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신학자 김영한 교수의 <밀양>에 나타난 기독교(3)
<밀양>에 나타난 일반 대중의 기독교 상 [2007-09-21 09:52]
-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 대학원장)
1. 고통의 개념
2. 용서의 개념
3. 회개의 개념
4. 일반 대중에 비친 기독교 상
1) 소외된 자의 고통과 상처를 도외시하는 종교?
여인 신애는 고통당한 자의 상한 심정을 몰라 주고 피해 당사자인 자신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살해범을 용서해 주며 그에게 용서와 은혜의 평안을 준 신(神)에게 반항하고 있다. 이것은 작가의 기독교 이해를 반영한다. 기독교란 소외당한 자의 상처와 고통을 공명하기 보다는 용서와 은혜라는 기계 안에 융해시키는 종교라는 것이다. 용서해야 할 자는 바로 피해자인데 피해자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가해자에게 용서와 평안을 선사해 주는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저항이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작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절규에 대하여 침묵하시며 아들을 죽음에 내버려두심으로 당신의 뜻을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십자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있다. 독일 신학자 몰트만은 그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Der gekreuzige Gott)>에서 당신의 아들의 죽음 속에서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시는 하나님은, 기독교의 신은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대하여 연민을 모르는 무감정적인 신이라는 항의무신론에 대한 응답이라고 해석한다.
2) 소란한 싸구려 은혜 종교?
영화에는 기독교가 겉으로는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종교이지만 그 내면은 이기적이고 왜곡된 종교라는 인상이 깔려 있다. 살인범의 ‘용서받고 평안하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그녀는 그처럼 일방적으로 용서와 은혜를 베푼 하나님에 대한 배신을 하나하나씩 실천한다. 그것은 어쩌면 종교에 대한 굴레를 푸는 행태이며, 지금까지 그녀를 억압했던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는 행태이다. 여인은 반항적 행태들을 행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에 저항한다. 야유회 집회에서 목사님의 대표 기도에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를 틀어 놓아 방해한다. 약국을 운영하는 장로를 유혹해 불륜을 저지르려다가 실패를 맛본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돌멩이를 던져 기도회를 무산시킨다. 그러한 그녀는 초라하고 힘도 없다. 그래서 죄의 과일로 상징되는 사과를 칼로 베어 물며 동맥을 끊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근 문을 어렵게 열며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이러한 여인 신애의 저항운동에는 정당성이 없다. 영화가 보여 주는 정당성이란 피해자인 자기 먼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용서를 해 주었다는 사실에 대한 실망과 반항이다. 신애는 회한과 절망 속에 있는 살해범이 자기에게 용서를 구하는 말과 모습을 원했을 것이다. 그럴 때 신애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이 절망과 자책감에 시달리는 영혼에게 용서라는 선물을 주었을 것이며, 신애는 용서를 베푸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강력하게 비판한 인간 행위의 의(the righteousness of works)다. 기독교에서 용서는 우리의 은전이나 독선이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용서에 감사해서 행하는 2차적 일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인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았다는 살해범의 너무나 평온한 표정과 말에서 깊은 충격과 저항감을 느꼈던 것이다. 자기가 해야 할 용서를 하나님이 가로챘다는 마음을 가진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기독교에서 회심하고 용서받은 자의 태도는 아니다.
여기서 신애가 이해하는 기독교는 인간적인 원한을 풀어 주는 종교 외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의 하나님은 인간의 원한을 풀어 주는 출처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내가 너를 용서한다는 주권적 선언이 가지는 깊은 의미를 모르고 있다. 그녀가 가진 종교적 체험 속에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용서라는 카타르시스를 단지 자기 위안(慰安)를 위해 심리적으로 체험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여기서 신애에게 이사야처럼 그의 거룩한 주권적 영광 속에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체험이 결여되고 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났고 이 만남 속에서 그 자신의 죄책을 발견한 것이다: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3-5):
3) 인간의 용서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기독교?
이 영화는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잃은 여인의 한 많은 마음을 극화(劇化)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줄거리의 배경으로 설정한 기독교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왜곡을 초래할 위험성을 동반하고 있다.
영화에 의하면 기독교는 용서를 말하나 피해자의 마음의 아픔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종교집단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것은 ‘피해 당사자인 인간이 용서해 주기 이전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용서를 하고 마음에 평안을 준다’는 사실에 대한 거부감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받는 용서라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함축은 신애가 살해범을 만난 후부터 하는 일탈행동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야유회에서 목사님의 설교 시에 몰래 음향실에 들어가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틀어 설교를 방해하는 것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가게에서 이 CD를 몰래 훔쳐 와서 음향실에서 설교 도중 튼 것은 의도적이며, 목사의 설교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애를 위하여 기도하는 신자들의 진지한 기도 시에 약국의 유리창을 깨뜨림으로 더욱더 드러나고 있다.
4) 일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오는 주인공
이 영화에는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처럼 해피엔딩이 없다. 영화에서 화해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애가 다시 돌아온 것 자체가 화해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신애는 그녀와 적든 크든 간에 갈등 관계에 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상담과 치료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료했다고는 하지만, 결코 입원 이전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지 않는다.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을 보면 피하거나 화내게 된다. 살인범 딸이 이발사 보조원이 되어 자기 머리를 잘라 주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신애는 중간에 뛰어 나오게 된다.
영화의 마무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줄거리가 전개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차라리,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후 신애가 그녀가 유혹한 장로를 찾아가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더라면, 그리고 그녀가 기도회를 방해한 신자들에게 찾아가 저들의 진심을 왜곡했던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했더라면. 목회자를 찾아가 야외설교를 방해했던 것에 대하여 용서를 구했더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인간적인 차원에서 해석한 자신의 얕은 믿음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잘라 주는 살해범의 딸로 하여금 머리를 자르도록 허락했더라면. 그리고 그 딸을 받아줌으로써 그 아버지를 용서를 하는 것으로 끝났더라면 훨씬 영화는 깊이를 더하는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집 마당으로 되돌아와 거울로 자기가 스스로 자기 머리를 어설프게 자르는 것으로 이 영화는 끝나고 있다. 그녀는 기독교에서 용서와 구원을 찾지 못하고 다시 되풀이 되는 일상(日常)으로 되돌아온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인이 자르는 머리카락 더미가 바람에 날아갈 때 비밀스러운 햇빛(밀양)이 그것을 비추고 있다. 여기에 밀양이라는 주제의 함축성이 있다. 여인의 머리카락을 비추는 비밀스러운 햇빛은 아마도 제도적 기독교 안에서 자기의 한을 풀지 못한 여인에게로 향하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이 창조세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다.
5) 상(傷)한 심리를 무시하는 기독교?
이 영화는 기독교가 심리치료를 무시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하나님은 죄인을 헐값으로 용서해 주시는 ‘용서의 기계’인 것처럼 기독교를 왜곡하고 있다. 하나님은 항의무신론자들(protestatheists)의 비난처럼 감정도 없고 상처받은 자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분으로 왜곡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알려 주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감정이 없으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슬퍼하시는 너무나 풍부한 감정을 지니신 분이시다. 범죄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슬퍼하시는 심정을 그의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 같이 전하고 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였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1;2-4)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파멸한 그의 백성과 예루살렘에 관하여 다음같이 애가를 부르고 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애2;11)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찌어다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찌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찌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와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찌어다 하였도다”(애2;18-19)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 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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