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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 초대교회의 변증론적 방어와 공격의 무기

은바리라이프 2009. 8. 10. 14:32

신유: 초대교회의 변증론적 방어와 공격의 무기

 

 

 

머리말

 

21세기에 들어와 한국 교회는 “치유 목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교회가 치유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신학의 새로운 발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과학이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새롭게 규명하고 있는 데에 자극을 받기 때문인 듯 싶다. 물질적인 것에만 기본을 세우던 과학이 두 가지 면에서 놀라게 되었다.

 

첫째로, 과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많은 질병의 원인이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는 것과 새로운 치료 방법에 못지 않게 새로운 질병이 발생하는 사실에 놀란다. 둘째로, 육체의 치료가 단지 해부학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정신 치료와 병행할 때 더욱 효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에도 놀란다. 이미 플라시보 효과는 의학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흔한 사실이 되었다. 일부 의학계에서는 대체 치료나 심리 치료의 효능을 크게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제는 아예 전통적으로 종교의 영역에 속한 묵상이나 기도 등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하게 되었다. 의학계의 이런 관심 표명은 교회와 신학으로 하여금 다시 신유에 대해 관심을 가지도록 도왔다.

 

로마 천주교는 10세기 이후 치유를 위한 도유 대신에 종부성사로 바꾸었고, 개신교 정통교회는 계몽주의 이후로 웬만한 질병들의 치료는 과학과 의학의 영역으로 넘기고 오직 구원과 영혼에 관계된 것만을 다루는 것으로 스스로 자리매김을 해왔다. 과학의 유전자 연구는 이제는 거의 그 비밀을 해독했다고 보도되고, 인간을 복제하는 것이 기술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단지 윤리적인 판단의 어려움만 남아있을 뿐이라는 현실에 직면해서 종교는 윤리적인 책임의식만을 강조하는 것 외에 달리 대책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종교가 과학과 대립하거나 과학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표면적으로 말하지만, 그럼에도 내면적으로는 혹 종교가 과학으로부터 “무식한 광신”으로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는 사이 과학은 오히려 종교의 영역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의학적으로 규명하려고 노력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일부 신학자들은 구원의 문제를 보다 전인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치유의 문제를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교단에 따라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치유 사역이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의 치유와 기적을 문학적인 표현 양식으로 보거나, 아니면 시대경륜적으로 해석해서 그 시대에는 그런 사역이 필요했지만 지금 과학의 시대에는 그런 사역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입장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기적, 신유, 귀신을 쫓는 일을 아예 무시하게 되어 성서 본문의 상당 부분을 사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거나, 아니면 단지 영적이나 비유적으로만 해석될 뿐이다. 이런 차원에서 일부 교단과 일부 신학자들이 치유를 새롭게 부각시키는 노력은 우선 성서와 성서를 배태한 초대 역사에 보다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보여진다.

 

또 다른 한편, 치유에 대해 보다 집중적인 관심을 갖는 일은 과학을 전혀 무시하고 신유만을 강조하는 집단들을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항상 사회적인 어려움을 주었던 집단들의 태도는 반사회적인 모습을 띤다는 것이며,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반사회적인 태도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기독교가 강조하는 구원이 영과 육의 전인적 구원이기 때문에 인간 구성 요소의 그 어느 것도, 인간 사회의 어떤 구성원이나 노력도 구원의 영역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과학을 도외시한 신유는 자칫하면 구원을 현 세상에 대한 반대의 개념으로만 이해하는 편협된 신학을 만든다. 영혼의 구원을 말한다 해도 초대교회는 육체를 뺀 영혼만의 구원을 의미하지 않았다.

 

“구원”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 σωτηρία는 “치유(healing)와 구원(salvation)"을 의미했다. 육체의 회복은 육체만의 건강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본래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터툴리안은 이 세상 끝난 다음에도 여전히 우리의 육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차원에서 초대교회에서 신유가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편중된 사고를 지양하고 균형 잡힌 신학을 갖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연구는 초대교회에서 치유가 어떤 자리에 있었는가를 보고자 한다. 굳이 연구의 한계를 말한다면 초대교회가 치유 자체를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정밀하게 추적하는 연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차원보다는 치유의 역사적 기능과 의미를 찾고자 한다. 치유의 문제를 재검토하는 연구의 기초적 작업의 하나로 초대 기독교가 교회를 세워가는 데에 치유가 어떤 기능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연구를 통해 초대교회에서 치유는 많은 부수적인 기능 가운데 하나의 기능이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해주는 가장 중요한 핵심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즉 교회가 로마 제국이나 철학자들의 공격에 대해 방어적으로 변증할 때 치유는 “전인적으로 건강한 삶”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교회가 내부의 이단적 분파나 다른 종교 집단과의 경쟁을 할 때는 치유를 “신적 능력의 현현”으로 제시하였다.

