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말하는 8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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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인사 너무 길어서 읽다보면 앞쪽을 잊여버려 반복해서 읽게 되는군요 너무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영적인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는 글입니다. 참고바랍니다.
"왕국 헌법의 공포"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5, 6, 7장에 기록된 왕국 헌법의 공포에 왔다. 여러 해를 통하여 이 세 장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오해되거나 오용되었다. 이 장들에 관한 메시지들에서 우리는 말씀의 이 부분의 진정한 의미를 보게 되기 바란다.
A. 천국을 받기 위해 영 안에서 가난함
3절에 있는 영은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의 영, 즉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 우리가 하나님을 접촉하고 영적인 것들을 깨닫는 기관을 말한다. 영 안에서 가난한 것은 가난한 영을 갖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영은 결코 가난할 수 없다. 가난한 영을 갖는다는 것은 가련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서 가난하다면 우리는 복이 있다. 영 안에서 가난하게 되는 것은 겸손할 뿐 아니라 우리 영 안에서, 즉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서 비우고 옛경륜에 속한 것들을 붙들지 않고 새로운 것들, 즉 천국에 속한 것들을 받기 위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천국을 깨닫고 소유하려면 우리 존재의 이 부분 안에서 가난해지고 비워지고 짐이 덜어져야 한다. 이것은 천국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주 예수께서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전파하셨을 때(4:17), 많은 이들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이는 그들의 영이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좋은 음료가 제공되었지만 그들의 그릇은 이미 채워져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목마르지 않았다. 우리의 영이 채워져 있을 때 심지어 가장 좋은 음료라도 우리의 그릇에는 그것을 담을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주님은 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분의 헌법을 여는 말씀으로 우리는 영 안에서 가난해야 하며 우리의 영은 모든 것을 위하여 비워져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가난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주의해야하며, 『주여, 나를 비워 주소서. 주여, 나의 영을 비워 주소서. 나는 나의 영에 어떤 것도 저장해 두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여, 나는 나의 영이 온통 당신에게만 유용하기 원합니다.』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3절은, 『영 안에서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에 가려고 애쓰지만 천국 안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늘에 대하여 갈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하늘에 있지 않고 천국에 있다. 영 안에서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전적으로 우리의 영에 관계 있다. 5장의 첫 번째 축복은 우리 영 안에서의 축복-『영 안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이다(5:3). 따라서 이 장에서 다루어진 천국의 첫째 방면은 우리 사람의 영과 관계 있다.
3절에 대한 매우 빈약한 번역들-『생각이 겸손한 자는 행복하리니』, 『마음이 겸손한 자는 복이 있나니』-이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께서 영 안에서 가난한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욱이 그들은 천국이 전적으로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문제임을 모른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는 끝날 것인데, 이는 천국이 우리의 영과 관계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산에서 말씀하고 계실 때 그의 청중들, 즉 갈릴리 사람들로 구성된 청중들의 실제적인 상황을 아셨다. 그 갈릴리 사람들은 전통적인 종교의 관념으로 채워져 있었다. 심지어 요한복음 4장에 있는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조차도 많은 종교적인 관념들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주님과의 대화가 이 사실을 드러낸다. 만일 그러한 낮은 부류의 여인까지도 종교적인 관념으로 가득했다면 틀림없이 갈릴리 어부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일 년에 세 번 그들은 절기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으며 매번 최소한 일 주일 동안 머물렀다. 이 한 가지 사실이 당신에게 그 갈릴리 어부들이 빈 그릇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주 예수님이 땅에 계시는 동안 모든 사람들-그들이 유대인이든 로마인이든 헬라인이든-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 관념과 그들의 성경 지식과 율법의 교훈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들은 거룩한 성과 거룩한 성전과 제사장의 봉사의 거룩한 체계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았다. 그들은 제단과 제물들과 절기들과 의식들과 규례들, 즉 그들이 밖의 축복으로 간주했던 것들에 대하여 알았다.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은 언급할 필요도 없는데, 이는 심지어 주 예수 앞에 있던 유대인들조차도 그들의 전통적인 관념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주 예수는 새로운 경륜을 시작하시기 위하여 새 왕으로서 오셨다. 새 왕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은 새 경륜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새 경륜은 놀라운 인격을 포함한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이 새 경륜은 바로 이 인격이다. 천국을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것으로 생각지 말라. 아니다, 천국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왕이 없이 우리는 왕국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천국을 가질 수 없다. 바리새인들이 주 예수께 하나님의 왕국이 언제 오느냐고 물었을 때 주님은 『보라 하나님의 왕국은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고 대답하셨다(눅 17:21).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분 자신이 왕국이었음을 가리킨다. 예수가 계신 곳에 또한 왕국이 있다. 왕국은 바로 왕의 인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왕을 가질 때 우리는 왕국도 갖는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이 명절에 참석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침례자 요한은 예루살렘 밖 광야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의심할 바 없이 이 네 사람은 그에게 매혹되었다. 결국 그들은 요단강가에서 예수를 만나 구원받았다. 주 예수는 이 네 제자들이 침례 받았던 요단 강에서 침례 받았으며, 거기에서 기름 부음 받았다. 주 예수의 기름 부음 받으심에 이어서 그분이 시험받으신 사십 일의 기간이 있었다. 그 사십 일은 또한 이 새로 구원받은 네 명의 제자들에게도 시험이었다. 주 예수는 시험을 통과하셨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요단강에서의 구원의 체험을 잊어버리고 먹고 살기 위하여 갈릴리 바다로 돌아감으로 시험에 실패했다. 둘은 그물 던지는 일을 하고 있었으며, 둘은 그물 깁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서 고기를 잡고 그물을 수선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패배했음을 입증한다. 그들은 구원받았지만 그들의 옛 상황으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패자들이다.
새 왕은 광야로 이끌리셨으며 거기서 원수를 이기고 승리를 얻으셨다. 사탄에 대한 싸움에서 승리하신 후 새 왕은 갈릴리 바다로 오셨으며, 그것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깜짝 놀라게 했다.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이 그들을 접촉하신 것은 두 번째였다. 우리가 메시지 12에서 본 대로 이 네 제자들이 첫 번째 주님께로 인도되었을때, 그들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주님을 보았다. 그러나 두 번째에 주님은 그들에게 큰 빛으로서 자비로운 방문을 하셨다. 성경은 이 네 제자들에 대한 부르심의 묘사에 있어서 매우 경제적이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고기를 잡고 있었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그물을 깁고 있었다. 갑자기 사십여 일 전에 그들을 만나셨던 분이 그들에게 비취는 큰 빛으로 나타나셨다. 그들은 이분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분께 사로잡혔었다. 그러나 이번에 하나님의 어린 양은 그들에게 비취는 큰 빛이셨다. 그들에게 비취신 후 새 왕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고 이 네 제자들은 그분을 따랐다. 결국 이네 제자들은 주 예수를 따르는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군중들은 그분께 이끌렸다.
