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바울의 소명사상

은바리라이프 2009. 9. 1. 14:49

바울의 소명사상

김 세윤 교수(총신대신학대학원 교수)


바울의 소명사상을 올바로 이해하면 직업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현재는 계몽주의적 인본주의다. 인간의 인성을 계발하여 하나님의 도움없이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진행시켜왔다.

선교멧세지는 민족적 삶으로 뒷받침되지 않을 때 그들의 멧세지는 설득력이 없다. 복음의 혜택은 구원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샬롬, 즉 삶을 온전케 함, 자유, 정의, 풍요로울 때, 이것이 구체화되었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설득력을 얻을 것이고, 보다 효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자유보다는 억압, 불의, 갈등이 있다면, 가진자 못가진 자의 갈등이 있다면 복음의 설득력은 없다.

경제력, 과학기술은 압도하나, 인권의식, 정의의식이 없는 민족이 세계를 주도하면 어떻게 될까? 영국, 미국은 그래도 기독교 문명이 동반되어 많은 치유를 주었다. 한국이 주도국이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까? 하나님이 한국에 왕성한 교회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다른 나라 사람들을 착취하기 위함일까? 다른 민족을 한국 물건을 파는 시장으로 만들기 위함일까?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세계만방에 전달하는 민족이 되도록 하기 위해 복음화를 허락하셨다. 직접적인 선교를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나 직접적인 선교를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도 이땅에 새로운 기독교적 문명을 이루어야 한다. 기독교 문명을 이루어 가던 유럽이 타락했다면, 미국이 그렇게 되었다면, 이제야말로 일본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우리만 할 수 있는 기독교적 문명을 이루어서 참으로 온세계 만민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그 구원의 혜택을 나누어주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기독교적 문명을 이룰 것인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각자의 소명의식을 회복해서 기독교적 문명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적 문명의 혜택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바울의 소명사상이 기독교적 문명을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막스 웨버는 종교개혁자들이 재발견한 바울의 소명사상은 사회적 혁명을 가지고 왔다고 했다.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는가? 중세 때는 성직자들만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을 했다. 평신도들의 활동, 직업은 하나님의 소명과는 하등관계가 없다고 했다. 평신도들의 직업활동은 중립적인 것으로 이 세상에서 빵을 얻기 위해 의미있는 것이지, 도덕적으로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도 직업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따라서 노사분규가 일어나고, 착취, 피착취가 일어나고 물질이 주인이 되어 버렸다.

