의 구원을 얼마나 원하지 않았는지를 보여 준다. 원어의 표현은 ‘큰 혐오로 혐오하고 불이 붙었다’이다. 생생한 표현이다. 사실 그는 자신이 니느웨의 구원을 위한 도구가 되기를 원치 않아서 다시스로 도망하였다. 풍랑 이는 바다에서 거의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은 후에도 자신이 다시스로 도망한 사실에 대한 후회나 사죄의 마음은 전혀 없었다. 이스라엘에서 니느웨까지 여러 날 걸려 먼 길을 여행하는 동안에도 그 마음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니느웨를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면서도 내내 마음속으로는 혹시 이 말을 듣고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가득했다. 물론 요나는 자기의 싫어하는 일이 발생하고야 말 것이라는 불길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다. 그는 그 심판을 외치면서 제발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지 말고 그대로 멸망 당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마침내 요나는 자기가 가장 걱정하고 우려하던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목도하고야 말았다. 절대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지 말아야 하는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까닭이다. 그래서 그는 극히 싫어하고 분노하였던 것이다.
요나의 기도
니느웨가 구원 받은 사실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가득하여 요나는 입을 열어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만약 우리가 요나서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제야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으려고 다시스로 도망한 행동의 동기가 여기서 처음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셈이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가 그 말이다. 그는 결국 니느웨가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이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요나서에는 요나의 기도가 두 번 등장한다. 하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올린 감사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니느웨가 구원 받은 사실을 확신하고서 올린 기도이다. 이 두 기도는 모두 죄인을 구한 하나님의 자비가 드러난 결과 드려진 기도이다. 첫째 기도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와 찬송의 기도였다. 이 둘째 기도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분노와 원망의 기도이다. 첫째 기도는 자기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의 기도이고 둘째 기도는 니느웨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원망의 기도이다.
여기 하나님에 대한 요나의 묘사는 그렇게 정통적이고 신학적으로 정확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요나의 고백을 들어보자.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요엘서에 등장한다.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2-13). 여기 보면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다’는 표현이 요나서와 요엘서에 순서도 똑 같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보건대 이 표현이 당시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고백하는 일종의 표준적인 신앙고백이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정통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믿음이 요나의 편견을 고치는 역할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사한 불평
우리가 좀 더 주의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이런 불평이 요나의 경우에만 발견되는 희귀한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큰 아들의 경우를 보자(눅 15.11-32). 그는 아버지가 귀향한 작은 아들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에 불평이 가득하였다. 지금까지는 아버지의 것이 다 자기의 것이므로 자기는 아버지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면 되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돌아오자 그는 갑자기 자기의 처지에 대해서 불평하게 되었다. 작은 아들이 돌아오기 전에는 큰 아들이 그렇게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 같이 그렇게 불평하는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살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불평의 동기는 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호의였다. 그는 그렇게 아버지의 호의를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문전박대했다든지 혹은 최소한 엄하게 꾸짖은 다음에라도 받아들였다면 큰 아들의 불평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큰 아들의 불평의 원인은 아버지가 자기에게 섭섭하게 대한다는 것이 아니라 작은 아들에게 너무 자비하다는 것이었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작은 아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한다는 자기의 기준을 정해 놓고 아버지의 자비가 그 정도를 넘는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아버지가 자기에게 한 것에 대해서도 불평하게 되었다. 즉 탕자인 아들에게 이 정도로 해준다면 모범생인 자기에게는 훨씬 더해 주어야 했다는 논리이다.
이와 유사한 또 다른 경우는 포도원 품군의 비유이다(마 20.1-16). 거기 보면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불러서 일을 시키는데 어떤 사람은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하고 어떤 사람은 그 후에 와서 일을 시작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후에 와서 일을 시작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루 일을 마치기 직전에 와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품삯을 줄 때에 주인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었다. 그러자 아침부터 와서 일한 사람이 주인에게 불평한 것이다. 왜 자기보다 덜 일한 사람에게 자기와 똑 같이 주느냐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왜 주인이 그 사람에게 지나친 호의를 베푸느냐 하는 말이다. 언뜻 보면 정의의 관념에 맞는 것 같은 이 말은 실은 질투의 결과이다. 자기는 원래 주인과 그렇게 계약을 맺었으므로 주인의 입장에서는 그 계약에 충실하면 아무 문제가 없고 자기도 그렇게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호의의 기준을 자기가 정하고자 하는 이런 태도라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
만약 그로 인해서 자기가 피해를 본다면 항의할 수 있으나 자기에게 피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에 대해서 그 기준을 자기가 정하겠다는 것은 대단히 이상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요나의 이런 태도와 유사한 현상들이 의외로 우리 안에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호의를 베푸는 사람의 결정의 문제이다. 이 시점에서 이제 우리는 요나의 사고방식의 어떤 면이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것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반영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요나의 죽고자 하는 마음
요나의 혐오감과 절망감이 얼마나 컸는지가 그의 다음 말에서 드러난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물에 빠져 죽어가던 요나는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여 살려 달라고 호소하였고 죽음에서 건짐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 그것보다 훨씬 큰 하나님의 자비가 니느웨에게 나타나자 자기를 죽여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자기가 니느웨 구원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 속에 일으킨 혐오와 분노가 그에게서 살 의지를 빼앗아간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 이렇게 살 의지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을 거둬가 달라고 기도한 예가 가끔 등장한다.