주 예수께서 산꼭대기에 오르셨을 때 그분의 제자들은 새 왕의 공포를 위한 내적 범주, 즉 직접적인 청중이 되기 위해 그분께 나왔다. 그분이 말씀하신 첫 번째는 『영 안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였다. 이 말은 4장 17절에 있는 주님의 전파의 계속이었으며, 거기서 주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분의 전파하심에 있어서 생각 곧 사고를 다루셨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너희는 회개해야 한다. 너희는 너희의 생각하는 것과 정신을 바꿔야 한다. 너희의 생각은 전환이 필요하다.』 의심할 바 없이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모두 그들의 이해에 있어서 참된 전환을 가졌다. 그 당시 그들은 새 왕의 공포를 위한 직접적인 청중이 되는 내적 범주 안에 있었고 그들의 생각에 관하여 어떤 문제도 없었다. 그들의 생각은 이미 변화를 체험했다.
우리의 생각의 전환은 우리가 왕국 안으로 들어가고, 왕국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관문을 제공한다. 생각은 수령자나 내실이 아닌 출입문(gateway)이다. 수령자, 즉 내실은 우리의 영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은 출입문이요, 우리의 영은 내실이다. 우리는 4장 17절에 있는 주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씀을 5장 3절의 말씀 『영 안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라는 말씀과 함께 두어야 한다. 돌이켜진 생각은 출입문으로서 그것을 통하여 천국은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왕국이 올 때 그것은 우리의 영 안에 심겨진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의 관문을 통하여 들어오며 우리의 영에 도달한다. 왕국을 받아들이고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은 천국을 받아들이는 곳이요 담는 곳이다.
복음의 비밀을 아는 전도자들은 그들의 전파에 있어서 먼저 사람들의 생각을 다룬다. 그 다음에 그들은 계속하여 그들의 영을 다룬다. 복음 전파는 사람들의 생각, 곧 그들의 사고 방식을 다루어야 한다. 이것은 그들로 회개하게 하며 그들의 생각하는 것과 삶의 방식을 돌이키게 한다. 어떤 사람이 회개하자마자 합당한 복음 전파자는 그에게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생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영을 다루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그의 영을 사용하면 주님은 즉시 그 사람의 생각의 관문을 통과하여 영에 도달함으로 그의 영 안에 들어가실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통과하여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신 그 주 예수는 왕이시다. 왕국은 그분과 함께 있다. 왕이 어떤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갈 때 이것은 왕국 또한 그의 영 안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그때로부터 왕과 왕국이 둘 다 그의 영 안에 머문다. 오늘날의 타락된 기독교의 가르침 안에는 우리 영 안으로 들어오신 그리스도가 바로 왕국과 함께 있는 왕이심을 지적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분이 당신의 영 안으로 들어올 때 왕국이 그분과 함께 도달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구주뿐 아니라 또한 왕국과 함께 하신 왕을 갖는다.
여러 해를 통하여 우리는 디모데후서 4장 22절의 말씀-『주께서 네 영에 함께 계실지어다』-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우리는 항상 이것을 생명의 문제에 적용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또한 주 예수께서 우리의 영에 계신다고 말할 때마다 그것은 왕국이 우리의 영과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함을 보아야 한다. 주 예수는 구주요 생명일 뿐만 아니라 또한 왕국과 함께 계신 왕이시다. 오늘날 우리는 『나는 내 영 안에 구주와 생명과 왕과 왕국을 가지고 있다!』고 선포할 수 있다. 우리가 회개하고 구주요, 생명이요, 왕국과 함께 계신 왕이신 주 예수를 믿을 때, 그분은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시며 거기에 심겨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의 영 안에 구주와 생명과 왕국과 함께 계신 왕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 안에서 회개하고 영 안에서 가난함으로 우리 안으로 그러한 분을 영접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나의 타락한 상태 안에서 행하고있었을 때 나는 철학과 종교로 충만했었다. 나는 그릇된 방향 안에서행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가치 없는 관념과 사상으로 충만했었다. 복음 전파를 들었을 때 나는 생각에서 전환을 가졌었고 나의 생각은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많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관념으로 충만했다. 따라서 나에게는 나의 생각의 전환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영 안에서 가난하게 되어야 했다. 우리의 영 안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의 영을 비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을 열고 다른 모든 것들을 내려놓음으로 주 예수께서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분이 내 안으로 들어오셨을 때 그분은 왕국과 함께 계신 왕으로서 오셨다. 그러므로 당신이 영 안에서 가난하다면 천국은 당신의 것이다. 당신이 당신의 생활을 전향하고 이제 주님을 대하여 서 있을지 모르나 당신의 영은 어떠한가? 당신의 영은 그분께 열려 있는가 아니면 다른 것들로 충만한가? 당신은 여전히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관념으로 충만한가? 헬라인들은 플라톤의 철학으로 충만하고, 중국인들은 공자의 가르침으로 충만하고, 유대인들은 모세의 가르침으로 충만할 것이다. 왕국과 함께 계신 왕이 당신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당신은 영 안에서 가난해야 한다. 이것은 당신이 당신의 존재의 깊은 곳을 열고 당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관념과 의견과 사상을 몰아내야 함을 의미한다. 당신이 당신의 영을 비울 때 왕국과 함께 계신 왕이 당신 안으로 들어오실 것이다. 그럴 때 천국은 당신의 것이다.
3절에 있는 술어의 시제에 주의하라. 그것은 미래 시제가 아니라 현재 시제이다. 이 구절은 『천국이 저희의 것이리라』고 말하지 않고, 『천국이 저희의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당신의 존재의 깊은 곳, 즉 당신의 영을 열고 당신 자신을 내려놓고 당신의 영을 비울때, 생명 주는 영이신 왕은 당신의 회개한 생각의 관문을 통하여 왕국과 함께 당신의 왕이 되기 위해 당신의 영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때로부터 왕국은 당신 안에 있으며, 천국은 당신의 것이다. 이것이 신약에 따른 구원이다.
이제 우리는 3절의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 『영 안에서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우리는 대명사를 바꿔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영 안에서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천국이 우리의 것임이요』. 우리가 이 구절의 의미를 일단 이해하면 왕국이 천년 왕국 때까지 연장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임을 볼 것이다. 이 구절에 있는 「이요」라는 단어는 천국이 바로 지금 우리의 것임을 입증한다. 우리는 얼마나 축복된 자들인가! 영 안에서 가난한 것은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 만일 우리가 영 안에서 가난하다면 천국은 우리의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 말씀을 당신 안으로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결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 한 구절이 백 개의 메시지보다 낫다. 할렐루야, 천국이 우리의 것임이요! 우리는 참으로 복되고 행복한 자들이다. 우리가 영 안에서 복되고 행복한 것은 천국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B. 애통하는 자들은 위로를 받을 것임
우리는 우리가 오늘 천국 안에 있다는 것을 들을 때 매우 기쁘겠지만 다음 구절에서 주 예수는 우리에게 애통하라고 말씀하신다. 4절은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한다.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고 행복하다는 말은 논리적인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왕과 왕국으로 충만한 영을 가지고 얼마동안 기도한다면 오늘날의 소극적인 상황에 대해 우리는 애통하게 될 것이다. 세상의 전체적인 상황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소극적이다. 사탄과 죄와 자아와 어둠과 세상적인 것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지배적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모욕을 당하고, 그리스도는 배척되고, 성령은 방해를 받으며, 교회는 황폐해지고, 자아는 부패되고, 온 세상은 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상황에 대해 애통하기를 원하신다. 왕국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주하시는 왕에 의하여 정복되고 통제되고 다스림 받는다. 만일 우리가 이 다스림 아래 있으면서 오늘날의 세상의 환경과 상태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한숨짓고 애통할 것이다.