루터는 고전7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는다고 했다. 이중적 부름인데, 하나는 구원에로의 부름이요 다른하나는 이웃에게 제사장노릇하도록 부름받음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봉사하는 직업이 그사람이 구원으로 부름받은 장으로서 이웃을 위한 제사장 노릇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해석함으로 모든 직업이 구원이 임한 장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직업은 부름받은 것이라고 했다. CALLING, 직업자체로 해석해서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부름으로 해석했다. 돈을 벌기위한 수단을 넘어서 신적, 도덕적 의미로서의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전력을 다해서 일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신학에 더 큰 공헌을 한 것은 칼빈의 개혁신학이다. 칼빈신학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이므로 그것이 강조될수록 각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서있는가에 절실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장로교회도 내가 과연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구원, 고백,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진다. 예정에 의해서 구원받았음을 확인하려고 애를 쓴다. 칼빈주의는 영국, 네덜란드등지에서 많이 일어났는데,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하나님을 섬김 즉, 직업활동에 전력을 다해서 사람을 예정과 부르심의 증거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니까 겨우 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구원이 달린 것으로 생각해서 자기 직업에 최선을 다하게 되었다. 그 결과의 열매를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축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청지기로서의 재원을 잘 관리하도록 하신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을 이세상에서의 쾌락을 위해서 쓸 수 없다고 생각해서 청교도적 근면성과 금욕주의를 낳아서 자본이 축적이 되어서 현대 서구자본주의 체제가 생겼다. 웨버는 종교개혁자들이 재발견한 바울의 소명사상이 이러한 혁명을 가지고 왔다고 했다. 웨버의 사상은 논쟁거리다. 어떤 사람은 루터의 소명사상이 절대적 순종심을 요구하는 독일의 관료정신, 프로이젠의 관료정신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토니는 청교도들의 개인주의, 근검절약이 자본주의 사상의 근거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논지를 떠나서, 직업을 빵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자기의 구원과 직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소명이라고 생각하면 직업에 더 의미를 더하게 하고 성실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은 새로운 직업의식, 직업윤리, 경제 사회적 현실을 일으킬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웨버의 논지는 일리가 있다. 바울의 소명사상은 변화의 힘과 능력이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바울의 소명사상을 올바로 이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의 소명사상의 과격성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바울의 소명사상은 그의 구원론의 이면이다. 우리의 구원을 생각하게 하고, 구원은 주머니에 가지고 있는 담보물인가? 심판때 내어놓고, 어느날 고백해서 구원받은 보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구원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구원과 무관해진다.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활동 즉, 직업활동과 구원은 아무관계가 없어진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구원을 받을 것이나, 현재 구원을 받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 나타나야 한다. 직업활동은 구원과 무관할 수 없다. 직업활동을 중심으로 우리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바울은 부름을 믿음과 구원으로 부르셨다고 할 때 쓴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믿도록 하심에 대해서 쓴다. 동시에 종들을 부르시는 전통,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과 자기도 부름받은 종이라고 쓴다. 비슷하게 바울은 은혜라는 말을 믿음을 통하여 얻는 구원을 일컬을 때 쓴다. 동시에 자신의 사도직을 은혜라 지칭한다(롬1:5;로전15:10;빌1:7). "나에게 주어진 은혜" 사도직을 지칭할 때 쓰는 문형이다. 부름과 은혜를 구원에 대해서, 또 사명(사도직)에 대해서 사용한다. 두말, 즉 은혜와 부름을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쓴다. 구원받고 사도가 된 사건을 쓴다.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받았다. 그러나 개인적 구원의 체험보다 사도직으로의 부름으로 쓴다. 빌3장에서는 구원과 사도직의 부름으로 쓰지만 다른 모든 곳에서는 사도직의 부름으로 쓴다(갈1:고전9:15:엡3:고후4장) 개인적 구원사건보다 사도직 소명사건으로 그린다. 믿음과 구원은 사도직의 부름과 동시에 일어났고 사도직으로의 부름이 구원의 부름을 내포하고 사도직의 은혜가 구원의 은혜를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구원의 선물의 부름은 사도직의 임무의 부름이요 구원의 선물의 은혜는 사도직 임무의 은혜로 본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 구원을 전제할 따름이지 길게 논하지 않는다. 빌3장에서의 강조점도 사도직의 사명에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도직을 두고 말한다. 은혜와 부름의 선물쪽 보다는 그것의 사명, 또는 임무쪽을 더 중시, 강조했다. 이것은 바울의 철저한 신본주의적 사고의 결과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 개인적 회심과 체험을 강조하는 경건, 복음주의 전통의 영향으로 우리의 구원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한다. 이 주의들은 좋은 전통이다. 경건주의가 왜 일어났는가? 유럽의 전통교회에서 기독교 집안에서 출생했다는 이유로 기독교인이라는 인식이 팽배했을 때, 각 개인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로 신앙고백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생의 체험을 해야 한다. 한국도 이것이 심각해진다. 이런 전통이 하나님의 주권, 칼빈의 큰 테두리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신앙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부작용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 나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전자를 강조하면 주권자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무슨용도로, 무엇에 쓰려고 나를 구원하셨나에 강조점이 있다. 후자를 강조하면 정체된다.

바울은 다메섹 사건에 대한 철저한 신본주의적 해석이 사명임을 깨닫게 된다. 바울은 헬라인, 야만인, 지혜있는자, 미련한 자에게 내가 빚진 자이다 라고 말했다. 모든 이방인들에게 빚진 자라고 했다. 빚진 자라는 말은 오페일레테스 "빚을 갚아야 하는 법적 의무를 가진자"를 의미한다. 이말은 "--할 의무를 가진 자"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해서, 롬1:14절을 복음을 전파할 의무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말로 해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 원래의 의미로 생각했다. 바울은 구원의 빚을 졌다. 갈 1:13-17까지와 함께 해석을 해야 한다. 어떻게 사도직으로 부르셨는가를 보고하고 있다.

