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바울 전승의 발전

은바리라이프 2009. 9. 3. 09:38

바울 전승의 발전

유승원

1. 바울의 신학적 유산(遺産)에 대한 증언들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비전의 운명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가 세운 공동체의 역사가 계속되면서 그의 도덕적 비전이 어떻게 수용되고 어떻게 활용이 되었을까? 시간이 계속 진행되면서 공동체가 시대의 전환점에서 살아가는 긴장을 여전히 관용할 수 있었을까? 유일하게 율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 밖에 없는 공동체를 계속 보전한다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 일이었을까? 성령의 인도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관성 있는 인간 집단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폐일언(蔽一言)하고, 바울의 비전이 윤리를 위해 안정된 신학적 기초를 제공해 주었을까? 신약 정경 안에 있는 제이(第二)-바울 서신들(deutero-Pauline letters)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문제들을 상고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전 장에서 다룬 바울 윤리학은 일반적으로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는 일곱 편지들(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에 기초하고 있다. 대다수의 신약학자들은 나머지 여섯 편지(데살로니가후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를, 바울이 죽은 후에 그의 추종자들이 바울의 이름을 빌어서 쓴 위서적(僞書的)인 글들(pseudepigraphical compositions)로 취급한다. 그러나 결코 모든 이들이 다 이러한 판단을 내리고 있지는 않다. 저작설의 문제는 각 편지마다 개별적으로 살펴보아야만 된다.1 나 개인적인 견해로는 데살로니가후서와 골로새서가 바울 자신의 글이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나는 이 편지들이 바울 자신의 글들이라고 보고 싶다. 반면에 에베소서와 목회서신들(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은, 신학적으로나 스타일로 보나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는 다른 편지들과 현저하게 다르기 때문에 후대에 어떤 이들이 바울의 이름을 사용하여 기록한 것들로 보아야만 할 것 같다. 이러한 편지들 중에서도 진정성의 문제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디모데후서의 경우 다른 목회서신들보다 바울 저작의 진정성이 의심되는 증거들이 상대적으로 빈약하다.2

본 서의 목적 상 필자는 에베소서와 목회서신들이 제 2세대 바울 계열 기독교의 산물이라는 작업 가설을 전제로 채택하여 시작할 것이다. 따라서 이 편지들을 통해 2세대 바울 계열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바울의 유산을 해석, 발전시키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예시적(例示的) 효과를 위해 에베소서 디모데전서를 샘플로 삼아 집중적인 연구를 하게 될 것이다. 바울 자신의 편지들을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작업을 위해 던지는 질문은 "이 본문들에서 어떠한 도덕적 삶의 비전이 제시되고 있는가"이다.

일면으로 볼 때, 신약 윤리학에 있어서 저자의 문제는 그다지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비록 바울이 이 서신들의 본 저자라 할지라도, 이 글들이 그리고 있는 교회의 모습과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는 다른 글들이 교회를 그리고 있는 모습과 심각하게 다르기 때문에 여전히 별도로 취급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볼 경우 이 서신들이 제시하는 내용은,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등의 "초기 바울"과 대조되는 "후기 바울"의 비전으로 구분을 해야만 될 것이다.3 사상가로서의 바울의 발전 과정에 대해 전기적(傳奇的)인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이 편지들의 저자와 기록 연대순에 대해 분명한 판단을 내려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연구의 경우 그 목적이 정경 내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듣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중차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절실하지는 않다. 목회서신들이 바울 전승 제 2세대에 의한 적응의 결과로 나온 것이던, 교회 내의 제도화된 구조적 질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안타깝게 느끼기는 하지만 더 현명해진" 바울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던 간에, 이 편지들이 증거하고 있는 내용들은 초기의 바울 서신들과는 구별되는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신약 학자들은, 바울이 한 신학 사상가로서 자기의 생각을 발전시켰다거나 포기했을 가능성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위서설[僞書說]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나는 학생들에게 지난 15년간에 걸쳐 밥 딜런의 이름으로 나온 음악 앨범들이 한때 "다시 찾은 61번 하이웨이"를 불렀던 사람과 동일한 인물의 작품들일 수 있겠냐고 묻고는 한다.)