예를 들어서 민수기 11장 15절에 보면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찐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등장한다. 이것은 모세의 기도이다. 모세로 하여금 이런 절망감을 느끼게 만든 것은 백성의 지속적인 불평과 불순종이었다. 그 계기는 10절에 기록되어 있다. ‘백성의 온 가족들이 각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지금까지 모세는 백성의 불평을 반복적으로 들으면서도 꿋꿋이 견뎌왔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 아뢰었고 하나님은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시면서 이끌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한없이 지속되는 백성의 불평으로 인해서 마침내 모세의 인내력은 한계에 도달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신의 노력이 아무 효과를 못보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과연 자기의 삶과 사역이 의미가 있는가를 자문하였고 결국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장면을 엘리야에게서도 발견한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 19.4). 엘리야의 이 절망감은 갈멜산에서 위대한 승리를 얻은 직후에 온 것이다. 아마 엘리야는 그 승리에 큰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이렇게 승리했고 바알의 선지자 450인을 도륙하였으니 이제 이스라엘에 큰 신앙의 부흥이 일어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자기를 잡아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위협이었다. 엘리야가 죽음이 두려워 도망했을까? 물론 죽음이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로 하여금 도망하게 만든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라 자기 사역에 대한 절망감이었다. 그것은 모세가 느꼈던 것과 매우 유사한 절망감이었다. 아무리 갈멜산에서 승리하고 아무리 바알의 선지자를 잡아 죽여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게다가 바알 종교의 후견인인 이세벨은 여전히 기세 등등하여 자기를 죽이려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엘리야는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절망은 자기의 사역이 아무 열매를 얻지 못한다는 판단에서 오는 것이었다.
요나는 왜 죽고자 했겠는가? 그도 바로 이런 선지자의 절망감을 경험한 것이다. 그는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면서 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늘 마음 한 구석에 있었으나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심판을 선언했다. 그 심판이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기의 사역은 성공하는 것이다. 이방에는 심판이 떨어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만방에 선포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자기가 불길하게 생각하던 그 일, 결단코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그 일이 그만 현실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선지자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니느웨의 회개와 구원을 보는 요나의 마음 속에는 이 절망감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살고 싶은 의욕이 없어졌다. 그래서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기도하기에 이른 것이다.
요나는 이스라엘 선지자의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으며 정통적인 신학을 견지하고 있는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가장 정통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고백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가서 전하라는 위임을 받았다. 이미 보았듯이 요나는 니느웨만을 위해서 선지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원래부터 선지자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또한 자기의 사역에 대한 절망감으로 죽기를 구하는 것까지도 선지자들이 하던 일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제 그는 그 선지자의 절망감으로 죽기를 구하고 있다. 나타나지 않아야 하는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이방 적국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발휘되고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할 그들이 심판을 받지 않은 큰 구원과 은혜의 사실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요나의 마음 속에 말할 수 없는 절망을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죽기를 원하고 있다.
요나의 그 요구에 대해서 하나님은 한 마디로 말씀하신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가장 복잡한 상황에 대해서 가장 간명한 말이 최선의 방책인 경우가 있다. 요나는 이미 하나님의 충분한 행위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없이 분명히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쳐지지 않는 요나의 암매에 대해서 하나님은 간단하게 한 마디로 말씀하신다. ‘네가 옳지 않다.’ 공은 요나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요나의 생각을 고쳐주려는 하나님의 자비는 계속된다. 또 다른 시청각 교육으로 요나의 생각에 빛을 비춰주시는 것이다. 다음 시간에 계속 그 다음을 보겠다.
요나(7) 4.1-11 2007.9.9 주일 오전
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복습
지난 시간에는 4장 1-4절을 보았다. 거기서 우리는 요나에게서 나타나는 기현상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나가 가진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인식은 정통적인 것이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의 아이러니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이런 그의 지식이 그로 하여금 니느웨에 대해서 자비를 품게 한 것이 아니라 니느웨에 하나님의 자비가 임할 것을 두려워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니느웨가 그런 자비를 입을 것이 걱정되어 그는 급히 다시스로 도망하였다고 했다. ‘저런, 그런 일이 있으면 큰 일 나지. 빨리 피해야겠군.’ 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요나가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를 죽여달라고 요구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선지자의 절망은 대표적으로 모세와 엘리야에게서 발견되었다. 자기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 선지자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죽기를 구하였다. 요나도 바로 이런 선지자의 절망에 빠져서 죽기를 구한 것이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의 경우에는 백성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것에 대한 절망감으로 죽기를 구했다면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불쌍히 여기고 구원한 사실에 대한 절망감으로 죽기를 구했다. 니느웨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사실을 보니 이제 자기는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서 하나님은 간단하게 대답하셨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요나는 하나님의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 대신 행동을 취했다. 성의 서쪽에 가서 초막을 만들고 거기서 니느웨의 결국을 보겠다는 뜻이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런 요나를 깨우치시는 장면이다.
