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겨울이 오기 전에

은바리라이프 2009. 9. 8. 18:21

겨울이 오기 전에

창33,1-4 디모테오II 4,5-22

조헌정 목사 (향린교회 담임목사)

향린교회를 20년 이상 다니신 분들은 오늘 하늘뜻펴기 본문과 제목이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초대담임목사님이셨던 김호식목사님께서 이 본문으로 여러 번 설교하셨다고 하신 얘기를 들었습니다. 김목사님께서 이 본문으로 여러 번 설교하셨듯이 저 또한 오늘 본문만은 여러 번 설교를 했습니다. 제가 김호식목사님께 그 이유를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이유는 같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설교 배경] 약 60여년 전 피츠버그제일장로교회를 담임하시던 맥카시목사님께서 9월 첫 주일에 이 본문을 갖고 설교하셨습니다. 설교에 깊은 감동을 받은 교인들이 매년 같은 설교를 반복해달라고 특별요청을 하였고, 당회에서는 이를 아예 의결사항으로 못을 박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맥카시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은퇴하실 때까지 40년 동안 매년 이 설교를 40회 반복하셨습니다. 한 20년 전 미국장로교단에서는 제일 큰 아틀란타의 피치트리장로교회의 해링톤목사께서 이 얘기를 듣고 10년째 같은 설교를 하셨습니다. 한 10년 전에 워싱톤 DC부근에서 한인교회를 목회하던 조헌정이라는 목사가 이 얘기를 듣고 같은 방식으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고, 한 7년 전에 또 이 얘기를 들은 근처 미국감리교회 한인목사가 같은 방식으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해링톤목사님은 2년 전에 갑작스레 돌아가셨고, 감리교회 목사님은 그 후 만나지를 못해 이 설교가 계속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 짐작에 ‘겨울이 오기 전에’라는 설교를 매년 반복하는 목사님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향린교회에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서 같은 설교를 반복하니까 목사는 설교준비를 하지 않아 참 좋겠다고 생각하신 분이 계신다면 이는 엄청난 착각이라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고 싶고, 오히려 다른 주일보다 애를 더 먹는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반복이라고 말하지만 똑같은 설교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고, 오히려 같은 본문 안에서 새로운 소재를 발견하기 위해 더욱 공을 들여야 합니다. 실제로 지난 몇 년동안 미국에서 매년 같은 제목과 본문으로 설교를 반복했지만, 교인들로부터 식은 밥 먹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모르는 성경말씀 속에서 얻어지는 은혜보다 잘 아는 말씀이 색다르게 들려 질 때에 교인들은 더 큰 은혜를 얻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김호식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이 자리에 앉은 여러 교우들께서 같은 재료이지만 색다른 맛이 났다는 후평이 있는 설교가 되기를 바라고 지나친 욕심 같지만, 피츠버그제일교회와 같은 결의문이 나오는 하늘뜻펴기가 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아멘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니라.)

오늘의 말씀은 사도 바울로가 디모테오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입니다. 이 둘은 어떤 관계였으면 지금 사도 바울로는 어디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으며 디모테오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선 바울로는 지금 로마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 활동으로 열성 유대인들로부터 로마법을 어긴다고 하는 고소를 당한 것입니다. 6절에서 ‘나는 이미 피를 부어서 희생제물이 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가 왔습니다.’라는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바울로는 이미 사형언도를 받았거나 아니면 사형 언도가 불가피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며 디모데와 바울로는 믿음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습니다. 실제로 바울로는 디모테오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결혼하지 않았던 바울로는 디모테오를 아들로 받아들였고, 어려서 아버지를 여윈 디모테오는 바울로를 아버지로 모신 것으로도 추측이 됩니다. 이 둘은 섬김과 나눔이라고 하는 멘토링의 가장 극적인 모델입니다. 그리고 바울로의 편지를 받는 지금 디모데는 바울로가 개척한 에페소 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진정 바울로가 원했던 바는?]

