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성극(대본)

대도시에 사는 한 사람

은바리라이프 2009. 6. 21. 09:48

대도시에 사는 한 사람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시 107:14)

<등장인물> 사내 의사
<무대> 긴 장의자와 그 옆에 의자 하나 놓여있는 어느 정신과 의사의 집무실.  - 무대 밝아오면, 차트를 들고 앉아 있는 의사의 모습이 나타난다.


의사 : 간호사! 다음 환자 들여보내요.  무대 좌측으로부터 사내가 비척거리며 들어와 장의자에 앉는다.   의사 (챠트를 들여다보는 채로) 앉으세요.  사내, 당황하며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는다.   의사 (비로소 고개를 들어 사내를 바라보며) 도일남씨?  

사내 : (황송스러운 듯) 네, 네 접니다. 제가 도일남입니다.

의사 : 새벽마다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비명을 지름..... 아내가 잠들기를 기다려 아내의 소매에다 물을 따름.....

사내 :아, 아닙니다. 마누라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따르는 게 아니라, 내가 깨어 났을 때 아내가 잠들어 있으면 물을 따르는 거죠.

의사 : 왜 잠든 아내의 소매에 물을 따르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사내 : 그야 마누라를 깨우려는 거죠.

의사 : 다른 방법도 있었을텐데. 가령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든가.......

사내 : 물론 여러 방법들이 있겠죠. 하지만 제가 택한 방법은 소매에 물을 딸아서 깨우는 것이었죠.

의사 : 왜죠?

사내 : 네?

의사 : 왜 그 방법을 택했느냐는 것입니다.

사내 : 이유는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유국가이고, 저는 그 자유를 구가하였을 따름입니다. 사실, 제가 제 스스로 선택한 방법으로 마누라를 깨울 수 있다는 사실은 제에게 묘한 쾌감을 줍니다. 아니 어쩜 그건 쾌감이라기보다 자유로움일지 모르겠습니다. 잠들어있는 마누라를 깨울 때마다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거나, 고함을 질러 깨워야한다고 강요받는다면..... 아마 전 정말로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의사 : 새벽마다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비명을 지른 것은?

사내 : 그야...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는 게 새벽이니까요.

의사 : (챠트를 뒤적이며) 선생께선 그 외에 여러 증상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화초 잎사귀를 바늘로 콕콕 찌르고......

사내 : (몸을 꼬으며) 아아... 바늘 이야기는 제발 하지 마세요. 온 몸이 콕콕 찔리는 것 같습니다.

의사 : 목욕탕에 가면 신발을 꼭 바꿔 신고 오고......

사내 : 맞습니다.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제 신발을 신고왔었어야 했는데.

의사 : 그건 왜죠?

사내 : 왜라니요? 그럼 선생님은 목욕탕에 가서 남의 신발을 신고 오십니까?

의사 : 그렇군요.

사내 : 그렇죠? 남의 신발을 신고 오는 건 잘못된 것이지요?

의사 : 맞습니다.

사내 :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실 그것 때문에 많이 고민했습니다. 제가 틀렸으면 어떻하나하고요.

의사 : 가끔 우울해지는 적이 있으시죠?

사내 : 네 너무 빈번히.

의사 : 그 우울해질적마다 갑자기 뭔가 막 먹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사내 : 글세요.... 그럴 때 뭐 먹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요....

의사 : 잘 생각해보세요.

사내 :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없어요.

의사 : 그렇군요. 그렇다면 거꾸로 말해서 우울해지는 증상이 있은 후 식욕을 잃었다는 쪽으로 해석해도 되겠군요?

사내 : 네?

의사 : 아무튼 좋습니다. 자, 잠시 선생의 무의식 세계로 들어가 최면치료를 해 보겠습니다.

사내 : 어떻게.....

의사 : 자, 머리를 뒤로 대고 좀 더 편히 누우시고, 아주 평온한 마음을 가져보세요.

사내, 그렇게 한다. 의사의 목소리는 최면을 걸 듯 좀 더 진지하여 간다.

의사 : 의식을 잠재우고 무의식을 깨우기 위해 우선 눈을 감고, 머리 속에 하얀 양떼를 떠올리며, 그 양떼를 세는 것입니다. 자, 해보세요.... 양떼가 보이십니까? (사이) 흰털이 보송보송한 양떼들....

