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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한국 교회 지도자들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은바리라이프 2008. 12. 3. 13:54

[주장] 한국 교회 지도자들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입력 : 2008년 03월 15일 (토) 18:12:21 [조회수 : 369] 신동수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요즈음 교회개혁 대한 외침이 교회 안팎으로부터 크게 울려 퍼지고 있다. 많은 문제들이 산적하지만, 교회 지도자들(특별히 목사)의 문제야 말로 가장 크고 심각한 문제다. 한국교회에서 목사가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을 감안할 때, 한 목사의 영적·윤리적·사회적 범죄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과 교회와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고 상처를 주며, 결국 반기독교 조류의 확산을 가져온다. 그렇기에 이는 너무나 중한 문제이며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마땅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 불리는 영적지도자들의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제대로, 심각하게,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다루는 것일까?
 
이 문제를 다룰 때 봐야 하는 성경 본문(locus classicus)이 바로 창세기 9장의 ‘노아의 술취함’ 사건이다(창 9:20~29). 극단적인 해석의 위험이 늘 존재하여서, 16세기 개혁자들까지도 주의 깊게 씨름해야 했던 본문, 바로 그 창세기 9장의 노아 사건을 통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문제를 어떻게 보고 처리해야 할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기독교 성경해석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양한 해석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은, 노아의 범죄는 우연한 실수였다는 해석이다. 이는 유대 랍비들의 해석적 경향으로서, 노아의 범죄와 죄책을 최소화시키는 해석이다. 유대 랍비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12세기 중세 신학자인 니콜라스 라이라는, 노아의 술 취함과 그로 인한 벌거벗음이 그리 큰 죄가 될 수 없다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노아 이전에는 술이라는 것이 없었고, 노아가 최초로 포도주를 재배한 후, 자연숙성 된 포도주를 어쩌다 마셨던 것뿐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노아는 홍수 후, 세상을 재건하기 위해 하루 종일 애쓴 후 피곤하였기에 한 잔 포도주에 그렇게 취했던 것뿐이니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사실, 이러한 노아의 무죄(아니면, 최소한, ‘한 번의 실수,’ 혹은 ‘우발적 사건’)를 변호하는 해석은, 기독교 해석가들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지는 해석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신약 성경 히브리서 11장에서 노아를 믿음의 본이요, 용사로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아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그의 인생에 남은 단 한 번의 수치의 흔적은 예기치 않은 한 번의 실수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기독교 해석가도,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렇게 단순하게 보아 넘기기에는, 노아의 벌거벗음의 사건은 그 파장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노아의 술 취함과 벌거벗음을 영적으로 재해석한다. 초대 교회의 성경해석의 두 거장, 오리겐과 어거스틴 이래로 구약의 본문은 문자적 해석(literal sense)을 넘어선 또 다른 영적 의미(sensus allegoricus)를 가진 것으로 해석된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선구자, 마틴 루터의 해석도 다분히 그렇다. 즉, 노아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type)다. 포도원의 농부였던 노아는 바로 인간의 심령에 은혜의 씨를 뿌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데, 포도나무는 구약과 신약의 교회를 의미한다. 노아가 술에 취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열정’(fervor of love) 에 취한 것의 모형이며, 노아가 벌거벗은 수치에 빠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실 수치와 벌거벗음을 예표하는 것이다. 노아가 함에게 당한 수치는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에게 당하실 예수님의 조롱당함을 보여주는 것이고,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구나”라는 소리를 들으며 저주 받을 함의 행동은, 한 교회 내에 상존하는 저주 받을 불택자를 의미한다. 또 아름다운 셈과 야벳의 아비 공경은,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로서 ‘벌거벗겨진 그리스도’를 모든 원수들의 중상과 비방으로부터 변증하는 참 신앙인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가 되며, 노아의 삶은 오실 그리스도의 완벽한 예표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해석이 끝난다면,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신앙 밖에는 안 남게 된다. 그래서 교회의 해석가들은 이러한 영적인 해석을 통해,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한 성경의 본문(text of terror)을 승화시켜 성경전체의 초점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일단 고정시킨 후에, 현실적인 가르침(윤리적 권고)으로 향했다.
 