어느 날 바울로 선생께서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몇 가지 개인적인 부탁을 하면서 자기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와달라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이는 그의 죽음이 목적에 있기도 하였지만, 겨울이 되면 에베소에서 로마로 가는 뱃길에는 예측할 수 없는 강풍이 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사도행전 27장에서 죄수의 몸으로 잡혀가던 바울로 자신이 유라퀼라라는 강풍을 만나 배가 파선하여 죽음 직전에 까지 갔던 경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겨울 전에 오라고 말 속에는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오의 안전을 염려하는 바울로의 따스함이 담겨 있는 말입니다.

그는 디모데오에게 세 가지를 부탁합니다. 첫째는 어두컴컴하고 습기 찬 로마의 감옥에서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외투가 필요했습니다. 이 외투는 그가 평소에 입던 옷인데 드로아스에 있는 가르포 집에 맡겨두었던 옷입니다. 사실, 바울로는 어쩌면 로마 교회의 교인들에게 부탁을 하든지 해서 값싸고 품질이 좋은 외투를 로마에서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굳이 자기가 입던 외투를 가져오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아마도 그 외투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교인이 손수 만들어 준 외투일수 있습니다. 또 그 외투에는 바울로가 복음을 전하다가 받은 박해의 흔적이 묻어 있는 옷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몽둥이로 맞을 때의 핏자국이 남아 있을 수 있고, 선교여행 중에 산길에서 맹수를 만나 싸울 때의 찢긴 자국이 남아 있는 외투였을 것입니다. 그는 교우들의 사랑이 담겨있고, 복음에의 고난의 흔적이 남아있는 외투를 원했습니다. 혹 여러분의 옷장 속에도 어떤 추억이 담긴 옷이 있지 않습니까? 사이즈도 맞지 않고 색깔은 바랬지만 그래도 굳이 간직하고 있는 옷. 바울로선생께서 굳이 이 외투를 원했던 것은 감옥에서 교우들의 사랑을 기억하고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기억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로는 매우 외롭습니다. 그와 함께 하던 믿음의 제자들이 모두 떠났기 때문입니다. 데마는 이 현세를 사랑해서 떠났습니다. 그가 그렇게 바라던 현세의 복은 오지 않고 오히려 감옥에 갇힌 바울로 때문에 고통만 더 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바울로를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레스겐스와 디도도 각기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루가만이 함께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외롭습니다. 차가운 감옥 안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외롭습니다. 지난 목요일 향우실에서는 비전향 장기수들이 모여 송환을 촉구하는 촉구대회가 있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하십니다. 1980년대에 4년 전에 북쪽으로 돌아가신 장기수 한분의 면회를 갔더니 이분이 들어오셔서 면회실 벽을 어루만지면서 ‘아 면회실이 이렇게 생겼군요.’ 하더랍니다. 아무도 찾아주는 사람이 없어 30년 만에 처음 면회실에 들어왔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팠노라고. 30년 동안 아무도 찾아오는 감옥에 있었던 그분들의 외로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같은 동포들인데, 전쟁의 포로들인데 그렇게까지 가두어 두어서 뭐가 이득이 있었을까요? 북한에 가족을 두고 있는 30여명의 장기수님들. 1차 송환이후 이미 4분이 돌아가셨다는데, 더 이상 늦기 전에, 겨울이 오기 전에, 남한 땅에 한 맺힌 원혼으로 떠돌아다니기 전에,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보내드리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요? 남쪽에서 풀 수 있는 것들은 먼저 풀어나가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울로는 외투와 함께 책을 가져와달라고 부탁합니다. 특히 양피지로 만든 책들을 가져다 달라고 말합니다. 이는 아마도 성서일 것입니다. 혹, 예수님의 삶을 기록한 복음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양피지 성서도 교인들에게 부탁하면 로마에서도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외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손때가 묻은 책을 원했습니다. 밑줄도 처 있고, 뭔가 여백에 글도 써 놓은 자기 성경책을 갖다 달라고 말합니다. 보던 자기 성경책을 보는 것과 남의 것을 보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성경을 비치해 놓긴 했지만 성서는 역시 자신의 성서를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예전에는 교인들이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도 다 성경책을 들고 다녔는데 요즘은 자가용을 타고 다녀도 성경책 없이 다니는 교인이 태반입니다. 학교에서 다른 사람 책 빌려서 대학 들어갔다는 얘기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주일에 교회 올 때는 성경책은 들고 다니는 습관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 하늘뜻펴기 중에 깨달은 지혜가 있으면 그 옆에다가 기록도 하시고. 지금이야 다 아는 것 같지만, 문 열고 나서면 다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외투와 양피지 책을 부탁한 바울로 선생은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를 부탁하는데, 이는 물건이 아닌 마르코라는 사람입니다. 마르코는 누구입니까? 마르코는 바르나바의 조카로서 바울로가 바르나바와 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함께 출발했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행 초기에 집으로 되돌아간 사람입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2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에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다시 데려가기를 원했고, 바울로는 반대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28절은 이에 대해 이렇게 짤막한 얘기를 전합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심한 언쟁 끝에 서로 헤어져서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바울로는 실라를 택하여 각각 길을 떠났다.’ 믿는 사람들이 의견이 갈려 다툴 때에 그래서 교회가 갈라설 때면 흔히 애용하는 구절입니다.

