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eaning of Paul for Today Chapter 12
Chapter 12. The Life of the Divine Commonwealth
by C. Harold Dodd
유대주의에 있어서 정교(正敎) 보다는 정행(正行)이 종교적인 인간의 시금석(판단기준) 이었기 때문에 바리새인으로서 바울은 최고로 행위에 관심을 가졌다. 그 행위의 기준은 "율법의 보다 비중 있는 문제"를 지니고 있는 제의에 대한 외적(형식)이면서도 혼란스러운 세세한 것들이었지만 행위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는 실천적 종교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잃지 않았다. 그가 쓴 가장 위대한 신학적인 서신 로마서에서 "그러므로,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여러분에 말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 논증의 요체와 본질이 어떻게 실제적인 삶에서 도덕적 거룩인가를 보여주려고 할 때, 그 고도의 논증은 절정(climax)에 도달한다.
그가 제시한 윤리적인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그를 이방 사회 한 복판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훈련시키려 하는 선교사로서 생각해야만 한다. 그는 모든 행동을 규제하는 엄격한 법을 부과시키는 어떤 시도를 통해 그 훈련을 할 수도 없었고 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목적은 "그들 안에서 형성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었다. 인간의 영의 해방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와 친교하는 자기결단의 삶으로 그들이 들어가는 것을 바울은 보기를 원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와 친교하는 생활은 한 몸의 구성원(지체)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두 개의 원리 즉, 개개인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 몸을 창조하는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모든 도덕성은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하심에, 개인들이 순수하고 자유롭게 복종함으로써 솟아나야만 한다. 바울이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은 수신인들이 로마세계에 살고있는 것을 충분히 감안한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독특한 방식 속에서, 그의 윤리적 가르침은 동시대의 스토아 철학 뿐만이 아니라 Jesus ben Sirach의 인간적 유대 도덕전통과 "지혜문학"이 표방했던 상당부분의 도덕성을 구현한다. 그 현명한 도덕 선생 바울은 그의 청중들에 의해 이미 음미된 방식으로 가능한 한 한층 더 천명하고자 하는 이상들을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전체의 통일성은 깨닫게하시는 영에 달려있다. 그것을 전체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특성이다. "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관대하심을 힘입어서, 여러분을 권면합니다(고후 10:1)";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갈 6:2)"; "말을 하든지 일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에게서 힘을 얻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골 3:17)" 다시 말해 바울이 이러한 언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겉치레의 말이 아니다. 바울의 말은 첫째는 사람들 가운데 선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은 생명을 주시는 영 곧 그리스도의 사역이며, 둘째는 그리스도가 인간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모든 도덕적 직관들의 분명한 시금석을 지닌다는 확고하고 합당한(reasonable) 확신을 나타내고 있다. 바울의 도덕적 가르침의 전체 속에, 유일하고 자기 일관된 이상이 내포되어 있는데, 그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이다. 우리가 바울 윤리의 생동적인 중심으로써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난 사랑의 송가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제시한 모습을 바르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바울이 행하려고 노력한 것은 그리스도가 사람 안에 살아 계신다면 네로의 통치하에 있는 고린도, 에베소, 로마에서 어떻게 그 사람이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과정의 문제로써 바울이 피하려고 했던 어떤 것이 있었다. 즉, 그것들은 이교도의 가장 최상의 양심에 의해 금지되었다. 실제로, 바울이 제시한 악행목록은 동시대 도덕론자의 악행목록과 매우 밀접하게 상응한다. 바울은 일반적으로 그 악행목록을 넓게 두 가지 분류로 모았다. 다시 말해, 육, 정욕, 식탐의 죄들 그리고 반 사회적 악행들 특히 상업적 악행을 "탐욕" 내지는 "지나침 혹은 과욕(pleonexia)"이라는 말로 요약하였다. 내가 "과정의 문제"로써 말했는데, 그것은 바울에게 해당하는 문제였지 바울의 개종자들(converts)에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놀랍게도 우리는 고린도서에서 지독한 음행을 에베소서에서 절도를 그리고 양쪽에서 술취함을 발견한다. 바울이 사회의 하층민을 교회로 부르는 대담한 시도를 연설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좁게는 경건주의적인 엄격한 종교에서 양육받은 바울이 어떻게 이러한 인간의 본성 속에 있는 신앙에 도달했는지를 우리가 묻는다면, 우리는 그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였던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바로 여기에서 그 대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악한 것들이 진행되리라는 것을 바울은 의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를 주셨다는 확신 속에서 그 악한 것들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악들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써, 바울은 단순히 금욕주의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수도사의 삶을 요구함으로써 음행을 교정하지 않았으며, 프란시스의 청빈을 주장함으로써 탐욕을 교정하지도 않았고 율법화 된 절제를 통해 술취함을 교정하지 않았다. 