요나의 행동
요나는 니느웨에 들어갈 때에 서쪽에서 진입했을 것이다. 팔레스틴에서 니느웨를 향해서 여행하면 서쪽에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니느웨를 하루 동안 다니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친 결과 사람들은 극적으로 회개했고 그것이 왕에게까지 도달하여 마침내 왕을 포함한 온 백성이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굵은 베를 입고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거두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요나가 니느웨의 서쪽에서 진입하여 도시를 가로질러 동쪽에 이르렀을 때 이미 대세는 결정되었다. 그래서 지금 요나는 도시 동편에 있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요나는 행동으로 들어갔다. 그 행동은 성의 동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아마 성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이었을 것이다) 성의 멸망을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혹은 과연 하나님이 이 성에 재앙을 내리는지 내리지 않는지를 마지막까지 지켜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요나는 마지막까지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확신하고 있다.
요나가 초막을 지은 것을 보면 상당한 기간 동안 거기에 버티고 있을 요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 초막이라는 단어는 유대인들이 초막절에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서 지은 초막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한시적으로 야외에서 견딜 수 있는 처소였다. 아마 돌이나 잡목으로 벽을 만들고 지붕은 나뭇가지 등으로 엉성하게 얹은 정도였을 것이다. 그 정도의 초막을 만들고서 요나는 그 안에 들어가 앉아서 그 성이 어떻게 되는지 보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
하나님의 행동
요나의 이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도 행동을 취하신다. 그것은 요나서에서 일관되게 제시되는 하나님의 성품 곧 자비의 행동이다. 그 행동의 동기가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여기서도 하나님은 요나를 불쌍히 여기신다.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는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용서하셨다. 니느웨의 구원에 대해서 요나가 크게 분개할 때에도 하나님은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는 정도의 질문으로 마무리하셨다. 그리고 지금 요나가 당하는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여 그의 위에 박 넝쿨을 준비하사 그늘을 만드신 것이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는 요나가 당하는 그 괴로움이 하나님을 저항하느라 당하는 괴로움이라는 사실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수긍하고 귀국했다면 그는 거기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고생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고생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며 그 동기는 하나님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요나를 불쌍히 여겨 괴로움을 면케 하기 위해서 박 넝쿨을 준비하신 것이다. 여기 괴로움을 면케 한다는 히브리어 표현은 니느웨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니느웨의 괴로움을 면해 주기 위해서 요나를 보내신 것이다. 이는 니느웨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 까닭이다.
요나는 이 박 넝쿨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심이 기뻐하였더라’고 되어 있다. 요나가 그 박 넝쿨의 호의에 대해서 심히 기뻐한 것 역시 아이러니이다. 그는 이미 앞에서 크게 기뻐한 적이 있었다. 그가 익사 직전에 구원을 받아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였다. 그는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로 말미암나이다’라고 노래했다(2.9). 그러므로 박 넝쿨을 요나가 크게 기뻐했다는 이 표현에 암시된 바는 이것이다. 그는 자기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호의에 대해서는 크게 기뻐하지만 니느웨에 베푼 하나님의 호의에 대해서는 크게 혐오하고 분노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자신과 자신의 민족이 독점해야 한다. 그 이외의 이방인이 그 자비를 받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이것이 요나의 전형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박 넝쿨이 요나의 괴로움을 면케 한다는 표현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박 넝쿨은 단순히 햇볕만을 가리는 목적이 아닌 까닭이다. 만약 그것이 햇볕만을 가리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다음 행동이 설명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다음 날 벌레를 보내 박 넝쿨을 죽이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뜨거운 바람과 햇볕을 보내신 까닭이다. 그러므로 박 넝쿨은 단순히 햇볕의 괴로움만을 면케 하고자 함이 아니라 요나가 빠져 있는 진정한 난관 곧 그의 민족주의와 배타주의의 난관에서 그를 건지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요나서의 저자는 이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요나가 지은 초막이 중동 지방의 뜨거운 햇볕을 충분히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부실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초막 위에 박 넝쿨이 얼마나 유용했을까! 