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장에 관한 신학적 고찰과 김세윤교수의 견해
중략...
그렇다면 롬 7장이 무엇이냐? 크게 두가지 설이 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자서전적인 것이 아니라면 하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화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요구와 그래서 의인으로 살고자 하는 과정 중에서 겪는 투쟁,갈등 이런 것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았으며 또한 동시에 아직 죄인ㅇ니 상태로서 성화의 과정에 있는 소위 Simuliustus et Peciator를 나타낸 말이다. 그리�인이 믿은 후의 성화의 과정을 그린 것이라는 이런 설이 있다.
그런데 요새 지배적인 설은 그게 아니고 이건 전혀 자서전적인 요소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상황을 그린 것도 아니다. 바울이 아담의 상황, 또는 아담적 인간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나타난 이 구원의 사건의 빛 아래에서 보아서 객관적인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요새 주로 학자들이 많이 취하는견해이다.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의 객관적 실존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설을 제일 먼저 객관적 실존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설을 제일 먼저 강력하게 창시한 사람은 W.Kummel이었고 그 이후 모든 Bultmann학파가 있고 그것을 좀더 세련되게 한 것이 E.Kasemann이다. 그래서 Kasemann의 주석책을 보면 이 설이 아주 대표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의 상황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롬 7장에는 자서전적이 아니고 객관적인 것이니까 바울의 일생에 잘 맞출 수없는 요소들도 포함되어 있고 또 거기에는 보통 인간의 경험들 특히 율법을 지키는데에 대한 회의가 극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보통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율법 지키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즉 그리스도인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대인들의 율법지키는 행위가 사실은 얼마나 어려운 행위였고 불가능한 행위였나를 안다. 유대인 자신들은 피상적으로 지키는 것으로도 만족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의가 아니고 진정한 의는 이러이러한 것인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깨달음을 어떻게 알게 되느냐?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롬 7장에는 보통 인간의 경험들 특히 율법을 지키는데에 대한 인간의 능력에 대한 회의가 극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의 완전한 무력에 대한 통찰력은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이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없으며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에 대한 통찰력은 열성 있고 성공적이었던 바리새인 바울에게는 오직 회심 후에야 비로소 생겼을 것이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 견해를 따르고 한동안은 이런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어던 사람들은 견해 1을 어떤 사람들은 격해 2를 부활시키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 그런데 나는 3의 견해가 맞다고 본다.
견해1:자서전적인 성격으로 보는 견해
견해2:회심 이전의 심리적 준비과정으로 보는 견해
견해3:아담적 인간의 객관적 실존을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의 빛 아래 조명한 것이라는 견해.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Kummel의 책에서부터 읽기 시작하여 최근에 나온 J.Dunn의 로마서 주석도 한번 보고 H.Gundry(LA 옆에 있는 바바라에서 가르치는 복음주의 학자)의 Article을 보라. 이런 사람들의 최근 경향은 이 두설(1,2) 중에 하나를 부활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견해 3이 일관적으로 맞다고 보느데 다만 거기에 내가 한가지 좀더 조정을 한다.
그러니까 롬 7장은 바울이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의 상황을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기는 한데 이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을 그리는데 있어서 바울은 자기의 과거 율법 아래에서의 경험을 자료로 쓰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명이 자기로 하여금 탐심을 일으키는 경험을 바울이 한다고 하는 인간으로서 그런 경험을 바울은 자료로 쓰고 있다. 그래서 견해 3이 맞는데 바울은 어떻게 해서 율법 아래 있는아담적인 인간의 상황을 알수 있느냐 하면 자기 스스로 율법 아래있는 아담적 인간으로서 과거에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자서전적인 요소가 있다. 과거 율법 아래서의 자기 경험을 일부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자서전적인 요소들이 일부 있다. 그런데 율법 아래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그런 율법에 대한 절망은 과거의 자기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새롭게 깨달은 바 갈1:14이나 빌3:5f에서의 바울은 우리에게 자기 과거에 대해서 정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하기는 커녕 율법의 의로는 흠없는 자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서 만족하고 썩 자랑스러운 과거를 생각했다. 그래서 이 7장의 일부 바울의 자서전적인 요소들이 있으나 율법의 지킴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율법을 통해서 의를 얻는 것을 절망적으로 본 것은 과거의 요소들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깨달은 뒤에 자기가 자기의 과거를 뒤돌아 보았을때 ‘아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인 인간의 상황이 이것이구나’하고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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