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바울-4 바울의 생애와 성격

은바리라이프 2009. 8. 30. 18:56

4 바울의 생애와 성격


1

이와 같은 큰 희망과 신앙의 복음을 들고 바울은 일어섰습니다. 아니 일으켜 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개인의 구원도 사회의 구원도, 세계의 평화도 우주의 완성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인류의 희망은 모두 그에게 달려 있다. 다만 사람이 그를 믿기만 하면!

그렇게 생각하면 바울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자기가 일찍이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박해한 자였음을 생각하면, 크게 돌이켜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의 은혜를 받은 이제, 복음 전도의 열정은 스스로 불같이 그의 뼈 속에서 불타올랐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혼자서 생각해 낸 열심도 아니고, 또 누구에게서 임명된 것도, 의뢰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그를 사로잡고 그를 강요해서 넓은 이방인의 세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띠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도 아니고, 사람에 의해서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되살아나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의하여 세움을 받은 사도 바울”(갈라디아서 1:1)이라는 것이 그의 자각이었습니다.

바울은 서재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여행가였습니다. 그의 활동으로 보거나 성격으로 보아 그는 오리겐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신학자가 아니라, 엘리아나 아모스와 같은 예언자형의 인물이었습니다. 신약 성서 27권 중 바울의 서신이 열셋 있습니다. 즉 약 반수가 바울이 쓴 것입니다. 이 밖에도 바울이 쓴 서신에서 오늘날 전해 내려오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들 서신은 그 속에 신학적인 변증(辯證)도 포함되고 있지만, 그것을 결코 체계적인 신학서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의 여행의 산물이고, 사신(私信)의 성질을 띤 것으로 그의 개인적인 감정이 도처에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그는 여행지에서 또는 연금되고 있는 감옥에서, 자기가 일찍이 방문했던 또는 이제 방문하려는 각지의 형제 자매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하여 이들 서신을 쓴 것으로 바울에게 있어서는 여행과 서신이 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전도 방법이었습니다. 그런 형태를 얼마간 오늘까지 지니는 것은 개인 잡지에 의한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붓을 들어 서신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나 구술(口述)하여 필기시켰던 것입니다. 다만 서신의 끝부분에 가서, 자필 문안만은 부기(附記)하는 것이 습관이었던 듯합니다. 갈라디아서 말미에 “보시오, 내 스스로 지금 붓을 들어 이렇게 큰 글자로 당신들에게 쓰고 있는 것을”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갈라디아서 6:11). 바울이 스스로 붓을 들어 적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습니다. 너무 바빴기 때문에 희랍어의 문장이 서툴렀기 때문에 시력이 약해서 또는 천막 제조의 노동으로 굵어진 손마디가 펜대를 잡는 데 접합하지 않아서 등등, 그 이유는 판명되고 있지 않지만, 때로는 의자에 앉아, 때로는 서서 방은 거닐면서 때로는, 한 마디 한 마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또박또박, 때로는 마른 풀에 불이 붙는 기세로 그는 말을 토해냈을 것입니다. 수신인을 눈 앞에 둔 듯한 절박한 현장감이나 진실감에서, 구술에 의한 서신은 가장 바울 바울에 어울리는, 바울다운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


바울의 발은 또, 복음을 나르는 중요한 구실을 했습니다. 람제이 교수가 그 저서에 「여행자(旅行者) 성 바울」이라고 제목을 붙일 정도로, 그는 여행가였습니다. 바울의 주요한 여행을, 연대순으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다메섹에서 회개한지 3년 지나,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베드로나 야곱에 소개되었습니다.

(2) 안디옥의 교회에서 파견되어, 기근 구제(飢饉救濟)의 의연금을 가지고 다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3) 역시 안디옥의 교회에서 파견되어 키프로 섬 및 갈라디아 지방에서 제1회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4) 할례 문제에 대한 협의차, 세 번째 예루살렘 상경

(5) 아시아주(州)의 내륙지방을 서쪽으로 나아가, 에게 바다에 임한 도로아스 항에 이르러, 그곳에서 마케도니아를 건너, 빌립보, 데살로니가, 아데네, 고린도 등의 여러 도시를 전도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제2의 전도 여행으로, 이때 그리스도의 복음이 비로소 유럽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6) 고린도로부터돌아오는 도중, 예루살렘에 네 번째 방문을 한 뒤,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7) 소아시아 및 희랍으로 제3회 전도 여행

(8) 빈민 구제금을 가지고, 다섯 번째의 예루살렘 방문, 이때 보수파(保守派)의 유대인이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을 죽이려고 음모(陰謀)를 계획했으므로, 로마의 총독 벨릭스는 그를 가이사랴의 감옥에 2년간 보호 감금하였습니다. 그 다음 총독(總督) 베스도로 바뀌었을 때, 바울은 자기의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가이사에게 상고(上告)할 것을 신청하고, 그에 따라 로마로 호송 받게 되었습니다.