 

그는 핍박자로 가던 도중 그리스도의 계시를 보았다. 다메섹의 계시는 하나님의 예정, 은혜의 부름이었다. 그것의 목적은 16절이다. "이방인들에게 그 아들을 복음으로 선포하도록(유앙겔리조마이) 하기 위해서"계시하셨다. 바울은 복음을 아들로 요약한다. 바울은 내가 그때 구원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개인적 구원의 사건으로 보기보다는 사도직의 부름으로 그리고 있다. 구원적 사건을 암시하고 있지만 강조점은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 은혜를 주셨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비아 사막에 갔다. 묵상하고 준비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다. 아라비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갔다. 아라비아는 다메섹을 말한다. 다메섹 선 밖을 아라비아라고 했다. 나바티아 왕국의 아렙파스 4세에게 쫓겨서 광주리에 실려서 다소로 도망을 간다.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쫓겨났다. 다메섹 도상에서 은혜를 베푸신 주권자의 목적을 깨달았다. 이방인들에게 아들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을 그 도구로 쓰고자 하신 것이다.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 바울을 구원하신 것이다.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계획 덕분에 바울이 구원을 받았다. 핍박자이고 교회의 원수인 바울은 이방인 덕분에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방인들에게 빚을 진 것이다. 이것이 롬1:16에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독특하게 이방인들의 사도라고 불렀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전하는 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보았고, 고전 9장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자는 복음으로 생계를 유지하도록 했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용했다. 나는 예수께서 주신 사도의 권리를 포기했다. 자비량선교를 했다. 천막을 만들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고린도인들에게 일말의 누를 끼치지 않았다. 바울은 유일하게 빌립보 교회에서만 헌금을 받았다. 왜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의 명령을 어기기까지 하면서 했는가? 이방인에게 빚진 자이기 때문에 복음 선포를 빚갚는 것이라 보았다. 돈을 받으면 빚을 더 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만을 예외로 했다. 더 중요한 것은 고전9:16-23절이다.

복음 선포하는 것이 부득불 할 일이다. 아난케는 필연, 숙명이란 뜻이다. 헬라사상에 숙명주의는 중요하다. 숙명을 거스리는 파멸된다. 바울은 헬라사상을 피한다. 그러나 아주 헬라적 개념을 쓰고 있다. "숙명이 내 위에 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구약형식이다. 임박한 재앙 앞에서 울부짖는 절망의 소리이다. 복음선포는 자기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이것을 거스리면 멸망의 재앙이 내릴 것이다. 복음선포를 안하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얘기다. 구원이 아니라 화가 임한다고 했다. 23절 "내가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한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같이...... 왜, 복음에 참예하기 위해서. 순코이노니아. 복음으로 구원의 능력을 덧입는 그들과함께 복음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남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구원받도록 함으로써 자신도 구원을 받아가고 있는 것이다. 16절은 부정적으로 23절은 긍정적으로 말한 것이다. 번역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한다. 이것은 내가 복음으로 구원받는 모든 사람과 함께 나도 복음을 덧입는 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빚진자로서, 충실히 선포함으로 구원의 능력을 덧입게 되었다. 이런 구절들은 다 똑같은 뜻이다. 이방인들에게 빚갚는 자세로 했다. 채무자로서 했다. 그들이 구원받으므로 자기도 구원받으려고 했다.

이러면 마음가운데 질문이 하나 생긴다.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의 행위,공로를 통해서 구원받으려고 한 것인가?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3가지 가능성이 있다.

1.전통적인 복음의 해석
2.행위구원론이다. 빚진 자 의식으로서만 구원을 얻는다.
3.아니면 해석의 부족함 때문에 모순이 일어난다.

전통신학에서 의라는 개념을 법정적으로만 이해를 했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면 의인이요 어그러지면 죄인이다. 이것은 헬라 로마식 개념이다. 법의 기준에 합치하면 의롭고 어긋나면 죄인이다. 의인이 된다는 것은 재판소에서 무죄 석방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서, 의인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뜻으로만 해석을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의인으로 선언이 되어 최후의 심판대에서 의인이 재확인되어서 구원받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헬라, 로마식 해석이다. 그런데 최근 많은 성경해석자는 "의"라는 개념이 법정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관계론적 개념"이다. 유대교에 있어서 의라는 개념은 객관화된 법기준에 합치가 아니라, 관계에서 나온 의무를 다하면 의인이고 관계에서 나온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죄인이다. 따라서 올바른 관계이다. 우리는 모두 관계에서 산다. 모든 관계는 관계속에 있는 파트너에게 의무를 준다. 아버지는 아들을 잘 양육할 의무를 준다. 아들은 아버지를 잘 공경할 의무가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잘 양육하는 의무를 잘 이행하면 아버지는 의롭다. 아들은 아버지께 공경, 순종하면 의롭다. 관계에서 나온 의무를 잘 행하면 원만한 관계이다. 한쪽에서 안하면 관계는 절단이 된다. 의는 올바른 관계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는 스스로 의무를 지셨다. 피조물들을 잘 다스리고 보호하시겠다. 사랑의 의무를 지셨다. 인간은 완전히 의존하고 순종하겠다는 의무를 가졌다.