 

 

방어의 무기로써의 치유의 전인성

 

기독교가 로마 사회로부터 받은 공격은 황제숭배와 연관해서 나온 무신론자, 성만찬과 연관한 오해에서 비롯된 식육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과 아울러 미신을 숭배하는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로마의 집정자들은 기독교를 미신(superstitio)이라고 단정하고 정치적 박해의 근거로 삼았다. 물론 이 때 미신이란 단지 비사회적이고 몰상식적인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교 즉 바르지 못한 종교(국가종교가 아니라는 뜻에서)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신이라고 공격하는 것에는 주로 기독교인들의 치유 행위와 연관되어 있었다. 기독교인들의 치유 행위가 주술적이고 마술적이라는 비난이다.

 

우선 이 비난은 부분적으로 정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놀랍게도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기도문을 부적같이 사용한 흔적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헬라어, 콥트어, 시리아어 등 고대 언어로 남아있는 파피루스 단편들을 통해 그 내용에 성서 본문이나 기도문을 적었고 이를 지니고 다니도록 만들어졌음을 보게된다. 치유를 위한 것뿐만 아니라 사랑을 얻기 위한 것, 상대방을 저주하기 위한 것, 소원 성취를 위한 것 등 그 종류도 다양하였다.

 

최근의 많은 연구들은 모든 초대교회 교인들이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명철한 합리를 바탕으로 신앙의 윤리화를 이루어 살았던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로마의 황제 숭배 종교가 힘을 잃자 영적인 진공 상태가 발생하고 많은 사람들이 마술적인 행위로 빠지게 될 때, 이방 대중 문화에 점성술, 꿈 해몽, 주술, 나무에 주술적 리본 달기 등의 미신적인 일이 아주 흔하게 되었다. 일반 가정집에 주술을 행할 수 있는 개인방이 있었으며 특히 무덤을 중심으로 죽은 자에게 비는 행위가 지속되고 있었다. 심지어 서민층뿐만 아니라 지식인층에까지 마술이 파고들고 있었다.

 

현대적 해석은 교인들의 주술적인 행위를 충분히 변호한다. 온 문화가 마술의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성서 구절이 지닌 부적을 지니고 다니던 행위는 오늘 우리의 부정적인 시각에서 “마술”이지 당시에는 누구나 흔하게 행하던 종교적 행위였다는 지적이 부분적으로 옳다. 학자들은 고대인들에게는 “마술(magic)이 아니라 “의식”(ritual)이었다고 지적한다. 기독교인들도 이런 시대적인 환경에서 부분적인 영향을 받아 신앙이나 양심에 저촉 없이 주술적인 행위를 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교인들의 신앙의 실천을 살펴보면 더 분명히 교인들이 주술적인 모습을 띨 수밖에 없었음을 알게된다. 초대교회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서를 소유하지 못했고, 또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고대 로마 말기의 전체 사회의 20퍼센트 훨씬 못 미치는 정도였음을 감안한다면, 성서가 있었다해도 읽고 그 뜻을 해석해서 삶에 적용하는 문학적인 활동은 소수의 학자와 지도자에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일반 신자들에게 성서는 소리를 통해 전해져서 암기해 만들어진 소리 형태가 아니면 글이 쓰여진 서찰 형태이었다. 소리 형태는 주문(invocation), 서찰 형태는 부적(amulet)의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었다.

 

기독교 교인들의 이런 미신으로 오해받을 만한 행위가 당연히 로마 당국자들이나 철학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치유의 능력은 마술의 힘이 아니라 치료자의 윤리적 인격에서 오며 이 인격 배후에 “말씀”(Logos)이 있다고 변증한다. 오리겐의 켈수스 논박에는 이런 관점이 드러나고 있다. 켈수스는 기독교인들의 치유 행위가 마술이며 설사 예수가 실제적으로 기적을 행했다 해도 다른 마술사보다 못하다고 비난한다. 또한 켈수스는 기독교인들이 “마귀의 기적적인 행위들과 이름들을 담고 있는 야만적인 책들을[즉 성서]” 소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오리겐은 예수의 치유 행위를 마술이라고 비난하는 켈수스가 왜 다른 마술사는 욕하지 않는가 반문하면서, 기독교의 치유와 마술의 차이를 드러내어 켈수스의 비난을 반박하고자 한다. 마술에 의한 치유는 단지 과시(show)에 불과하지만 예수의 치유는 전인적으로 “인간을 개조하는 일”이며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이라고 강조한다. 치료는 육체를 치료하는 기적과 아울러 “말씀과 인격으로” 사람에게 교훈을 주는 일이 병행된다.

