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제10장 바울이 보는 헌금

은바리라이프 2009. 9. 8. 09:20

  제10장 바울이 보는 헌금
  이진천
  

헌금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조심스러운 주제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헌금의 문제로 인하여 실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또한 교회 안에서 너무도 왜곡되게 가르쳐지고 있는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헌금에 대하여 말하면서 신약 시대에 헌금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성경구절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약 성경의 예를 들면서 십일조가 가장 이상적인 헌금방식이라고 주장하며, 율법적인 헌금을 강요합니다. 이일들로 인하여 결국에는 많은 부딪힘이 생기고, 성경대로 믿는 자들이 교회에 대하여 등을 지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헌금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필요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헌신하는 또 다른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들을 통해서 헌금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 먼저 자신을 드려야 한다

헌금의 가장 일차적인 방법은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기준보다도 앞서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물질에 대한 애착은 심각할 정도의 수준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헌금을 강요하지 않는 교회만을 찾아 나서는 경우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주님 앞에 먼저 자신을 드리는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이 훈련이 되어지지를 않는다면 그는 정상적인 헌금행위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바라던 대로 하였을 뿐 아니라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8:5)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롬12:1)

만일 거듭나지도 않은 그리스도인에게 헌금을 요구한다면 그는 분명히 강도나 혹은 절도와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듭난 사실도 없이 헌금을 요구받고 있으며, 이일을 위해서 결국 율법을 가르치고, 사람들은 그렇게 헌금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거듭난 자들의 모임이며, 그들의 헌신을 통하여 유지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거듭나지도 않은 이들에 의해서 교회가 유지되고 있다면 그곳은 분명히 종교단체로 분류되어야 마땅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헌금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드리는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명령으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이 열심인 것을 기회로 삼아 너희의 사랑이 진실함을 입증하려고 말하는 것이라(고후8:8)

바울은 헌금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것이 사랑을 입증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바울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주님에 대한 사랑의 입증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헌금을 통하여 자신의 사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자신을 드리는 행위를 통하여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2. 헌금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헌금에 대한 보상 문제에 대하여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겠지만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된 것이므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헌금에 대한 보상은 장차 주님의 왕국에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하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회계장부에 기록될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게 될 때에 그가 행했던 것만큼 상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에게 보낸 헌금에 대하여 회계장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헌금은 주님께서 반드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이제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초기에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일로 나와 교제한 교회가 너희 외에는 없었느니라. 이는 심지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내게 필요한 것을 보내었음이라. 내가 선물을 바라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회계장부에 열매가 풍성하기를 바랄 뿐이라(빌4:15-17)

그렇다면 그들이 드리는 헌금은 하늘에서만 보상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드려지는 헌금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도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사실상 많은 이들이 주님 앞에 신실하게 들림으로 인하여 넉넉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물론 이 땅에서 넉넉하고 넘치는 복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겠지만 넉넉한 삶은 자연스럽게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항상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결국 주님께 헌금을 하는 것은 그 상에 어디에서 주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보상되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풍성하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주님께 드린 것에 대하여 반드시 보상하실 것입니다.

3. 자원하여 정한대로 드리라

어떤 분이 제게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의 대답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것입니까? 만일 주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당신이 가진 모든 것도 주님의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스스로 믿음에 따라 십일조가 아닌 새로운 법으로 주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 마음 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하여 십일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십일조가 필요 없다거나, 하지 말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물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이 구원을 받은 이후에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교회에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물질의 소유가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약교회 성도들의 헌금에 대한 자세는 분명해 졌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믿음의 분량에 따라 스스로 얼마의 헌금을 해야 할지를 정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며 헌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분의 일이 될 수도 있고, 가진 것의 전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억지로 해서도 되는 것이 아니며, 또 누가 가르침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헌금에 대하여 바울은 기준을 정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증거하노니 그들이 힘닿는 데까지 하였을 뿐 아니라 참으로 힘에 넘치도록 자원하여 하였으며(고후8:3)

물론 이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 성도들의 헌신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헌금하는 자의 자세가 먼저 자신이 힘이 닿는데까지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때로는 힘에 넘치도록 자원하여 헌금을 했다고 말함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자세로 헌금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스스로 정하십시오. 그것은 가장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번성하게 하신대로 드리라