증거의 성격상 저자 문제에 대해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지만, 제이-바울서신들은 제2 세대에 의해 만들어진 텍스트들로 해석을 할 때 좀더 의미가 분명해진다. 왜 그럴까? 그렇게 읽을 때, 이 편지들은, 첫 세대와는 달라진 역사적 상황 속에서도 바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지게 하려는 교회의 치열한 노력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된다. 목회서신의 수신자들인 "디모데"와 "디도"는 바울 시대를 넘어서 자신들에게 위탁된 복음을 보전하고 해석하는 사명을 수행해 나가는 사람들의 상징이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 편지들은 신약 성경 내에서 사도들의 유산을 전달하고 재해석하려는 시도들의 실례(實例)가 되고 있다.4 이것이 우리가 이제부터 살펴보고자 하는 이 텍스트들의 도덕적 증언을 연구하는 배경 관점이다.

2. 에베소서: 우주적 교회론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선택과 우주적 화목의 주제에 대한 길고도 신비스러운 묵상으로 시작된다. 편지의 절반(1-3장) 가량을 차지하는 이 묵상은, 길게 늘어진 분사구문과 관계사절들로 점철된 매우 긴 문장을 담은 현란한 스타일의 헬라어로 작문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에베소서 1:3-14는 헬라어 원문에서 한 문장이다. 일반적으로 영문 성경들은 읽기 쉽게 하기 위해 이 긴 한 문장을 여러 개로 끊어놓았다. 그러나 에베소서 1:3-14의 스타일이 풍기는 인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은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이다.5

Blessed be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who hath blessed us with all spiritual blessings in heavenly places in Christ, according as he hath chosen us in him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that we should be holy and without blame before him in love, having predestinated us unto the adoption of children by Jesus Christ to himself,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his will, to the praise of the glory of his grace, wherein he hath made us accepted in the beloved., in who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the forgiveness of sins, according to the riches of his grace, wherein he hath abounded toward us in all wisdom and prudence, having made known unto us the mystery of his will, according to his good pleasure which he hath purposed in himself, that in the dispensation of the fullness of times he might gather together in one all things in Christ, both which are in heaven, and which are on earth; even in him, in whom also we have obtained an inheritance, being predestinated according to the purpose of him who worketh all things after the counsel of his own will, that we should be to the praise of his glory, who first trusted in Christ, in whom ye also trusted, after that ye heard the word of truth, the gospel of your salvation, in whom also after that ye believed, ye were sealed with that holy Spirit of promise, which is the earnest of our inheritance until the redemption of the purchased possession, unto the praise of his glory.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한글 개역)
바울과 다른 스타일로 장식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이 구절이 담고 있는 신학적 모티브는 특성상 바울의 것이다. 선택, 구속,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입양, 약속된 상속의 사인과 봉인으로서의 성령 등은 모두 바울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다른 바울 서신들과 현저하게 구별되는 점은, 이러한 주제들이 정해진 회중의 특정 문제나 상황에 뚜렷하게 연계됨 없이 일반적인 교의상의 반추(反芻) 형식으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몇 중요한 사본에서 인사말의 "에베소에 있는"이 (1:1) 빠져있다는 사실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원래 에베소서가 여러 교회들로 보내는 돌려보기 위한 편지로 만들어졌고 바울 서신 모음의 머리말 구실을 하는 글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에베소서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현저한 특징은 교회의 전 우주적 의의(意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을 모으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로서 교회를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엡 1:22-23, 표준새번역). 오랫동안 감춰져 있던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의 경륜(oikonomia)"이 마침내 계시되어 "교회를 시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엡 3:9-10, 표준새번역). 이렇게 고조된 우주적 교회론은 바울의 입장을 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형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한다고 보았다(고후 3:18). 에베소서에서 교회는 계시의 접수자일뿐 아니라 (1:9) 전 피조 세계에 계시를 전달해주는 유일한 매개이기도 하다. 이 피조 세계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목적에 대항하고 있는 우주적 권세도 포함되어 있다(3:10, 6:10-20).

