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나

요나가 회개를 외친 니느웨

은바리라이프 2009. 9. 24. 14:17

  요나가 회개를 외친 니느웨 조회수 : 1810
니느웨가 성경에 처음 소개된 것은 창세기이다. 노아 홍수 이후 노아와 그 자손들이 세상에 흩어져 살 때,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의 계통에서 니므롯이란 영걸이 출생한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여러 곳에 큰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당시 세운 도시 가운데 하나가 곧 니느웨이다(창10:8~12).
오늘날 이라크 북부의 모슬에 속해 있는 니느웨는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일반인은 출입이 거의 불가능하다.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2001년 8월이었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나라 자이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니느웨(모슬)에서 동쪽으로 70km 지점에 있는 아르빌(아르벨라)이다.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나는 티그리스 강변을 따라 난 1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400여km나 되는 긴 여정 속에 사마라, 앗수르, 님룻를 거쳐 오후 늦게 니느웨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요나의 무덤이 있는 곳을 방문했다.

니느웨(Nineveh)는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티그리스강 유역에 자리잡은 현재 이라크 영내에 속해 있다. 현재 모슬(Mosul)에서 곧바로 강을 건너면 티그리스강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니느웨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세워진 고도로서 이곳의 유적지는 2개의 커다란 큐윤지크(Quyunjiq, 많은 양무리) 언덕과 네비 유누스(Nebi Yunus, 선지자 요나) 언덕이 구획을 짓고 있다.
성 주위에는 약 13㎞에 이르는 정방형의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다.  니느웨 성벽의 높이가 30m에 달하고, 이 성벽 위에 6대의 쌍두 마차가 동시에 달릴 수 있는 길과 성 주위에는 18m 깊이의 연못이 둘러쳐져 있고 성벽 내부는 병영과, 무기고, 군량창고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 면적은 욘3:2절에 니느웨성을 한 번 도는데 3일길이라고 할 만큼 매우 커서 220만평에 달한다. 오늘날 남아있는 성벽과 성문을 보면 당시 니느웨의 규모가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컸음을 실감할 수 있다.

왕하19:35~37에 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은 18만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치러왔으나 하룻밤에 몰살되었고 산헤립은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귀국하여 니느웨로 돌아가 그들이 섬기는 우상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 피살 당했다.
이 니느웨성은 상업이 번창하여 국민생활이 윤택해지자 범죄가 극심하여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를 보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했으나 요나는 이방인의 구원을 달갑지 않게 여겨 욥바로 내려가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하게 된다. 이에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켜 결국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내며 회개한 후 니느웨로 와 멸망을 경고하자, 임금 이하 온 국민들이 회개함으로 일단 멸망은 보류되었다(욘3:4~10). 그러나 BC606년에 바벨론에게 패망되었는데 이것은 선지자 나훔과 스바냐의 예언이 응한 것이다(나3:7, 습2:13).

오늘날 요나의 무덤은 시내 언덕 위에 세워진 에살핫돈 왕궁에 있다. 에살핫돈은 산헤립의 아들로 피살당한 부친의 뒤를 이어 앗수르의 왕위에 오른 자이다(왕하19:37). 내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많은 순례객들은 이 에살핫돈 왕궁에 있는 요나의 무덤을 찾아 참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1845~1850년 발굴에 의하여 니느웨의 도서관 규모가 밝혀졌는데 주로 점토로 만든 서판이었고 설형문자 비문도 발굴되었다. 그 내용으로는 언어학, 천문학, 점성술, 종교적 문헌, 법전, 과학 서적과 기구, 문학과 예술, 역사서와 연대표, 상업서, 각종 서간 등의 서판이 26,000개나 소장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니느웨는 이라크의 다른 도시들보다 사원이 많고 고대 앗수르의 수도답게 많은 유적이 있다. 1834년 영국의 에밀보타의 발굴에 의해 옛날의 실체들이 많이 드러났는데 이곳에서 발굴된 많은 고고학적 유물들은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늘날 니느웨는 1992년도에 약57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 쿠르드족이다. 기후는 자그로스 산맥의 영향으로 여름은 50도까지 올라가는 무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영하까지 내려간다. 연평균 강수량이 400mm로 남부에 비해 비가 많이 온다.
산업은 중세부터 직물로 유명했으며 바그다드 다음가는 대도시로 이라크 경제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특히 1939년 북부 교외에서 유전이 발견된 후 석유개발기지와 교통요지로 급속히 발전했으나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다시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국제정세와 치안 문제로 갈수 없는 이곳이지만 그 옛날 요나가 회개를 외쳤던 이곳이 회개하여 구원을 얻은 것처럼 우리나라 자이툰 부대의 주민들을 위한 치료와 많은 봉사활동, 특히 이곳 쿠르드족들에 대한 군선교활동으로 하루속히 그리스도의 평화의 계절이 오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