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한국 교회 지도자들 어떻게 보아야 할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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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교회개혁 대한 외침이 교회 안팎으로부터 크게 울려 퍼지고 있다. 많은 문제들이 산적하지만, 교회 지도자들(특별히 목사)의 문제야 말로 가장 크고 심각한 문제다. 한국교회에서 목사가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을 감안할 때, 한 목사의 영적·윤리적·사회적 범죄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과 교회와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고 상처를 주며, 결국 반기독교 조류의 확산을 가져온다. 그렇기에 이는 너무나 중한 문제이며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마땅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 불리는 영적지도자들의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제대로, 심각하게,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다루는 것일까? 사실, 이러한 노아의 무죄(아니면, 최소한, ‘한 번의 실수,’ 혹은 ‘우발적 사건’)를 변호하는 해석은, 기독교 해석가들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지는 해석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신약 성경 히브리서 11장에서 노아를 믿음의 본이요, 용사로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아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그의 인생에 남은 단 한 번의 수치의 흔적은 예기치 않은 한 번의 실수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기독교 해석가도,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렇게 단순하게 보아 넘기기에는, 노아의 벌거벗음의 사건은 그 파장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선구자, 마틴 루터의 해석도 다분히 그렇다. 즉, 노아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type)다. 포도원의 농부였던 노아는 바로 인간의 심령에 은혜의 씨를 뿌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데, 포도나무는 구약과 신약의 교회를 의미한다. 노아가 술에 취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열정’(fervor of love) 에 취한 것의 모형이며, 노아가 벌거벗은 수치에 빠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실 수치와 벌거벗음을 예표하는 것이다. 노아가 함에게 당한 수치는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에게 당하실 예수님의 조롱당함을 보여주는 것이고,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구나”라는 소리를 들으며 저주 받을 함의 행동은, 한 교회 내에 상존하는 저주 받을 불택자를 의미한다. 또 아름다운 셈과 야벳의 아비 공경은,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로서 ‘벌거벗겨진 그리스도’를 모든 원수들의 중상과 비방으로부터 변증하는 참 신앙인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가 되며, 노아의 삶은 오실 그리스도의 완벽한 예표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해석이 끝난다면,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신앙 밖에는 안 남게 된다. 그래서 교회의 해석가들은 이러한 영적인 해석을 통해,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한 성경의 본문(text of terror)을 승화시켜 성경전체의 초점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일단 고정시킨 후에, 현실적인 가르침(윤리적 권고)으로 향했다. 이성을 상실하여 자신의 아들들 (못된 아들과 착한 아들들) 모두에게 자신의 치부를 수치스럽게 드러내는 것이 어찌 경한 일이겠는가? 특별히 한 가정의 가장이요, 한 부족의 족장이요, 인류의 대표요, 교회의 수장이 그러하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한 것이다. 때문에 루터는 그의 특별한 이신칭의의 교리를 따라, 그 위대한 노아도 한 사람의 죄인일 뿐이요, 그가 하나님 앞에 인정될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은 오직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루터는 노아의 삶(특별히 그의 말년의 술 취함과 벌거벗음)은 우리가 결코 본 받아서는 안 될 해악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에게서 보아야 할 것은 ‘오직 믿음’뿐이라고 재확인한다. 이로써, 노아의 수치스런 행동과 그의 믿음을 분리시킨 것이다. 교회 지도자가 범한 죄에 대한 지침 위의 세 가지 기독교 해석의 역사를 염두에 두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지침–교회 지도자가 범한 죄에 대한 지침–을 생각해보려 한다. 여기서 본인이 전개하는 신학적 논리는 전적으로 칼빈신학에 근거한 개혁주의적 모델임을 미리 밝혀둔다. 