그 이유로 해서 교회가 일치를 보여주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셨다." 실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온 주 효과는 바로 이 구분선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4-16)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온 결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똑같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감을" 얻었다(2:18). 이것이 바로 교회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통해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지혜이다. 그렇다면 에베소서의 장문의 묵상적 도입 부분은 그 교회의 상상력을 위한 기도라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는 그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마음 눈을 밝힘"(1:18) 받아 그리스도의 우주적 몸인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하여, 온 우주의 화목을 발생시키려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엄청난 영광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참조, 3:14-19). 그러나 에베소서 3장은 그 인식의 한계에 대한 송영으로 끝을 맺는다. 교회가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한다 해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조망(眺望)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우리 가운데서6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3:20-21, 강조는 필자의 것)

이 모든 것들이 편지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4-6장) 도덕적 권면과 교훈의 정교한 서언(序言)으로 기능하고 있다. 교회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화목케 하시는 능력의 현시(顯示)가 되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런 권면을 받는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1-3)

"한 믿음, 한 세례"를 공유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는 공동체의 삶을 기초하고 지탱하는 하나님의 한 분되심과 연관되어 있다.

에베소서 4:1-5:20은 화목을 이룬 공동체의 성격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담고 있다. 교회 내의 다양한 은사들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는 것이며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려는 것이다(4:12-13).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특정 그룹의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일로 이해가 되어지고 있다. 교회 내에서의 은사들의 상호작용은 궁극적으로 전체 공동체를 온전한 성숙에 도달하게 하여 교회가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완성된 화신(化身)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굳게 서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그려지고 있는 성장의 이미지는 장래에 순간적인 변형을 통해 이루어질 성격의 것이 아니고 (예를 들자면,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순간에) 공동체 내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과정의 최종적 귀결을 가리키는 생생한 목표이다.

성숙을 향하여 진행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교훈의 풍조"를 이겨내고 공동체를 미혹하려는 모든 궤계를 물리쳐야만 한다(4:14). 신앙의 공동체는 "예수 안에서" 더 이상 "이방인의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행동해서는 아니 된다(4:17-24). 에베소서 4:25-5:2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특징짓는 긍정적 행위들에 대한 간략한 묘사가 담겨 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정직한 노동을 하며, 어려운 이들을 돕고, 덕을 세우는 말을 하며 원한과 분노를 피하고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는 그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바울의 권면인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명령으로 요약이 된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5:1-2).

이 단락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대한 일련의 경고(5:11)와 악한 시대 속에서 시간을 구속(救贖)하면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교회 구성원들에 대한 소명의 부름으로(5:8, 15-16) 마무리를 한다. 이 구절들에 담긴 언어 표현들은 다른 바울 서신에 있는 묵시적 권면들을 상기시키고 있다(참고, 롬 13:11-14). 그러나 여기에는 주의 강림이나 미래의 심판에 대한 공개적인 언급이 없다. 흥미롭게도 여기서는 부활이 장래의 소망으로 그려지지 않고 도덕적인 의식 각성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5:14). 사실, 이 편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신학적 발전은 바울의 미래 지향적 묵시의 소망을 상대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대신 교회의 성장을 통하여 세계를 점차적으로 구속하게 될 것이라는 신념이 부각되고 있다.

에베소서 5:21-6:9에서는 도덕적 권면이 전체 교회를 향한 일반적 조언에서 대가족에 속한 구성원들에게 주는 개별적 역할에 대한 일련의 경계로 이행한다.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다루어진다. 이 단락은 '하우스타펠른'(Haustafeln, 가족 구성원들의 의무에 대한 규정들, 즉 가족 범절[家族凡節])이라는 장르에 속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은 장르로 구분되는 다른 구절들은 골로새서 3:18-4:1, 디도서 2:1-10, 그리고 베드로전서 2:18-3:7 등이다.

에베소서 가족범절의 특징들로 들 수 있는 것이 네 가지 있다. 첫째로, 개별적 경계의 조언들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는 교회 전체에게 주는 일반적인 권면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언급되는 관계들의 위계(位階)적 구조는 겸손과 상호간의 복종으로 사는 사람들로서의 종합적인 교회 비전에 의해 조율된다. 따라서 고대 가족 사회의 전통적인 권위 구조는 언급이 되지만 그와 동시에 개념상의 전복(顚覆)이 발생한다. 둘째로, 이 범절의 형식적 구조는, 사회 질서의 하급자들을(아내, 자녀, 노예) 복종하기를 의지적으로 결단해야만 하는 도덕적 행위의 '주체'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대 일반의 가족범절들과 다르다.7 전형적인 고대 '하우스타펠른'은 권력을 쥐고 있는 쪽의 사람들을 권고의 대상으로 삼으며, 주로 그들이 자신들에게 복속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해 가져야 할 의무들을 명시하고 있다. 셋째로, 에베소서의 가족범절은 그 상호성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디도서 2:9-10에서와 같이) 덜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남편, 아버지, 주인) 똑같이 자신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종속인들을 향해 친절과 관심을 보일 것을 명령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범절에 기술된 명령들이 복음에 어떻게 기초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분명한 신학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저자가 혼인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 관계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그려지는 상징적인 상호관계는 남편이 자기 희생의 돌봄으로 자신의 아내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당위의 근거가 되고 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5:25). (이 본문이 아내들로 하여금 자신의 남편들에게 복종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22-24절] 종종 여성에 대한 심각한 부당 취급, 그리고 심지어는 신체적 학대까지 정당화시키는 내용으로 잘못 생각되어 왔다. 그러한 텍스트의 오용(誤用)은 기괴하고도 비극적인 오역(誤譯)에 기인한다. 에베소서의 저자는 남편들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과 같이" 하라고 명령함으로써[28-29절] 그리스도인들간의 혼인관계에서 그러한 학대들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8