잎사귀가 두껍고 큰 박 넝쿨은 초막 위에 훌륭한 지붕을 만들어서 초막 내부를 시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요나는 그 시원함을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요나의 기쁨은 그것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초막에 그렇게 그늘을 만들어주시는 것을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인정으로 해석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아, 하나님이 이렇게 나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것을 보니 내 생각이 역시 옳았군’ 하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은 그의 기쁨을 배가했을 것이다. 만약 자신의 생각이 옳다면 니느웨 백성이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들은 조만간에 재앙을 만날 것이다. 이렇게 요나는 하루를 기쁨 속에서 지내면서 니느웨가 망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요나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밤의 서늘한 기운이 아직 남아 있던 새벽에 하나님은 벌레를 보내서 박 넝쿨을 씹게 하셨다. 그 결과 박 넝쿨은 곧 시들어 버렸다. 그러므로 이제 요나는 박 넝쿨이 없는 초막에서 햇볕 속에 앉아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다. 여기 동풍은 scirocco라는 바람으로써 양이온을 가득 품고 있어서 세로토닌과 신경전달 물질의 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중동 지방의 바람으로 보인다. 그 바람 속에 있으면 사람은 탈진, 우울증, 환각 증세 혹은 이상 행동을 보일 수 있다. 이 바람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강한 영향을 미치므로 지금도 어떤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 바람이 불 때에 발생한 범죄에 대해서는 정상을 참작하기도 한다고 한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 바람을 보내셨다.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은 맑은 하늘에서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로 내려 쪼이게 하셨다. 히브리어로는 햇볕이 요나의 머리를 공격했다고 되어 있다. 벌레가 박 넝쿨을 씹어 시들게 만든 행동에 대해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그 의취는 단순히 햇볕이 비친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시로코 바람과 열사의 햇볕 속에서 요나의 고통은 점점 더해졌을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어제의 박 넝쿨이 얼마나 고마운 선물이었는지를 더욱 절감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박 넝쿨이 사라진 사실에 대한 분노가 솟아 올랐다.
하나님과 요나의 마지막 대답
이 속에서 요나는 ‘혼곤하게’ 되었다. 극도의 피곤과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햇볕을 피할 생각을 않고 거기에 버티고 앉아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것은 분노에 찬 생각이었다. 요나는 두 번째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요나의 마음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렇게 질문하신다.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이 질문은 단순히 요나가 성내는 사실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박 넝쿨로 인하여’ 성내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요나가 지금 니느웨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행동과 생각에 일관되려면 그는 박 넝쿨이 죽은 사실에 대해서 성을 낼 수 없다는 말이 거기에 암축되어 있다. 그러나 요나는 그 질문의 의취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확신에 찬 대답은 요나가 어디서 잘못되어 있는지를 보여 준다. 요나는 시종일관 비록 잘못되었지만 강한 확신 속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확신에 너무나 붙잡힌 나머지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는 도무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그의 확신을 흔들지 못하고 있다. 아마 그의 확신과 선입관이 그의 마음을 너무나 사로 잡아서 다른 가능성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완전히 빼앗아간 듯이 보인다. 어떻게 보면 어리석고 어떻게 보면 순진한 이 요나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패배한 싸움 속에서 장렬하게 산화하기를 원하고 있다. 요나는 순진한 암매 속에서 저돌하고 있는 것이다. 요나의 이 모습 속에서 우리는 다메섹 이전의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사도는 그 당시의 자신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3-14).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렇게도 오래 참고 친절하게 대하시는 것은 요나가 알지 못하고 행하는 연고일 것이다. 알고 악을 행하는 자와 알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자를 하나님은 똑같이 다루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박 넝쿨로 인하여 분노하는 요나의 행동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를 지적하신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가 박 넝쿨로 인해서 느끼는 분노가 근거 없음을 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먼저 박 넝쿨과 요나의 관계를 거론하신다. 박 넝쿨에 대해서는 요나가 애석하게 생각할 하등의 조건이 없다는 뜻이다. 만약 요나가 그 넝쿨을 심고 가꾸고 했다면 그것이 죽은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슬픔과 아까움과 분노를 느낄 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박 넝쿨을 얻기 위해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그것은 그저 하루 밤 사이에 났다가 그 다음 날 죽어버린 넝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것이 죽는 것에 대해서 요나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느냐 하는 뜻이다.