헌금에 대한 바른 기준은 스스로 정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을 정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될만한 가르침은 바로 하나님께서 번성하게 하신 대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가진 대로 주께서 받으신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가지지 않은 것은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자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사람이 가진 대로 주께서 받으실 것이요, 그가 갖지 아니한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무리한 확장으로 인하여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는 모습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가진 재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빚을 얻어서라도 교회의 헌금을 요구하고 심지어 재산을 팔아 드리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 그러한 헌신이 요구되기도 하지만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가 갖지 아니한 것은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週)의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 대로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모으는 일이 없게 하라(고전16:2)

오늘날 교회들은 교회 물질적인 필요가 생기면 각종 특별 집회들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헌금을 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바울을 통하여 그러한 행위를 중단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형통하게 하시는 대로 모아두었다가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5. 뿌린 대로 거둔다.

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때로는 부담이 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믿음도 없이 이 말씀만을 의지해서 헌금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뿌림은 무엇을 뿌리는 가가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옳지 못한 것을 심게 된다면 그의 결과는 결코 바르지 못한 것이 될 것입니다.

오직 내가 말하려는 바는 곧 인색하게 뿌리는 자는 또한 인색하게 거둘 것이요, 후하게 뿌리는 자는 또한 후하게 거두리라 하는 것이라(고후9:6)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임이라. 자기 육신을 위하여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갈6:7-8)

무엇을 뿌렸습니까? 만일 육신을 위하여 심었다면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면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는데 있어서도 어떠한 자세로 드리는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헌금을 드리는 것이 탐욕과 자랑거리로 삼기 위한 것이라면 그에 대한 결과도 결국 비참한 육신의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함과 진실함으로 드리게 된다면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결실을 가져 올 것입니다.

6. 지역교회에 드려야 한다.

저는 가끔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지역교회에 헌금을 하지 않고 다른 교회로 헌금을 하는 성도들을 봅니다. 물론 그들은 그들이 헌금하고 있는 교회가 물질적으로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선교차원에서 헌금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으로 명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원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성도들은 마땅히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어려운 교회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이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지시한 바와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주(週)의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 대로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모으는 일이 없게 하라. 내가 가게 되면 너희가 편지로 인정하는 자들이 누구든지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너희의 너그러운 선물을 가지고 가게 하리라(고전16:1-3)

사실상 오늘날의 교회가 이러한 일들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은 교단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교단에 속한 교회들만을 지원할 것이며, 또한 선교의 권한이 담임목사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에서 선교비용이 지출되고 잇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연히 성도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헌금을 하려고 할 것이며, 실제로 이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헌금은 당연히 지역교회에 드려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지역교회는 이 헌금을 적절하게 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만일 교회가 헌금을 지출함에 있어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성도들의 반발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며, 결국 성도들은 그들이 속한 지역교회에 헌금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일의 방지를 위해서 교회는 재정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야하며, 더불어 성도들은 당연히 지역교회에 헌금을 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가장 이상적인 신약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7. 헌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렇다면 헌금이 어떻게 사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경이 명쾌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상 많은 교회들이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대부분이 레위족속들을 포함한 제사장들과 성막, 성전의 관리에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그러한 헌금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요, 교회는 레위족속들을 위한 헌금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 드려지는 헌금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사역자를 위해서

헌금의 일차적인 용도는 전임 사역자들을 위한 지원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천막을 짓는 일을 했다는 이유로 사역자들에게 물질적인 공급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 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자비량 선교를 했다고 말하고 있는 바울이 사역자의 지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과 사실상 바울 자신도 많은 지역교회들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들에 관하여 섬기는 자들이 성전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며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이 제단과 더불어 희생물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13-14)

말씀을 가르침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함께 모든 좋은 것을 나눌지니라(갈6:6)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두 배나 존경할 자로 여기되 특별히 말씀과 교리에 수고하는 이들에게 그리할 것이니라. 이는 성경이 이르기를,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자기 품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음이니라(딤전5:17-18)