그렇다면, 이 모든 면에 있어서 에베소서의 가족범절은 사회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규정되는 공동체를 그리는 비전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비전은 20세기의 기준으로 볼 때의 이상인 사회적 평등에 견줄만한 그러한 평등주의는 아닐 것이다. 엘리자베쓰 쉬슬러 피오렌자(Elisabeth Sch?ssler Fiorenza)가 적절하게 표현했듯이 여기서 제시된 사회 질서는 "사랑 가부장제"(love patriarchalism)이다.9 그러나 에베소서의 사랑 가부장제는 그 성격이 폐쇄적이고 정체적(停滯的)이지 않다. "[저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6:9) 주인들이 노예들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권면을 받을 때, 여기에는 주인-노예 관계의 전통적 유형을 위협하는 신학적 이미지가 원용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만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남편과 아내 사이의 혼인관계를 비유하기 위한 메타포가 된다면, 에베소서의 고양(高揚)된 교회론이 혼인관계에 대한 가부장제의 정체적 고정관념을 붕괴시키고 있는 셈이다. 에베소서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되는 형국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교회가 온전한 성숙으로 양육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4:13). 이런 이미지에 비추어 본다면 혼인관계의 '텔로스'(telos, 완성, 목적, 끝의 뜻을 가진 헬라어--역자 주)가 어떤 성격을 띠게 되겠는가?

에베소서의 절정을 이루는 구절에서는(6:10-20), 교회가 마귀의 궤계에10 대항하여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이 우주적 권세에 대항하여 사용되어야 하는 무기들은 인간 기술에 의해 제조된 철제품이 아니다. 대신 전쟁은 기도와(6:18) 거룩한 공동체의 경신(更新)된 새 성품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무기들은 대체적으로 방어적이며 교회로 하여금 "악한 자"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도록 구비시키기 위한 것들이다.
벨트: 진리
흉배(胸背): 의
신발: 평화의 복음(!)
방패: 믿음
헬멧: 구원
교회가 지녀야 할 공격 무기 하나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전통적인 성전(聖戰, Holy War) 이데올로기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이 본문은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를 약속하는 복음만을 무기로 삼아 우주적 권세에 대항하여 싸우는 전투에 굳게 서 있는 교회를 묘사한다. 교회는 세계 속에서 평화적인 실존으로 서 있음으로 해서(6:13) 악의 힘에 대항하는 도전적 존재가 된다. 진리를 말하며 용서로 살면서 교회는 정사와 권세의 지배를 분쇄하여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을 드러낸다.
간단하게 다시 묻는다면, 에베소서가 어떻게 바울의 유산을 자신의 상황에 적용시키는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공개적인 종말론의 구도가 비록 완전히 포기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약화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반면에 교회가 지닌 전 우주론적 중요성은 크게 부각되었다. 교회의 공동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인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의 만드신 바"이고,11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2:10). 로마서에서 중요한 주제로 제시된 유대인과 이방인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는 여기 에베소서에서 하나님께서 우주를 통일하며 그것을 자신에게 화목시키시려는 계획의 사인으로 해석된다. 만일 에베소서 5:21-6:9가 더 단순한 '하우스타펠른'인 골로새서 3:18-4:1을 상세하게 기술한 것이라면, 아내의 복종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개발하려는 에베소서 저자의 시도가, 바울 문헌의 그 어디에서보다도 적극적인 부부 사랑의 이야기를 제공하는 풍요로운 상징을 창출해 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에베소서와 기타의 바울 서신들 사이에서 가장 현격하게 드러나는 차이점은 상황적인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에베소서는 바울의 개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취하여, 전 세계를 구속의 일치 속에 모으는 하나님의 계획 내에 있는 우주적 교회의 신비한 역할에 대한 추상적 묘사로 발전시킨다. 그 계획 안에서 교회의 도덕적 행위는 두 가지 근본적 목적을 지니게 된다. 하나님의 전 우주론적 기획을 현시(顯示)하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한 성숙을 향해 자라나게 하며 하나님의 화목케 하시는 능력을 세계 속으로 확장시키는 것이 그 둘째 목적이다.