이 말의 배후에는 ‘그런데 너는 왜 느니웨 백성이 망하는 것에 대해서는 슬픔과 연민을 느끼지 않느냐’ 하는 말이 암시되어 있다. 실제로 그 다음에 그 말이 뒤따른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셈이다. ‘박 넝쿨을 아끼는 네 심정을 먼저 살펴 보아라. 그리고 니느웨 백성을 아끼는 나의 심정을 헤아려 보아라’ 하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단순 비교가 아니다. 박 넝쿨의 가치와 니느웨 백성의 가치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왜냐하며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기’ 때문이다. 여기 한 편에는 요나와 박 넝쿨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하나님과 니느웨 성이 있다. 지금 요나는 박 넝쿨이 죽은 사실에 대한 섭섭함으로 죽도록 분노하고 있다. 박 넝쿨이 요나에게 그렇게도 중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니느웨에 사는 그 많은 사람과 육축의 중요성은 얼마나 더 한가. 그런데 박 넝쿨을 그렇게도 아끼는 요나가 니느웨를 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여기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라는 말이 젖먹이 유아를 가리킨다고 본다. 유아의 숫자가 그 정도라면 니느웨의 인구는 엄청날 것이다. 유아가 십 이만 여명이라면 청소년, 장년, 노년 노예를 포함한 전체 인구는 백만 명을 훨씬 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보다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라는 이 표현을 니느웨 사람 전체의 우매한 상태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우리는 이 표현의 이중성을 또한 즉시 주목하게 된다. 요나서 전체를 볼 때에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사람이 어디 니느웨 사람 뿐인가? 요나 자신이 바로 이런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라는 말로 니느웨 백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요나까지 포함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다. 왜 요나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는 기뻐하면서 역시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는 분노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육축까지 포함시킨 것은 박 넝쿨과의 대비를 더욱 강화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육축까지도 박 넝쿨보다 귀하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은 육축에 대해서까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분임을 암시적으로 표시한다. 만약 니느웨의 멸망 속에서 육축이 함께 멸망 당한다면 육축에게는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육축은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없는 까닭이다. 그들은 단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더불어 피해를 볼 뿐이다. 이 지구 전체가 그러하다. 인간의 죄악과 탐욕으로 인해 땅이 신음하고 동물이 학대 받고 있다. 그들에게는 죄가 없다. 죄는 인간이 범하고 피해는 그들이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육축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다.
결론
우리는 요나서의 서론에서 요나의 이야기가 하나의 공연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요나서를 읽고 요나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과연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요나는 어떤 의미에서 현실보다 더욱 생생한 현실이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요나의 신앙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속성에 대한 그의 이해는 흠 잡을 데가 없다. 그는 삶과 죽음 속에서 항상 하나님을 생각했으며 그의 도우심을 받았을 때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했으며 니느웨가 망하는 것이 아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요나에게서 볼 수 있는 그의 성격상의 특징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단순성과 순진성이다. 그는 한번 이것이다 하고 생각했으면 그것을 고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성격을 가졌다. 좋게 말하면 개결한 성격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요나와 같은 단순성과 개결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면에서 요나는 단순히 비난만 받을 수 없는 성격상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요나서의 어디에서도 요나가 자기의 이익을 계산하는 사특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고 시종일관 확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너무 확신한 나머지 하나님이 잘못을 지적하자 자기 생각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바꾸려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의 이런 단순성과 진실한 신앙이 편견 속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다. 그 편견이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어야만 하고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면 안되고, 그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하나님이어야 하고 다른 민족의 하나님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그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나와 나의 민족에게만 부어져야지 적국인 앗수르에게 그 자비가 부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요나의 입장이었다. 요나서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런 단순하고 진실한 신앙이 치명적인 편견에 빠졌을 때 발생하는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우매함이다.
요나 당시의 북조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유대 역사 전체는 요나의 오류의 공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신이시다. 창세기의 기록이 그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만 언약을 맺었는가? 그들이 특별히 사랑스럽고 고귀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들이 천하고 연약했기 때문이다. 그런 백성을 택해야 만이 하나님의 자비가 더욱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천하 만민에게 자비로운 분이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같이 목이 곧고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는 백성에게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면 어느 누구에게 자비하지 않으시겠는가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벌써 이스라엘 백성이 선민이 된 것은 이방을 위한 증거의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자비를 열방에 증거하는 나팔이었고 시청각 교재였다. 만약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다면 어느 나라의 하나님도 되실 수 있는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받아들이는 하나님이라면 어느 민족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는가. 이것이 이스라엘이 선택을 입은 한 가지 이유였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해내어야 했다. 그렇게 되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곧 천지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열방에 증거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예물을 들고 시온으로 모이도록 해야 했다. 과연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자비를 증거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영광을 충분히 드러내긴 하였다. 그 영광을 어떻게 드러냈는가? 이스라엘 백성의 사회를 통해서 드러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리신 율법과 그 나라에 베푸신 은혜와 선지자의 선포를 통해서 드러낸 것이다. 마치 검은 바탕에 그은 흰 선이 더욱 선명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어두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성격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루시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는 곤고가 있을 것이다.
공연에 열중하여 관람하고 있을 때에 사람은 때로 그 내용이 너무 극적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막이 내리고 극장이 밝아지고 밖으로 나와 귀가하노라면 사람은 서서히 극중 인물이 혹시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요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혹시 요나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아닌가?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편견에 빠져 너무나 명확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 교회 생활에 대해서, 가정 생활에 대해서, 국가에 대해서, 혹은 자녀 교육에 대해서 자기의 편견에 사로잡혀 너무나 명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지 못하는 요나의 모습이, 하나님의 말씀이 늘 우리 곁에 있는데도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요나서는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난다. ‘내가 아끼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우리는 항상 이 질문을 받아야 하는 존재인 까닭이다.
