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공개된 새 5만원권에 쓰일 신사임당의 초상화를 보고 매우 충격을 받았다. 인품과 아량과 재능과 덕성이 저절로 배어 나오는, 이상화된 모든 한국여성의 모습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되어서였다. 나의 느낌으로는 그 초상화는 이렇다 할 개성이나 매력이 없는, 텔레비전 사극에 '동네아낙'이나 주막집 주모 역으로 나오면 알맞을 여성의 얼굴이다.
새로 발행되는 5만원권 화폐의 인물로 신사임당을 선정하는 데 대해서 일부 여성계의 반발이 컸던 것은 그만큼 사임당의 진모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유관순이나 허난설헌처럼 '화끈한' 반항아는 아니었지만 신사임당이 유교적 여성억압에 찬성하고 협조함으로써 '출세'한 여성은 결코 아니었다.
친정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토로한 시나 유약했던 남편을 계도하며 독려했던 일화들은 사임당이 당시의 사회·가족제도와 갈등하면서 그 속에서 개인적 진실과 존엄성을 지키려 노력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율곡의 개혁사상 역시 어머니 사임당의 사회관, 시대관의 영향이 기저에 있지 않았겠는가?
또한 일곱살부터 화재(畵才)와 글씨로 칭송이 자자했던 사임당의 남아있는 그림이나 글씨, 시가 불과 10여점이라는 것 역시 사임당이 가부장제의 수혜자가 아니라 피해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거의 평생을 백수였던 남편을 받들고 시어머니를 모시며 일곱 자녀를 손수 가르치느라 자신의 자아실현은 계속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여인의 고단한 삶이 보이는 듯하다.
10여 년 전에 강릉의 오죽헌에서 사임당의 작품을 대하고, 노산 이은상 선생의 사임당 전기를 읽고 내가 감지한 신사임당은 무엇보다도 정감이 넘치는 따뜻한 인품의 소유자이고, 벌레나 풀의 오묘한 생리에서 생의 환희를 느끼는 타고난 예술가였다. 그래서 신사임당을 유교적 부덕(婦德)의 화신으로 인식하고 거부감부터 느끼는 현대여성들도 사임당과 깊이 있는 대면을 한다면 그에게서 동료의식을 느끼고 그의 덕과 의지와 지혜의 가치를 새롭게 평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종상 화백이 제작한 사임당의 초상을 보면 화가가 사임당을 어떤 사람으로 파악한 것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이 화백도 당연히 제작에 앞서 신사임당의 체취를 느끼고 그 느낌을 살리기 위해 노력을 했을 터인데 그가 그린 초상은 '초충도'나 '사친시' 작가의 형상화라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초상화의 예술성을 말하자면, 평범한 인물의 초상화나 악인의 초상화도 높은 예술성을 지닐 수 있지만, 수백 년 '부덕'의 상징이었던 인물의 초상에 인품이나 덕성의 아우라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작품의 '예술성'은 매우 미약한 것이 아닐까?
사임당의 외외가인 강릉최씨 문중에서 몹시 실망하고 분노해서 항의한 것이 충분히 이해된다. 일반 국민도 이 초상이 이상적 한국여성의 초상으로 우리나라 최고액권 화폐의 얼굴이 되는 것에 대해 별로 달갑지 않은 사람이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 '표준영정'이 된 이당 김은호 화백의 신사임당 초상은 지나치게 엄격한 인상으로 인간적인 따뜻함이나 재치, 예술가적 기질이 결여되어 있기는 하지만 위엄과 확고한 도덕성이 강렬히 느껴진다. 화폐라는 것은 그 나라의 얼굴이기도 한데, 외국인들이 5만원권을 손에 쥐었을 때 무언가 큰 인물 같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것 같다. 무엇보다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가 신사임당을 하찮은 인물로 인식하고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을 것이 걱정이다.
지금까지 화폐에 등장한 남성들의 초상은 그리 예술성이 높다고 생각되지는 않아도 깐깐한 유학자, 온화하고 후덕한 임금 등의 형상화로서 어느 정도 적절했다. 그 위에 재능과 인품의 향기가 완연한 여성을 담은 고액권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물화전문 화가나 여성화가에게 의뢰했다면 이보다 나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보고 또는 공모를 해서 여러 개의 응모작 가운데서 선정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다. 또 한 사람의 위인이 격하되어 버린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아침논단] 신사임당의 참 얼굴
입력 : 2009.03.08 22:01 / 수정 : 2009.03.08 23:01
최근 공개된 5만원권 초상화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이상적 한국 여성이 전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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