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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겸(過謙)과 과격(過激)의 신학]

은바리라이프 2009. 1. 11. 19:29

설교이론마당
[과겸(過謙)과 과격(過激)의 신학]
2008/04/06 오후 2:22 | 설교이론마당

 

"과겸(過謙)과 과격(過激)의 신학"

-'과격'은 형편없이 비성서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인가- 

1. 서론: 
 
과겸은 과격의 반대되는 개념이다. 오히려 과분한 겸손, 지나친 겸손(Over modesty)이라고 하겠다. 어떤 의미에서는 과겸은 ‘오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지 과겸은 겸손으로, 용서로, 사랑으로 면면히 뻗어 나아가는 맥이고 길이다. 한편 과겸의 반대는 과격이다. 지나친 격렬(Over violence)이고, 급진적 행동과 사상이라고 하겠다(Radical action, Radical ideas). 그러나 과격은 용기로, 엄격으로, 정의로 이어지는 맥이고 과정이다.

2. 본론:
한국교회가 복음이 전래된 지 천주교(Roman Catholic Church)는 약 220년이 되고, 신교(Protestant Church)는 약 120년이 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우리 땅에 상륙하여 선교할 때는 조선조 말기(천주교) 대원군의 박해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기미(속국이란 뜻)에서 우리 백성은 온갖 설움과 고통 중에 신음하던 때였다.

박해와 주권을 잃은 백성들에게 선교사들이 줄 것은 오직 <위로의 복음>이었다. 주권재민이나 주권국가사회의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 인간의 존엄성, 가치 등에 대한 의연함이나 위풍당당하고, 정의로운 기독교 윤리를 전할 상황이 아니어서, 다만 온유와 겸손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이 땅이 아니라 저 천당을 향하게 했다.

사실 신약성서의 말씀들은 대략 AD. 60-95년 어간 35년 동안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마태, 베드로, 베드로의 제자 마가, 바울의 동역자 누가, 사도 요한, 사도 바울 등이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 기록한 27권의 성서이다. AD. 60~95년 사이는 그리스도께서 부활·승천하시고, 재림해 오실 ‘심판주’를 앙모하는 신앙 속에 산 삶이었다(대표적 예로 마 25:1-46).

요한복음, 요한서신, 요한계시록 등은 AD. 85-95년, 즉 10년간에 사도 요한이 기록한 성서이다. 이 시기는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네로황제처럼 극렬한 박해(약 64년 경)에서 정신적이고 어쩌면 더 악랄하고 교묘한 수법으로(비교적 가벼운 방법이라고 하지만) 박해한 트라얀 황제와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전 로마제국으로 확산된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였다.

특히 바울서신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살기를 원했다. 그리스도가 재림주로 오시기 때문에 '노예제도'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비평등적이고, 비인륜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윤리임에도 그냥 용허하는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재림주로 오시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신앙 때문이었다(고전 7:25-40, 살전 4:1-5: 23, 몬 1:1-25 참조).

환언하면, 신약성서의 기독교윤리사상은 '개인윤리'에 관한 교훈뿐이다. 물론 겸손, 용서, 사랑이 성서적 근간을 이루는 윤리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교회공동체 내에서는 사회윤리라는 것이 설 자리도, 명분도, 필요성도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도 그리스도의 재림 신앙 때문이었다. 물론 현재 조직신학적 견지에서 기독교 종말사상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승천 이후부터 지금까지, 또한 언제 오실 지는 모르지만 항상 준비하고 대기하는 이 기간을 역사의 ‘종말’이라고 한다.

위와 같이 신약성서적이고 신학적인 견해에서 볼 때, 오히려 구약성서에서는 사랑과 정의의 윤리관이 수레의 두 바퀴처럼, 동전의 양면처럼 강조하고 있다(이사야서, 아모스서, 미가서, 하박국서 등). 그래서 과거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나라를 강점할 때 구약성서를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구약성서엔 국가사회 윤리관과 사회정의에 대한 윤리관의 교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120년간의 한국 신교 역사에서, 일제 강점기, 해방과 더불어 외세의 통치(미국과 소련) 자유당 정권의 한민족 정체성의 상실, 6·25 골육상쟁,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정치, 현재 남북화해시대 속에서 보수와 개혁세력 간의 색깔 논쟁 등의 역사의 물결을 타고 지금에 이르렀다. 이런 와중에서 한국교회 목사들은 설교만 하면, “서로 사랑하자”, “서로 용서하자” 등의 개인윤리만 강조했다.