골로새서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창조물과 자유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거부하는 것으로써 어떤 집단의 금욕주의를 비판한다. "만물은 여러분의 것이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는 바울의 광범위한 원리이다. 그의 "고행"의 교리는 뒤에 나타난 카톨릭의 고행의 교리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다. 그 교리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고치는 일종의 금욕적 훈련이 아니라, 모든 이기적이고 자기 본의적이며 자기 보호적 충동으로부터 자기를 완전히 결별시키는 것이며, 그러한 상실속에서 이루지는 결별의 결과 곧 육체 혹은 영혼에 대한 박해와 가혹함을 받아들이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가 쓴 고린도전서 안에는 이러한 빛에서 보면 흥미로운 연구를 할만한 대목이 있다. 아마도 그 결론은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금욕적인 것이다. 그 문맥은 검토해볼 만 하다. 논점은 바울이 그의 봉사의 대가로 돈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의 청중들로부터 대가를 받는 것은 냉소주의자, 스토아 학파, 다른 종파들의 견유학파들의 통상적인 모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의 제자들이 환대받을 기대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베드로도 최소한 그의 아내의 생활비(생계)를 포함함으로써 이것을 해석해왔던 것처럼 보인다.
"아주 올바르고 적절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그것을 방해물로 여겨야만 합니다. 나는 내 자신의 짐을 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장한 자유조차도 포기 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나는 마음 약한 사람의 편에 설 준비도 되어있으며 그들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규제(절제)를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있습니다. 나는 나의 선교의 성공을 방해하는 어떤 것이라도 포기 할 각오가 되었습니다." 라고 바울은 말한다. 만약 그것이 금욕주의라면 바울은 금욕주의자다. 그는 반드시 이루어져야될 일을 가지고 있었고 바로 그 일이 그가 절실하게 생각하는 고난이다. 권투선수가 아주 힘들게 훈련하고 달리기 경주자가 재빨리 달려가듯 그는 목표지점까지 이르는데 방해하는 것을 떨쳐버릴 것이다. 그것은 "건들지 마라! 먹지 마라! 조정하지 마라!"고 하는 겁 많은 골로새인의 금욕과는 다르며 후대 교회 금지와 규제와도 다른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한 점에 있어서 바울은 자기자신에게 진실하지 않게 보이는 것 같다. 상당히 나중에 결혼 금지를 가르쳤고 어느 정도 바울의 허락을 받았다고 주장했던 에베소의 금욕주의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만약 그렇다면, 비난받아야만 하는 자는 바울이다. 바울도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그 나머지 사람들처럼 결혼할 권리를 지니고 있었을지라도 자신의 선교를 위해서는 가족을 이루어 사는 삶의 포기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그가 선교사역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범을 따르기를 원해서 결혼이란 하나의 pis aller라고 제시했을 때, 그는 별로 안전하지 않은 토대 위에 있었다. 그의 사역이 독신을 원해서 바울이 미혼남성이 될 권리를 주장하는데 일차적인 관심을 가졌다는 William Ramsay 경의 견해는 해명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다. 보통의 유대인들에게 독신은 보통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으며 그리스인들에게는 결혼하지 않는 남자는 거리끼는 것이었다. 바울은 온전하고 순수하고 명예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결혼생활을 하지 않고서도 어떤 사람은 그렇게 살고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처럼 너무 많은 것을 입증하려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넋을 잃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 속에서 그리고 성(性)과 다음의 보다 인간적이고 참으로 그리스도교적인 가르침과의 관계 문제에서 그를 최선을 다해서 파악하려고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란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없지만 남편과 아내의 순수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신성한 성례전이며 그 성례전이 거룩하게 하는 결혼관계는 와해될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
악에 대한 정면공격은 금욕적 규율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삶에로의 지속적인 호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그는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은 더러움에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고를 저버리는 사람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랑하는 것을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가르침을 받아서, 온 마게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그것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더욱더 그렇게 하기를, 우리는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러분에게 명령한 대로 조용하게 살기를 힘쓰고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은 바깥 사람들을 대하여 품위가 있게 살아가야 하고 또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살전 4:7-12)
