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자기관념과 하나님의 뜻 욘3:1-4:4
구약에서 요나는 존경받는 선지자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다가 물고기 뱃속까지 들어가 혼쭐이 난, 말썽꾸러기 괴짜선지자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언제든지 ‘아멘’하고 순종하는 것만이 요나처럼 되지 않고, 하나님 사랑과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입이 달도록 동화 같은 설교를 해주시던 교회학교 선생님의 모습도 함께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입니까? 불순종의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순종을 거부하거나 회피해야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할 정당한 이유와 명분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창조주시며 인간의 생사와 삶의 세상을 조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사탄의 미혹에 동조자가 된 죄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면 그 죄악과 함께 영원한 지옥형벌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일 뿐입니다.
요나는 불순종의 이유를 외부적인 요인이나 시대적인 역사와 주변 정세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그 이유로 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요나의 불순종은 전적으로 요나 자신의 의식적인 관념의 습성이었습니다. 요나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하고 달리 반대 편향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비뚤어진 의식으로 굳어버린 고정관념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요나의 관념은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를 정면으로 위반하고 도전하는 불순종에 이르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요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불순종에 대한 따끔한 경고를 하자는 것이겠습니까? 불순종의 결과는 고난에 빠지는 것뿐이라는 협박성 위협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의문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요나서는 이보다 훨씬 크고 깊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의 교훈을 담고 있을 것이라 ale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믿음의 답은 무엇입니까?
1. ‘자기 관념의 동굴을 무너뜨리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근대과학의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동굴의 우상’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했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때, 드디어 ‘참 자아’와 ‘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관념의 동굴에만 갇혀 있으면 진실을 찾을 수 없습니다. 동굴의 우상은 평소 에 읽었던 책이나, 막연히 존경하던 사람을 추종하는 집착과 몰입에 의해 굳어지는 습성을 말합니다. 이것을 베이컨은 ‘동굴 우상’ 즉 ‘자기 우상’으로 본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 이 같은 자기 관념의 동굴에 갇히게 되면, 백약이 무효합니다. 그 어떤 이론도, 교훈도, 받아들여지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더 깊은 동굴 속으로 자신을 몰입시키며 파고들어갈 뿐입니다. 타협도 협상도 없습니다. 구제의 길이 없습니다. 극단적인 선택과 돌발적인 결정으로 상황을 더 악화만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동굴우상에 사로잡힌 요나는 어떤 인물입니까?
구약에 기록된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로서 북이스라엘 가드헤벨 출신의 선지자였습니다(1:1, 왕하14:25). 히브리인의 전승에 의하면 요나는 엘리야가 살려 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었으며(왕상17:17-24), 엘리사가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해 보냈던 바로 그 소년이었습니다(왕하9:1-6). 그러나 요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살았던 그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가 활동하던 시기는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대로서, 이스라엘이 황금기를 맞아 국력이 왕성하게 회복되던 때였습니다. 요나는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 두 가지 고정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다’ 라는 것과, 또 하나는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인과 다른 특권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적어도 이 두 가지 관념만큼은 어떤 경우에도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좋게 보면 그는 민족주의자요 애국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요나는 철저한 동굴우상의 피해자였습니다. 요나의 동굴우상은 하나님의 명령까지도 외면하고 등지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까지도 좌지우지 하려는 불충에까지 이르게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관, 인생철학, 고유한 자기 주관과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생각들은 쉽게 무너지거나 훼손당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데 기반이 되고 중심축이 되어, 시련과 역경을 견디고, 이기며, 또 다른 형태의 자아로 재생산하기까지 발전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의지와 관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 한계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사람이, 한계를 뛰어넘는 또 다른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은 발전과 성장의 체험자들입니다. 세속이란 새장에 갇힌, 한계 앞에 굴복한 자들이 아니라, 새장을 벗어나 창공을 날아오르는 새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독수리 날개쳐 오르듯, 힘차게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를 향해 솟구쳐 오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생각과 관념에 의한 사상과 이념적 사고는, 자기 고집과 아집에 사로잡혀 스스로 만든, 동굴의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요나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만의 고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생각은 하나님이라도 양보할 수 없는 신념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하나님도 등질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다에 던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요나의 관념을 민족사랑, 애국주의자로 칭송할지 모르지만 요나에게는 우상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니느웨에 대한 증오와 저주에 가까운 정죄와 자기 심판이었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성읍으로서, 이스라엘이 해마다 엄청난 물량의 조공을 바치는 적대국이었습니다. 니느웨는 나중에 앗수르의 수도가 되어 바벨론에 함락될 때까지 이스라엘을 침탈하는 적국의 심장부 같은 곳이었습니다. 니느웨를 향한 이스라엘과 요나의 생각은 하루빨리 망하는 것이었습니다. 니느웨가 무너지면 앗수르도 무너진다는 생각은 이스라엘 인이라면 반드시 가져야하는 운명적 사명이었습니다. 앗수르가 무너져야 이스라엘이 살고, 니느웨가 망해야 이스라엘 민족의 평화와 번영이 보장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나쁘다, 불의하다 할 수 없는 것은, 지금이나 그 때나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탈했을 때, 우리 민족의 생각은 오직 일본멸망이었습니다. 그것만이 우리민족이 일제의 억압과 수탈로부터 해방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적국의 멸망을 기도하는 것이 피해국민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선택이라는 경우, 우리는 이것을 ‘상황윤리’라고 부릅니다. 윤리의 생명은 절대성에 있으나 상황을 무시할 때, 윤리가 오히려 선을 무너뜨리고 악을 세우는 모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상황윤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와 뜻 안에는, 이 같은 상황윤리의 목적까지도, 전적으로 수용되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요나서가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서는 요나의 상황윤리나, 이스라엘의 특수상황까지도 용인하지 않습니다. 오직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과 섭리만이, 세계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절대 믿음만을 원할 뿐입니다.