그러나 이 애통함은 축복인데, 이는 주께서 애통하는 자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경륜에 따라 애통한다면 우리는 천국과 함께 상을 받음으로써 위로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소극적인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하늘에 속한 다스림을 볼 것이다. 많은 때에 나는 애통함과 위로 받음을 체험했다. 실망하지 말라. 우리는 애통해야 하지만 소망으로 충만하다. 왕은 오고 계시며, 원수는 패배할 것이며, 땅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통치될 것이다. 빠르든 늦든 우리는 위로 받을 것이다. 주의 회복 안에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추구하는 것은 위로가 아닌가? 이것은 나에게 어떠한 위로인지! 만일 당신이 당신의 영 안에서 결코 애통함을 체험한 적이 없다면 오직 주님의 왕국만을 관심하는 매우 많은 이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 위로인가를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의 회복 안에 있는 모든 사랑스러운 성도들을 사랑한다. 모든 추구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는 모든 교회들은 모든 애통하는 영에 대한 참된 위로이다.
C. 온유한 자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음
이 구절들의 문맥은 매우 의미가 깊다. 먼저 우리는 왕국과 함께 계신 왕을 영접하고 그분을 담기 위하여 영 안에서 가난하다. 그 다음에 우리는 가련한 상황들에 대하여 애통하며 위로를 받는다. 이에 이어서 우리는 온유함이라는 단어를 갖는다. 5절은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한다. 어떤 번역자들은 「땅(earth)」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를 「육지(land)」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육지로 번역하든 땅으로 번역하든 그것은 장차 오는 정복된 땅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늘날 땅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적인 왕국이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그날 왕이신 주님은 이 땅을 다스릴 것이다. 계시록 11장 15절은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영원토록 다스릴 것이라』고 말한다. 계시록 11장 15절에서 말한 세상은 5절에 있는 땅이다.
마태복음 5장 5절에서 주님은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3절에 있는 영 안에서 가난한 자들과 4절에 있는 애통하는 자들은 이제 5절에서 온유한 자들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점잖고 겸손하고 복종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세상의 반대에 대항하지 않고 그것을 달게 받는 것이다. 온유하다는 것은 싸우거나 대항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온유하여 이 시대에 세상의 반대를 달게 받는다면 우리는 히브리서 2장 5절부터 8절과 누가복음 19장 17절, 19절에 계시된 대로 장래 오는 시대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오늘날은 싸우는 사람들이 땅을 획득한다. 만일 당신이 싸우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떤 영토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그처럼 전쟁이 많은 이유이다. 나라들은 서로 더 많은 영토를 얻기 위하여 싸운다. 인간적인 방법은 싸움에 의하여 땅을 얻는 것이지만 천국의 방법은 온유함으로 땅을 얻는 것이다. 싸울 필요가 없으며 온유할 필요가 있다. 어떤 젊은이들은 땅을 차지하는 것에 대하여 구호를 외쳐 왔다. 땅을 차지하는 방법은 구호나 외침이나 싸움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 길은 온유함을 통해서이다.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는데, 이는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싸우는 사람인가 온유한 사람인가? 만일 당신이 땅을 기업으로 얻으려면 온유해야 한다.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은 땅을 다스리실 것이다. 그분은 체포되셨고 시련을 당하셨으며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그분은 온유하셨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저항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방면에서 온유하셨으며, 끝까지 온유하셨다. 결국 땅은 싸우는 자들이 아닌 온유한 자들이 얻게 될 것이다. 수 주일 전에 한 반대자가 우리 형제들 중 한 명에게 『우리는 너희를 멈추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간이 누가 멈출 것인가를 말해 줄 것이다. 싸우는 자들은 멈추어질 것이지만 온유한 자들은 멈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사탄은 언제나 싸우지만 주 예수님은 결코 싸우지 않으신다. 그 대신 그분은 온유하시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 사람의 경륜과 다르다는 것을 본다. 만일 당신이 땅을 얻기 원한다면 당신은 온유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어떤 땅도 받지 못했다면 이는 당신이 충분히 온유하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청년들이여, 여러분은 캠퍼스에서 온유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하늘의 언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싸우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얻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싸우자!』라고 말하지 말라. 아니다, 당신은 오히려 『온유함으로 땅을 차지하자.』라고 말해야 한다. 당신은 온유함이 물질적인 것에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이 문제를 주의 깊게 생각한다면 온유함이 우리 밖의 물질적인 것에 관계되지 않음을 보게 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내적인 어떤 것들, 즉 우리의 존재 안에서의 어떠함에 관계된 것이다.
D.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만족할 것임
6절에서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만족할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의는 우리의 행동에 있어서 옳은 것이다. 이 의는 우리의 내적인 어떠한 것과 관계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만족할 것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지적된다.
6절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또한 20절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20절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3절과 20절에서 우리는 천국의 두 방면을 본다. 3절에 있는 동사는 현재 시제이고, 20절에 있는 시제는 미래 시제이다. 한편으로 천국은 우리의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천국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영 안에서 가난하다면 천국의 실제는 오늘날 우리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천국의 나타남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천국의 두 방면, 즉 오늘날 교회 생활 안에 있는 실제와 장래 천년 왕국의 위에 속한 부분 안에 있는 천국의 나타남을 기억하라. 만일 우리가 참으로 영 안에서 가난하고, 그리스도를 추구한다면 천국의 실제는 우리의 것이다. 그럴 때 천년 왕국에서 우리는 천국의 나타남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나타남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능가하는 의, 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능가하는 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천국 안으로 들어가도록 이 의를 위하여 굶주리고 목말라야 하며 그러한 의를 추구해야 한다(6, 10, 20절). 만일 우리가 의를 위하여 목마르고 굶주린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추구하는 그 의로 우리를 만족케 하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능가하는 의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의는 단지 하나님께 의롭게 될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의롭게 되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다소 낮은 것인데, 이는 그것이 율법을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는 옛 율법을 따라서는 안되며 새 율법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보겠지만 새 율법은 옛 율법보다 훨씬 높다. 옛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새 율법은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22절)고 말한다. 이 한 예로써 우리는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있음을 본다. 우리는 단지 살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의 형제에게 화내지도 말아야 한다. 이 의는 가장 높은 수준이다.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은 이 의를 얻지 못한다. 이 내적인 주관적 의는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새 율법의 요구를 이루실 수 있다. 내가 젊은이로서 마태복음 5장을 읽었을 때 나는 실망하여, 『나는 결코 이것을 해 낼 수 없다.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더 자라면 자랄수록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그것을 할 수 있는 생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더욱더 깨닫게 되었다. 내 안에서 그분의 왕국과 함께 계신 왕은 그것을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이 왕은 우리의 동역을 필요로 하신다. 우리는 굶주리고 목마름으로 동역한다. 우리는 『오, 주 예수여, 나는 당신으로 인하여 목마르고 굶주립니다. 주여, 나는 당신으로 충만 되기 원합니다.』라고 말함으로 동역한다. 당신이 이러한 방법으로 굶주리고 목마르다면 당신은 만족케 될 것이다.
