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소선지서
12장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한,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한다 (찬 334, 420) [내려받기]1. 12장에서는 11장에서 행한 일곱번째 설교가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인간적인 계책에 대한 지적이다. 이스라엘은 본래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푸른 초장에서 꼴을 먹어야했지만, 그들의 허황된 생각은 자기들이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겠다는 것이다(1). 바람은 헛되고 공허한 것이다. 동풍은 성경에서 아라비아 광야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으로서 파괴적인 힘을 가진 부정적 의미로 쓰였다. 가령 집을 날려버리고(욥 27:21), 바다의 배들을 깨뜨리며(시 48:7), 그 바람이 한 번 지나가면 전쟁터처럼 황폐해지는 것이다(렘 18:17). 그러므로 동풍을 그 품에 품는 자는 허황되어서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자이다(욥 15:2). 그러니 그들의 행위는 거짓과 폭력이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으려고 인간적인 계책으로 애굽, 앗수르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올리브 기름은 이스라엘의 값진 상품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이스라엘)의 행위대로 벌을 주실 것이다(2). 유다와 쟁변한다고 하심은 유다는 아직 이스라엘 만큼 죄악이 차지 않았다는 말이고, 이스라엘을 여기서 야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조상 야곱이 가졌던 그 인간적인 계교를 쓰는 성격을 지적하기 위한 의도이다. 야곱을 세 가지로 본문은 지적하는데, 첫째는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 뒤꿈치를 잡고 나온 것이고(3a) 둘째는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룬 것이며(3b) 세째는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한 것(12)이다. 첫째는 태어날 때의 일이므로 의도적인 행동은 아니었겠지만, 성경이 지적하는 바는 그의 천성이 어떤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다는 말씀에서 ‘장년’은 인간적 성숙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힘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야곱이 자기 힘으로 천사와 겨루어 이기려고 했다는 말이다. 그는 자기 힘을 믿고 살다가 결국 하나님께 붙잡히는데 거기서도 지지 않으려고 천사(그리스도의 현현)와 겨룬 것이다. 그가 ‘이겼다’는 표현은 그가 마침내 돌이켜 울며 하나님께 축복을 간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4). 비록 야곱은 계교를 쓰는 자였지만, 하나님께 울며 회개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의 후손인 이 자손도 역시 하나님께 울며 회개하고 나올 때 소망이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라는 말은 미완료형으로 비록 옛날 한 순간에 야곱에서 말씀하신 것이지만, 여전히 그 자손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하는 이름이라고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질책하고 있다(5).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할 일은 분명하다. 그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의 성품인 인애와 공의를 드러내며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다(6).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에는 하나님께 와서 그 안에서 살며 그 안에서 쉬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사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고생인가를 알라는 것이다. 이것은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가 너무나 확연하게 보는 사실이 아닌가! 하나님의 품안에 쉬고 살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자신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의 삶은 항상 하나님을 우러러 살고 세상의 슬픔과 고통을 견디며 구원을 기다리고 장래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을 통해서 자기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2. 이스라엘을 가리켜 ‘상고’ 즉 장삿군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 장삿군이라는 말이 아니라 본래 가나안 사람들이 무역을 하던 상고들이었는데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본래 가나안 사람들의 삶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므로 그렇게 풍자하며 말하는 것이다(7). 거짓 저울로 사취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가나안의 삶 곧 세상의 삶의 방식이었다면, 이스라엘이 이를 똑같이 행했다는 것이다. 사취는 거의 강탈과 같은 말이다. 그렇게 해서 모은 재산으로 자기는 부자라고 떵떵거리면서도 자기에게서는 죄를 찾을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8). 그들의 양심이 실로 화인맞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다시 장막에 거하게 되기를 명절일에 하던 것 같이 하리라고 하신다(9). 이는 심판의 말씀이면서도 동시에 은혜의 말씀이다. 다시 장막에 거한다 함은 이스라엘이 광야의 고생스러운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갈 것을 말씀하는 것이지만, 명절일에 하던 것 같이 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것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초막절에 일주일동안 장막에 거하는 것처럼 일시적인 하나님의 징계가 될 것임을 보여준다. 언제나 하나님의 징계는 비록 고난의 형식을 통해서 오지만, 변장된 축복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많이 말씀하셨다(10). 하지만, 이스라엘은 회개치 않고 계속해서 길갈과 길르앗으로 대표되는 우상숭배의 도시에서 계속 불의와 음란을 행했다(11).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3. 이제 설교의 결론부에서 다시 호세아 선지자는 야곱의 이야기를 꺼낸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서 아람들로 도망했다(12). 하나님께서 그 들에서 야곱을 보호하고 인도하셨듯이, 이스라엘도 그렇게 인도하고 보호해주셨다(13). 그런데 지금 에브라임(이스라엘)은 여전히 자기 계책을 의지하고 범죄하면서도, 조상 야곱처럼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있지 않은가? 조상 야곱이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받았던 은혜를 생각하고 다시 너희도 돌아오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이다.4. 결국 자기 힘, 자기 꾀를 믿고서 허황된 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내려놓지 않는 한,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허황된 것이 허황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진지하게 허황된 것을 추구한다. 그것이 자기를 파멸하게 될 줄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니 거기에는 거짓과 세상 방식이 난무하고 거기서 부를 축적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 품에서 살고 쉬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행복임을 아는 자는 복이 있는 것이다. 야곱은 결국에 그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어떠한가? 5.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의 인생에 허황된 것을 잡으려고 시간을 낭비하거나 저 자신을 파멸과 비참함에 이르게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품에서 살며 쉬는 것이 최상의 행복임을 알고 누리게 하여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