사내 : 보이는 것 같은데.... 닭뗀데요. 꼬꼬댁! 꼬꼬꼬꼬...... 닭들이 웁니다.!

의사 : 자, 그 닭떼를 푸른 초장 위의, 흰털이 보송보송한 양떼로 바꾸는 것입니다. 자, 바꿨습니까?

사내 : 자, 잠깐만요......

의사 : 쉽게 생각하세요.

사내 : 그러는 중입니다. 그런데 닭떼는 양떼로 바뀌었는데, 닭장이 푸른 초장으로 잘 바뀌지 않습니다.

의사 : 할 수 있습니다.

사내 : (자조적으로) 아! 정말 제가 미치긴 미쳤나봐요. 너무 힘들군요.

의사 : 처음에는 누구나 다 힘들어요. 자 이젠 바꾸셨습니까?

사내 : (자신없게) 네....

의사 : 자, 그 양을 세어보세요.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사내 :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네 마리..... 양 아홉 마리 (눈을 감은채 거의 같은 목소리로) 그런데, 선생님, 양을 몇 마리나 세어야 합니까?

의사 : 자, 집중하시고 계속 세세요. 양 열 마리, 양 열 한 마리....

사내 : 사실은 양이 다 떨어져서 드린 말씀인데....

의사 : 쯧쯧.... 집중이 안되시는군요.

사내 : 그게 아니라 양이 다 떨어져서.....

의사 : 자, 그럼 이제 다른 방법으로 하겠어요. 눈을 뜨세요.

사내, : 눈을 뜬다.

의사, : 줄이 달린 추 같은 것을 꺼내어 사내의 눈앞에서 빙빙 돌린다.

의사 : 자, 이 추를 바라보시고, 의식을 집중하세요. 자, 나는 이제 조금씩 졸리기 시작한다..... 조금씩 졸리기 시작한다.

사내 : 잠깐! 질문있습니다. 거기서 나는 선생님이 아니라 저겠죠?

의사 : 맞습니다. 집중하세요. 자, 나는 이제 조금씩 졸리기 시작한다. 조금씩 졸리기 시작한다...... 눈은 깜박거리지 마시고, 조금씩 졸리기 시작한다.... 나는 졸립다..... 온 몸이 나른하다.... 자, 잠이 온다.... 깊은 잠에 빠진다........ 허허! 눈은 깜박거리지 말라니까요!

사내 : 생리적인 현상인데요.....

의사 : 선생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사이) 사내, 눈을 감고 말하기 시작한다.

사내 : 어릴 적에 집에서 강아지를 키웠습니다. 너무 이뻤습니다. 밥도 제가 주고 물도 제가 줬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운동도 같이 하러 나갔지요. 어느날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보니 강아지가 없었습니다. 온 집안과 동네를 찾아 헤멨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녁 어스름해서 아버지가 돌아오셨습니다. 입을 쩝쩝거리며 요지를 이빨 사이에 끼고 말입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죠. 아버지에게 여쭤보았습니다. (눈을 뜨고) 아버지가 제 강아지를 먹었습니까? 아버지는 웃으시면서 대답하셨어요. 안 먹었다. 그러나 저는 웃으시는 아버지가 미심쩍어 다시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제 강아지 정말 안먹었습니까? 아버지는 대답하셨습니다.정말이다. 그래도 이상해서 한 번 더 여쭸습니다. 아버지가 제 강아지 정말 안잡수셨죠? 아버지는 또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이놈아! 정말 안먹었다니까! (사이) 저는 아버지를 믿기로 했지만 저의 강아지는 결코 찾을 수 는 없었습니다. 그 해 가을에 새로운 강아지가 다시 들어오고 그 다음 해 여름에 또 다시 똑같은 일이, 그리고 그 일이 매년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내가 중학교에 올라갔던 해 여름, 아버지는 제 강아지를 바라보시며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남아! 우리 저 멍멍이 먹으러 가자! 그 순간 저는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매 해 여름마다 제 강아지를 잃어버리게 된 이유를 알게되었다는 말입니다. 순간 배신감이 몰려 왔습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엄청난 배신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나도 미웠습니다. 또 그 이야기를 안해준 어머니도 미웠고, 같이 나를 속여 먹은 형도 누나도 미웠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전 누구도 믿지 못하고, 사랑할 수 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 믿지 못하느느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의사 : 선생의 그 상처가 어릴적 그 사건에서 비롯되었군요.