6절에 있는 의는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것은 능가하는 의, 즉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에 있는 의이다. 그분이이 가장 높은 의를 산출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나를 굶주리게 만드소서. 나에게 당신 자신을 위한 식욕을 허락하소서. 나에게 능가하는 의를 추구하는 식욕을 허락하소서.』 만일 당신이 이러한 방법으로 의를 추구한다면 당신은 만족될 것이다. 당신은 추구하고 있는 것을 받을 것이다.
E. 긍휼히 여기는 자들은 긍휼을 받음
7절은 『긍휼히 여기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한다.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의로운 것이지만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천국을 위해 의로와야 할 뿐 아니라 긍휼히 여겨야 한다. 긍휼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받을 수 없는 것을 받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긴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며(딤후 1:16, 18), 특히 그분의 심판대에서 긍휼을 주실 것이다(약 2:12-13).
의롭게 되는 것은 엄격한 방법으로 당신 자신을 다루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다루는 데 있어서 엄격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어떤 변명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을 향해서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능가하는 의를 부지런히 추구한다면 우리는 결국 다른 이들을 향해서 긍휼을 베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이 약해서 곧잘 실패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천연적인 사람의 가련한 상태를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은 결코 다른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 수 없다. 그들에게 긍휼을 보이는 대신 당신은 그들이 실패하거나 타락했을 때 그들을 정죄할 것이다. 당신이 그들을 정죄하는 이유는 당신이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안다면 어떤 이가 실패할 때마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여, 나와 나의 형제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우리는 모두 약한 그릇이요 당신의 요구를 이룰 수 없습니다. 주여, 나의 형제가 나를 마음 상하게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긍휼을 베풀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결코 실패한 적이 없다면 당신은 결코 긍휼을 베풀지 못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거룩함과 온전함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성공적이라면 당신은 다른 이들이 실패할 때 그들을 향해서 동정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언제나 그들을 정죄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얼마나 약하며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는가를 안다면 당신은 다른 이들에게 긍휼을 보일 것이다.
7절에는 우리를 위한 약속이 있다. 그 약속은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오늘 긍휼이 없이 당신의 형제를 판단한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어떤 긍휼도 받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긍휼이 없이 다른 이들을 판단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을 긍휼이 없이 판단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당신의 형제에게 긍휼을 베푼다면 주님은 그분의 심판대에서 당신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따라서 왕국 백성들은 자신들을 엄격하게 다루어야 하지만 다른 이들을 대함에 있어서는 많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것은 외적인 일이 아니고 우리의 내적 존재에 관계된 일이다.
F.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하나님을 볼 것임
8절은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한다.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다루는 데 있어서이고, 긍휼히 여기는 것은 다른 이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이며, 마음이 순수한 것은 하나님을 대하는 데 있어서이다. 우리 자신을 향하여 우리는 엄격해야 하며 어떠한 변명도 허락해서는 안된다. 다른 이들을 향하여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야 하며 그들이 받을 만한 것보다 더 주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는 마음이 순수해야 하며 그분 이외의 어떤 것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순수한 자들을 위한 보상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보상이다. 하나님 자신보다 더 큰상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는 엄격하고 의로움으로,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는 긍휼히 여김으로, 하나님을 향하여는 마음이 순수함으로 이상을 얻는다.
마음이 순수하다는 것은 목적에 있어서 단순한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고전 10:31) 단순한 목적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천국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관이요(요 1:12, 3:6),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가 생명의 씨로서 성장하는 땅이다(13:19). 천국을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영 안에서 가난해야 하며 영 안에서 비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가 방해받지 않고 우리 안에서 성장하도록 우리의 마음이 순수해야 하며 단순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함에 있어서 마음이 순수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마음이 순수한 것에 대한 상이다. 이 축복은 오늘날과 장래 오는 시대를 위한 것이다.
G. 화평케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
9절은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한다. 사탄, 즉 거스르는 자는 모든 거역의 선동자이다. 천국을 위하여, 그 하늘에 속한 다스림 아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로 더불어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히12:14).
처음 일곱 가지 축복들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싸우는 자들이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항상 다른 이들과 화평하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본다. 만일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마귀의 자녀들은 문제를 일으키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평케 한다. 하나님의 아들인 주 예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평케 하셨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인 우리는 화평케 하는 데 있어서 그분을 따라야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는 평강의 하나님이며(롬 15:33, 16:20), 화평의 본성을 가진 화평의 생명이 있으시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태어난 자로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그분의 신성한 본성에 따라 그분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나타낼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H.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은 천국에 참여함
10절은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한다.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고(요일 5:19)불의로 가득하다. 만일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우리는 의를 위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천국을 위해 추구하는 의에 대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의롭다면 우리는 정죄 받고 반대당하고 핍박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당할 것이다. 의롭게 되기 위하여 그들의 최선을 다한 많은 성도들이 그 결과로 핍박을 당했다. 그들의 환경과 사업과 고용에는 많은 의롭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들이 그러한 상황 안에서 의롭게 되기를 갈망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로부터 핍박을 당했다.
이 구절은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의를 추구한다면 천국은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는 지금 천국의 실제 안에 있고 장래 오는 시대에 그 나타남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20절에 따라 천국에 있기 위해서는 능가하는 의, 즉 가장 높은 수준의 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천국의 나타남 안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에게는 이러한 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목마르고 굶주릴 필요가 있으며 그것을 위해 핍박을 받는다.
I. 그분을 인하여 능욕을 당하고 핍박받고 모든 악한 말을 듣는 자들은 하늘에서 큰상을 받음
11절에서 새 왕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다. 10절에 있는 핍박은 우리가 추구하는 의를 인한 것이다. 한편 11절에 있는 핍박은 직접적으로 우리가 따르는 그리스도 곧 새 왕을 인한 것이다.
우리가 천국의 영적인 본성과 하늘에 속한 원칙에 따라 천국을 위한 생명을 살 때 우리는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관념을 고수하는 대부분의 종교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악한 말을 듣는다. 유대 종교인들은 천국의 초기 시대에 사도들에게 이러한 모든 일을 행했다(행 5:41, 13:45, 50, 고후 6:8, 롬 3:8).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당신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추구한다면 교파 안에 있는 많은 이들이 일어나 당신을 대항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욕과 핍박을 당했으며 심지어 우리에 대한 풍문들이 퍼졌다. 최근에 이름 있는 어떤 출판사가 우리를 힌두교와 연관시킨 책을 출간했다. 이 얼마나 악한 풍문인가! 이러한 욕과 핍박이 우리에게 오는 것은 우리가 전통을 주의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순수한 말씀만을 주의하기 때문이다.
12절에서 주 예수는 그분을 인하여 핍박받는 자들에게 격려하는 말씀을 하신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아홉번째 축복인 이 상은 앞에 있는 여덟 가지 축복의 결과도 모두 상임을 가리킨다. 이 상은 크고 하늘에 있는 상, 즉 땅에 속한 상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상이다.
