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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 통해 용서와 고통의 의미를 묻는다

은바리라이프 2008. 9. 22. 13:14
영화 ‘밀양’ 통해 용서와 고통의 의미를 묻는다
CBS 토크프로 ‘크리스천 Q’, 기독교의 근본가치인 ‘용서’와 ‘고통’에 대해 토론


기독교 시사토크 프로그램 CBS TV ‘크리스천 Q’가 이번에는 영화 <밀양>을 되돌아보며 기독교의 근본가치인 ‘용서’와 ‘고통’의 의미를 묻는다.

<영화 밀양, 당신은 용서하십니까?>라는 주제의 이번 토론에서 채수일 교수(한신대)와 구미정 교수(숭실대 겸임), 오승준 신경정신과 전문의(예담 정신과 원장)는 기독교의 근본 물음인 ‘용서와 회개’, ‘고통과 치유’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다음은 이들의 생생한 토론을 옮겨 보았다.

영화 밀양, 과연 문제되는 반기독교적인 영화였나

채수일 교수(이하 채): 오히려 ‘모든 종교의 근본가치인 용서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에 대해 한국 기독교가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구미정 교수(이하 구): 처음엔 착한 여자였던 신애가 나쁜 여자처럼 보인다. 결국 한 여자가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영화다.



오승준 신경정신과 전문의(이하 오): 위기상황이 되면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무의식적ㆍ의식적으로 동원한다. 강렬한 충동이 갑자기 발생하게 되면 마음속 댐 속에 가두어두려고 한다. 영화는 이처럼 한 여성의 고통과 싸우는 과정을 다룬 것이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서해야 하는가, 또는 할 수 있나

: 용서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즉 정직한 게 중요한 거 아닌가. “하나님 도저히 (용서)못해요, 강요하지도 마세요”라고 밖에, “기도해 달라”고 밖에 못할듯하다.

: 성서의 가르침은 ‘용서를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용서가 좋은 거다’라는 의미다. 용서를 하지 못하는 마음이라면 분노가 늘 살아 꿈틀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자기 자신의 인격을 황폐화하게 만든다.

: 성서는 마음속의 분노에 대해 ‘네가 알아서 풀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질적으로 새로운 관계에 새로운 시작을 요청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관계에 대해, ‘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명령이라기보다는 초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질적으로 다른 삶인 그 초대에 응하느냐 아니냐는 인간의 선택이다.

과연 모든 고통과 불행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인가

: 모두 하나님 뜻이라고 하면 하나님은 사디스트다. 크리스천이라면 남의 고통 앞에 같이 울어줘야 된다.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소리나 정답을 말하려 하지 말고, 믿음이 만병통치약이라는 그런 거짓말, 그런 사이비를 정답으로 주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주인공 신애가 하나님에게 따지는 장면이 가장 솔직한 모습이다. 하나님은 착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사람을 사랑하시면서도, 신앙의 주체는 인간에게 넘기는 분이시다. 신앙은 이렇듯 역설이고 은총인 것이다.

: 하나님은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지, 고통 받는 것을 원하시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과 답변을 하나님께 묻거나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역경과 고통은 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을 것’이라며 보상을 기대한다면 계산착오를 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한 프랑스 신학자는 “하나님은 문제의 해답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 근원에 계시다”고 말했다. 즉 하나님은 문제의 유발자가 아니라 문제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모든 고통이 인간을 정금같이 단련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파괴하기도 한다. 따라서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하는지’를 놓고, 신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질문을 해야 한다.


: 누가 고통을 받으면 기독교인들은 ‘무슨 죄가 있으니까 이렇게 주셨겠지’라고 생각한다. ‘병이 있거나 사업이 잘 안될 때, 벌 받은 거야’라며 고통과 형벌을 연결시키는, 바로 이런 생각을 끊으라고 욥기가 있는 것 같다.

반대로 잘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냥 놔두는 게 아니라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고통 중에 “하나님 주시는 고통이라면 제가 어떻게 피해가겠습니까”라고 주님께 질문해가면서, 주체적으로 감내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고통은 오직 믿음으로만 치유되는 것인가

: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은 분노를 지연시킨다. 댐 속에 있는 물이 한꺼번에 댐 밖으로 나가면 홍수가 되니까 수문을 한 두 개만 열면서 해결하는 식이다.

따라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는 조심스럽고 기술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잘못된 방법을 택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마음의 틀을 그 사람에게 맞춰주는 연습을 해야 한다.

: 남의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교만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남의 고통을 하찮게 보는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치 교회가 해방이나 치유를 줄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처럼 말하는데, 이건 거짓말이다. 교회라는 신앙공동체가 내 신앙에 도움이 될 순 있겠지만, 신앙은 결국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인 것이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부엌에서 혼자 밥 먹을 때,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내 마음의 방에 들어오신다면, 안방이나 거실에 들어오시는 게 아니라 아무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다락방, 그곳에 들어오실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대면이다.