사내 : 상처요? 전 그저 제가 아직껏 보신탕을 멀리 하는 이유를 말씀드린 것 뿐입니다.

의사 : 어쨌든 또 다른 말씀은?

사내 : 좋을실대로.

사내, : 의자를 당긴다.

의사 : 직장은 언제 퇴직하셨죠?

사내 : (완강하게) 아닙니다. 선생님! 전 직장에서 짤린게 아니라, 제 스스로 그만 둔 겁니다.

의사 : 선생에게 짤렸다고 말씀드리지 않았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내 : 사실 그게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직장에서 짤렸다고 하지만 전 결코 짤린게 아니라 제가 그만둔 겁니다. 왜냐고요? 소위 재벌 그룹이라는 회사에서 구멍가계 잡아먹으려는 사업을 하려하고, 그 기획을 저에게 맡긴 것입니다. 대기업이면 대기업으로서 할 일이 따로 있지, 어떻게 구멍가계들을 잡아먹으려고 합니까? 회사가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제가 그 짓을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부장님한테 말했죠. 저는 못하겠다고. 그러니까 너말고도 할 사람 많으니까 싫으면 관두라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 뭔가 이상하더라구요. 평소에 삼차까지 어깨동무하고 어울리던 동료들과 선배들이 저를 피하는 거예요. 서로 터놓고 의지하던 동료들이었는데말입니다. 저는 정말 저의 동료들에게 마음을 줬고, 저의 선배들을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 이후 그들이 전같이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들 눈엔 저에 대한 미움이 가득 차고, 그들의 입가엔 저를 향한 조소가 끊이질 않았어요. 그래서 그만둔 겁니다.

의사 : 그들이 미운가요?

사내 : 네?

의사 : 그들이 너무나도 밉지요?

사내 : .... 미운 게 아니라.... 무섭습니다. 그들만 무서운 게 아니라 집에 있는 마무라도 무섭고 왠지 따돌림하는 친구들도 무섭고 부모님도 무섭습니다.

의사 : 그래서 회사에서 고함치고, 길거리에서 비명지르고 집에 가서 부인 소매에 물을 따른 것입니까?

사내 : 사실 물을 따른 건 내가 깨어있는 동안 혼자 자고 있는 마누라가 무서워서라기보단 미워서였습니다

의사 : 왜 그렇게 밉죠?

사내 :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밉습니다.

의사 : 왜 부인이 선생을 미워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내 : 아니 그게 아닙니다. 제 마누라가 저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제가 저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의사 : 자신이 미우세요?

사내 : 네

의사 : 얼마나 미우시죠?

사내 : 너무나. 이 세상에서 제일 밉습니다. 전 친구들보다 늘 한발자국씩 뒤떨어져 따라가는 제가 밉고, 제 눈과 코가 밉고, 제 입술이 밉습니다. 전 늘 비척거리기만하는 제 몸뚱아리가 밉고, 한번도 사랑 못하고 늘 상처만 받는 제 마음이 밉습니다.

의사, : 시계를 본다.

사내 : 저도 압니다. 사실 그들이 저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사실 전 한번도 누굴 진정으로 사랑해 본적이 없게든요. 그냥 사랑한다는 착각만 해왔지.... 아마 사랑하겠지? 사랑할걸! 맞아! 사랑할거야....

의사 : 자, 예약시간이 끝났군요. 다음에 계속하기로 하죠.

사내 : 잠깐만요. 저는 정말 믿고 사랑하고 싶었어요.....

의사 : 죄송합니다. 다음 환자가 있어서.

사내 :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말씀드리면 됩니다.!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제가 밤 거리의 텅 빈 빌딩 숲 속을 배회하고, 비명지르고, 또 옥상에 올라가 고함을 지르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세요! 아무도 제 말을 들으려하지 않는다구요..... 단 몇 분만 더! 아니 일분만 더! 아니! 일초만 더 들어주셔도 좋습니다.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사내의 절규 속에 무대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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