 

오리겐이 잘 지적한데로 초대교회는 기독교의 기적적인 치유 행위가 미신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도(道) 또는 덕(德) 자체인 말씀(Logos)과 이 것이 기록된 성서가 있으며, 이 성서의 가르침에서 나오는 도덕적 삶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터툴리안은 마르시온 추종자들과의 논쟁에서 그들도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으나 그들에게는 예언의 말씀[즉 구약의 말씀]이 없다고 일축한다. 주술적으로 병을 고치는 것이 기독교의 목적이 아니라 치료자나 치료를 받는 사람이 함께 진리의 근원인 예수를 본받는 삶에서 구원의 길을 가고자 함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런 면에서 순교자 저스틴은 예수는 마술사(magus)가 아니며 오히려 많은 이방 철학자와 지식인이 추구하는 덕목의 원천이었음을 변증한다. 예수의 사역이 결코 마술적인 힘의 사용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며 인간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구원의 원천임을 말한다. 저스틴은 육신이 된 로고스가 바로 덕 자체라고 변증할 수 있는 배경에는 단지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우월성이 아니라 로고스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기독교인들의) 덕스러운 삶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의 치유는 단지 환자의 육체를 치료하는 것보다 치료자의 정신적이고 윤리적인 삶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병을 고치는 일은 심지어 사악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그저 소리만 내어서 예수의 이름만 불러도 그런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능력 자체보다는 신앙의 인격이 더 중요하였고, 신앙의 인격이 갖추어진 사람에게 신유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믿었다. 초대교회에서 특히 수도사들이 치유와 연관해 받는 기대와 존경이 컸었다. 수도원 운동과 관련한 많은 문헌들에는 예외 없이 치유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런데 주목을 끄는 부분은 신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수도사들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열광과 달리 정작 당사자들인 수도사들은 전혀 자신들의 능력을 나타내지 않고자 했다. 이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이웃에 대해서는 동정과 사랑이며, 자신에 대해서는 오직 겸손이었다. 혹 이들이 신유의 능력을 내어 치료했다면 이는 이웃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동기가 되었고, 오직 예수 이름의 능력이 치유의 방법이었다는 겸손만 남을 뿐이었다.

 

다음의 이야기는 수도사들의 이런 모습을 잘 드러내준다. 바벨론의 한 권력자의 딸이 병에 들자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수도사라는 정보를 얻었다. 이 정보를 준 사람은 그 수도사가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면 응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대신에 다른 일로 그 수도사가 권력자의 딸을 만나게 했다. 귀신이 들어 병이 난 딸이 이 수도사의 뺨을 때리자 수도사는 다른 뺨을 대었다. 그러자 갑자기 귀신은 예수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한다며 소리지르다 나가고 병이 낫게 되었다. 겸손이 마귀에게는 폭력이었지만, 수도사에게는 능력을 얻는 비결이었다.

 

기독교 치유가 전인적인 것이어서 도덕적이고 영적인 건강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치료의 방법으로는 기적적인 모습만 기대했던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 문헌에서 기적적인 신유의 예들은 넘쳐난다. 그렇다고 치료의 방법으로 의사와 약물 그리고 정성스런 간호를 배제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가 미신이라는 비난에 대해 교회는 교인들이 의학적으로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초대교회의 신유를 말할 때 이 사실도 강조되어야 된다.

 

초대교회에 “파라볼라노이”(παραβολάνοι;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치료를 위해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이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알렉산드리아 지방에 페스트가 만연해 사람들이 죽어갈 때 이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담보로 치료에 나섰음을 보고해준다: “형제들은...그리스도 안에서 치료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지극히 기분 좋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다른 사람을 치료하고 건강하게 해주고는 자기들은 죽었습니다.... 시신을 맨손으로 품에 안아다가 눈을 깨끗이 해주고 입을 닫아주었으며, 그들을 어깨에 지고 가서 사지를 가다듬고 포옹하였고, 그들을 단정히 씻기고 수의를 입혔습니다. 그리고 곧 자기 자신도 같은 의식을 제공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교도들은... 병들어 앓기 시작한 사람들을 쫓아냈으며 사랑하는 친구들도 멀리했습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기도로 다 병이 치료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치료를 기도로만 한 것도 아님을 알게된다. 분명 교회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단지 영적인 기도에만 의존하지 않고 의학적인 치료와 간호와 병행하려고 애썼다.