3.1 디모데전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우리는 디모데전서에서 제도화된 질서와 안정으로 특징지어지는 공동체의 청사진을 대면하게 된다.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젊은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조직화하고 인도하기 위한 일련의 교훈들을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있다(딤전 1:3).12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13 (3:14-15).

'집'(household)이라는 제도는 이 편지에서 교회를 위한 통제 메타포를 제공한다. 여기서 '통제'(controlling)라는 말은 한가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주 관심사는 교회의 리더쉽인데, 교회는 잘못하면 방황의 길로 빠질 수 있는 구성원들을 사려 깊게 제어하는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 '에피스코포스'("감독자"라는 뜻. 흔한 번역인 '감독'은 1세기 후반의 글에는 적절하지 못한 이후 세대의 발전된 형태의 교회 직분을 암시하는 용어이다)는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된다 -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3:4-5, 참고, 3:12)? 교회는 그레코-로마 세계의 확대된 집(가족)이 되고 가장(家長)의 권위는 교회 내에서 행사되는 권위의 모델이 된다.

디모데전서는 공동체를 위하여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이루는 것과 (2:2) 외부인들에게 존경을 받을만한 모양을 보이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예, 3:7, 5:14, 6:1). 이는 교회가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14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eusebeia)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2:1-2)

이러한 권면을 한다는 점이 교회가 사회-정치적 기성 체제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평화로운 환경이 복음을 전하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런 권고가 나온다고 보아야 한다(2:3-4). 따라서 교회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선한 증거"를 하신 예수에 대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6:13) 이 편지에는 복음이 당대의 정치 질서에 도전장을 던질 것이라는 암시는 담겨있지 않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 질서정연(秩序整然)을 위한 지시는 강하다. 여성에게는 특별히 종속적인 역할이 부과되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15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2:11-15)

편지 내에서 이 텍스트는 바울의 글일 가능성이 거의 없는 구절이다. 자녀 해산을 통하여 여성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단언은 모든 인간이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의 혜택을 입어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의 심오한 확신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설득력이 없는 아담의 방면(放免) 언급(2:13-14) 또한 바울이 로마서 5:12-21에서 아담을 죄의 원천이며 죄악된 인류의 모형론적 대표로 묘사하고 있는 것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 구절의 기묘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를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여러 가지 석의상의 시도가 있었지만 본문의 전반적인 의미는 회피할 수 없을만큼 분명하다. 여성들(또는 아내들)은 침묵을 지켜야 하며 복종하며 자녀를 낳는 일에 전력해야 된다.16 디모데전서에 따르자면 그것이 바로 교회 내의 질서가 요구하는 일이다.

이 규정의 한 예외는 과부들의 그룹이다(5:3-16).17 이들은 교회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으면서 기도와(5:5) 봉사에(5:10) 전념하는 연로한 여인들이다. 디모데전서는 이에 대해 허락을 하면서 "참 과부"를 선별하기 위해서 일정한 테스트를 요구한다. 최소한 만 60세가 되어야 하며 오직 한번 결혼을 했어야 하며 선한 일에 자신들을 바쳐왔어야 된다. 이러한 기준에 합당한 여인들만이 공동체로부터 지원을 받는 공식적인 과부로 등록이 될 수 있다. 젊은 과부들은 다시 결혼을 해야 된다. 저자의 생각에 따르자면,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욕망과 나태와 한담(閑談)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5:11-14, 바울이 고린도전서 7:8, 39-40에서 과부들에게 주고 있는 권고와 어떻게 대조적인가를 관찰하라). 노예들도 교회의 좋은 평판을 위해서 복종하는 자세를 유지해야만 된다.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didaskalia)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6:1-2)

만일 그리스도인 노예들이 그들의 그리스도인 주인들과의 관계에서 거만해지면 (교회의) "교훈"을 논란에 빠지게 만들 것이다.

