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바울서신

복음을 위하여 택함 받은 사람

은바리라이프 2008. 11. 3. 08:04

복음을 위하여 택함 받은 사람  

로마서1:1-7


저는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로마서만큼 조직적이고,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서를 읽고 연구하고 로마서 때문에 은혜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든 성도들이 로마서를 극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은혜받은 사람이 많습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 몇 사람을 들 수가 있습니다. 먼저 세계 교회를 위해서 크게 역사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들 수 있습니다. 엉어식 이름으로 어거스틴이라고 합니다. 그가 성 어거스틴이 된 것은 바로 이 로마서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한때 사교에 심취했고, 잘못된 철학을 통해서 방탕하기도 했습니다. 결국은 예수 믿어서 진리를 찾아보겠다고 애를 썼습니다마는 여전히 그의 생활에는 이렇다할 변화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서 그 타락된 생활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단지 추상적 진리로만 성경을 상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루는 어거스틴은 정원을 걷고 있었습니다. "오 나의 주여, 언제까지 하시려나이까? 언제까지 분노하시려나이까? 나의 젊었을 때의 죄를 기억하지 말아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이웃집에서 어린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라는 말로 들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찾았습니다. 그가 성경을 펴들고 눈에 들어오는 부분을 읽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롬13:13-14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말씀의 능력이 오면서 그 방탕했던 생활로부터 온전히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잇는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 강해를 남겼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이 로마시에 있는 계단교회의 거룩한 계단을 기어오르다가 일어선 것이나, 비텐베르그 대학 교회의 정문에 95개조문의 토론의제를 붙인 것으로 출발한다고 이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종교개혁의 출발은 1514년 가을 엘풀트에 있는 어거스틴파 수도원 흑탑 속에서 무릎을 꿇을 때부터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지금 QT를 할 때에 여러 가지 방법이 활용되고 있지만, 마르틴 루터식 QT도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개혁은 루터가 어거스틴파 수도원에서 성경을 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중에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때 그는 로마서 1장을 정독하고 또 정독하고 묵상하고 또 묵상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전에는 순수하게 학문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강해하였습니다. 차분하면서도 순수하였고, 독창력을 발휘하였습니다. 1512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비텐베르그대학에서 성서를 강해하였는데 1513년에 시편을 강해했으며, 15-16년에 걸쳐 약 10개월에 걸쳐 로마서를 강해했습니다. 로마서는 종교개혁의 중심 사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루터의 로마서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와 있는데 루터선집 제4권 안에 로마서 강해가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로마서는 종교개혁을 가능케 하였으며, 한 사람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를 깊이 연구하고 묵상할 때 죽어 가는 수많은 심령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97년에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가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칼 바르트는 스위스 바젤에서 1886년에 출생하여 1968년에 세상을 떠난 분입니다. 그는 독일계 스위스인의 목사 프리츠 바르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921년에 괴팅겐 대학, 1925년에 뮌헨대학, 그리고 1930년에 본 대학에서 교수로 지냈으며 1930년에 독일의 나찌스(Nazis)에 반항하다가 추방되어 스위스의 바젤 대학의 교수로 일생을 보냈습니다. 신학자들은 그를 가리켜 사도 바울, 어거스틴, 마르틴 루터를 이은 훌륭한 신학자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그가 로마서를 강해하였습니다. 가장 역작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의 생전에 10판이 인쇄되었습니다. 5판 때까지만 해도 계속해서 서문을 추가시키고 있습니다.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는 지난 89년으로 15판이 인쇄되었습니다.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는 사실 내용이 어렵고, 번역된 책이다 보니 심오한 내용의 전달이 그리 쉽지 않음을 봅니다. 그래도 정독하면서 그 의미를 찾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왕 예수 믿을 바에는 바로 믿어야 하고, 잘 알고 믿어야 하고, 확신해야 됩니다. 그럭저럭 따라가면서 믿어두는 정도로 신앙생활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기억력이 있고, 총기가 있을 때에 내가 믿는 신앙이 과연 무엇이며,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과연 진리로구나' 하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으면 잘 된다더라,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건강의 축복을 받고, 천당 간다더라'는 식으로 믿지 말고, 나는 이것 때문에 예수 믿는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중에 바울만큼 잘 믿은 사람도 없지만, 그는 복음의 도리를 잘 정리하여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로마서에 나타난 구속의 진리를 증거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로마서 1장 1-7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잘 관찰하고, 말씀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를 알아보도록 할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봅니다.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합니다.