"왕국 헌법의 공포"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5, 6, 7장에 기록된 왕국 헌법의 공포에 왔다. 여러 해를 통하여 이 세 장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오해되거나 오용되었다. 이 장들에 관한 메시지들에서 우리는 말씀의 이 부분의 진정한 의미를 보게 되기 바란다.
A. 천국을 받기 위해 영 안에서 가난함
3절에 있는 영은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의 영, 즉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 우리가 하나님을 접촉하고 영적인 것들을 깨닫는 기관을 말한다. 영 안에서 가난한 것은 가난한 영을 갖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영은 결코 가난할 수 없다. 가난한 영을 갖는다는 것은 가련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서 가난하다면 우리는 복이 있다. 영 안에서 가난하게 되는 것은 겸손할 뿐 아니라 우리 영 안에서, 즉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서 비우고 옛경륜에 속한 것들을 붙들지 않고 새로운 것들, 즉 천국에 속한 것들을 받기 위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천국을 깨닫고 소유하려면 우리 존재의 이 부분 안에서 가난해지고 비워지고 짐이 덜어져야 한다. 이것은 천국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주 예수께서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전파하셨을 때(4:17), 많은 이들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이는 그들의 영이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좋은 음료가 제공되었지만 그들의 그릇은 이미 채워져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목마르지 않았다. 우리의 영이 채워져 있을 때 심지어 가장 좋은 음료라도 우리의 그릇에는 그것을 담을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주님은 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분의 헌법을 여는 말씀으로 우리는 영 안에서 가난해야 하며 우리의 영은 모든 것을 위하여 비워져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가난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주의해야하며, 『주여, 나를 비워 주소서. 주여, 나의 영을 비워 주소서. 나는 나의 영에 어떤 것도 저장해 두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여, 나는 나의 영이 온통 당신에게만 유용하기 원합니다.』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3절은, 『영 안에서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에 가려고 애쓰지만 천국 안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늘에 대하여 갈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하늘에 있지 않고 천국에 있다. 영 안에서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전적으로 우리의 영에 관계 있다. 5장의 첫 번째 축복은 우리 영 안에서의 축복-『영 안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이다(5:3). 따라서 이 장에서 다루어진 천국의 첫째 방면은 우리 사람의 영과 관계 있다.
3절에 대한 매우 빈약한 번역들-『생각이 겸손한 자는 행복하리니』, 『마음이 겸손한 자는 복이 있나니』-이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께서 영 안에서 가난한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욱이 그들은 천국이 전적으로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문제임을 모른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는 끝날 것인데, 이는 천국이 우리의 영과 관계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산에서 말씀하고 계실 때 그의 청중들, 즉 갈릴리 사람들로 구성된 청중들의 실제적인 상황을 아셨다. 그 갈릴리 사람들은 전통적인 종교의 관념으로 채워져 있었다. 심지어 요한복음 4장에 있는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조차도 많은 종교적인 관념들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주님과의 대화가 이 사실을 드러낸다. 만일 그러한 낮은 부류의 여인까지도 종교적인 관념으로 가득했다면 틀림없이 갈릴리 어부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일 년에 세 번 그들은 절기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으며 매번 최소한 일 주일 동안 머물렀다. 이 한 가지 사실이 당신에게 그 갈릴리 어부들이 빈 그릇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주 예수님이 땅에 계시는 동안 모든 사람들-그들이 유대인이든 로마인이든 헬라인이든-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 관념과 그들의 성경 지식과 율법의 교훈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들은 거룩한 성과 거룩한 성전과 제사장의 봉사의 거룩한 체계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았다. 그들은 제단과 제물들과 절기들과 의식들과 규례들, 즉 그들이 밖의 축복으로 간주했던 것들에 대하여 알았다.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은 언급할 필요도 없는데, 이는 심지어 주 예수 앞에 있던 유대인들조차도 그들의 전통적인 관념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주 예수는 새로운 경륜을 시작하시기 위하여 새 왕으로서 오셨다. 새 왕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은 새 경륜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새 경륜은 놀라운 인격을 포함한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이 새 경륜은 바로 이 인격이다. 천국을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것으로 생각지 말라. 아니다, 천국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왕이 없이 우리는 왕국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천국을 가질 수 없다. 바리새인들이 주 예수께 하나님의 왕국이 언제 오느냐고 물었을 때 주님은 『보라 하나님의 왕국은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고 대답하셨다(눅 17:21).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분 자신이 왕국이었음을 가리킨다. 예수가 계신 곳에 또한 왕국이 있다. 왕국은 바로 왕의 인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왕을 가질 때 우리는 왕국도 갖는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이 명절에 참석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침례자 요한은 예루살렘 밖 광야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의심할 바 없이 이 네 사람은 그에게 매혹되었다. 결국 그들은 요단강가에서 예수를 만나 구원받았다. 주 예수는 이 네 제자들이 침례 받았던 요단 강에서 침례 받았으며, 거기에서 기름 부음 받았다. 주 예수의 기름 부음 받으심에 이어서 그분이 시험받으신 사십 일의 기간이 있었다. 그 사십 일은 또한 이 새로 구원받은 네 명의 제자들에게도 시험이었다. 주 예수는 시험을 통과하셨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요단강에서의 구원의 체험을 잊어버리고 먹고 살기 위하여 갈릴리 바다로 돌아감으로 시험에 실패했다. 둘은 그물 던지는 일을 하고 있었으며, 둘은 그물 깁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서 고기를 잡고 그물을 수선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패배했음을 입증한다. 그들은 구원받았지만 그들의 옛 상황으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패자들이다.
새 왕은 광야로 이끌리셨으며 거기서 원수를 이기고 승리를 얻으셨다. 사탄에 대한 싸움에서 승리하신 후 새 왕은 갈릴리 바다로 오셨으며, 그것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깜짝 놀라게 했다.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이 그들을 접촉하신 것은 두 번째였다. 우리가 메시지 12에서 본 대로 이 네 제자들이 첫 번째 주님께로 인도되었을때, 그들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주님을 보았다. 그러나 두 번째에 주님은 그들에게 큰 빛으로서 자비로운 방문을 하셨다. 성경은 이 네 제자들에 대한 부르심의 묘사에 있어서 매우 경제적이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고기를 잡고 있었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그물을 깁고 있었다. 갑자기 사십여 일 전에 그들을 만나셨던 분이 그들에게 비취는 큰 빛으로 나타나셨다. 그들은 이분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분께 사로잡혔었다. 그러나 이번에 하나님의 어린 양은 그들에게 비취는 큰 빛이셨다. 그들에게 비취신 후 새 왕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고 이 네 제자들은 그분을 따랐다. 결국 이네 제자들은 주 예수를 따르는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군중들은 그분께 이끌렸다.