그것은 우리 민족사의 발자취가 외세통치, 한민족이란 국가사회적 정체성을 상실된 상황, 골육상쟁을 통한 아픔, 주림, 죽음, 군사문화 속에서 순종과 복종을 강요받으면서, 겸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재림사상과 초대교회의 로마제국의 박해 때와 비슷하게) 시각에서의 의식화였다. 이것은 겸손을 빙자한 오만과 비굴(비겁)로 오도한 것이라고 하겠다. 사랑의 빌미를 삼아 비리와 부패를 은폐하고, 공법과 정의를 눈멀게 했다.

“용기 있게 살자”, “정의롭게 살자”는 것은 ‘과격’으로 오해토록 했다. 미국의 니버(R. Niebuhr) 같은 신학자는 진실, 사실, 정직, 정의는 “힘의 균형”이 설 때만 진실, 사실, 정직이 입증되고, 정의가 실현된다고 하였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핵심적인 문제는 ‘개인윤리에 순치(馴致, bringing about)’된 아주 순한 양들과 수년 전부터 독버섯처럼, 교활한 이리떼처럼, 사악한 ‘악의 무리’(사조직) 때문에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에서 진실과 정직,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근원적 암적 존재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차제에, “악의 무리”에 대한 더 이상 수수방관, 겸손이라는 미명하의 비굴한 자세, 말 못하는 침묵의 무리들, 기회주의자(때를 기다려 강자에게 아부할 수 있는 가능적 존재자들)들 때문에 거듭되는 사건과 사태가 야기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악의 세력'을 대항할 수 있는 '힘의 균형'이 결집되어야만 “··· ··· 하나님의 공법(公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河水)같이 흐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암 5:22).한국교회 성도 여러분! 정말 “과격”이 형편없는 비성서적이고, 기독교의 비윤리적인 것인가. 그러면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그리스도의 과격성을 살펴보자!

그리스도는 성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연민의 정을 가지신 분이었다. 그러나 때와 장소 및 상황에 따라서는 과격하셨다. 그리스도는 온화하기만 한 분이 아니었다. 그는 때때로 성도 내고 욕도 하고 울기도 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하물며 가족까지도 그가 ‘미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할 정도로 과격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전이 장사꾼들한테 더렵혀지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껴 노끈으로 회초리를 만들어서 그 돈궤를 뒤엎고 그들을 쫓아내어 하나님 아버지의 성전을 깨끗이 하였다.

그처럼 성전 청결을 위해서는 폭력을 쓰는 것조차도 사양치 않으셨다. “저주를 받으라. 위선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독사의 자식들아!(우리나라 욕으로 X자식 보다 지독한 말이다) 너희가 어찌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상대해서 욕하는 말로 이보다 더 과격한 말은 없다. 그리스도는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미워하셨다. 하나님의 집을 위한 열정이 그를 삼키어 때로는 분노의 불길로 자신의 몸을 태우셨다.

“나를 따르면서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자기 자신의 생명까지도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또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화평을 주기 위해서 내가 온 것이 아니다.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칼을 주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들까지도 모두 과격했다. 계시록에 표현된 요한도, 야고보서에 나타난 야고보도,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도 과격했다.

사실이지, 성내지도 않고 때와 경우에 따라서 과격해지지 않는 사람은 불성실한 신자이다. 이 지구상의 내로라하는 위인들과 영웅들은 거의 과격했다. 종교개혁자 루터도 과격했다. 영국의 크롬웰도 과격했다. 온화하다고 일컬어진 조지 워싱턴도 때로는 과격했다. 또한 우리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도, 영국의 존 녹스도 과격했다.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게 해보려던 사람은 모두 과격했다.

3. 결론:
오늘의 신자들은 다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상식이나 원만을 주장하며 무난하게 세상살이를 살고자 하는 것은 이기주의자다. 채찍이 아니라도 혀로, 붓으로, 강한 편달(鞭撻)로서 이 허위의 세상에, '한국교회 악의 무리들에게'가(加)해야 한다. 과격하기가 세상 사람들에게, 성도들에게 회자되는 것을 두려워서, 항상 평온하기를, 겸손과 용서와 입에 발린 사랑의 말을 하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이 아니다. 필자는 “하나님 아버지 집을 사모하는 열정이 나를 삼킨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필을 놓는다. 끝.

2008. 4. 6.(6. 29. 다시 포스팅함)
山下연구소장: 양     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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