흥분을 잘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금지 명령에는 타당한 의미가 있다. 여기저기 도처에서 바울은 매우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그 자신의 개종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충동(impulse)과 조명(illumination)을 신뢰할만한 준비가 되어있다는 인상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다시금 그는 예수의 호소를 반복한다. "어찌하여 너희는 옳은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그리고 동일한 뿌리에서 필연적으로 온전히 새로운 삶이 성장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이다. 이런 것들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성령은 집단적 차원의 소유이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소유는 아니다. "성령의 교제"가 있다. 교제가 있다는 이러한 사실은 새로운 중심으로부터 완전한 윤리적 삶을 창조한다. 로마서 12장에서 우리는 몸이 각각의 지체에 명령한다는 생각으로부터 성장하는 그리스도교 윤리를 알고 있다. 에베소서는 이것의 가장 온전한 활동을 제공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삶에 대한 이러한 광범위한 묘사를 간취하고 각각의 묘사 단계에서 그리스도 안의 삶이라는 중심 원리에 대한 호소가 어떻게 있는가를 관찰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도 다른 구성원(지체)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도둑으로 하여금 도둑질을 그치게 하여서 그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게 하자. "그리스도가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을 위해 자기자신을 희생하셨듯이!" 상호 존중은 선망, 미움, 악의 그리고 모든 무자비함의 자리를 차지해야만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당신을 용서하셨듯이!" 용서에 의해 상처가 물들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이 음행과 탐욕과 맘몬의 우상을 철폐하신다. 상호 복종이 규율이다. 이는 가족 안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곳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신비 또는 그리스도와 교회 관계의 성례전이다. 부모와 자식들은 주안에서 상호 의무와 책임을 지니고 있다. 종은 복종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주인 역시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주인도 종에게 동일한 것을 해야만 한다.
우리가 여기서 관찰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관계 위에 토대를 두고있는 상호 책임성이라는 개념이다. 바울은 그리스, 로마, 유대 율법에 알려져 있는 것으로 가정(household)의 틀을 물려받았다. 즉, 가정은 자기 아내, 아이, 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최상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위에서 말한 전통적인 전(全) 개념을 뒤바꾸어 버리는 혁명적 원리를 도입하였다. 노예에 관해서는 그리스도교는 '뿌리깊은 제도에 대항하고있는 스토아 철학'에 반해서 재강화를 불러일으켰다. 그 공격은 상이한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스토아 철학은 주로 인간의 자연적 일치와 평등으로부터 출발해서 노예제도가 비논리적인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대속해서 죽은 형제로서 노예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그 노예제도를 강력하게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으로서 노예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태도는 바울이 자기 친구인 골로새의 빌레몬에게 보냈던 편지로부터 잘 드러난다. 바울은 자기 주인의 돈을 가지고 도망했던 한 노예 오네시모를 잃어버렸다. 몇 가지 방법을 통해 오네시모와 접촉하게 되었고, 그에게 보다 나은 마음을 품게 하였다.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자신의 편지를 가지고 그의 주인에게 되돌아갈 것을 권면하였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아들 오네시모를 두고 그대에게 간청합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나의 마음입니다. 나는 그를 내 곁에 두어서, 내가 복음 때문에 갇혀 있는 동안에 그대를 대신하여 나에게 시중들게 하고 싶었으나,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대로 하여금 선한 일을 마지못해서 하지 않고, 자진해서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잠시 동안 그대를 떠난 것은 아마 그대로 하여금 영원히 그를 데리고 있게 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부터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그대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가 나에게 그렇다면, 그대에게는 육신으로나 주 안에서나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기에는 스토아 철학의 화려한 휴머니즘 이상의 깊이를 지니는 변혁적 힘이 있다. 소위 말하는 스토아 학파의 가장 고귀한 사랑 중 하나인 Epiictetus 조차도 다음과 같은 말 즉, "It is better for your slave to be bad than for you to make yourself unhappy"라는 말로 노예를 처벌하지 못하도록 어떤 사람을 설득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다.