주 예수께서 산꼭대기에 오르셨을 때 그분의 제자들은 새 왕의 공포를 위한 내적 범주, 즉 직접적인 청중이 되기 위해 그분께 나왔다. 그분이 말씀하신 첫 번째는 『영 안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였다. 이 말은 4장 17절에 있는 주님의 전파의 계속이었으며, 거기서 주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분의 전파하심에 있어서 생각 곧 사고를 다루셨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너희는 회개해야 한다. 너희는 너희의 생각하는 것과 정신을 바꿔야 한다. 너희의 생각은 전환이 필요하다.』 의심할 바 없이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모두 그들의 이해에 있어서 참된 전환을 가졌다. 그 당시 그들은 새 왕의 공포를 위한 직접적인 청중이 되는 내적 범주 안에 있었고 그들의 생각에 관하여 어떤 문제도 없었다. 그들의 생각은 이미 변화를 체험했다.
우리의 생각의 전환은 우리가 왕국 안으로 들어가고, 왕국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관문을 제공한다. 생각은 수령자나 내실이 아닌 출입문(gateway)이다. 수령자, 즉 내실은 우리의 영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은 출입문이요, 우리의 영은 내실이다. 우리는 4장 17절에 있는 주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씀을 5장 3절의 말씀 『영 안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라는 말씀과 함께 두어야 한다. 돌이켜진 생각은 출입문으로서 그것을 통하여 천국은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왕국이 올 때 그것은 우리의 영 안에 심겨진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의 관문을 통하여 들어오며 우리의 영에 도달한다. 왕국을 받아들이고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은 천국을 받아들이는 곳이요 담는 곳이다.
복음의 비밀을 아는 전도자들은 그들의 전파에 있어서 먼저 사람들의 생각을 다룬다. 그 다음에 그들은 계속하여 그들의 영을 다룬다. 복음 전파는 사람들의 생각, 곧 그들의 사고 방식을 다루어야 한다. 이것은 그들로 회개하게 하며 그들의 생각하는 것과 삶의 방식을 돌이키게 한다. 어떤 사람이 회개하자마자 합당한 복음 전파자는 그에게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생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영을 다루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그의 영을 사용하면 주님은 즉시 그 사람의 생각의 관문을 통과하여 영에 도달함으로 그의 영 안에 들어가실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통과하여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신 그 주 예수는 왕이시다. 왕국은 그분과 함께 있다. 왕이 어떤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갈 때 이것은 왕국 또한 그의 영 안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그때로부터 왕과 왕국이 둘 다 그의 영 안에 머문다. 오늘날의 타락된 기독교의 가르침 안에는 우리 영 안으로 들어오신 그리스도가 바로 왕국과 함께 있는 왕이심을 지적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분이 당신의 영 안으로 들어올 때 왕국이 그분과 함께 도달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구주뿐 아니라 또한 왕국과 함께 하신 왕을 갖는다.
여러 해를 통하여 우리는 디모데후서 4장 22절의 말씀-『주께서 네 영에 함께 계실지어다』-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우리는 항상 이것을 생명의 문제에 적용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또한 주 예수께서 우리의 영에 계신다고 말할 때마다 그것은 왕국이 우리의 영과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함을 보아야 한다. 주 예수는 구주요 생명일 뿐만 아니라 또한 왕국과 함께 계신 왕이시다. 오늘날 우리는 『나는 내 영 안에 구주와 생명과 왕과 왕국을 가지고 있다!』고 선포할 수 있다. 우리가 회개하고 구주요, 생명이요, 왕국과 함께 계신 왕이신 주 예수를 믿을 때, 그분은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시며 거기에 심겨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의 영 안에 구주와 생명과 왕국과 함께 계신 왕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 안에서 회개하고 영 안에서 가난함으로 우리 안으로 그러한 분을 영접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나의 타락한 상태 안에서 행하고있었을 때 나는 철학과 종교로 충만했었다. 나는 그릇된 방향 안에서행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가치 없는 관념과 사상으로 충만했었다. 복음 전파를 들었을 때 나는 생각에서 전환을 가졌었고 나의 생각은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많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관념으로 충만했다. 따라서 나에게는 나의 생각의 전환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영 안에서 가난하게 되어야 했다. 우리의 영 안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의 영을 비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을 열고 다른 모든 것들을 내려놓음으로 주 예수께서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분이 내 안으로 들어오셨을 때 그분은 왕국과 함께 계신 왕으로서 오셨다. 그러므로 당신이 영 안에서 가난하다면 천국은 당신의 것이다. 당신이 당신의 생활을 전향하고 이제 주님을 대하여 서 있을지 모르나 당신의 영은 어떠한가? 당신의 영은 그분께 열려 있는가 아니면 다른 것들로 충만한가? 당신은 여전히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관념으로 충만한가? 헬라인들은 플라톤의 철학으로 충만하고, 중국인들은 공자의 가르침으로 충만하고, 유대인들은 모세의 가르침으로 충만할 것이다. 왕국과 함께 계신 왕이 당신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당신은 영 안에서 가난해야 한다. 이것은 당신이 당신의 존재의 깊은 곳을 열고 당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관념과 의견과 사상을 몰아내야 함을 의미한다. 당신이 당신의 영을 비울 때 왕국과 함께 계신 왕이 당신 안으로 들어오실 것이다. 그럴 때 천국은 당신의 것이다.
3절에 있는 술어의 시제에 주의하라. 그것은 미래 시제가 아니라 현재 시제이다. 이 구절은 『천국이 저희의 것이리라』고 말하지 않고, 『천국이 저희의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당신의 존재의 깊은 곳, 즉 당신의 영을 열고 당신 자신을 내려놓고 당신의 영을 비울때, 생명 주는 영이신 왕은 당신의 회개한 생각의 관문을 통하여 왕국과 함께 당신의 왕이 되기 위해 당신의 영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때로부터 왕국은 당신 안에 있으며, 천국은 당신의 것이다. 이것이 신약에 따른 구원이다.
이제 우리는 3절의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 『영 안에서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우리는 대명사를 바꿔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영 안에서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천국이 우리의 것임이요』. 우리가 이 구절의 의미를 일단 이해하면 왕국이 천년 왕국 때까지 연장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임을 볼 것이다. 이 구절에 있는 「이요」라는 단어는 천국이 바로 지금 우리의 것임을 입증한다. 우리는 얼마나 축복된 자들인가! 영 안에서 가난한 것은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 만일 우리가 영 안에서 가난하다면 천국은 우리의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 말씀을 당신 안으로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결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 한 구절이 백 개의 메시지보다 낫다. 할렐루야, 천국이 우리의 것임이요! 우리는 참으로 복되고 행복한 자들이다. 우리가 영 안에서 복되고 행복한 것은 천국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B. 애통하는 자들은 위로를 받을 것임
우리는 우리가 오늘 천국 안에 있다는 것을 들을 때 매우 기쁘겠지만 다음 구절에서 주 예수는 우리에게 애통하라고 말씀하신다. 4절은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한다.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고 행복하다는 말은 논리적인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왕과 왕국으로 충만한 영을 가지고 얼마동안 기도한다면 오늘날의 소극적인 상황에 대해 우리는 애통하게 될 것이다. 세상의 전체적인 상황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소극적이다. 사탄과 죄와 자아와 어둠과 세상적인 것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지배적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모욕을 당하고, 그리스도는 배척되고, 성령은 방해를 받으며, 교회는 황폐해지고, 자아는 부패되고, 온 세상은 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상황에 대해 애통하기를 원하신다. 왕국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주하시는 왕에 의하여 정복되고 통제되고 다스림 받는다. 만일 우리가 이 다스림 아래 있으면서 오늘날의 세상의 환경과 상태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한숨짓고 애통할 것이다.