세 번째로, 노아의 죄를 직시하며 함의 죄를 질타하고 셈과 야벳의 행동을 높이 산다. 노아의 술 취함이 비록 (설령) 우발적인 한 번의 실수였다 해도 그가 하나님의 종이요, 남은 인류의 대표요, 경건한 자들의 머리인 것을 생각할 때, 노아의 술 취함과 벌거벗음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거스틴은 해석하기를 비록 노아가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예표이지만, 윤리적으로는 치명적인 죄(후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죽을 수밖에 없는 죄’(mortal sin))를 범한 것이라고 했다.

이성을 상실하여 자신의 아들들 (못된 아들과 착한 아들들) 모두에게 자신의 치부를 수치스럽게 드러내는 것이 어찌 경한 일이겠는가? 특별히 한 가정의 가장이요, 한 부족의 족장이요, 인류의 대표요, 교회의 수장이 그러하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한 것이다. 때문에 루터는 그의 특별한 이신칭의의 교리를 따라, 그 위대한 노아도 한 사람의 죄인일 뿐이요, 그가 하나님 앞에 인정될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은 오직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루터는 노아의 삶(특별히 그의 말년의 술 취함과 벌거벗음)은 우리가 결코 본  받아서는 안 될 해악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에게서 보아야 할 것은 ‘오직 믿음’뿐이라고 재확인한다. 이로써, 노아의 수치스런 행동과 그의 믿음을 분리시킨 것이다.
 
약술하자면, 일반적으로 교회의 해석가들은 노아의 술 취함의 사건을 쌍방향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다면적 사건으로 인정했다. 즉, 신약적 관점과 그의 전 인생의 관점에서 볼 때 믿음의 유비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신학적 의미에서 볼 때, 피해야 할 죄의 사례로서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지도자가 범한 죄에 대한 지침

위의 세 가지 기독교 해석의 역사를 염두에 두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지침–교회 지도자가 범한 죄에 대한 지침–을 생각해보려 한다. 여기서 본인이 전개하는 신학적 논리는 전적으로 칼빈신학에 근거한 개혁주의적 모델임을 미리 밝혀둔다. 그러므로 다른 전통에 선 이들에게 다소간 생소하거나 이질적인 논의가 있을 수 있으며, 정통기독교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다른 지평의 논의가 될 수 있겠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의 약 70% 가 장로교 전통의 기독교임을 감안할 때, 공통된 관점과 논제 속에서 이해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첫째, 목사도 죄를 지으면 치리를 받아야 한다. 칼빈은 노아의 사건을 주석(그의 창세기 주석 참조)하면서, 우선 노아를 변호하려는 어떤 시도도 ‘성경의 엄중한 판단’ 앞에 설 수 없다고 논한다. 노아의 술 취함과 벌거벗음은 정말 ‘추하고 더러운 범죄’라고 지적한다. 아무리 거룩한 족장이고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해도 그의 이런 추한 죄의 책임으로부터 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노아의 인생에 있어서 이 사건은 하나님 앞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루터도 비슷한 주석을 한 바 있지만 칼빈은 혹시라도 노아의 축복받은 두 아들의 사례를 들어, 노아에게서 아무런 허물을 보지 않고 덮는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교황·주교·사제·목사들)에게 적용시켜, 하나님의 종을 함부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자들에 대해서 분개한다. 물론, 한 그리스도인 형제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죄를 드러내어 망신을 주듯 공박하는 것은 사랑과 공경의 법에 어긋나는 함의 죄악이지만, 공적인 자리에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대상으로 범하는 죄에 대해서는 반그리스도적(antichrist) 죄악이므로 공적인 공개와 치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경우에는 그의 기독교강요 4권(12장 22절)에서 고대 교회를 예를 들어, 목회자의 권징(discipline of clergy)에 대해서 논한다. 치리와 권징이 없는 교회는 참 교회일 수 없는데, 특별히 죄를 범한 교회 지도자를 치리하는 것은 더 큰 엄중함을 요구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그의 1536년 초판 기독교 강요(30장)에서는 만약 교회의 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기 생각대로 가르친다면 이미 목회자가 아니요, 이리나 늑대로 여겨 쫓아버려야 한다고까지 강력하게 말한다.

