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나

하나님과 요나의 동상이몽 (욘 4:1-11)

은바리라이프 2009. 9. 25. 15:32

 

 

우리는 3장에서 요나의 위대한 믿음과 순종을 살펴봤었습니다. 요나 한 사람의 헌신으로 악독하기로 소문난 니느웨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회개하고 악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 명을 인한 것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이 하늘에서는 더 큰 기쁨이라고 하셨습니다(눅 15:7). 그러니까 요나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일을 이루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큰 상을 내리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4장에 와서 보니까, 요나는 그 일어난 일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화가 잔뜩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따집니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래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한 것 아닙니까?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어제까지만 해도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치려 했던 것이 죽을 죄였는데, 이제 그게 잘한 일로 둔갑했습니다. 다시스로 도망갔어야 하는데, 중간에 하나님이 붙잡아 오시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고기 뱃속에서 그렇게 회개했던 것은 무엇이 됩니까? 회개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인데 그렇게 심각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했으니 억울한 일이 되는 것입니까?

지금 요나는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을 바꾸는 미성숙한 인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고 과거의 행동이 옳았었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속된 말로 하면 화장실 들어갈 때의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른 것입니다. 인간적인 정으로 말하자면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뀐다고 말을 바꾸는 것처럼 위험한 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황이란 언제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해서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시키는 행위도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설령 상대방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나의 잘못이 옳은 것으로 바뀔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치려 했던 것이 옳은 일이었다고 주장하는 요나의 행태가 몹시 실망스럽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 왜 그렇게도 간절하게 회개했던 것일까요? 회개란 돌아선다는 뜻입니다. 가던 길이 잘못된 방향이라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요나가 회개했다는 것은 여호와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다시스로 가려 했던 것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돌아섰던 것을 다시 돌이키겠다는 것입니다. 회개한 것 취소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이리저리 마음 변하는 것을 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요나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였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요나는 바다까지 쫓아오셔서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완력에 굴복해서 끌려왔을 뿐이지, 그의 근본적인 생각이나 삶의 태도가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급할 때 나오는 말로 살려만 주시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식으로 반응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 징계라는 방법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히스기야는 유다의 왕들 가운데 가장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그의 교만을 깨닫고 죄악을 회개하였습니다(대하 32:24-2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해 주셨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유다의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입니다. 어떻게 가장 선한 왕에게서 가장 악한 왕이 나왔을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므낫세 왕이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환난을 당하여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선한 왕이 되었습니다(대하 33:12-13).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가 항상 진정한 회개를 이끌어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급할 때는 ‘아이구 하나님, 살려만 주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습니다.’ 이러다가 환난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리고 다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대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변하고 고난이 끝났다고 해서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친다면, 그게 될 말입니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급할 때 하나님께 회개하고 약속했던 것들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그 약속들이 지켜졌습니까? 아니면 금새 잊혀지고 없던 일이 되었습니까? 기억력 나쁜 우리는 잊어버렸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그 약속 이행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요나가 지금 분노하는 것은 하나님이 니느웨에 내리려고 했던 재앙을 취소하셨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원했던 것은 니느웨 성이 멸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보내서 니느웨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외치게 하신 이유는 그들이 듣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면에 요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하나님의 생각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과 요나가 같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서로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음에 큰 도전과 부담을 느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일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 마음 속에 따로 계산하는 것이 있는가? 요나의 말 한 마디에 니느웨 성이 무너졌습니다. 물리적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무너지고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요나는 위대한 일을 이루었습니다.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아무리 큰 성과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다른 생각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한 것이라면, 그 위대한 일과 요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요나가 의도한 것도 아니었고 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큰 열심을 보였고 또 좋은 결과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겉으로는 충성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내 욕심과 내 명예를 위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이 나에게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섬기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이제 결과를 놓고 하나님과 요나는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두고 대립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시고 붙잡아오셔서 그 명령에는 순종하게 되었지만, 니느웨가 멸망하지 않게 되었다는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시는 반면에 요나는 대단히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대립과 갈등에서는 요나가 큰소리를 뻥뻥 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갈등에서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쳤던 것과 매우 대조적입니다. 지금 요나가 큰소리를 치는 이유는 자기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하나님과 같이 일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잘못했다며 하나님을 훈계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믿음깨나 있고 봉사 좀 한다는 사람들, 할 만큼 한다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기의(自己義)의 함정에 빠지면 하나님도 안중에 없는 교만에 이르게 됩니다. 요나의 말투를 보십시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이게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말투입니까? 자기는 하나님을 위하여 할 만큼 했다는 자기의와, 하나님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실망감이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들게 만들었습니다.

자,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요나를 손보셔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나는 고난과 징계를 통해서 진정한 회개에 이르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번에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를 설득하십니다. 작은 박 넝쿨입니다. 요나가 ‘니느웨 놈들한테 하늘에서 불벼락이 떨어지나 보자’ 하고 산에 올라가 초막을 짓고 그늘 아래 앉아 있는데, 박 넝쿨 하나가 나오더니 금방 무성하게 자라서 요나 위에 그늘을 만들었습니다. 요나가 그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벌레가 그 박 넝쿨을 갉아먹어서 금새 시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햇볕은 뜨거운데 박 넝쿨 죽어버린 것이 너무나 아쉽고 속이 상했습니다. 그날따라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까지 불게 하시니 요나는 짜증이 나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하나님의 말씀에 요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5장으로 가봐야 알 수 있겠지요. 1장은 하나님의 명령이 마음에 안 들어서 거부하는 요나와 그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익숙하게 경험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2장의 내용은 요나의 회개입니다. 깊은 고독과 아픔의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경험을 우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3장은 요나가 순종하고 헌신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는 요나서의 클라이막스입니다. 바로 여기까지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들입니다. 우리 인생의 3장까지에 드러난 것으로 세상은 우리를 평가합니다. 그 평가가 칭찬과 갈채일 수도 있고, 비난과 조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밖으로 드러난 3장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감추어진 4장이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는 상관없이 이 4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되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도달점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내면에서 요나의 4장처럼 하나님과 갈등하고 하나님께 동의하지 못하고 있다면, 5장을 써야 합니다. 때로는 징계로 때로는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를 다듬어나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진정으로 변화된 모습이 우리의 5장에 담겨야 할 것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요나의 5장도 궁금하지만, 앞으로 계속 써나가야 할 여러분 인생의 5장이 더 궁금합니다. 저 역시 5장을 써나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써나가는 5장에는 상황에 따라 억지로 하는 회개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는 회개가 기록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게 되는 믿음이 기록되고, 더 나아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이야기들로 채워지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