(9)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해로(海路) 호송 도중 폭풍우를 만나 파선하여 마르타 섬에 상륙했지만, 다음 해 봄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로마에서는 보초를 세운 세든 집에서 연근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 후 바울의 생애는 확실히 모르지만, 한 번 석방되어 스페인에 갔다는 상상설도 있고, 또 고린도, 에베소 등 동북 도시를 방문했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어쨌건 한 번 석방되었던 것은 사실 같고, 그 뒤 다시 체포되어 로마에 압송(押送)되어 그곳에서 네로 황제에 의해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여행한 이정(里程)을 합치면 굉장한 거리가 될 것입니다. 다이스만 교수는, 바울이 여행한 지역이 올리브나무가 생육하는 동온 지대(同溫地帶)에 있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당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는 철학자 필로가 있고, 신플라톤파 철학이 번영한 학문의 도시였지만, 어떻게 된 이유인지, 바울은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선배 바나바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전도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남이 놓은 기초 위에 세우기를 바라지 않는 바울이, 이집트에 가지 않았던 것도 수긍이 갑니다. 예루살렘은 베드로에 알렉산드리아는 바나바에, 그리고 나 바울은 서부 희랍, 로마, 스페인으로. 그렇게 바울은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쨌건 바울의 발걸음은 남쪽으로 향하지 않고, 서쪽으로 뻗었습니다. 한 덩어리의 빵, 한 모금의 물, 그리고 몇 알의 올리브 열매를 가지고, 천막 제조의 나그네 직인(職人) 바울은, 서쪽으로 동쪽으로 몇 차례고 준령을 넘고, 대해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를 뿌렸던 것입니다.




3


바울은 여행자로서의 어려움을 두루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로서의 심로(心勞)는 그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그를 괴롭힌 사람의 제일은 유대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주장한 자유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울을 하나님의 모독자, 율법의 파괴자로 알고, 몇 번이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둘째는, 이교(異敎)의 신들을 숭배하여 이익을 얻는 무리였습니다. 에베소에서는 여신 알테미스의 은제(銀製)의 소궁(小宮)을 제조하여 팔고 그것으로 돈을 벌던 은 세공인들이 바울의 전도로 자기들의 장사가 문 닫을까 두려워, 소요를 일으켜 바울을 잡으려 한 일이 있습니다.

셋째는, 로마의 총독 이하 관리들도, 유대인의 인기를 얻으려 바울을 감금하고, 공정히 취급하지 않았던 일이 있습니다.

넷째는, 같은 전도자 중에 바울을 질시하는 사람이 있어서, 혹은 그의 사도로서의 자격을 의심하고, 혹은 그의 자유의 복음을 비판하고, 혹은 그의 성격의 결점을 걸어 인신공격을 가했습니다. 이런 것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다고 해도, 이런 비난에 끌려, 바울이 가르친 신자들이 순수한 십자가의 복음을 떠나, 율법에 집착하는 형식주의의 신앙으로 후퇴해 가는 것은 바울로서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갈라디아의 신자들을 향하여 비분에 차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들 눈앞에 선하거늘, 도대체 누가 그대들을 미혹케 했단 말이오, 나는 오직 이 한 가지 일을 그대들에게 듣고 싶소. 그대들이 영을 받은 것은 율법을 행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들어서 믿었기 때문인가?
(갈라디아서 3:1-2)

이것은 바른 신앙의 길에서 떠나가는 율법주의적 경향의 신자에 대한, 폐부에서 울려나오는 사랑의 부름이었습니다. 그 길은 바른 길이 아니다. 그 가르침은 복음이 아니다. 돌아와, 돌아와 하고.

바울의 전도와 사람 됨됨이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한 사람은 상당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베드로 등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달리, 예수의 직제자(直弟子)가 아니니까, 그 사도로서의 자격이 베드로만 못하다든가, 또는 바울이란 인물은 떨어져 있으면 강한 듯이 말하지만, 만나 보면 약한 사람이다. 즉 이불 안에서만 활개 친다든가, 또는 바울은 전도 여행의 핑계로 돈을 벌고 있다든가, 그 밖에 여러 가지 비평 및 중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 사람에게 부친 서신에서,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지만 할 수 없다고 전제한 뒤에 다음과 같이 부러지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종이오, 나는 미친 듯이 말하오, 나는 그들 이상이요, 그렇소. 고생하기를 더하고, 투옥된 일도 더 많고, 매 맞은 것은 훨씬 더 많고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여러 번 하였소. 유대인으로부터 40에서 하나 모자라게 매를 맞은 일이 다섯 번, 로마 사람에게 매를 맞은 것이 세 번, 돌로 맞은 것이 한 번, 파선(破船)한 것이 세 번, 그리고 꼬박 하루 밤낮, 바다 위에서 표류한 적도 있소. 몇 차례를 여행하고, 강의 어려움, 도적의 어려움, 같은 국민의 어려움, 이방인의 어려움, 도회의 어려움, 황야의 어려움, 해상의 어려움, 거짓 형제의 어려움을 만나고 애쓰고 괴로워하며, 수시로 잠 못 이루고, 밤을 지새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때로 먹을 것이 없고, 추위에 얼고, 벗은 채로 지낸 적도 있소. 여러 가지 일이 있는 외에, 날마다 내게 닥치는 여러 교회의 걱정거리가 있소.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않을 수 있겠소. 만일 굳이 자랑해야 한다면, 나는 내 약함을 자랑하리다. 영원히 찬양받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내가 거짓을 말하지 않은 것을 아실 것이오.
(고린도 후서 11:23-31)