바르나바와 바울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떠한 사이였습니까? 함께 안티오키아교회를 섬겼던 동역자 관계였습니다. 1차 선교여행에서 죽음의 고개를 함께 넘었던 끈끈한 동지였습니다. 또 바울로는 바르나바가 없었다면 그냥 고향 다소에서 묻혀 무명의 한 인간으로 그 삶이 마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로는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거듭났지만, 교회를 핍박했던 악명 높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교인들이 모두 그를 피했습니다. 그러나 바르나바가 적극적으로 나서 그를 불러온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나바는 바울로에게 있어 은인입니다. 그 은인의 소원을 한번 들어주어 마르코를 선교 여행에 데려가는 일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그러나 바울로는 한번 실망한 사람은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는 고집불통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르나바가 설득합니다. 마르코가 잘못을 뉘우치고 잘 해보겠다고 하니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 그러나 바울로는 이를 끝내 거절하였고 결국 이 두 사람은 각기 제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바르나바는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집니다. 어떤 일을 했는지 사도행전은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참 화해]

믿는 사람들도 때로는 의견차이로 갈라 설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일은 아니지만 인간의 약점으로 인해 이런 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친하면 친할수록 더 잘 다투게 됩니다. 사랑싸움 이라는 게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사랑이 깊을수록 기대가 커져 더 잘 다투게 됩니다. 사실 싸우지 않는 부부는 친한 부부가 아닙니다. 싸움을 통해 서로가 더 잘 이해할 수가 있다면 가끔 싸우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오늘 저녁에 가서 싸우지는 마세요. 피보다 더 진하다고 했던 바르나바와 바울로. 초대교회의 가장 존경받던 이 사람의 끈끈한 관계는 마르코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 영원히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당시 바울로는 마르코라는 인간은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으리라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죽음을 앞둔 이 로마 감옥에서 마르코를 보기를 원합니다. 마르코가 복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고 일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바울로는 내가 그 당시 너무 고집을 피웠구나 하고 후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마음으로 후회하는 것으로 그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로는 단지 후회하는 일로 그치지 않고 그를 직접 만나 용서를 빌고자 합니다. ‘마르코는 내가 하는 일에 꼭 필요한 사람이니 그를 데리고 오시오.’ 복음사역의 동역자로 그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편지로도 화해의 얘기를 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마르코를 직접 만나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고 그를 포옹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하게도 이 두 사람이 서로 만났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가 바울로의 마지막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만났다고 한다면 서로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고 껴안는 순간은 정말 감격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살면서 가슴 뭉클한 순간이 많이 있지만, 미워하던 두 사람이 서로 만나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손을 내밀고 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포옹하는 순간처럼 아름답고 감격적인 순간은 없을 것입니다. 형 에서오와 동생 야곱의 만남. 세상에 둘도 없는 혈육지간. 그러나 야곱의 간계로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형 에서오는 그를 죽이고자 했고, 야곱은 이를 피해 20년 동안을 고향을 떠나 방황해야 했습니다. 이제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기로 결단합니다. 그러나 형이 그를 용서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에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만납니다. 