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케돈(Chalcedon)신조- A. D.451
1) 칼케돈 신조의 작성배경 및 논쟁 내용
콘스탄티노플 신조와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분임을 밝혔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완전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들 사이에 이론(異論)이 많았다. 즉 그의 한 존재 안에 신성과 인성이 어떤 모양으로 연합되어 있느냐의 어려운 문제였다. 신인양성을 믿으면서도 그의 신성을 더 우세한 것으로 강조한 사람들은 주로 알렉산드리아 학파(네스토리우스파,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레)에 속했었고, 그의 인성의 약화를 막으려는 사람들은 주로 안디옥 학파(유티케스)였다. 이러한 기독론의 역사적인 논쟁들을 일괄하여 종식시키고 정통신조를 확립할 목적으로 로마의 감독 레오(Leo)가 449년 6월 13일에 플라비안(Flavian) 황제에게 보낸 편지 톰(The Tome)에서 논쟁의 해결을 위한 신학적 시론을 발표하였었다.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451년에 칼케돈에서 제4차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회의를 소집하였다.
① 그릇된 교리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 유티케스(Eutyches)의 주장}
벌코프(Louis Berkhof)는 당시 그릇된 교리를 주장하였던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몹시수에스티아의 데오도레(Theodore of Mopsuestia)와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했고, 그 안의 로고스의 내재를 신자들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똑같이 누리는 단순한 도덕적 재주로만 이해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람을, 곧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동참하지만 단일한 인격적 생명의 하나 됨에서는 그와 하나가 아닌 사람을 보았던 것이다. 즉, 두 인격으로 구성된 한 중보자를 보았다.
이에 반대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단일성을 강조했고, 그의 반대자들은 그가 양성을 부인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반대자들이 오해한 듯싶지만, 유티케스와 그 일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의해 흡수되었거나 양성이 융합하여 단일한 본성이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그 근거로 시릴을 인용하였다."
② 바른 교리(칼케돈회의의 결정 내용)
Louis Berkhof는 칼케돈 신조의 진술에 관한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4가지를 들고 있다.
① 양성의 특성은 일위에 속한다. 예를 들면, 전지(全知)와 제한된 지식과 같은 것이다.
② 신인의 수난은 참으로 무한한 것일 수 있으나, 그 신성은 감각할 수 없다.
③ 그리스도의 인격의 근거와 기초를 이루는 것은 인성이 아니고 신성이다.
④ 로고스는 어떤 독특한 인간 개체와 연합한 것이 아니라, 인성과 연합한 것이다.
처음부터 신격의 제2위와 연합된 개인이 있은 것이 아니라 동정녀의 복중(腹中)에서 인간의 본질과 연합한 것이다.
2) 칼케돈 신조의 특징 및 영향
이러한 칼케돈 신조는 동방, 특히 발칸반도의 저속화 된 기독교를 정화하기 위하여 753년 콘스탄티노플 노회에서 결의한 '성상 반대 결의'에 기본 정신이 되었다.
3) 칼케돈 신조에 대한 평가
Louis Berkhof는 칼케돈 신조는 "양극단의 견해를 전부 정죄하고, 위(인격)의 단일성(unity)과 양성을 함께 주장했다"는데 큰 의의를 두지만 아쉬운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케아 회의가 삼위일체 논쟁을 끝마치지 못한 것처럼 칼케돈 회의도 기독론 논쟁의 종결을 짓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