그러나 이 애통함은 축복인데, 이는 주께서 애통하는 자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경륜에 따라 애통한다면 우리는 천국과 함께 상을 받음으로써 위로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소극적인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하늘에 속한 다스림을 볼 것이다. 많은 때에 나는 애통함과 위로 받음을 체험했다. 실망하지 말라. 우리는 애통해야 하지만 소망으로 충만하다. 왕은 오고 계시며, 원수는 패배할 것이며, 땅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통치될 것이다. 빠르든 늦든 우리는 위로 받을 것이다. 주의 회복 안에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 그분의 왕국을 추구하는 것은 위로가 아닌가? 이것은 나에게 어떠한 위로인지! 만일 당신이 당신의 영 안에서 결코 애통함을 체험한 적이 없다면 오직 주님의 왕국만을 관심하는 매우 많은 이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 위로인가를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의 회복 안에 있는 모든 사랑스러운 성도들을 사랑한다. 모든 추구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는 모든 교회들은 모든 애통하는 영에 대한 참된 위로이다.
C. 온유한 자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음
이 구절들의 문맥은 매우 의미가 깊다. 먼저 우리는 왕국과 함께 계신 왕을 영접하고 그분을 담기 위하여 영 안에서 가난하다. 그 다음에 우리는 가련한 상황들에 대하여 애통하며 위로를 받는다. 이에 이어서 우리는 온유함이라는 단어를 갖는다. 5절은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한다. 어떤 번역자들은 「땅(earth)」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를 「육지(land)」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육지로 번역하든 땅으로 번역하든 그것은 장차 오는 정복된 땅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늘날 땅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적인 왕국이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그날 왕이신 주님은 이 땅을 다스릴 것이다. 계시록 11장 15절은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영원토록 다스릴 것이라』고 말한다. 계시록 11장 15절에서 말한 세상은 5절에 있는 땅이다.
마태복음 5장 5절에서 주님은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3절에 있는 영 안에서 가난한 자들과 4절에 있는 애통하는 자들은 이제 5절에서 온유한 자들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점잖고 겸손하고 복종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세상의 반대에 대항하지 않고 그것을 달게 받는 것이다. 온유하다는 것은 싸우거나 대항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온유하여 이 시대에 세상의 반대를 달게 받는다면 우리는 히브리서 2장 5절부터 8절과 누가복음 19장 17절, 19절에 계시된 대로 장래 오는 시대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오늘날은 싸우는 사람들이 땅을 획득한다. 만일 당신이 싸우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떤 영토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그처럼 전쟁이 많은 이유이다. 나라들은 서로 더 많은 영토를 얻기 위하여 싸운다. 인간적인 방법은 싸움에 의하여 땅을 얻는 것이지만 천국의 방법은 온유함으로 땅을 얻는 것이다. 싸울 필요가 없으며 온유할 필요가 있다. 어떤 젊은이들은 땅을 차지하는 것에 대하여 구호를 외쳐 왔다. 땅을 차지하는 방법은 구호나 외침이나 싸움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 길은 온유함을 통해서이다.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는데, 이는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싸우는 사람인가 온유한 사람인가? 만일 당신이 땅을 기업으로 얻으려면 온유해야 한다.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은 땅을 다스리실 것이다. 그분은 체포되셨고 시련을 당하셨으며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그분은 온유하셨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저항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방면에서 온유하셨으며, 끝까지 온유하셨다. 결국 땅은 싸우는 자들이 아닌 온유한 자들이 얻게 될 것이다. 수 주일 전에 한 반대자가 우리 형제들 중 한 명에게 『우리는 너희를 멈추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간이 누가 멈출 것인가를 말해 줄 것이다. 싸우는 자들은 멈추어질 것이지만 온유한 자들은 멈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사탄은 언제나 싸우지만 주 예수님은 결코 싸우지 않으신다. 그 대신 그분은 온유하시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 사람의 경륜과 다르다는 것을 본다. 만일 당신이 땅을 얻기 원한다면 당신은 온유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어떤 땅도 받지 못했다면 이는 당신이 충분히 온유하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청년들이여, 여러분은 캠퍼스에서 온유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하늘의 언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싸우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얻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싸우자!』라고 말하지 말라. 아니다, 당신은 오히려 『온유함으로 땅을 차지하자.』라고 말해야 한다. 당신은 온유함이 물질적인 것에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이 문제를 주의 깊게 생각한다면 온유함이 우리 밖의 물질적인 것에 관계되지 않음을 보게 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내적인 어떤 것들, 즉 우리의 존재 안에서의 어떠함에 관계된 것이다.
D.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만족할 것임
6절에서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만족할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의는 우리의 행동에 있어서 옳은 것이다. 이 의는 우리의 내적인 어떠한 것과 관계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만족할 것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지적된다.
6절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또한 20절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20절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3절과 20절에서 우리는 천국의 두 방면을 본다. 3절에 있는 동사는 현재 시제이고, 20절에 있는 시제는 미래 시제이다. 한편으로 천국은 우리의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천국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영 안에서 가난하다면 천국의 실제는 오늘날 우리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천국의 나타남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천국의 두 방면, 즉 오늘날 교회 생활 안에 있는 실제와 장래 천년 왕국의 위에 속한 부분 안에 있는 천국의 나타남을 기억하라. 만일 우리가 참으로 영 안에서 가난하고, 그리스도를 추구한다면 천국의 실제는 우리의 것이다. 그럴 때 천년 왕국에서 우리는 천국의 나타남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나타남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능가하는 의, 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능가하는 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천국 안으로 들어가도록 이 의를 위하여 굶주리고 목말라야 하며 그러한 의를 추구해야 한다(6, 10, 20절). 만일 우리가 의를 위하여 목마르고 굶주린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추구하는 그 의로 우리를 만족케 하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능가하는 의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의는 단지 하나님께 의롭게 될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의롭게 되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다소 낮은 것인데, 이는 그것이 율법을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는 옛 율법을 따라서는 안되며 새 율법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보겠지만 새 율법은 옛 율법보다 훨씬 높다. 옛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새 율법은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22절)고 말한다. 이 한 예로써 우리는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있음을 본다. 우리는 단지 살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의 형제에게 화내지도 말아야 한다. 이 의는 가장 높은 수준이다.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은 이 의를 얻지 못한다. 이 내적인 주관적 의는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새 율법의 요구를 이루실 수 있다. 내가 젊은이로서 마태복음 5장을 읽었을 때 나는 실망하여, 『나는 결코 이것을 해 낼 수 없다.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더 자라면 자랄수록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그것을 할 수 있는 생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더욱더 깨닫게 되었다. 내 안에서 그분의 왕국과 함께 계신 왕은 그것을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이 왕은 우리의 동역을 필요로 하신다. 우리는 굶주리고 목마름으로 동역한다. 우리는 『오, 주 예수여, 나는 당신으로 인하여 목마르고 굶주립니다. 주여, 나는 당신으로 충만 되기 원합니다.』라고 말함으로 동역한다. 당신이 이러한 방법으로 굶주리고 목마르다면 당신은 만족케 될 것이다.