골로새서 3:18-4:1, 그리고 에베소서 5:21-33과 대조적으로, 디모데전서는 남편과 주인에게 아무런 견제의 말을 하지 않는다. 일관성 있게 제시되는 메시지는 교회라는 집이 질서 속에 보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성과 노예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주는 교훈은 없다. 대신 바울의 사절인 디모데가 그네들을 질서 속에 잘 지키도록 지도를 받는다(6:2c,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바람직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는 리더쉽과 권위의 직분들을 임명해야 된다.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전서에는 개 교회 모임에서 아무런 직분의 권위자가 언급되지 않는다. 이런 편지들에서 암시된 카리스마적인 자유의 상대적으로 무질서한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디모데전서는 "감독"과 "집사"의 임명에 대한 명백한 규정을 제시하고 있고 이들을 선출하기 위한 기준도 명시한다(3:1-13). 그런데 이러한 기준들은 주로 영적인 은사나 은혜의 수여가 아니라 일반 세속적인 미덕들이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3:2-3)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질서를 보전하듯이 자기 자신의 집의 질서를 잘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일을 잘 감당하는 사람들은 봉사에 대한 재정적 보상도 받도록 되어 있다(5:17-18). 그리고 "범죄한 자들(죄를 계속 짓는 이들)은 디모데가 공개적으로 응징하여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해야 된다(5:20). 이 마지막 지시가 암시하고 있듯이, 지도자들의 주요 기능은 공동체 내의 다른 이들을 위해 그리스도인 성품의 모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지도자의 자질로 열거된 내용들 중에서 사역과 관련된 기능 한가지는 교사의 역할이다. 실제로 디모데전서에서 '가르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선한 교훈"(4:6)은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과 (4:1) 모든 비도덕적인 행실에 (1:8-11) 대한 필수적인 해독제가 되기 때문이다.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eusebeia]에 대한 교훈[didaskalia]"(6:3)은 디모데의 특별 과업이다(4:11-16). 짐작컨대, 개 교회 지도자들도 디모데의 지도 아래 이 교육 사역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 같다(참조, 딤후 2:2, 딛 1:9). 디모데는 이 선한 교훈을 바울에게서 받았고 그는 그것을 자신에게 맡겨진 '파라쎄케'(paratheke), 즉 '적립한 것' 또는 "부탁한 것"(6:20)으로서 충실하게 지키도록 되어 있다. 고정된 전승의 체계로서 보전을 해야만 하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개념은 다른 바울 서신들에서도 전례를 찾아 볼 수 있다(예를 들어, 롬 6:17; 고전 11:2, 15:1-3을 보라). 그러나 디모데전서와 다른 목회서신들에서처럼 (참조, 딤후 1:13-14, 2:2; 딛 2:1) 특별한 강조를 하는 경우는 진정성을 인정받는 바울 서신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권위가 부여된 이 전승 모음의 내용은 자세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짐작컨대 디모데가 그 내용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편지 안에 담겨있는 힌트를 근거로 해서 살펴보면 이 전승 모음은 최소한 두 가지 종류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하나는 신앙고백적 전승이고 또 하나는 도덕적 교훈이다. 이 두 요소들 사이의 관계는 - 만일 서로 관계가 있다면 -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신앙고백적 전승들은 다음과 같이 간결한 형식으로 나타나 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딤전 1:1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딤전 2:5-6)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딤전 3:16)

반면에 우리가 위에서 부분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도덕적 교훈은 '유세베이아'(eusebeia, 2:2, 4:7-8, 6:3-6, 6:11)의 육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하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이 헬라 단어를 "godliness"로 번역한다. 그러나 더 나은 번역은 "piety"로서 라틴어 pietas의 어원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의무적인 경외심'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 단어는 목회 서신 밖의 다른 바울 서신 어디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목회 서신에서만 10번에 걸쳐 발견된다(디모데전서에서만 8번). 이러한 통계 수치에 부여하는 의미가 어떤 것이든 간에,18 디모데전서에서 제시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전은 고상한 준법정신에 입각한 행위를 보이는 고정된 관습에 순응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는 인상을 피하기가 어렵다. 바울의 특징적인 주제라 할 수 있는 자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기, 공동체를 위한 희생적인 사랑, 시대들의 창조적 긴장 속에서 살기 등의 내용들이, 완전히 포기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현저하게 그 강조의 정도가 약화된다.19 그 대신에 우리는 질서가 잘 잡힌 집(houshold)의 온건하고 현세적인 미덕들을 발견하게 된다.