그러나 인간은 그 의무를 파괴했다. 아담은 자기가 하나님같이 되려고 했다. 자기가 하나님이라 했다(창3:5). 그래서 이 관계가 깨어져 불의하게 되었다. 관계단절이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더이상 창조주로부터 오는 부요, 존재, 전능, 무한한 사랑 무소부재함의 자유, 영원하심을 덧입지 못하고 조그마한 자원, 지혜로 자기 삶을 꾸려간다. 자기 힘, 꾀, 능력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까 자연히 인간은 불안하게 되고, 고난속에 빠지고, 늙고 쇠약해지고 죽음의 증상들이 나타났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되어 제한된 자원에 갇혀서 생명의 뿌리로 부터 잘린 나무같은 인생이 되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죽어있다. 잎이 마르고 가지가 마르는 것처럼 죽음의 시말에 놓이게 된 증상이 되었다. 성경은 불의한 죄인이 죽었다고 말한다. 자원이 지탱되는 한 살았다고 할 수 있지만, 뿌리로 부터 분리되는 순간부터 죽음의 권세 아래 놓였다. 창조주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되었다. 그 죄가 불의이다. 죽음이 역사해서 불안하고 갈등의 상처를 입고, 심리적, 육신의 병고 등 모는 고난은 죽음의 증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선택해서 언약의 관계를 맺으셨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고 너는 내 백성이라". 너는 나의 맏아들이다(출4:13)" 부자의 관계로 나타내셨다. 아들이란 그림은 상속자이다. 하나님의 창조주의 무한하신 부요함, 영원하심, 전지하심, 전능하심, 완전한 사랑을 상속받아 사는 자이다. 이런 인간이 다시한번 하나님의 무한하신 부요함을 덧입는 관계가 되었다. 따라서 창조주와 연결되어 보호, 인도, 복주고,구원해 주겠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언약의 관계에서 의무를 지신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은혜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며 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 인도, 구원하실 때 의로우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순종하고, 의존할 때 의롭다. 이것이 올바른 관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아담의 범죄에 빠졌다. 자기들의 뜻을 따라 불순종한다. 자기의 힘을 의존한다. 이스라엘은 불의하다.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벌만 주면 하나님도 불의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하고 구원하셨다. 가나안 정착시대에 이방민족들의 전투에서 이기게 하셨다. 이것을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고 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칭송했다. 헬라, 로마개념으로는 하나님이 의롭지 않다. 법정개념이 아니라 관계 개념으로 봤을 때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이방 남여 노소 다 죽이는 것도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의롭다는 말은 관계의 신실함, 언약의 신실함이란 뜻이다. 다른 말로하면 사랑이다. 이스라엘은 불의는 하나님의 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몰라라 하지 않고 끝까지 신실해서 하나님 노릇해 주셨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 구원자 그의 아들을 보내어 대속해서 이스라엘이 다시 한번 하나님의 백성으로 재구성되어 구원을 받도록 하셨다. 언약관계에서 나온 의무를 다했다. 바울은 모든 인간이 불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의 즉 예수그리스도가 나타났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의 체현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 약속의 신실하심, 이것이 의이다. 우리 피조물을 다시한번 자기와의 올바른 관계 속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이것만이 올바른 구원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아서 다시한번 창조주의 대지에 뿌리받아,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아서, 불안함, 고난, 갈등 상처 등에서 해방받는다.

 

고난이 싹 없어지는 상태, 고난은 우리의 결핍에서 온다. 하나님의 무한함에 동참하는 상태를 영생이라 한다. 이것이 신적인 삶이다. 고난이 있다는 것은 죽음 아래 놓여있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내재하는 자원이 있는 한 살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된자, 즉, 올바른 관계속에 있는 자, 의는 올바른 관계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다. 올바른 관계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 하나님 노릇 해주심의 동인자가 되었다.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자녀들이 되었다. 무한한 자원을 상속받는 자가 되었다. 이것이 신적인 삶, 즉, 영생이다. 생명이다.