물론, 그의 1559년 최종판 기독교 강요에서는, 목회자의 치리를 담당하는 상위 치리 기관(주교나 총회 등)을 상정하고, 1년에 1차 혹은 2차 정기적인 회합을 통해 목회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감독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치리하고 최고로 중한 치리는 목회직에서 물러나게 함과 동시에 수찬정지(전통적으로 기독교인에게 가장 엄한 영적 치리로 인식되어 옴 –영적 죽음을 상징)를 내리는 것 등이었다. 
 
칼빈은 노아의 사건을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그림자로 보았다.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도 결코 완벽하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라도 얼마든지 타락하고 넘어질 수 있다고 믿었기에 칼빈은 노아의 경우를 들어 인간의 전적 부패성과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하는 사도바울의 예를 상기시킨다. 어떤 인간이라도 기회만 주어지고, 유혹이 오고, 죄 지을 환경만 되면 부끄러운 죄와 수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성경의 많은 예들이 있다고 말하며, 구지 나열하지는 않는다(아브라함이 예외가 될 수 없고, 다윗이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그렇다고, 지도자의 허물을 보고 권위와 질서를 파괴하고 전복시키는 한다면 이것은 더 큰 죄악이다. 정확히 함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오랜 논란이 있었다. 고대 유대인 주석가는 함이 노아의 하체를 보았다는 것은 그 아비의 생식기를 거세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초기 기독교 어느 주석에도 이것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다른 성경적 근거가 희박하여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몇몇 교회 주석가들이, ‘하체를 본다’는 구절이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성관계를 갖다’는 말의 암시적 표현으로 간주하여 그 아비 노아를 성적으로 범한 것 (incest or homosexuality)으로 보기도 한다(i.e, G. von Rad 의 창세기 해석).

칼빈이나 루터는 이런 원색적인 해석은 아예 언급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이 공통적으로 바라 본 함의 문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도덕법으로서의 십계명의 제5계명, 즉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어긴 것이라는 것이다. 부모는 곧, 이 땅을 살아가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권위와 질서인데, 이 부모를 공경치 않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치 않는 것,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기에 엄중한 중벌을 자초하는 죄라는 것이다. 사뭇 다른 해석 같지만, 모든 기독교 해석가들이 파악하는 함의 죄 문제는, 바로 ‘질서의 파괴’, ‘하나님의 권위의 제거’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윤리신학적 지침이 있다. 특별히, 제5계명의 ‘부모’의 문제를 대할 때 – 칼빈은 제5계명을 해설하며, 이 ‘부모’는 단지 육신의 부모뿐 아니라, ‘영적인 지도자’ 와 ‘모든 권위’를 의미하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질서와 권위에 순복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복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우리는 비록 죄 범한 부모라 할지라도 술 취해 엎어진 노아가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요,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 보내주신 영적 지도자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루터나 칼빈이 가졌던–그리고 그들의 후예들이 세워 온 개혁 교회들이 가지는–질서와 영역주권의 논리를 보게 된다. 노아의 죄는 반드시 정죄되고 다루어져야 할 죄이지만, 그의 아들 함이 함부로 조롱하고 파괴하고 전복할 질서가 혹은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은 이 때문에 교회의 질서와 치리를 논함에 있어, ‘성도의 치리’와 ‘목회자의 치리’를 구분하는데, 후자가 더욱 엄격해야 함은 물론이요, 전자와 구별이 있어야 할 것도 분명히 한다. 목회자의 범죄는 공적인 범죄이므로 공적으로 다루어야 하며 사적인 비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주신 질서와 권위를 인정하고 그 아비를 ‘공경’하여 그 하체를 기꺼이 보지 않으려 뒤로 들어가 덮은 셈과 야벳의 행동은, 아름다운 부모 공경의 예로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 남은 참된 성도들의 믿음과 순복을 예시하는 사례가 된다고 하겠다.
 