디모데전서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윤리적 강조를 주목할 가치가 있다. 경제적 야심과 욕망에 대한 강력한 제어가 그것이다. 저자가 비판을 가하는 적대자들은 여러 가지 잘못 이외에도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6:5)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기서 주어지고 있는 비난은 소피스트와 기타 철학적인 적들과 대결하는 고대 논쟁에서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다. 디모데전서의 저자는 그의 독자들이 부를 탐욕 하는 유혹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한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9)

그래서 감독은 "돈을 사랑치" 않는 사람이어야만 된다(3:3). 교회는 수수한 여건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6:8).

반면에, 이 편지는 공동체 내에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그들에게 재산을 포기하라는 과격한 요구는 하지 않는다. 대신 디모데가 그들을 권면하여 그들의 부에 대해 올바른 자세를 갖도록 돕고 소유한 것을 관대하게 나누어줄 것을 격려하도록 지시를 한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딤전 6:17-19)

이러한 온건한 조언은, 교회가 자신을 위치시킨 세계 속에서의 사회적 실재의 현상유지를 수용하려는 디모데전서의 일반적 경향과 일치하고 있다(참조, 고전 7:17-24).

그렇다면 우리는 디모데전서에서 보는 바울 계열 윤리 전통의 발전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에베소서에서처럼, 우리는 여기서 초기 바울의 종말론적 긴장이 쇠퇴하는 경향을 목격하게 된다. 종말론적 심판과 소망에 대해 스쳐 지나가는 듯한 암시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암시들이 윤리적 입장을 상술하는데 있어서는 직접적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한다. 예수의 죽음은 신앙고백의 신비로 선전되지만 이것도 역시 윤리적 규범의 형성에 특별히 가시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다른 바울 서신들과 가장 강력한 연속성을 갖는 점은 공동체의 도덕 형성에 대한 강조가 핵심적인 관심으로 부각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조차도 강조 초점의 변화가 현저하게 드러난다. 디모데전서가 공동체를 위한 '규범들'을 열렬하게 장려하고는 있지만, 공동체의 복지가 윤리적 논의의 '근거'로서 그 현저함을 드러내지는 않는다(예를 들어서, 고린도전서에서는 공동체의 복지가 윤리 논의의 근거로 작용한다).

사실 디모데전서에는 거의 윤리적 토론이라 할 수 있는 종류의 내용이 없다. 도덕 규범은 이미 전통 속에서 정해져 있는 것으로 상정되어 있고 이 규범들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디모데전서와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는 다른 바울 서신들과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점에 있다. 바울은 복음을, 자신의 "타깃"(target) 교회들의 상황에 신선하게 연관시키는 해석학적 과제와 중단 없는 씨름을 한다. 반면에 디모데전서는, 이미 있는 규범들을 보수하고 전수해야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신학적 논의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조바심이 나타나 있다. 공식적 인정을 받은 "건전한 교훈"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들로 낙인을 찍어 버린다(딤전 6:4). 바울이 이런 식으로 신학적 논란을 회피해버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신학적 논쟁에 식상해 버리는 좋지 못한 선례(先例)의 증거를 목격하고 있는 것일까?

그보다는, 디모데전서가 바울의 유산을 수용, 적용하는 제 2세대를 대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설명이 될 것이다. 이 편지의 저자는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대 사도에 의해 이미 정착이 된 골간의 신학적, 윤리적 문제들을 전승대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하다 보니, 아이러니컬 하게도 우리가 바울에게서 발견했던 신학과 윤리의 역동적인 연합이 디모데전서에서는 오히려 와해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디모데전서가 전승을 당연시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디모데전서는 어느 정도의 제도적, 상징적 안정성을 이미 확보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도덕적 비전을 상술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저자는 그들의 신학적 기초로부터 윤리적 이슈들을 제기하는 방식의 사고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사도가 맡긴 전승을 잘 간수하는 것뿐이다. 그 결과는? 안정성은 확보한다. 그러나 사고의 심오(深奧)와 자유를 상실한다. 진성성을 인정받는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교회들이 성령의 인도 아래 계속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것을 반복하여 권유를 받고 있다. 디모데전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전승의 "건전한 교훈"을 이미 충분하게 알려주셨다고 보기 때문에 더 이상 분별에 대한 요청을 발견하지 못한다.

