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G뉴스/문화읽기

도쿄 소나타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게끔 해주는 영화

은바리라이프 2009. 4. 28. 22:04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게끔 해주는 영화

 
 
 
   「도쿄 소나타」. 꽤나 감성적인 제목이다. 제목만 보고는 여느 음악 영화같은 감미롭고 감동적인 이야기일 거라는 예상이 들지만 실상 영화를 보다보면 도대체 왜 제목이「도쿄 소나타」인지 화가 날 정도다. 아무튼 나처럼 이런 잘못된 판단을 하고 들어가 내 예감이 적중하지 않을 때의 짜증을 맛보지 않으려면 영화에 대한 간단한 정보는 알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절.대.음.악.영.화.아.님.
 
「도쿄 소나타」예고편
 
 
  잠깐 연합뉴스 김지연 기자의 '현대인의 초상 '도쿄 소나타'' 기사를 가져왔다.

 

  일본 영화 '도쿄 소나타'에는 퇴근길의 아버지와 하굣길의 아들이 갈림길에서 마주치는 모습이 여러 차례 나온다. 집 대문을 나서면서 세파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집으로 들어가면서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된다.
  이 가정은 사회 전체의 요약본이다. 지붕 밑은 한없이 따뜻할 것 같지만 싸늘한 비밀과 거짓들이 숨어 있다. 그렇다고 이 가족 전체를 거짓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절망의 바닥으로 끝없이 떨어지면서도 결국에는 식탁 앞에 다시 모여앉는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에 살고 있다.
 
  대기업 서무과장 류헤이(가가와 데루유키)는 저임금 중국인들에 밀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다. 아내 메구미(고이즈미 교코)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 그는 매일 공원으로 출근해 무료 급식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초등학생인 막내아들 겐지(이노와키 가이)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지만 아버지의 단호한 반대에 부딪히자 급식비로 몰래 피아노 학원에 등록한다. 제때 귀가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던 큰아들 다카시(고야나기 유)는 미군에 입대해 버린다. 메구미는 우연히 공원에 있던 남편을 보게 되지만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나름대로 가족을 품에 안으려 애쓰던 메구미 앞에 얼뜬 강도(야쿠쇼 고지)가 나타나 흉기로 위협하며 돈을 요구한다.

  이 영화를 만든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그동안 독특한 공포영화들을 만들었다. 그는 'J호러'의 서막을 열어 주고도 후배 J호러 감독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복수' 시리즈, '도플갱어', '절규' 등은 그저 그런 평범한 공포영화가 아닌 인간과 사회를 새롭고 파격적으로 파헤친 작품들이었고 해외 영화제에서 환영을 받았다.

  전형적인 일본 중산층이 살 법한 작은 주택을 배경으로 현대 사회와 현대 가족, 현대인들을 파헤친 '도쿄 소나타'는 구로사와 감독이 호주 출신 작가 맥스 매닉스의 각본을 토대로 만든 첫 가족 드라마지만 그의 개성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주인공 가족에 대한 묘사에는 유머가 깃들어 있지만 섬뜩할 정도의 현실감이 밑을 받쳐 주고 있다. 가장 류헤이는 아내 메구미의 표현대로 '개나 줘 버렸으면 싶은' 권위를 내세우고 애늙은이인 아이들은 자기만의 삶을 살아간다. 
  이를 일본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는 감독의 시각은 깊고 날카롭다. 비좁은 베란다의 문을 닫고 걸레질을 하는 주부, 양복을 입은 채 공원을 헤매는 실직자 등의 풍경은 일본적이지만 경제위기의 늪에 빠져있는 전 세계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일본 국민이 쉽게 미군에 입대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다른 가족에 비해 캐릭터 묘사가 희미한 큰아들을 그 안에 들여보내는 방식으로 세계 속의 일본을 짚어보기도 한다.

  이 가족이 내몰리는 상황은 사실적이고 절망적이다. 그러나 분열에서 통합으로, 파멸에서 부활로 건너가는 결말은 찬란한 희망과 구원을 보여준다.
 
   기사에도 나와 있듯 감독은 공포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공포영화 감독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강도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장면에서는 관객들 모두가 "꺄" 소리를 지를 정도. 갸날픈 손만을 찍는다던가, 아이가 계단에서 떨어지는 장면은 공포영화를 방풀케한다. 개인적으로 공포영화를 싫어하기 때문에 유쾌하지 않았다.
  게다가 같은 배경, 같은 구도의 반복으로 지루함까지!!! 오우 shit!
 
 
  이 영화는 굉장히 현실적이다. 엄마가 집안일을 하거나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은 일본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일본 문화나 일본어 시간에 딱 보여주기 알맞는 영화랄까?(...ㅋㅋ) 가족의 괴로움과 통합해가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은데, 별로 와닿지 않는다. 그리고 엔딩 장면에서는 관객 모두가 어이없어 웃고마는 사태까지..."뭐야, 이게 끝이야?" 이런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님은 먼곳에」의 엔딩에서도 관객들이 웅성댔었는데(난 개인적으로 「님의 먼곳에」엔딩이 정말 좋았지만) 이 영화는 거기에 비할 바가 못된다. ㅡ,.ㅡ 심지어 크레딧 올라갈 때는 음악도 안 나왔다!
 