이 두 형제가 20년 만에 서로 만나 화해하고 껴안는 장면은 보고 또 보아도 감동적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남과 북의 두 형제들이 함께 만나 화해하고 포옹하는 모습을 그리며 살아갑니다. 온 민족이 함께 일어나 그동안 우리가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서로가 서로를 향해 눈물로 고백하는 그 순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연세가 많으신 백인 부부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들이 얼마나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물론 은퇴를 하셨기도 그러하였지만 부부가 꼭 주중에 두 번 교회에 나와 청소를 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20년 동안 한주도 빠짐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두 분 다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만. 그런데 한 5년 전 어느 토요일 청소를 마친 여자장로님이 제게 이런 고백을 하십니다. 엊그제 메샤츄세츠에 살고 계시는 90이 넘으신 어머님과 언니를 만나고 왔다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머니는 그동안 가끔 뵈었지만 언니는 15년 만에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처음 만났을 뿐만 아니라 처음 대화했다고 고백합니다. 15년 전에 서로 다투고 나서 그간 서로 간에 전화 연락도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올라가서 화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편안해하는 그 얼굴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너무나 좋은 장로님이신데, 교회 일에 그렇게 충성하시는 장로님이신데 어떤 인간적 아픔이 자기와 언니 사이를 가로막았고 이로 인해 결국은 주님과의 만남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용서한다고 하는 것 그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물론, 내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자신을 움직일 때 가능합니다. 이제 남은 질문 하나는 과연 디모데오가 이 편지를 받자말자 즉시 마르코에게 연락을 하고 외투와 양피지 책을 찾아 로마를 향해 떠났을까? 물론, 우리는 갔을 것이라고 짐작을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디모테오가 에베소 교회의 한 교인이 중병에 걸려서 한주 두주 지체하다가 겨울 폭풍 전의 마지막 배를 놓쳤든지 아니면 교회 건축을 하느라 겨울을 지나 봄에 로마에 갔다고 가정을 해보십시다. 그가 감옥을 찾아갔습니다. 바울로를 면회하러 왔다고 하니까, 간수가 신경질을 부리면서 그런 사람은 여기 없다고 소리를 칩니다. 낙담이 된 디모테오는 혹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았을까 이리저리 수소문을 하다가 로마 교회의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아 당신이 바로 바울로 선생께서 그렇게도 보고 싶어 했던 디모테오이시군요. 바울 선생은 지난 겨울 차가운 새벽에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혹 디모테오가 오거든 내가 정말 사랑했노라고 이 말을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 아마 디모테오는 그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 속에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을 것입니다. ‘아 그때 만사를 제쳐놓고 왔어야 했는데.. 왜 내가 그때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의 우선순위]

심방을 하면 가끔 교우들이 이런 말씀 하는 것을 듣습니다. ‘제가 한 10년만 젊었어도 믿음생활을 잘 해볼 수 있을텐데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 전 속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교우님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사실, 인생은 조금 미루다가 영원히 미완성으로 그치는 일이 허다합니다. 한번 기회를 놓쳐 영원히 놓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 바로 할 수 있다면 지금이 바로 최고의 기회입니다. 만약에 지금 당장 시작한다면 늦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10년만 젊었더라면 라고 후회할 필요는 하나도 없습니다. 시작도 하지 못하면서 후회한다면 이는 후회하지 않는 것보다 더 못한 일입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시간입니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오늘만이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오늘 하지 못하는 일을 내일 한다고 하는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뭐라고 얘기하면 내일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일이 되어도 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러합니다. 교회봉사도 사회선교도 그러합니다. 생활이 안정되면, 이번 일만 잘되면...,

