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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언약: 그 구속의 파노라마 II - II. 주제연구 (4) 비스가 산의 절망 =

은바리라이프 2008. 6. 3. 20:36
비스가 산의 절망 = 우리의 희망?
8. 언약: 그 구속의 파노라마 II - II. 주제연구 (4)
 김무현
한국창조과학회 미주 텍사스지부장
Texas A&M 대학 교수
해양|토목 공학 박사


4) 비스가 산의 절망 = 우리의 희망?

신명기 3:25-28은 구약 전체 중에 가장 슬프고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80세의 늙은 나이에 소명을 받아,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온갖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해가며 하나님께 헌신했던 모세가, 정작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려 하는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죽음을 준비하라고 아주 냉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하고 그를 담대케 하며 그를 강경케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로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신명기 3:25-28)

모세는 “나로 하여금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그 약속의 땅을 한 번 만이라도 밟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간구하지만, 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하십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 산에 올라가 그 땅을 바라만 보라. 하지만 네가 요단강을 건너지는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계속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가 이 백성을 거느리고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서 그들로 기업을 얻게 하리라.”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임을 천명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철저하고도 어찌 보면 지나치도록 냉정하게 모세의 간구를 외면하셨을까요?

신광야에서 물이 없어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위를 명하여 물을 내라 지시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동족에 대한 분을 참지 못하며 지팡이로 바위를 쳐 물을 냈기 때문일까요? 그 물 내는 일을 마치 자기의 능력으로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게 끔 한 그 행동의 대가가 그토록 컸을까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더 맡기신 자에게 더 찾으시고, 주신 달란트와 소명에 상응하는 심판(weighted judgement)을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 그것이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출애굽 초기에 이미 르비딤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한 비슷한 기사를 상기시키며, 반석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그 반석을 침으로 (즉 십자가에 못박으므로), 거기에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생명수가 나옴을 상징하는 것이라 해석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증거합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린도전서 10:4)

즉, 하나님께서 광야생활 말기에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 한 것은 한번 십자가에 못박은 그리스도를 다시 못박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함축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를 어기고 다시 반석을 친 모세에게 내린 엄한 징계는 은혜를 체험한 후에 다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크리스천에 대한 하나님의 엄한 경고이기도 한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모세는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와 동행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불순종하고 불평하며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타락에 대한 책임을 그들의 영적 지도자인 모세에게 물으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심판적인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과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려는 의도가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상징이며 대표자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약속의 땅인 구원과 영생으로 건널 수 있도록 해 주지 못합니다. 율법은 단지 모세처럼, 또는 몽학 선생처럼, 우리를 새 언약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인도해주는 역할만 합니다. 히브리어 여호수아(Joshua)는 헬라어 예수(Jesus)와 똑같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즉, 여호수아는 오실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여호수아, 즉, 예수께서 언약의 완성과 마침이 되셔야하며, 오직 그를 통해서만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몽학 선생으로서 바로 그 약속의 땅까지 인도해 준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옛 언약 즉 율법이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율법을 다 지켜서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자는 없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그로 인한 은혜만이 우리를 믿음 안에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점을 너무나도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비스가 산 정상에서 눈앞에 펼쳐져 있는 실재적 약속의 땅(physical promised land)은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원대하게 펼치시는 구속의 청사진 가운데에서의 예수께서 이끄시는 약속의 땅 (구원을 통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선명하게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 약속을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너무나도 선명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