가정을 넘어서서 우리는 성장하는 공동체를 지니고 있다. 로마 이전 시대에 그리스 도시국가는 "일반적인 의지(general will)"안에서 개개인이 자신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실질적인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 조직은 무너졌으며 지역과 중앙 정부로 이루어진 제국의 정교한 체제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평범한 인간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한 마음이 되는 그러한 친교를 발견할 수 있는 실질적인 공동체는 없었다. 사회가 점점 더 비인간화 되어감으로써 오늘날 우리는 이와 같은 동일한 문제에 직면하게된다. 로마 제국의 결과는 중앙정부가 끊임없이 질투하였던 종교적이고 반종교적인 상인들의 동업 조합(guilds)의 형성이었다. 그래서 중앙정부는 몇 번이고 그들을 무력하게 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완전히 무력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로마 세계의 조직이 없는 사회 안에서 실질적인 공동체를 창설하는 가장 큰 도전이었다. 크게 보면 그것은 성공이었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공동체는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와 자유에 근거를 둔 친교의 실제적 경험 위에 토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성립되어 가는 상호간의 책임성에 관한 개념을 바라본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들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살전 5:14)
각각의 구성원(지체)은 common store에서 초래 할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지니고있어야만 한다.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으나, 그 지체들이 다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사람 한사람은 서로 지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신령한 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의 정도에 맞게 예언할 것이요,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쓸 것이요, 나누어 주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은 열성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롬 12:4-8)
그리고 이것은 영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것들을 향한 호소이다. 그 원리는 바울에 의해 완전히 덧붙여져서 선언되었다. 바울은 선교사로서의 생애 중심부에서 활동하는 동안, 자신의 가장 귀중한 목적들 중의 하나인 일치 즉, 히브리파 그리스도인과 헬라파 그리스도인 사이의 일치가 진전되기를 소망하였으므로 거대한 계획을 착수하였다. 유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 공동체는 기근과 종교적 박해를 포함한 다양한 이유 때문에, 대단히 가난하였다. 바울은 이교도의 신앙 내지는 종교로부터 개종한 자신의 모든 공동체 사람들이 친밀한 형제 사랑의 표시로써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최초의 선포자들에게 지고 있는 실질적인 빛에 대한 어떤 사례로써 당연히 기부해야할 의무가 있는(should) 광범위한 구제기금을 계획하였다. 바울은 그의 편지의 후반부에서 로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케도니아 아가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낼 구제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신령한 복을 나누어 받았으니, 육신의 생활에 필요한 것으로 그들에게 봉사할 의무가 있습니다."(롬 15:26-27)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란 영적인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관계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교제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코이노니아(친교, koinonia)의 세계를 이용하여 영국 사람들 속에서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훨씬 더 멀리 그 적용범위가 미치는(a far reaching) 그리스도교 공산주의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의 사역에 대해 제시한 동기(목적) 바로 그것은 보다 폭 넓고 더욱 풍요로운 적용(응용)이 가능하다. 그리스 사회가 수공업을 폄하 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사회에 기술자를 존경하는 보다 건실한 유대교 전통을 가져왔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동기에 주목하라 "사람은 자신의 손으로 노동을 해야하며 그래서 필요한 사람에게 줄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가져야할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노동을 하되 소유하기 위해서 하지 말고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노동을 하라. Bernard Shaw의 언명인 "사랑을 위해서 여러분의 노동을 행하고 다른 사람들이 사랑을 위해 당신을 머무르게 하고 먹이게 하고 옷 입히게 하십시오" 는 거칠게 다루어졌지만 바울이 그의 개종자들에 가르쳤던 요약(summary)을 오도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의 자율과 공동의 책임성이라는 두 가지 원리에 대한 상호작용은,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민족의 사람들과 문화의 충돌로부터 발생했던, 어떤 궤변의 질문들을 바울이 다루는 것을 통해, 잘 설명되어있다. 고린도 교회에서, 이방 음식을 먹는 것에 관하여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 어려운 문제는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당신이 어떤 사회 모임이나 무역 조합에 속해있다면, 당신은 이교도들이 고기 앞에 절한 음식을 먹지 않고서는 그 구성원의 저녁 식사에 갈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친구와 함께 밖에서 식사를 한다면 그와 똑같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신은 정육점 주인에게서 구입한 그 고기가 이전에 이미 어떤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폼페이의 포럼에서, 신성한 황제의 성전이 도살장과 정육점 사이에 서있다. 희생제사가 고기를 파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여기서 그러한 희생제물은 그 음식 안에 악마적인 영향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의 묘한 딜레마가 발생한다. 유대인들은 그러한 '불결한' 고기를 건들려고 하지 않는다. 초대 그리스도교의 의식도 동일하게 이 문제에 관하여 꺼려하였다. 