은혜로만 하나님 노릇해주심, 즉 예수그리스도의 구속, 창조주로서의, 언약의 하나님으로서의 약속을 지키셔서 다시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키셨다. 은혜로만 의인이 되었다.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불의함이 용서되고 의인이라고 선언이 된다. 법정적 개념이 첨가된다. 다시한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되었다. 왕,목자,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었다. 아빠라 부르게 하셨다. 피조물적인 제한성과 결핍성을 극복하고 그의 완전함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같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게 된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은혜로만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받아서 의인이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은혜의 소명이다. 어떻게 지탱하는가? 이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으로써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머무르게 된다.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요구하는 의무는 하나님을 의존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50억이 모두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일반적 양태가 50억 개별에게 개별화되어서 각사람에게 요구하는 의존, 순종의 특별한 형태가 있다. 이것이 소명이다. 하나님의 주권자적인 경륜가운데 하나님은 각자가 담당해야 할 개별화된 역할을 염두에 두시고 올바른 관계로 부르셔서 개별화된 양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신다. 바울의 경우는 보편적 의무만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부르셨을 때, 개별적으로 부르신 순종의 양태는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자. 선생은 하나님이 어떤 순종을 하도록 구체적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르셨는가? 학생들을 위해서 부르신 것이다. 학생덕분에 구원받은 것이다. 학생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에 나를 사용하신 것이다. 목사는 왜 은혜로 부르셨는가? 양들을 잘먹이고, 전도해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게 하기 위해서, 목사는 양떼들 덕분에 구원받았다. 양떼들에게 빚진 자이다. 의사는 누구 덕분에 구원받았는가? 환자들 덕분에. 기업가는 고객들 덕분에, 대통령은 백성들 덕분에 구원받았다. 은혜는 카리스이다. 은사는 카리스마이다. 구체성을 띠는 말이다. 은혜가 구체적인 힘으로 나타날 때 카리스마이다. 신학자들은 카리스마를 은혜의 구체화되고 개별화된 양태라 정의한다. 하나님의 카리스로 올바른 관계로 들어간다. 카리스는 우리에게 카리스마로 나타난다. 올바른 관계 속에서 지탱되도록 하기 위해서, 의무를 다하도록 하기 위해서. 카리스는 우리 삶의 활동의 대상을 위해서 주어진다. 이웃을 위해서 우리에게 카리스를 베푸신다. 카리스는 카리스마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염두에 두신 것을 다할 수 있도록 하시는 힘. 의사는 치료할 수 있는 기술, 선생은 잘 가르치는 힘, 경영자에게는 경영능력, 고객들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소명이다.

정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부르심은 의인되게 함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덧입게 하는데, 어떻게 지탱이 되는가? 주권자적 목적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 우리가 종착역이 아니다. 우리를 통해서 다음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누구를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구원의 빚진 자로 생각해야 한다. 은혜는 구체적으로 카리스마로 나타난다. 내게만 특별히 요구하는 것이 있다. 카리스마도 은혜이다. 나의 삶의 활동의 대상 때문에 구원을 받는데, 그것이 직업이다. 자기 삶의 활동의 대상에게 빚진 자로 생각하고, 자기 주장을 못하고 오로지 섬긴다. 그러므로 죄인들의 관계는 자기 주장, 자기이익을 위한다. 그러므로 불의하다. 이웃보고 나를 섬겨라, 어떻게 하면 이웃을 착취하는, 이리 떼 노릇하는 관계는 갈등, 싸움의 관계이기 때문에 고난의 관계이다.

의인관계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이고 이웃에 대해서 섬김의 관계이다. 사랑의 관계이고, 샬롬, 의로운 관계이고 자유함의 관계이다. 이것이 의인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주권자적인 목적에 순종하는 자이다. 섬김으로써 가능하다. 이것은 섬김으로써 가능하다. 만인은 만인에게 섬김의 관계, 빚진 자의 관계이다.

더이상 그 관계를 포기하면 화가 미친다. 지쳤으니까 그만하면 올바른 관계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아담의 죄를 짓게 된다. 고전9:16절 화만 있다.

직업을 포함한 모든 활동은 구원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모든 활동의 대상에게 빚진 자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임으로 그도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올바른 관계가 지탱되게 하기 위한 순종의 장으로 직업을 생각해야 한다. 돈을 벌어서 쾌락의 장르로 본다면 인격이 상품화되어 버린다. 직업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면 서로 돈을 많이 빼앗으려고 하게 된다. 삶의 보람이 없다. 죄인들의 관계이다.

의인의 관계는 다르다. 직업이 구원의 과정이다. 대상에게 빚진 자의 심정을 가져야 한다. 전적으로 섬김, 그때 기업가의 착취가 가능하겠는가? 목사가 대접받으려 하고 목에 힘주겠는가? 의사가 환자를 돈벌이의 기회로 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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