요나(8) 마 12.38-42 마지막회 2007.9.16 주일 오전 성경: 마 12.38-42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복습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요나서를 전체적으로 보았다. 그것이 비록 짧은 글이지만 놀라운 문학적 완성도로 선지자적 메시지를 전하는 글인 것을 보았다. 스토리 라인이 너무나 간단하여 누구라도 쉽게 외울 수 있는 내용이다. 등장 인물도 많지 않고 대화도 복잡하지 않고 어려운 신학적 철학적 토론도 없고 머리를 쥐어뜯게 하는 어려운 말도 없다. 사용된 단어로 쉽고 간단하다. 국민학생에게 이야기해 주어도 얼마든지 쉽게 이해될 만한 내용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얼마나 강력하고 얼마나 생생한가. 그것을 하나의 유능한 연출자가 극본을 써서 연극으로 공연한다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길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요나의 믿을 수 없는 단순성과 고쳐지지 않는 편견이 너무나 효과적으로 그려진 나머지 그 모든 이야기가 정작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놓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저자가 정작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그것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이다.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심정에서도 드러났듯이 하나님은 그들이 죄악 중에 멸망 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죄악 중에 멸망 당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스라엘에 대해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방의 니느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일본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미국에 대해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러시아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로마서 3장 23절이 선언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그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정신에 투철하였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중요한 뜻을 알고 거기에 순종한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자비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그 자비는 죄인의 진정한 회개를 요청한다. 회개하면 죄를 사하고 구원하겠다는 것이다. 니느웨에 대해서 전해진 메시지도 그것이다. 그 성이 사십일 내에 망하리라는 선언은 만약 그들이 그 메시리를 듣고서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이다. 만약 회개한다면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입고 죄를 용서 받고 임박한 진노에서 건짐을 입을 것이다. 그 메시지를 듣고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진노를 그대로 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는 두 가지로 드러난다. 첫째는 아무리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이 멸망 받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것 자체가 죄인에게는 여간 큰 자비가 아니다. 사실 사람은 전부 멸망 받아 마땅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법정에서 정죄를 받고 그 정죄의 결과 영원한 멸망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 합당한 것이 죄인의 위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신다. 이것이 우선 하나님의 큰 자비이다.
다음으로는 죄인이 회개할 때에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죽게 하셨다. 죄인을 건지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것이다.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이것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이다. 이 자비를 깨닫고 믿는 것은 인간이 도달하는 최고의 경험이요 지식이다. 그리고 인간성의 모든 일그러짐과 영혼의 질병을 치유해주는 약이다. 이 자비와 사랑을 경험할 때에 비로소 사람의 영혼이 빛을 얻고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놓임을 받으며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상태에 도달하는 까닭이다. 요나의 이야기는 이 하나님의 자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데 이 요나의 이야기는 약간 다른 배경에서 우리 주님의 말씀에도 등장한다. 오늘은 그것을 보기로 한다.
이야기의 배경
오늘 읽은 마태복음에서 이 이야기가 등장하는 배경은 주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만나서 발생한 일이다. 마태복음 12장 22절부터 대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사람들이 데려오자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고쳐 주셨다.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이적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을 보고 무리가 말하기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고 찬탄했다. 이 말은 그가 메시야라는 뜻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의 이적에 대해서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미 악한 마음으로 딱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귀신의 능력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그들의 마음을 돌려 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이런 악한 평가에 대해서 예수님은 여러 가지로 설명하시면서 그들의 말의 오류를 지적하신다. 그러면서 그들이 말을 조심해야 할 것과 그들의 말이 결국 그들을 심판하는 고발장이 될 것을 경고하신다(마 12.26-37).
이 경고에 대해서 그들은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요청한다. 우리 한글 성경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라고 되어 있으나 여기 ‘말하되’라는 말은 원래 ‘대답하되’라는 말이다. 즉 예수님이 위에서 죽 하신 말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구였던 것이다. 그들의 말은 ‘우리는 당신의 말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으니 그 권위의 증거로서 흔천동지할 기적을 보여 달라’는 요구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은 이미 확정되었다. 이미 위에서 눈 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즉석에서 고쳐서 그가 말하며 보게 된 것을 그들이 직접 보았다. 그 기적을 향해서 그들은 이미 그것이 귀신의 능력을 힘입은 결과라고 비난했던 터였다. 그런 사람들이 다시 이적을 요구하고 있다. 설사 예수님이 다른 이적을 베푼다 한들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그 이적까지도 역시 귀신을 힘입은 결과라고 비난할 것이 거의 분명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의 기적을 베풀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그들에게는 요나의 이적 이외에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요나의 이야기는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다. 누가복음에는 약간 다른 배경에서 드러나지만 내용은 유사하다. 예수님은 요나 이야기를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셨다.