그러므로 다른 전통에 선 이들에게 다소간 생소하거나 이질적인 논의가 있을 수 있으며, 정통기독교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다른 지평의 논의가 될 수 있겠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의 약 70% 가 장로교 전통의 기독교임을 감안할 때, 공통된 관점과 논제 속에서 이해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첫째, 목사도 죄를 지으면 치리를 받아야 한다. 칼빈은 노아의 사건을 주석(그의 창세기 주석 참조)하면서, 우선 노아를 변호하려는 어떤 시도도 ‘성경의 엄중한 판단’ 앞에 설 수 없다고 논한다. 노아의 술 취함과 벌거벗음은 정말 ‘추하고 더러운 범죄’라고 지적한다. 아무리 거룩한 족장이고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해도 그의 이런 추한 죄의 책임으로부터 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노아의 인생에 있어서 이 사건은 하나님 앞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루터도 비슷한 주석을 한 바 있지만 칼빈은 혹시라도 노아의 축복받은 두 아들의 사례를 들어, 노아에게서 아무런 허물을 보지 않고 덮는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교황·주교·사제·목사들)에게 적용시켜, 하나님의 종을 함부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자들에 대해서 분개한다. 물론, 한 그리스도인 형제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죄를 드러내어 망신을 주듯 공박하는 것은 사랑과 공경의 법에 어긋나는 함의 죄악이지만, 공적인 자리에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대상으로 범하는 죄에 대해서는 반그리스도적(antichrist) 죄악이므로 공적인 공개와 치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의 1559년 최종판 기독교 강요에서는, 목회자의 치리를 담당하는 상위 치리 기관(주교나 총회 등)을 상정하고, 1년에 1차 혹은 2차 정기적인 회합을 통해 목회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감독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치리하고 최고로 중한 치리는 목회직에서 물러나게 함과 동시에 수찬정지(전통적으로 기독교인에게 가장 엄한 영적 치리로 인식되어 옴 –영적 죽음을 상징)를 내리는 것 등이었다. 칼빈이나 루터는 이런 원색적인 해석은 아예 언급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이 공통적으로 바라 본 함의 문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도덕법으로서의 십계명의 제5계명, 즉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어긴 것이라는 것이다. 부모는 곧, 이 땅을 살아가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권위와 질서인데, 이 부모를 공경치 않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치 않는 것,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기에 엄중한 중벌을 자초하는 죄라는 것이다. 사뭇 다른 해석 같지만, 모든 기독교 해석가들이 파악하는 함의 죄 문제는, 바로 ‘질서의 파괴’, ‘하나님의 권위의 제거’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루터나 칼빈이 가졌던–그리고 그들의 후예들이 세워 온 개혁 교회들이 가지는–질서와 영역주권의 논리를 보게 된다. 노아의 죄는 반드시 정죄되고 다루어져야 할 죄이지만, 그의 아들 함이 함부로 조롱하고 파괴하고 전복할 질서가 혹은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은 이 때문에 교회의 질서와 치리를 논함에 있어, ‘성도의 치리’와 ‘목회자의 치리’를 구분하는데, 후자가 더욱 엄격해야 함은 물론이요, 전자와 구별이 있어야 할 것도 분명히 한다. 목회자의 범죄는 공적인 범죄이므로 공적으로 다루어야 하며 사적인 비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주신 질서와 권위를 인정하고 그 아비를 ‘공경’하여 그 하체를 기꺼이 보지 않으려 뒤로 들어가 덮은 셈과 야벳의 행동은, 아름다운 부모 공경의 예로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 남은 참된 성도들의 믿음과 순복을 예시하는 사례가 된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창세기 9장의 ‘노아의 술취함’ 사건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만연한 수치와 죄악에 어떤 성경적, 교회사적 빛을 던져 주는가? 빈대 한 마리에 초가삼간 다 불태우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러하리라고 예수님께서도 거듭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알곡과 가라지가 마지막 때까지 함께한 밭에 있을 것이며, 양과 염소가 마지막 때 심판대 앞에서 가려지고, 영생에 들어갈 자와 영벌을 받을 자가 한 형제와 자매 가운데 있을 것이라 하시지 않았는가? 하물며, 악한 이리 같은 삯군 목자는 얼마나 더 교회 안에서 기승을 부리겠는가? 이러한 악을 하나님은 반드시 제거하시는데, 때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들에게 진노의 잔을 쏟아 부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교회의 치리자들을 세워서 징계하고 권징하기도 하시고, 그것마저도 교묘히 피한 이들은,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더 이상 회개할 기회가 없는 자리에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악한 목회자들로부터 믿음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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