4


참으로 바울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운다”면서 고난과 전투의 일생을 보냈습니다.

이 모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이 복음에 인류의 구원의 희망이 의존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적을 가졌습니다. 그는 많은 적과 격심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늘 이겼습니다. 이겼던 것입니다.
우리들 사방에서 환난을 받아도 궁하지 않소. 앞길이 막혀도 희망을 잃지 않소. 박해를 당해도 버려지지 않소. 넘어져도 멸망하지 않소.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우리들의 몸에 지고 있소. 그것은 또한 예수의 생명을 우리들의 몸에 나타내기 위함이오.
(고린도 후서 4:8-10)

라는 것이, 바울의 생애의 경험이고, 실감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투만이 바울의 생애는 아닙니다. 그에게 큰 환희가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 빌립보의 신자들에게 써 보냈습니다.
여러분들은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 그들 사이에서 별과 같이 이 세상에서 빛나고 있소. 이와 같이 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나는 내가 달린 길이 헛되지 않고, 애쓴 것도 헛되지 않았던 것을 자랑할 수 있소. 그리고 정녕, 그대들이 신앙의 제물을 바치는 제단에, 내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뻐할 것이오. 그대들과 함께 기뻐할 것이오. 그와 같이 여러분들도 기뻐하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시오.
(빌립보서 2:15-18)

여러분들의 신앙의 진보를 위해서라면, 나는 순교의 피를 뿌려도 기쁘다는 것입니다. 슬픔의 사람 바울은, 그러므로 환희의 사람이고, 전투의 사람 바울은 그러므로 평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유의 사람이었고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순을 모순 그대로 살았던 야인이었습니다. 그를 “성(聖) 바울”이라느니 하여 떠받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바울입니다. 그저 바울입니다. 우리들은 그를 통하여 자유의 평민을 안 것입니다.

바울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는 유럽에 전해졌습니다. 유럽에 전해진 것은 전 세계에 전해진 것이었습니다. 거대한 인류의 문명사(文明史)가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영향은 단지 그리스도교의 세계적 전파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바울이 싸운 싸움은, 그 뒤 여러 차례나 문명의 위기 중에서 싸워져 인류를 형식주의, 율법주의의 침체와 허위에서 구원한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율법주의의 베라기우스와 싸웠던 무기는 바울이었습니다. 루터가 형식주의의 가톨릭 교회와 싸운 것도 바울에 의해서였습니다. 우찌무라간조(內村鑑三)가 일체의 중냄새나는 제사적(祭祀的) 그리스도교와 싸운 것도 마찬가지로 바울에 의해서였습니다. 예부터 모든 종교 개혁은 언제나 바울로 돌아가 싸워졌던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의 정신은 자유롭고 혁신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에 낡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때 학자 사이에는, 바울의 신학이 예수의 단순한 복음을 부자연스럽게 왜곡시켰으니까, 우리들은 바울을 떠나 예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를 왜곡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사람이, 바울도 왜곡하고, 예수도 왜곡시켰던 것입니다. 예수의 발자취는 거의 유다 밖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바울의 발자취는 널리 세계에 미쳤습니다. 예수는 시골 출생이었지만, 바울은 도시인이었습니다. 예수는 학교를 다니지 아니하였으나, 바울은 가마리엘의 문하(門下)에서 배웠습니다. 그와 같은 차이점은 있었지만, 바울은 가장 자유롭게, 가장 신선하게, 예수의 복음을 후세에 권한 사도였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이중의 의미로 바울을 필요로 합니다. 이 혼란한 세상에서 우리들 각자의 구원의 확립을 위하여, 이 황폐한 세계에 평화가 영속하기 위하여, 이 미쳐 날뛰는 우주가 완성되기 위하여, 우리들은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랑하는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뿌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의 씨는 의식이나 전통이나 율법 등의 불순물을 섞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의 발아력(發芽力)을 방해는 일체의 불순물에 미혹됨이 없이, 어디까지나 순수한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 우리들은 바울과 같이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애쓰며,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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