 

기독교 대신에 다시 로마의 옛 전통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배교자 저스틴 황제조차 그리스도인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우리 신들에 대한 이러한 힘있는 대적들이 되도록 만드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이방인들에 대해 그리고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나타내는 형제애이다.” 사실 교회의 직제 가운데 여집사는 여자 환자를 돌보는 일이 주된 임무였고, 폴리캅의 편지에 의하면 장로들의 임무는 환자를 돌보는 일이었다. 교회의 이런 희생적이고 의학적인 노력은 후에 법령에 의해 더욱 권장되었다.

 

특히 콘스탄틴에 의해 기독교가 국가의 호의를 입게 되자 교회 감독은 자기 관할 구역에서 정부관리처럼 자선 사업에 관한 사업을 관장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기독론 논쟁으로만 알려져 있는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는 모든 도시에 환자를 돌보는 처소를 마련하도록 권하고 있다. Codex Theodosianus에 의하면 성직자 계급에서 5-6백명을 선출해서 다른 공직의 의무를 면제하고 환자를 돌보는 일을 하도록 권하고 있다. 카파도기아의 세 신학자들은 약학과 의학에 의한 치료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임을 강조한다. 대략 372년경에 바질에 의해 세워진 병원(basileias, πτ-ωχείον)은 환자를 돌보는 병실들과 나그네를 위한 숙소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위에서 보았듯이 기독교는 치유 사역이 부분적으로 마술이나 주술로 철학자들의 비난을 받았을 때, 기독교는 약과 의술을 중시하며 단지 육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건강까지 즉 인류의 전인적 건강을 위해 구원을 선포하는 종교라고 변증하였다.

 

 

공격의 무기와 전도의 방법으로 치유의 능력

 

전인적인 치유의 개념이 철학자들과의 논쟁에서 방어 무기로 쓰였다면,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행해진 신유의 능력은 다른 경쟁 종교와 교회 내의 이단 분파와의 싸움에서 공격 무기로 사용되었다. 철학자들에게는 윤리적인 건강을 강조해서 말했지만, 병자들에게는 실제로 병을 고쳐주는 사역을 한 것이다. 혹자는 기독교가 병원을 세웠다는 것은 카리스마 운동의 쇠퇴의 징조로 본다. 이런 정도의 시각은 아닐지라도 켈시(M. T. Kelsey)는 신유와 연관한 카리스마 운동이 변하고 있었음을 감지한다. 카리스마의 특별한 지도자들 대신에 안수 받은 성직자는 누구나 공식적인 치유자가 되었다. 십자가 성호를 그으며 기도의 능력으로 즉각적으로 병을 치료하는 것에서 예식의 행위로 전환한 것이다.

 

예전에서 예수의 이름과 함께 성수를 뿌리고 도유하는 일이 치유의 방법이 되었다. 기도의 능력으로 즉각적인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일이 점점 약해졌는지 모른다. 교회에서 카리스마적인 치유가 약해졌을 때 메살리안 운동이 등장하였을 것이다. 설사 메살리안 운동이 편중된 시각으로 신유와 귀신쫓기를 이해하고 실천해 이단으로 정죄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직제를 세우고 조직을 만드는 과정에서 약해진 카리스마 운동을 회복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갈망도 반영되고 있음도 또한 사실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이 행하는 마술적 치유와 기독교의 신유는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다른 종교는 치유가 눈속임이거나 아니면 마귀가 치료하는 것임에 반해, 기독교는 치료의 배후의 권위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마가복음 3:22에 보면 예수의 치유 사역에 대해 유대인들의 비난은 예수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병을 고친다는 것이다. 탈무드에는 예수가 마법을 행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렸다고 비난한다. 이런 비난은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신유의 능력을 행하는 교인들에게도 이어졌다. 이레니우스(Irenaeus)는 답변하기를 기독교의 치유는 마술적인 행위로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둘째는 기독교가 실제로 병을 고치는 능력이 탁월함을 강조한다. 첫 번째 주장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주장의 사실여부에 달려있었다. 여러 초대교부들은 다른 종교나 종파 사람들이 치료하지 못하는 것을 기독교가 했다고 변증한다.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실제로 병자들을 고치며 여러 가지 기적이 발생하는 체험들을 통해 기독교는 전도를 할 수 있었다.