제 목회 경험에 의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평생 그러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10년 전 신앙생활에 미지근한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미지근합니다. 10년 전에 시간이 없는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있고 없고는 삶의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우선순위를 바꾸면 시간은 얼마든지 생겨납니다. 시간을 아껴 쓰라는 바울로의 말씀은 우선순위를 바꾸라는 말입니다. 제3기 12주 성서배움마당을 엽니다. 한 번도 성서 공부를 안 해 보신 분들, 새롭게 믿음생활을 시작하고 싶으신 분들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없다고 미리 단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간은 우선순위입니다. 중요한 일과 긴급한 일을 구분할 줄 아는 게 지혜입니다. 긴급한 일만 쫓아다니다가 허겁지겁 마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중요한 일부터 먼저 처리해 나가는 여유 있는 인생도 있습니다. 배움은 열정만 있으면 됩니다. 다음에 하겠다고 말하지 마세요. 오늘 못하면 다음에도 못한다는 것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이야기]라는 책 115쪽을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자유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지만 남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빵을 만드는 사람들조차 이런 자유의 얘기를 하는데, 향린교인으로서 신앙의 자유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배는 여러분이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고 능력을 계발하는 공동체의 장입니다. 예배는 여러분 믿음의 시작이지 종착이 아닙니다. 공동체로 섬김과 나눔이 있는 그 일을 발견하고 자원하여 그 일에 뛰어들 때, 여러분은 비로소 한 사람의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저녁 늦게까지 당회수련회를 가지면서 장로님들에게 섬김과 나눔의 소그룹을 한번 조직해서 해보시라고 권유하였습니다. 목회는 여러분의 몫이고 나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목회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평신도라는 말은 성서에는 없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있다면 평신도목사라는 말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들이 자신의 목회를 위해 각기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이병희장로님이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오후에 아차산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소그룹 모임을 시작하겠노라고. 그래서 갔습니다. 7, 8명이 함께 모여 산행도 하고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고 얘기도 나누었습니다. 이상일수도 있겠지만, 전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이 향린교회를 통해 꼭 해보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는 그저 지금이 좋사오니 건들지 마십시오. 하는 분도 계신 줄 압니다. 그러나 저는 목회자로서 부름 받은 책임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스스로의 목회를 위해 도전하도록 책임을 부여 받았습니다. 하고 안하는 것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정말 참 자신을 발견하여 여러분 안에 있는 희미한 하느님의 형상을 보다 분명한 형상으로 볼 수 있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멘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율법과 국가보안법]

끝으로 바울로의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하고 하늘뜻펴기를 마치겠습니다. 바울로가 목숨을 건 복음의 실체는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였지만, 그건 외적으로 드러난 이름이고 내면의 실체는 무엇이었느냐는 것입니다. 왜 로마는 복음을 전하던 바울로를 처형해야만 했을까요? 로마는 기본적으로 유대인들의 종교문제에는 개입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예수님을 처형했고 스테파노의 죽음을 방관했고 바울로를 로마에까지 데리고 와서 처형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종교의 문제가 아닌 정치의 문제였고 체제위협의 문제였습니다. 유대 율법주의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겉으로는 전통의 고수였지만 안으로는 체제옹호였습니다. 그 체제가 옳은 것이었다면 괜찮지만 그 체제는 불합리한 것이었고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깨는 체제였습니다.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만이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은 유대교를 편협하게 만들어갔고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바울로도 가난한 자 병든 자 낮은 계층의 민중들의 구원을 차단하고 있는 이 기존체제를 거부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복음의 세계가 열려지지 아니함을 본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로는 이 복음에 목숨을 걸었고, 밖으로 세계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남한의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 민족의 세계화을 가로막고 오늘의 불평등 구조를 옹호하고 있는 실체는 무엇입니까? 바울로가 죽음을 무릅쓰고 개혁하고자 했던 율법의 실체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이 시점에서 남한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국가보안법입니다. 국가보안법은 남과 북의 현 잘못된 체제를 계속 끌고 가자고 하는 악법입니다. 누구를 위한 법입니까? 소수의 기득권자를 위한 법이지 결코 민족 전체를 위한 법은 아닙니다. 국가보안법을 하느님이라고 믿는 구세대의 정치인들과 소수의 법관들의 어리석음 속에서 예수를 죽이고 스테파노를 죽이고 바울로를 죽인 율법주의자들과 로마정권의 어리석음을 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시기가 더 늦기 전에 우리는 또 다시 우리의 믿음의 실체, 자유와 해방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민족을 하나됨을 위해 필요하다면 우리는 바울로를 따라 십자가 죽음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용기 있게 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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