1. 사도 바울은 종이요, 사도입니다. (1절)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여기서 "파울로스 둘로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는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다른 하나는 사도입니다.

사도바울은 서슴지 않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자기는 무엇을 위하여 이 세상에 왔으며, 무엇을 하다가 갈 사람인지를 너무나 확실하게 알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야할 사람입니까? 자신의 존재,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Identity를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바울도 다메석 도상에서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리스도의 종으로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였다고 하면 여러분의 주인은 아직도 당신 자신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1)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종은 "둘로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노예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노예라는 말에 놀라지도 아니하고, 실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이란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당시 노예는 죽을 권리조차 없는 일하는 도구입니다. 노예는 자기만의 인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주장을 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특권을 모두 상실한 사람입니다. 없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종이 종으로 잘 살려고 하면 종은 자기 주장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인의 주인됨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를 겸비할 때 진정한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종'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자신을 설명하고 있는데, 당시의 노예들처럼 맹목적인 복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이 아니요, 짐승입니다. 당시의 노예는 평생 부려먹다가 늙으면 버려지는 것이 노예의 특징입니다. 그런 부끄러운 이름을 자신에게 붙이면서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노예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오늘이라도 '나는 누구의 종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의 영광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지만 아닙니다.

주님을 향하여 "이래라, 저래라"고 말하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말씀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없습니다.

기도의 용사,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뮬러 목사님은 "나는 어떤 날 죽었다. 죠지 뮬러에 대하여 죽고, 세상이나 친구들의 칭찬이나 책망에 대하여 죽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종이란 자신의 특권은 없고, 오로지 감당해야할 책임만 있습니다. 오직 의무만 있지 권리가 없는 것이 종의 일생입니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께 모두 바치고 보니 번민할 일이 전혀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종이 무엇을 좀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도 주인의 소유입니다.

우리가 다 드린다고 할 때 무슨 욕심이 있을 것입니까? 욕심 없습니다. 결국에는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그렇지 않습니까? 의무는 감당치 아니하고, 권리만 주장하는 자세로 무슨 종이라고 할 것입니까?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짤라버리고, 지워버리고, 안 읽은 것으로 하고, 못 들은 것으로 하고, 그것은 율법적인 것이라고 해석해버리고 적용하려고 하면서 무슨 종으로 산다고 할 것입니까? 말씀을 짤라먹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곧 영생이요, 축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예수의 노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친다 봉사한다 하고, 걸핏하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하지만, 누가 죽는 것을 좋아합니까? 우리는 잘 죽으려고 예수 믿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생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다가 가면 영광입니다. 내 인생을 살려고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을 살려고 하면 성공하는 것입니다.

종으로 산다고 할 때 모든 영광, 모든 이름은 주인에게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명예를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루고 하는 일들이 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하신 것입니까? 주인에게 이름을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돈을 좀 벌었습니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야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무위도식하면서 허송세월하고, 돈 있는 사람들을 욕하고 저주하는 것은 한심한 존재들이 하는 짓입니다. 도둑질은 빼고 나머지 열심히 일하면 돈이 모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열심히 공부해서 어떤 분야에서 정상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주님의 이름을 높이세요, 그 동안 벌어놓은 것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하세요. 주님에게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나는 종이라는 할 때 나의 모든 명예는 없어지고 주인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주인님이 잘해주어서, 주님의 은혜로 이렇게 살고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정리합니다. 노예- 종은 치욕적인 이름입니다. 그러나 누구의 종이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사람의 종이 되고 죄의 종이 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종은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어떤 분은 종이 아니면서도 종보다 못한 인생을 살고, 어떤 이는 종이면서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아들보다 더 아끼는 종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고 기뻐하시던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을 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시는 중에 영광스러운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결단이요, 자신의 헌신이요, 자신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부르심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선택적 교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부르심, 소명이라는 것은 신앙생활에 능력을 부어주며, 생기에 넘치고,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일하는 것이라고 할 때 바로 그것은 능력입니다. 생기에 넘치고,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나의 하는 일이 나의 일이라고 하면 그만 둘 수 있지만, 이 일은 하나님이 시키고, 부르셔서 맡기신 일이라고 하면 조금도 중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나 같은 사람을 불러서 이 일을 하라고 부르셨고, 맡기셨다는 소명의식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생 주의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래도 자기 자신의 의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그분의 부르심으로 내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고, 무엇이 준비되어 있어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격도 없는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아서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지 자격이 있어서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닙니다.