성경이 주는 교훈

결론적으로, 창세기 9장의 ‘노아의 술취함’ 사건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만연한 수치와 죄악에 어떤 성경적, 교회사적 빛을 던져 주는가?
 
첫째, 술에 취해 벌거벗고 나자빠진 교회 지도자들이여 부끄러워하고 치리를 달게 받으라!설령, 단 한 번의 실수였다 하더라도, 공인으로서 끼친 패악을 생각하고 죄악에 합당한 치리를 받으며, 힘써 회개하고 근신하여, 다시 한번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를 바라야 할 것이다. 이 일에 하나님의 교회는 칼빈의 제안을 따라, 또한 초대 교회와 혹은 현 교단의 헌법 등이 규정하는 법을 따라, 정기적으로 목회자를 감독하고 권징하며 바른 말씀의 사역자로 본연의 임무를 다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둘째, 이런 추악한 교회 지도자들을 보게 되었다고 해서 믿음까지 허물어지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악한 세상 가운데에서 당신의 구속의 역사를 이루신다. 가장 악독한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당신의 선하심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는다면, 때로, 부끄럽기 그지없는 추악한 교회 지도자들의 문제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키우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빈대 한 마리에 초가삼간 다 불태우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러하리라고 예수님께서도 거듭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알곡과 가라지가 마지막 때까지 함께한 밭에 있을 것이며, 양과 염소가 마지막 때 심판대 앞에서 가려지고, 영생에 들어갈 자와 영벌을 받을 자가 한 형제와 자매 가운데 있을 것이라 하시지 않았는가? 하물며, 악한 이리 같은 삯군 목자는 얼마나 더 교회 안에서 기승을 부리겠는가? 이러한 악을 하나님은 반드시 제거하시는데, 때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들에게 진노의 잔을 쏟아 부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교회의 치리자들을 세워서 징계하고 권징하기도 하시고, 그것마저도 교묘히 피한 이들은,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더 이상 회개할 기회가 없는 자리에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악한 목회자들로부터 믿음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
 
셋째,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믿고, 믿음과 사랑의 역사를 실천하기를 권한다! 목회자의 죄를 무조건 덮는 것은 성경적도 아니고, 개혁주의적도 아니다. 죄는 반드시 드러나고 치리되어야 하며, 특별히 목회자의 죄는 더 엄히 치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설령,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죄를 범한 목회자라도, 하나님께서 어쨌든 세우셔서, 영적인 꼴로 영혼의 양식을 먹여주었던 것이 있었다면, 그것으로 인해 그의 인격과 사역과 권위 자체를 깔보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근거해서, 합당한 존경과 사랑과 보호를 베풀며 이런 것들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공적 자리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 를 통해서 문제가 제기되고, 상위 기관을 통해 치리가 되기까지 모든 것을 질서에 따라, 개인적인 사욕이나 무분별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행해야 할 것이다. 혹, 치리와 권징기간을 거친 목회자가 다시 회복되었을 때, 가장 큰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자세–아비의 권위를 거세하려는 함이 아니라 정상적인 모습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애쓰는 셈과 함의 행위를 품는 그런 자세–가 우리의 모습 속에 깃들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동수/ 목사 Wheaton College Ph. D. Program in Systematic 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