  칸 영화제가 이 영화를 주목한 것은 이 영화 자체가 정말 우수하다기 보다는 일본의 전형적인 모습을 현실감 있게 잘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먼저,
 
 
- 권위적인 아버지
  그는 실직했다. 하지만 가족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도 못한다. 매일 양복을 빼입고 실직자들이 모여있는 공원에 가서 무료급식을 받고 일자리 소개소에 가서도 내가 이전에는 회사의 과장이었어! 라며 알선해주는 일자리를 거절. 집에서는 자신이 먹자, 고 말할 때까지 가족 아무도 수저를 먼저 들지 못하는 권위자. 그 놈의 권위, 권위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은 꽤나 억압받고 산다. 흥, 그 놈의 권위 따위 개나 주라지!
 
  '권위적인 아버지'는 우리 사회에서 정말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만 땡글 돌려도 많이 보인다! 자식된 입장에서 그 권위라는 것은 정말 부담스럽고 억지스럽기 그지없다. 그지같은 권위.ㅋㅋ (물론 권위 없는 부모도 좋은 건 아니겠지만)
 
  그는 경제난으로 다가온 자신의 실직 상태에 혼란을 느끼고, 청소부 일을 하면서 주운 돈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 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의 책임져야 할 가족의 무게가 코끼리와 사자, 호랑이, 기린을 업은 것보다 더 무거우니 그는 더욱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꼬로록
  모든 남편들이, 모든 아버지들이 느끼는 중압감과 책임감의 무게가 얼마나 크겠는가. 안정되지 못한 자신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제 3자가 보기엔 '뭐, 다시 마음잡고 시작하면 되지.'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게 어디 생각만큼 쉬운 일이던가. 죽고 싶다, 차라리 이 세상에 없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할 만큼 짓누르고 있는 돌덩이의 무게를 그래도 덜어낼 수 있는 건, 소중한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들은 일하고 있다.
 
 
 
- 외로운 엄마
  Q. 이 세상에서 제일 만만한 사람은?
                                         ...........엄마다.
  왜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일을 엄마한테는 온갖 짜증 다 내고, 투정하게 되는 것일까!!!!!!!!!!!!! 결국 그 모든 것이 나의 후회의 표창으로 가슴에 박힐 것을ㅡ ㅜ...
  엄마란 나의 모든 것을 다 받아주고, 당연히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그런 존재로 인식되는 걸까. 그러면서 엄마의 개성이나 엄마의 욕구는 무시하고 말이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집을 깨끗이 하고 맛있는 요리를 하고 아이들과 놀아주던 일이 하나의 task로 자리잡아 오히려 그 일을 하는 기계처럼 취급되는 엄마는 외롭다. 엄마도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고 따뜻한 인사와 사랑을 받고 싶다.
=> 그래서 나온 것이 주말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였다. 이 드라마가 인기 있었던 것도 이 세상의 수많은 엄마의 외로움을 달래주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나 좀 일으켜줘.
 
  엄마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주는 것은 결국 가족이다.
 
 
 
- 가족을 지키기 위해 미군에 입대한 형
  형은 꽤나 멋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을 사랑해 -> 가족을 지키고 싶어 -> 가족을 지키는 건 미군이야 -> 그래서 미군에 들거야! 라는 허점 투성이인 이 논리로 부모님의 반대에도 미군에 들어가지만 거기서도 자신의 행위에 대한 회의감으로 괴로워한다.
 
  참 분량도 작았던 형, 세상이 녹록치가 않지?
 
 
 
- 피아노를 치고 싶은 동생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도전한 이 아이가 나는 꽤나 멋져보였다. 사실 영화가 이 아이 중심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 흠.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들의 음대부중 시험장에 나란히 앉아있는 부부를 보니 눈물이 왈칵.
 
 
  개개인이 세상사를 살아가는 것은 덤불 속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 가시에 긁히고 찢기는 고통을 감내하며 그 속에서 꽃을 발견하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 그런데 내 세상의 덤불을 가지치기 해주고 때로는 나를 업고 가주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가족이다. '나'라는 우주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고립되지 않고 잘 연결되어 굴러갈 수 있는 내 우주의 윤활제, 가족. 내 앞의 가시덤불이 두렵지 않은 이유이다.
 
 
저 권위적인 표정을 보라
 
식사 시간은 가족이 모이는 유일한 시간이다.
 
엄마도 즐겁게 살고싶단다.
 
난 피아노가 치고 싶을 뿐이고
 
선생님은 피아노를 가르쳐주기 보다 자기 연애사의 고통을 인내하기만 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잘~ 생겼다.
 
깨끗한 쇼핑몰을 위하여.
 
덜 떨어진 강도도 힘들다.
 
나의 소나타가 울려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