6절에 있는 의는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것은 능가하는 의, 즉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에 있는 의이다. 그분이이 가장 높은 의를 산출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나를 굶주리게 만드소서. 나에게 당신 자신을 위한 식욕을 허락하소서. 나에게 능가하는 의를 추구하는 식욕을 허락하소서.』 만일 당신이 이러한 방법으로 의를 추구한다면 당신은 만족될 것이다. 당신은 추구하고 있는 것을 받을 것이다.
E. 긍휼히 여기는 자들은 긍휼을 받음
7절은 『긍휼히 여기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한다.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의로운 것이지만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천국을 위해 의로와야 할 뿐 아니라 긍휼히 여겨야 한다. 긍휼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받을 수 없는 것을 받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긴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며(딤후 1:16, 18), 특히 그분의 심판대에서 긍휼을 주실 것이다(약 2:12-13).
의롭게 되는 것은 엄격한 방법으로 당신 자신을 다루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다루는 데 있어서 엄격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어떤 변명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을 향해서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능가하는 의를 부지런히 추구한다면 우리는 결국 다른 이들을 향해서 긍휼을 베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이 약해서 곧잘 실패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천연적인 사람의 가련한 상태를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은 결코 다른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 수 없다. 그들에게 긍휼을 보이는 대신 당신은 그들이 실패하거나 타락했을 때 그들을 정죄할 것이다. 당신이 그들을 정죄하는 이유는 당신이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안다면 어떤 이가 실패할 때마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여, 나와 나의 형제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우리는 모두 약한 그릇이요 당신의 요구를 이룰 수 없습니다. 주여, 나의 형제가 나를 마음 상하게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긍휼을 베풀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결코 실패한 적이 없다면 당신은 결코 긍휼을 베풀지 못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거룩함과 온전함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성공적이라면 당신은 다른 이들이 실패할 때 그들을 향해서 동정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언제나 그들을 정죄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얼마나 약하며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는가를 안다면 당신은 다른 이들에게 긍휼을 보일 것이다.
7절에는 우리를 위한 약속이 있다. 그 약속은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오늘 긍휼이 없이 당신의 형제를 판단한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어떤 긍휼도 받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긍휼이 없이 다른 이들을 판단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을 긍휼이 없이 판단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당신의 형제에게 긍휼을 베푼다면 주님은 그분의 심판대에서 당신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따라서 왕국 백성들은 자신들을 엄격하게 다루어야 하지만 다른 이들을 대함에 있어서는 많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것은 외적인 일이 아니고 우리의 내적 존재에 관계된 일이다.
F.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하나님을 볼 것임
8절은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한다.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다루는 데 있어서이고, 긍휼히 여기는 것은 다른 이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이며, 마음이 순수한 것은 하나님을 대하는 데 있어서이다. 우리 자신을 향하여 우리는 엄격해야 하며 어떠한 변명도 허락해서는 안된다. 다른 이들을 향하여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야 하며 그들이 받을 만한 것보다 더 주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는 마음이 순수해야 하며 그분 이외의 어떤 것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순수한 자들을 위한 보상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보상이다. 하나님 자신보다 더 큰상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는 엄격하고 의로움으로,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는 긍휼히 여김으로, 하나님을 향하여는 마음이 순수함으로 이상을 얻는다.
마음이 순수하다는 것은 목적에 있어서 단순한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고전 10:31) 단순한 목적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천국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관이요(요 1:12, 3:6),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가 생명의 씨로서 성장하는 땅이다(13:19). 천국을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영 안에서 가난해야 하며 영 안에서 비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가 방해받지 않고 우리 안에서 성장하도록 우리의 마음이 순수해야 하며 단순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함에 있어서 마음이 순수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마음이 순수한 것에 대한 상이다. 이 축복은 오늘날과 장래 오는 시대를 위한 것이다.
G. 화평케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
9절은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한다. 사탄, 즉 거스르는 자는 모든 거역의 선동자이다. 천국을 위하여, 그 하늘에 속한 다스림 아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로 더불어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히12:14).
처음 일곱 가지 축복들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싸우는 자들이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항상 다른 이들과 화평하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본다. 만일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마귀의 자녀들은 문제를 일으키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평케 한다. 하나님의 아들인 주 예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평케 하셨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인 우리는 화평케 하는 데 있어서 그분을 따라야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는 평강의 하나님이며(롬 15:33, 16:20), 화평의 본성을 가진 화평의 생명이 있으시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태어난 자로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그분의 신성한 본성에 따라 그분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나타낼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H.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은 천국에 참여함
10절은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한다.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고(요일 5:19)불의로 가득하다. 만일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우리는 의를 위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천국을 위해 추구하는 의에 대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의롭다면 우리는 정죄 받고 반대당하고 핍박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당할 것이다. 의롭게 되기 위하여 그들의 최선을 다한 많은 성도들이 그 결과로 핍박을 당했다. 그들의 환경과 사업과 고용에는 많은 의롭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들이 그러한 상황 안에서 의롭게 되기를 갈망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로부터 핍박을 당했다.
이 구절은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의를 추구한다면 천국은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는 지금 천국의 실제 안에 있고 장래 오는 시대에 그 나타남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20절에 따라 천국에 있기 위해서는 능가하는 의, 즉 가장 높은 수준의 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천국의 나타남 안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에게는 이러한 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목마르고 굶주릴 필요가 있으며 그것을 위해 핍박을 받는다.
I. 그분을 인하여 능욕을 당하고 핍박받고 모든 악한 말을 듣는 자들은 하늘에서 큰상을 받음
11절에서 새 왕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다. 10절에 있는 핍박은 우리가 추구하는 의를 인한 것이다. 한편 11절에 있는 핍박은 직접적으로 우리가 따르는 그리스도 곧 새 왕을 인한 것이다.
우리가 천국의 영적인 본성과 하늘에 속한 원칙에 따라 천국을 위한 생명을 살 때 우리는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관념을 고수하는 대부분의 종교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악한 말을 듣는다. 유대 종교인들은 천국의 초기 시대에 사도들에게 이러한 모든 일을 행했다(행 5:41, 13:45, 50, 고후 6:8, 롬 3:8).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당신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추구한다면 교파 안에 있는 많은 이들이 일어나 당신을 대항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욕과 핍박을 당했으며 심지어 우리에 대한 풍문들이 퍼졌다. 최근에 이름 있는 어떤 출판사가 우리를 힌두교와 연관시킨 책을 출간했다. 이 얼마나 악한 풍문인가! 이러한 욕과 핍박이 우리에게 오는 것은 우리가 전통을 주의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순수한 말씀만을 주의하기 때문이다.
12절에서 주 예수는 그분을 인하여 핍박받는 자들에게 격려하는 말씀을 하신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아홉번째 축복인 이 상은 앞에 있는 여덟 가지 축복의 결과도 모두 상임을 가리킨다. 이 상은 크고 하늘에 있는 상, 즉 땅에 속한 상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상이다.
출처 : 한국복음서원 『마태복음 라이프스타디』 메시지 13, 14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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