 

에피파니우(Epiphanius)는 요세푸스(Josephus; 역사가 요세푸스가 아니다)라는 한 청년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 청년은 예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이 병이 낫는 것을 보았고, 자신도 두 번이나 병 고침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망설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병 고치는 능력을 줄테니 믿으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미쳐서 옷을 벗고 다니는 남자를 자기 방에 데려다 물을 뿌리고 십자가 성호를 그리며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기적을 경험하였다. 요세푸스는 비로소 예수를 믿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을 신적인 거룩의 담지자로 간주하고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었다. 마술적인 테크닉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는 거룩한 능력의 나타남이었다. 사도행전 19:15에 유대인 제사장 스게와의 7명의 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자 예수의 이름을 불렀을 때 오히려 귀신이 이들에게 옮겨갔다는 기록은 치유의 능력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생겨나는 것 능력임을 보여준다. 일반 사람들은 신앙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신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사도행전 19:12에 바울이 몸이 지녔던 물건들을 만지면 병이 낫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믿음은 동서방 교회에서 다르게 나타났다. 서방 교회는 순교자들의 유골이나 유품 등 주로 죽은 사람과 관련해 치유의 행위가 실천되고 있었던 반면, 동방 교회에서는 현재 살아있는 성자들에 대한 존경과 신뢰로 나타났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초대교회의 문헌에 수없는 신유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동서방 교회의 이런 차이는 오늘 우리 시대에 교훈을 준다. 서방 교회의 죽은 자에 대한 존경이 미신적인 것으로 바뀌기 쉬웠던 반면, 동방 교회의 산 자에 대한 존경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상이 된다.

 

치유의 면에서 기독교와 경쟁의 상대가 되었던 것은 아에스큘라피우스(Aesculapius, Askelpios)였다. 이것은 의학을 담당한 헬라 신의 이름으로 많은 곳에 그 신당을 두었다. 이 신당에는 물지 않는 뱀이나 뱀의 주상들을 두었다. 환자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이 신당에 가 뱀을 보게되고 다시 꿈에 이 뱀을 보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이 종교에 대해 변증가 아리스티데스(Aristides)는 벼락맞아 죽은 신이 어찌 다른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겠는가 조롱한다. 변증가 아노비우스는 아에스큘라피우스가 육체의 어느 부분을 고칠 수는 있겠지만 전체는 아니며, 더욱이 영혼을 포함한 구원과는 너무 거리가 있다고 진술한다. 이 종교와의 경쟁의 결과는 기독교의 압도적 승리였다. 곳곳에 세워져 있던 이들 신당의 자리에 교회가 새로 들어서게 되었다.

 

 

꼬리말

 

초대교회는 신유를 중심으로 한편으로는 미신이라는 비난에 변증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신유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나타내었다. 이런 전략은 성공을 거두어 비난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과 도덕적 삶으로 잘 대응하였을 뿐만 아니라 몸과 영의 균형이 잡힌 치유관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환자들에게 의술과 기도로 치유를 하였다. 기독교가 로마 사회의 많은 종교들과의 경쟁에서 특히 로마 정부의 탄압을 받으면서 결국 성공의 길로 간 것은 치유를 중심으로 인간 이해가 편협한 이해가 아니라 잘 조화된 인간관을 제시할 수 있었고, 이론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의학적 돌봄으로 그리고 기도의 능력으로 환자를 고치며 사람을 새롭게 하는 사역을 성공적으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역사를 통해서 보면 초대교회의 이런 조화스런 치유의 관점이 때로 다시금 한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을 본다. 이미 머리말에서 언급했듯이 교회가 신유에 대해 주저하는 것은 사실 요즘 일이 아니다. 라틴어 성경 Vulgata는 병고침을 의미하는 curo나 sano라는 단어 대신에 일반적으로 구원을 의미하는 salvo로 번역하고 있다. 켈시가 이런 번역을 혹 교회가 신유를 포기하는 표시가 아닐까 걱정하는 것처럼 사실 과학이 발달한 서방 교회가 신유에 대해 태도를 유보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오늘 한국교회에 균형 잡히지 않은 신유의 시술 때문이거나, 육체적 치유는 오직 의학에 맡겨야 된다는 인간 중심의 합리적인 생각 때문에 신유 자체가 의심시 되는 상황에서 교회는 다시 한번 신유에 대한 이해를 진지하게 해보아야 한다. 단지 과학과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제 3세계의 선교적 전략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온전한 구원론과 인간론을 위해서 보다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의학계의 쏟아져 나오는 심신 관련의 연구들이 자칫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배제하고 인간 내부 안에 있는 “자기 충족적인 나르시즘”을 영적 치유의 근원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사랑을 받은 자가 사랑하는 자가 되고, 치유를 받은 자가 치유하는 자가 된다. 치유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체험하고, 상처받은 자를 이 능력의 체험의 현장으로 이끄는 교회의 사역이었으면 한다.

방 성 규 (한영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