그러므로 동일한 방식으로, 고린도 교회가 이 문제를 문제 삼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에 의해서 영감을 얻은 또 다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상이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우상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약한 형제들의 대단한 중상모략을 감수하고 자유롭고 개방적으로 이방의 희생제물 음식을 먹었다. "모든 만물은 정당하다"는 것은 그들의 슬로건이었다. "모든 음식을 깨끗하게 하신 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까? 라며 바울은 항변한다. 즉, "모든 것이 정당하지만 그 모든 것이 공동체를 증강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강건한 신앙을 소유하고있지 않으며 만약 심약한 형제가 당신의 지도를 따라 음식을 먹는다면, 당신은 그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고 당신은 그에대해 책임을 져야한다(cf. 고전 8: 1-13; 10:14-31). 안식을 유지와 채식주의에 관해 로마교회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와 같이 이 문제도 동일하게 다루었다(cf. 롬14: 1-15:6).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개개인의 양심에 있는 거대한 가치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공동체의 구성워들의 양심이 오해되거나 혹은 너무 세심하다 할지라도, 부드럽고도 신실하게 그 공동체 구성원들의 양심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공동체도 세워질 수 없다"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가장 강건한 양심은 반드시 양심의 명령과 임무의 전체 분야를 공평한 시각으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양심의 명령과 임무란 금기와 미신적인 두려움으로 인해 통제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로지 신성한 양심 속에서 그리스도와 친교 하려는 의식으로 움직여나가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을 향해 끊임없이 책임의 감각을 지니고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숙은 모든 인간을 포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 동안 이러한 과제는 완성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바깥에 이방인들(the iders)과 관련이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자신과 다른 이방인을 자신의 이웃으로 의식할 의무가 있다. 롬 12:17, 고전 10:32, 살전 4:12, 골 4:5를 아우르는 "모든 사람의 판단 속에 있는 존경받을 만한 행위를 생각해내십시오" 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최대한도의 능력을 반드시 그들 공동체의 도덕적 판단기준과 관련시켜야 함을 의미하지만 더 나아가 보면, 보편적인 자선행위에 대한 의무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경계선에 제한과 한계가 없다(참고: 갈 4:10, 살전 5:15, 롬 1:14; 13:8). 바로 그러한 사랑은 모든 사회적인 의무들의 가장 정확한 수행을 고취시킬 것이다. 황제와 그의 정부는 이러한 일반적인 의무의 범위에 포함되어있다. 제국은 그러한 보상의 자연법을 구체화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높은 사랑과 자유의 삶에로 들어갈 때에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무엇인가를 단순한 의무의 수행 차원 이상의 건설적인 차원으로 이끌 것이다. 이교도 종교에 있는 모든 좋은 척도에도 불구하고, 악의 능력은 역시 존재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반대하는 방식으로 압력이 가해졌다. 이것은 항상 무저항 뿐만 아니라 선의 과잉과 직면하게 된다. "가능하다면, 그 결정이 당신과 함께 있는 한, 모든 것과 더불어 평화를 유지하십시오. 복수하려하지 마십시오. 친구여, 죄에 대해 보복하는 사람(복수의 여신, Nemesis)은 그것의 과정을 겪게 되며..... 악에 정복되지 말고 선으로서 악을 정복하십시오." 이것은 산상수훈(sermon on the mount)에서의 무저항에 기초한 가르침의 탁월한 요약이고 적용임에 틀림없다. 그것의 모든 산출물은 상호관계(눈에는 이에)의 원리이다. 이 원리는 사랑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원리로 대체되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유일한 원리가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은 인간 도덕성의 유일한 근거이다.
이러한 모든 것에서 이교도의 기본 위에 구성된 것으로서의 사회는 반드시 사라져야만 한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미래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공동체와 더불어 있다. 인류의 미래는 이런 공동체에게 맡겨지며, 인류 미래의 역사는 이러한 공동체의 강화와 성숙임에 틀림없다. 그것의 구성원들은 세상 속에 있는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있는 등불과 같다. 그들은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선택된다. 즉, 그 목적이란 차별없이 전 인류를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며 그의 아들과의 친교로 인도하는 목적이다. 그러므로 더 앞으로 나아가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의 운명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다. 그것 안에서 바울은 인간의 진정한 신성사회의 약속을 바라본다. 이미 그리스도인 사회의 경계 안에서 인종과 성, 문화, 신분의 거대한 차별들이 초월되었으며 에베소와 로마에 사는 수많은 믿음의 동료들이 우주적 신성사회의 실제적인 핵심들이다. 바울은 이러한 신성사회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토대 위에 세워졌고 또한 성장해가고 있음을 바라본다. 즉, 그들의 삶이 모퉁이 돌인 그리스도에 의해 조명받고 영감받고 성숙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의 성전인 것이다. 또 다시 바울은 공동체를 살아있는 유기체로 바라본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머리이며 각 지체들은 완전한 인간으로 성장하기까지 살아있는 구조를 견고하게 하는데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하여 바울이 그의 비전을 확대했을 때, 그는 이러한 "완전히 성숙한 인간(예수)"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고대하며 기다리는 그러한 우주를 구원하는 수단임을 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고 있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의 만물을 총합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만들고 자유하게 한 세계에 대한 바로 그 비전이 사도에 사역의 영감이었고 그러한 경주에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희망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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