저는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물론 더 넓게 말씀드리면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러 성도들을 잘 인도하며, 신앙의 최고 정선된 본을 보이고, 할만하여 부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지금은 참으로 미흡합니다. 그래도 부르심을 충성하려고 힘써야 하고, 나아지는 과정에 서 있어야 합니다. 장로가 됨으로 되어 가는 것입니다. 목사가 됨으로 좋은 목사로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선택하신 주체는 내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시라고 할 때 거기에 감격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라고 하는 것은 "아포스톨로스"-"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글자풀이만 할 문제가 아닙니다. 엄격히 말하면 "사도"라는 말에는 높은 차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보세요. 열두 제자의 명칭이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제자"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로 넘어가서는 "사도"라는 명칭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제자"는 일반교인을 부르는 명칭입니다. 사도행전적 의미로 볼 때에 제자는 일반교인들을 지칭하는 것이요,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선택받은 주의 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냄을 받은 사신, 심부름꾼, 대사는 자기의 업무를 볼 수 없습니다. 외국에 파견된 사신이 여행이나 즐기고, 친지나 만나고, 쇼핑이나 일삼고 있다면 일국의 사신이 될 수 없습니다. 주인에게 속한 종이라고 하면서 주인의 일은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일에만 정신이 없다면 그는 종이 아니라 자유인입니다. 내편에서 보면 종이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사도인데, 한 사람의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자기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라고 하는 것에는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셨고, 또 이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이들을 통해서 복음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라고 하는 것은 아주 높고 특별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전해주신 말씀 위에 신앙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아무나 성경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쓰신 것을 성경으로 인정하였습니다.

2. 사도 바울은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습니다.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종이다', 동시에 '나는 사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 부르심의 역사요, 선택의 역사요, 하나님의 강권적이고 주도적인 역사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씀과 "택정함을 입었다"는 말씀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종이라고 하며, 자신을 사도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나깨나 복음 전파 외에는 생각도 아니하였고,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널리 증거할 수 있는지, 이것 하나만 놓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어떤 분야에 종사하다가 죽어야 하는 지를 알았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알고 일하는 사람, 나의 하는 일에서 보람을 찾고 있는 사람, 나의 하는 일을 중단 없이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사도 바울의 목적과 같습니다. 우리 역시 복음 증거를 위하여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은 무엇입니까? 2절부터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구주 예수 복음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건이 복음입니다. 복음이라는 말을 쓰자마자,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인하여 복음이 무엇인지를 즉시 미루지 않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받는 이들에게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미룬 채 이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직 복음 안에 살아왔고, 복음 외에는 아는 것도 없고, 복음만이 그의 전부라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주의 종이요, 주의 사도라고 사는 사람은 교만할 수 없고, 하나님의 대리자로, 자기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보내신 자의 뜻을 좇아 준행하며, 이런 사람은 두려워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으며 오직 보내어주신 주님의 이름을 높이 드러내며, 주님의 죽으심을 널리 증거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신 사도이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확신이 넘쳐야 합니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나는 또 무엇을 하다가 죽어야 할 사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주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헌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2000.02.06 서울영주교회 성홍모목사님 설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