물고기 뱃속에서의 사흘
첫째,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사흘 동안 머문 사실이 그들에게 주어질 유일한 이적이다.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이것은 물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주님이 이것을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도 이 말의 의미를 몰랐을 것이다. 당시에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감춰져 있었다. 주님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제자들은 요나의 이야기가 주님의 죽으심과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심인 줄 알았을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표적이 되는가? 주님은 이 이야기의 발단이 된 이적 곧 귀신 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쳐준 이후에 더 이상 아무 이적도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그 모든 이적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즉 그것이 표적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않는 것이다. 도리어 그것은 예수님이 귀신의 힘을 빌어서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는 증거에 지나지 않았으며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에 불을 지피는 효과만을 냈던 것이다. 그들은 이 논리를 가지고 예수님에 대한 살의를 정당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모든 논리와 적대감이 잘못임을 명확하게 드러낼 최후의 표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죽고 부활하시는 사실이다. 그들은 주님을 귀신 들린 자로 몰아서 죽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런 주님이 부활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들의 생각이 잘못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오순절 강설에서 사도 베드로가 몇 번에 걸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렸다고 선언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결국 예수님의 기적을 귀신의 힘에게 돌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선언은 그들이 넘지 못할 선을 넘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신적 권위를 가지려면 거기에 신적 능력 곧 신성한 표적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약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그들의 이 생각 자체가 무리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모세와 엘리야가 모두 그런 능력으로 자신들의 메시지의 신성한 기원을 입증한 까닭이다. 따라서 그들도 예수님께 그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악한 사람들은 성경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괴상한 생각을 발전시켰다. 그 신성한 능력을 귀신의 능력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이것은 악마적이고 교묘한 수단이다. 이 논리를 취하게 되면 예수님의 어떤 능력도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를 입증하지 못하게 된다. 도리어 예수님의 가르침이 귀신의 가르침이라는 증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귀신의 능력을 힘입어 병을 고치는 사람이라면 그의 가르침인들 귀신의 가르침이 아닐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이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악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한 셈이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고 환호하는 군중에게 이 말을 한 것을 보면 이것이 은밀하게 준비된 대답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준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신성한 능력을 귀신의 능력으로 돌림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 자체의 권위를 파괴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더 이상의 표적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또한 그들의 그 행동은 성신을 훼방하는 죄로서 다시는 사함을 받을 기회가 없다는 선언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선언이다(32절). 그들은 자기들의 악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 셈이다. 그들 스스로 사죄를 받을 수 없는 상태로 파고 들어가 앉은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주어질 마지막 기회 마지막 이적은 바로 요나의 이적 즉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이적이다. 만약 주님이 부활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다면 이는 예수님이 정당하다는 증거이다. 만약 예수님이 의롭고 정당한 분이라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잘못을 범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이런 논리를 잘 따라간다면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마지막 기회까지 차버리고 말았다. 예수님의 부활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나자 그들이 세운 대책은 이러하였다.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마 28.12-13).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로마 군대에서 보초 서던 군인이 졸다가 시체를 도둑 맞았다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사형 선고 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에 대한 대책까지 마련했다.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마 28.14). 귀신에게 사로 잡혀 정신이 완전히 전도된 이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들이 영원히 사죄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다.
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표적
누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다소 다른 형태로 전하고 있다. 11.14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기록과 같은 사건임을 암시한다. 마태의 기록에서는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가 등장하지만 누가는 그것을 간단하게 벙어리 귀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누가의 의도가 그 사람 자신에 집중되었다면 이렇게 간단하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의 경우와 유사하게 여기 누가의 의도도 그 사람이 어떤 병이 들었고 어떻게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에 있지 않고 그 기적으로 인해서 발생한 충돌에 맞춰져 있다. 마태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예수님의 기적을 귀신의 힘 바알세불을 힘입은 결과라는 비난이 등장하고 그 주장을 반박하는 예수님의 논증이 소개된다. 그리고 이제 요나의 표적이 거론된다.