우리에게도 요나와 같은 생각의 동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생각의 정당성과 정의를 증명할, 충분한 증거와 논리를 보유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얼마나 지혜롭고 영특하고 영민한지를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시는 것과 주시는 말씀은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리한 말씀은 하시지 않으실 것이란 생각까지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예배하며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섰던 내 생각과 사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주장도 고집도 버려야 합니다. 그것 가지고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무모한 시도도 중단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백지를 내어놓고 그 위에 어떤 그림을 그려주신다 할지라도 그대로 받겠다는 자세만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성도의 거룩한 신앙의 모습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나에게는 자기의 생각과 주장과 철학은 있었지만, 자기를 비우고 내려놓는 자기부인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요나를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오르게 했고, 배를 풍랑 속으로 몰아넣는 위기의 원인이 되게 했고,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까지 들어가게 했습니다.
고정된 관념은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주장과 생각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역사는, 은혜가 되고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어 임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친히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의 생각과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함으로서, 결국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삼야를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게 됩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요나의 음성을 들으시고, 요나를 삼켰던 물고기에게 명하여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십니다.
극적으로 기사회생의 은혜를 입은 요나는 두 번째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드디어 니느웨로 가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나의 생각하고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니느웨 성읍의 백성들은 패역하고 포악하며 우상을 섬기는 이방의 족속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기를 들고 대적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니느웨는 큰 성읍으로서 삼일을 다니며 외쳐야 다 듣게 할 수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런 성에 요나가 들어가 하루 길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요나는 성읍에 있는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두루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아이 어른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굵은 베를 입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어가자,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합니다.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합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를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라고 합니다.
더 놀라운 일은, 하나님이 그들의 행위를 보시고,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내리기로 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했습니다.
요나는 이러한 사태와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이 못마땅하여 불평을 터뜨립니다. ‘하나님 내가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습니다’ ‘니느웨가 멸망하는 것을 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낳습니다. 내 생명을 취하시옵소서’ 요나의 말은 단순한 불평을 넘어 강력한 항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관념보다, 사상보다, 우리의 주장과 정의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그 어떤 법보다, 우선적이며 위대하고 강합니다. 그 어떤 논리나 이념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요나의 생각은 죽이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살리는 것이었고,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도 살리는 구원입니다. 일으켜 세우고 힘차게 나아가도록 도우시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병마를 이기고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어나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도전하며 올라가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거룩하고 존엄하신 생명과 살림의 뜻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까?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요나가 알았더라면 괜한 고집으로 물고기 뱃속을 헤매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에스겔서 18:23에,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악인의 죽는 것을 내가 조금이라도 기뻐하겠느냐, 오히려 악인이 자신의 모든 길에서 돌이켜서 사는 것을, 내가 참으로 기뻐하지 않겠느냐’ 란 말씀의 뜻을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힘없이 구원받는 니느웨 성읍을 바라보는 요나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찌 내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아까지 않겠느냐’(4:11).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멸망의 운명을 타고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살길을 여시고 축복하셔서 천국 백성을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의 역사가 이루어진 열매가 지금 여기에 있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이 같은 생명과 살림의 역사를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고 강력한 은혜가 되었음을 감사하며, 주께 더욱 충성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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