: 바로 그 장면, 지극히 인간적인 삶 아닌가. ‘확신에 찬 삶이나 일관적인 신앙을 죽을 때까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인간이 상처받기 쉽고 상처 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신애가 부엌에서 찬밥을 우겨 넣는 장면에서 살아남는다는 것.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가치다. 고통을 도덕적으로 내면적으로 승화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 영화 속에서 신애가 혼자 싱크대에서 식은 밥을 먹던 바로 그 순간, 카메라 렌즈가 바로 하나님의 시선처럼 여겨진다. 하나님은 하늘에 편히 앉아있는 게 아니라, 내 등 뒤에 오셔서 같이 느끼고 계신다.

울며 저항할 때 비로소 ‘주님이 그 마음 깊숙이 들어가는 평생의 작업’이 시작되지 않는가. 그 절규하는 등 뒤에서 주님은 “조금만 힘내 봐, 살아내 봐”라고 말 걸어오시지 않을까. 이를 믿는 게 신앙이 아닐까 싶다.

기독교의 무조건적인 용서관, 어떻게 보십니까.

: 역사적인 범죄에 대한 용서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가해자가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 한, 피해자의 용서는 어렵다. 아무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보상과 배상을 한다고 해도 피해자의 마음에 남은 상처가 완전히 치유될 수 있는가. 동시에 피해자가 자신의 기억과 화해하는 게 매우 중요한데, 그게 안 되면 사회적ㆍ법률적 보상이 모두 이뤄진다 해도 여전히 고통을 당하게 된다.

▲왼쪽부터 채수일 교수(한신대), 구미정 교수(숭실대 겸임), 오승준 신경정신과 전문의(예담 정신과 원장)©뉴스미션

: 용서는 인간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이다. 욥기에 그 실마리가 있다. 세 친구와 엘리후가 와서 옳은 소리들을 하는데, 욥기 후반으로 가면 하나님의 처방은 ‘네가 욥한테 가서 잘못했다고 해라, 상처받은 바가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 차원에서도 인간사이의 ‘정의’ 화해라는 것에는 적합한 절차가 있지 않나. ‘하나님이 옳게 보느냐’는 것 역시 하나님의 차원인 것이다.

영화 곳곳에 숨은 密陽, 비밀스런 햇빛, SECRET SUNSHINE은 무슨 의미일까

: 마지막 장면에서 마른하늘 바람에 신애의 잘려간 머리카락이 흩어지는데, 시궁창을 비추는 햇빛과 그늘을 잡아낸 것이 이창동 감독의 신학적 해석이다. 보통 사람들은 땅에서 하늘이 매우 먼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사실 하늘과 땅, 햇빛과 그늘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기쁨과 고통이 늘 섞여있는 것이 ‘삶’인 것이다.

욥기를 ‘착한사람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신정론에 대한 답이라고 보는데, 그렇게 보진 않는다. 선한 사람들도 까닭 없이 고통받을 수 있다.

핵심은 마지막에 있다. ‘이제까지는 내가 주를 귀로 들었거니와 지금은 눈으로 본다’는 욥의 고백에 주목해야 한다. 신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소문일 수 있다. 수많은 소문을 삶의 복판에서 보지 않는 한, 신에 대한 모든 규정은 소문의 하나일 뿐이다.

욥기는 소문을 확신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왜 고통을 받았느냐 보다는 ‘고통 속에서, 또 고통 후에 어떤 인간이 되었느냐’가 욥기의 메시지다.

: 우리 모두 힘들어하고 상처에 젖어 살 수 있다. 그러나 상처는 자기 스스로 핥아야 나을 수 있는 것이다. 신애가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마지막 장면에서 혈루병 여인이 생각난다. 그녀가 옷자락을 만지자, 예수님은 “내가 너를 낫게 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씀하셨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듯, 남이 머리의 반을 잘라주더라도 나머지 반은 평생 우리 자신이 잘라가야 하는 게 아닐까.

또 한사람, ‘나이롱 신자’이고 속물냄새가 나는 송강호라는 인물이 중요한 것은 적당히 때묻은 그 사람이 계산하지 않고 끝까지 있어줘서다. 남의 고통을 듣는다면, 이제 우리가 해줄 일은 송강호처럼 거울을 들어주는 게 아닐까.

: 주인공은 커다란 감정의 댐에 갈등과 충동들을 쌓아두고 너무 급하게 해결하려다, 어느 날 암초 때문에 그 댐이 무너져 버린 상황을 만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과격한 감정적 반응을 하게 된다. 이런 이들에게는 관심을 가지고, 지혜로운 접근 방법으로 다가서야 한다. ‘밀양이란 영화가 반기독교적이지 않은가’라는 평도 있었지만, 실은 이 영화는 ‘크리스천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웃을 위해 어떤 훈련을 해야 하는가’를 제시한다.

: 본래의 주기도문 해석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옵소서,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한 것 같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인간적인 용서가 어려운 현실을 보여준다. 용서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서받았던 경험, 이웃으로부터 용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면 타인의 잘못과 허물도 용서할 수 있다.

: 용서를 못하고 있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용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너무 깊은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가 용서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번 토론은 오는 9일(금) 오전 11시50분, 10일(토) 밤 10시, 14일(수) 저녁 6시에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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