마태복음에는 요나의 표적 밖에 주어질 표적이 없음을 말하고 나서 그 표적의 내용을 요나가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그 표적의 내용을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이 표현이 포함하는 몇 가지 불확실성 때문에 많은 상이한 해석들이 제시되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어떻게 표적이 되었다는 말인가? 또한 그 표적이 무엇인가? 또한 그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은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는 어떤 점이 예수님의 경우와 대응되는가? 이것이 본문 자체에 잘 나타나지 않는 까닭에 명확한 의미를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전체적인 문맥으로 보았을 때 여기 표적은 심판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즉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심판의 메시지이다. 물론 그 메시지를 듣고 니느웨 사람이 회개했지만 지금 이 본문의 핵심은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가 아니라 요나가 선포한 심판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니느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요나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의 표적이었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은 그 세대의 사람들에게 심판의 표적이 될 것이다. 여기 ‘될 것이다’라는 말이 헬라어 시제로는 미래이지만 이것을 반드시 시간적 미래로만 볼 이유는 없다. 우리 말에도 시간과 무관하게 미래 시제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운동을 열심히 할 것이다’라고 말하면 이것은 미래의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결심을 표현하는 미래적 표현이다. 이와 같이 미래 시제가 반드시 시간적 미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 예수님의 말씀도 그런 의미를 가진다. 결국 이 메시지를 듣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심판의 표적이 될 것이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까닭이다. 그들의 불신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심판이 된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즉 예수님이 심판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마태와 누가가 다른 표현으로 같은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특별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그 대상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요나의 표적은 그들에게 다시는 다른 표적이 주어질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그들은 다시는 예수님의 생애 동안의 어떤 이야기나 어떤 사건을 통해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지경에 떨어진 것이다. 그들이 자기의 악함으로 그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요나의 표적 곧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표적은 그들에게는 하나의 심판이나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이미 본 것처럼 그들은 부활의 표적도 믿지 않았고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사실이 실은 그 세대의 성격을 표시하고 있다고 누가는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믿기를 거부하는 이런 불신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유대인 일반의 상황이었다. 요한복음 6장의 이야기가 그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와 마가는 동일한 주님의 말씀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내용이나 목적은 동일함을 알 수 있다.
니느웨 백성과 남방 여인
이는 뒤이은 이야기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두 이야기를 소개하는 순서가 뒤바뀌었지만 내용은 동일하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과 남방 여왕이 일어나서 그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다. 그들이 일어서서 그 세대 사람들을 나쁜 놈이라고 소리친다는 말이 아니다. 니느웨 사람과 남방 여왕 자신들이 한 일 자체가 그들을 정죄하는 구실을 할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심판의 선언을 듣고 믿고 회개하였다. 그들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잘 알지 못하는 먼 팔레스틴 땅의 약소국의 선지자의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기들을 불쾌하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믿고 회개했다. 그들은 겨우 요나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회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세대를 향해서 회개를 외치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그는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 회개를 외치라고 명하신 분이다. 따라서 그는 요나보다 말할 수 없이 큰 분이시다. 그 분이 지금 이 세대를 향해서 회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니느웨 백성이 요나의 이야기를 듣고 회개했다면 지금 그들 앞에 서서 외치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백배나 천배나 더 회개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예수님의 메시지가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순전히 그들의 고집과 회개치 않는 마음이 문제이다. 왜냐하면 니느웨 사람은 요나의 이야기를 듣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판날에 니느웨 백성이 서서 그 세대의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다.
이는 남방 여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듣고 먼 길을 여행하여 솔로몬에게 온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 앞에서 말씀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는 지혜 자체이신 분이다. 그 분이 바로 솔로몬에게 지혜를 은사로 주신 분이시다. 그가 지혜의 원천이시다. 솔로몬 보다 더 큰 분이다. 그런데 그 분이 그 세대를 향해서 지혜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도 그 시대 사람들은 믿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심판날에 그 세대 사람들이 남방 여왕을 만났을 때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남방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흠모하여 그 먼 길을 여행하여 지혜를 배운 사실 앞에서, 그 지혜 자체이신 분의 말씀에서 지혜를 배우지 못한 이 세대 사람들은 정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의 교훈
주님이 요나의 예를 들어서 자신의 사역을 설명하시는 사실 속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주님의 평가를 볼 수 있다. 슬프게도 그 평가는 요나서가 내리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평가와 동일하다. 니느웨 백성은 요나의 심판의 선언을 듣고 회개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자신은 어떤가? 그들은 요나에게서 발견되는 거의 신비로울 정도의 영적 암매와 고집 속에서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을 거슬려 왔던 것이다. 니느웨의 회개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정죄가 될 것이다. 니느웨 백성은 당시 여로보암 2세 치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너희는 어쩌면 그렇게도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외치는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대하고 있는 유대 사회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여로보암 2세 치하의 유대인과 달라진 것이 조금도 없었다. 결국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요나의 표적을 거론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마지막까지 거부하는 요나의 고집과 암매가 예수님의 이적을 귀신의 능력으로 돌리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그것에 필적할 수 있을까?
사람은 어떻게 해서 이런 영적 암매에 빠지는가? 유대인의 경우를 생각할 때 거듭 거듭 떠오르는 아이러니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율법과 선지자와 제사제도가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방인의 암매라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들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므로 그럴 수 있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늘상 부르고 온갖 종교적인 규례를 행하는 유대인의 영적 암매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고 남방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먼 길을 여행한 사실을 들으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적 암매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 모든 사실을 듣고 알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영적 암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세대의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아가서 우리 자신의 영적인 어두움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나의 이야기는 다시 한번 우리의 이야기가 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더욱 빛이신 주님을 사모하고 그 빛을 향하여 나가며 그 빛 가운데 살기 위해서 애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의 사실을 각성하고 오로지 은혜로 내리시는 빛과 깨달음을 간절히 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요나의 교훈을 받는 정당한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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