아마도 목회서신들의 이러한 도덕적 비전이, 1세기말의 교회들이 사회적 응집력을 획득하고 외부의 압력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그리고 어찌 보면 필수적일 수도 있다) 과정이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무질서한 이교(異敎) 문화가 점증되는 가운데 질서정연한 '집'의 정신을 보전해야 하는 20세기말의 교회들을 위해서 이와 유사한 도덕적 비전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20 이러한 주장이 옳던 그르던 간에, 신약 정경 내에 목회서신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의 질서의 중요성을 그 위험성과 함께 깊이 묵상할 것을 요청한다.




1. K?mmel 1975 [1973]의 264-269, 340-346, 357-363, 370-374를 보라. L. Johnson 1986의 255-257, 266-267, 357-359, 367-372, 381-388을 보라.

2. L. Johnson 1986의 381-389에 잘 정리되어 있다.

3. 일반적으로 로마서는 진정성을 인정받는 바울 서신 중 마지막으로 쓰여진 것으로 간주된다. 로마서의 기록 시기에 대해서는 Jewett 1979를 보라. L?demann 1984와 Soards 1987도 참고할 것.

4. 이와 같은 입장에서 신약의 후기 문헌들을 다루는 경우를 위해서는 R. E. Brown 1984를 보라.

5. 여기서 필자는 희랍어 원문에 기록된 것처럼 구문을 분리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흠정역의 구두점들을 약간 변형시켰다.

6. 문맥상으로 볼 때, 희랍 원문의 en hemin은 "among us"(즉, "교회의 공동체 생활에서")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NRSV의 "within us"는 그 본래 의미를 약화시킨다.

7. Yoder 1994의 162-192 [1972, 163-192]를 보라.

8. 이 점에 대한 더 깊은 논의를 위해서는 본서의 15장 2항을 보라.

9. Sch?ssler Fiorenza 1983, 218.

10. 헬라 원문은 tas methodeias이다. NRSV의 "wiles"는 다소 고어(古語)적이다.

11. Jerusalem Bible은 poiema, 즉 "만들어진 것"이란 헬라단어를 "하나님의 예술 작품"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12. 이 편지와 에베소서 사이에 존재하는 어조와 내용의 차이는 이러한 지리적 연결을 고려할 때 더 강하게 부각된다고 할 수 있다.

13.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는 바울의 일곱 편지에 나타나는 바울이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묘사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러한 내용은 에베소서의 교회론과 일치한다. 특히 에베소서 2:20을 참조하라.

14. Verner, 1983.

15. 헬라어로는 authentein이다. 신약 성경 내에서 오직 여기에서만 등장하는 이 단어는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일반적 의미의 용어가 아니다(물론 NRSV는 그렇게 번역을 하고 있지만). 이 단어는 의도적인 또는 지나친 권위의 행사를 가리킨다. Scholer 1986을 보라.

16. 이 구절에 대한 최근의 문헌을 위해서는, Donelson 1988과 S. Porter 1993을 보라.

17. Bassler 1984를 보라.

18. Towner(1989)는, 목회서신에서 공격을 받고 있는 적대자들이 자신들의 교훈을 묘사하기 위해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목회서신의 저자들은 그들의 용어들을 원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9.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은 분명히 디모데후서의 주요 테마이다. 디모데후서가 디모데전서 및 디도서와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이 점에 있어서 Luke Johnson의 주장을 읽고 도움을 받았다. 1995년 4월 1일 Duke 대학에서 있었던 심포지움, "The Use of the New Testament in Christian Ethics"에서 발표된 연구논문 "The Use of the New Testament in Christian Ethics: A Response to Richard Hays"의 20쪽을 보라. Oden 1979의 130-147을 보라.

'성경 > 바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울신학   (0) 2009.09.03
바울신학의 전제  (0) 2009.09.03
바울로 이해의 첫걸음  (0) 2009.09.02
메이첸의 바울 신학 이해   (0) 2009.09.02
바울신학의 전제   (0) 2009.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