사역자에게 물질을 공급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과제입니다. 만일 교회가 사역자에게 지원을 할 수 없다면 결국 사역자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직업을 가져야만 하고, 그는 자연히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시간들을 빼앗길 것이며, 결국 가장 큰 손해를 입게 되는 것은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사역자들이 오직 기도와 말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충분한 물질을 공급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구제하는 일을 위하여

물질의 사용에 있어서 교회가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은 바로 구제하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의 주변에 각종 선교단체에 구제를 위한 명목으로 구제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구제의 방법은 교회 내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특히 과부에 대한 구제는 성경의 많은 곳들로부터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그 조건에 있어서도 우리는 충분히 검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육십 세가 되지 않은 과부는 명부(名簿)에 올리지 말지니 과부는 한 남자의 아내였던 자로서 선한 일들로 인하여 좋은 평판이 있어 혹은 자녀들을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들을 묵게 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어 주며 혹은 고난받는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부지런히 행하는 자라야 하리라(딤전5:9-10)

선교하는 일을 위해서

헌금의 용도 가운데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선교하는 일을 위해 쓰여지는 것입니다. 사실상 많은 교회들이 선교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적인 지원에는 인색한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나 교회는 반드시 선교하는 일을 위해 지원할 수 있어야 하며,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자들의 필요를 알고 지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지시한 바와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주(週)의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 대로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모으는 일이 없게 하라(고전16:1-2)

빌립보 사람들아, 이제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초기에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일로 나와 교제한 교회가 너희 외에는 없었느니라. 이는 심지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내게 필요한 것을 보내었음이라(빌4:15-16)

그러나 선교를 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교회 돌아보는 일들을 게을리 한다면 그것도 바람직한 것이 되지를 못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선교는 그들이 지원하는 대상자가 자신의 사역을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충분히 지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간적인 감정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서도 않되며, 오히려 안정되고 꾸준하게 지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선교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원은 기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8. 헌금에 관한 잘 못된 가르침들

오늘날에는 교회 안에 헌금에 대한 많은 잘못된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잘 못 이해하는데서 오고 있는 것이며, 이 잘 못된 가르침은 때때로 많은 성도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오직 너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 먹지도 녹이 슬지도 않으며 도둑이 들지도 훔치지도 못하나니 이는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기 때문이라(마6:20,21)

우리는 위의 구절에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을 하면서 교회에 헌금을 하도록 강요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러나 하늘과 교회는 다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보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헌금(돈)이 아닙니다. 그 답은 바울의 서신 안에 답이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건초나 짚으로 이 기초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일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그 일을 밝히 드러내리니 이는 그 일이 불로써 드러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떤 것인지 시험할 것임이라(고전3:12-13)

금(그리스도의 신성), 은(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보석(구원받은 혼)들이 바로 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함을 통하여 많은 혼들을 이겨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헌금을 많이 해야 한다는 설교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보물과 헌금(돈)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오해되고 있는 헌금에 대한 가르침은 바로 율법의 십일조에 대한 것입니다. 말라기서에 쓰여진 성경구절은 모든 집회 때에 성도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하도록 강요하기 위해서 반드시 쓰여지고 있는 성경구절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내 것을 강도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강도질하였나이까? 하나니 이것은 곧 십일조와 헌물이니라. 너희가 저주로 저주를 받았나니 이는 너희 곧 이 온 민족이 내 것을 강도질하였음이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가져다가 창고에 들여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쏟아 붓되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8-11)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중심으로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힘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흩어져 있었던 관계로 십일조를 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전을 잃었고, 레위지파들도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언자 말라기는 그들로 하여금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다시 그들이 십일조를 하도록 말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레위지파나 성전을 위하여 헌금(십일조)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 답도 성경 안에 있습니다.

이는 제사장 체계가 변하였은즉 율법도 변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요(히7:12)

이제는 더 이상 구약의 제사장 개념을 가지고 헌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며, 왕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구약의 율법을 가지고 헌금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면 그는 성경을 매우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성도들은 누군가로부터 생활비를 공급받아야만 합니다. 신약의 헌금에 대한 자세는 구약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에서 시작되어 감사로 드리는 것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십일조는 그 체계가 없어졌으며, 이제는 스스로 자원하여 정하고 인색하지 않게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 신약성도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체계가 된 것입니다. 부디 헌금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하여 넘치는 은혜가 이 땅에서와 하늘에서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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