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족장(아브라함)
제 3 장 아브라함의 받은 약속 아브라함은 두번에 걸쳐 거듭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그처럼 거듭 받은 약 의 속의 내용은 곧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와 그 후손에게 주시리라는 것과 또 그 후손들은 능히 셀 수 없으리만큼 번성하리라는 것이었다. 이같은 그 두번의 약속은 내용이 동일한 것이지마는 그 약속을 받을 때의 환경이 달랐고 그 내용 에 있어서도 약간 다른 점이 있다고 느껴진다. 이제 그것들을 좀더 자세히 살 펴 보기로 한다. 1. 첫번 약속을 받을 때의 환경 창세기 13:14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란 말로써, 첫번째의 하나님의 약 속의 말씀은 시작된다. 위에 기록된 본문이 바로 그것이다. 창세기 13:1-13까 지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이 무엇 때문에 서로 갈라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구 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는 것을 본 아브라함 은 그러한 부끄럽고 비참한 꼴을 이방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에게 보이 고 싶지 않았다(창13:7).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모든 것을 희생하고 나선 골육 형제(삼촌과 조카)가 얼마 안되는(?) 풀밭 몇평을 놓고 이방인들 앞에서 서로 다툰다는 것은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이었던가. 아브라함은 슬픈 마음으로 롯을 불렀다. 창13:8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 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 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것은 아브라함이 롯에게 한 말이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 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 얼마나 처 량한 말이었던가. 롯은 물이 넉넉한 기름진 땅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여 떠났다. 슬픈 마음으로 롯을 떠나 보내고 쓸쓸히 돌아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셨다.<바로 그후에(창13:14)> 하나님께서는 온 가나안 땅을 그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이러한 약속을 주신 것은 바로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 " (13:14) 의 일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재명심할 필요가 있다. 보이는 것을 양보 했을 때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주시는 하나님, 적은 것을 양보했을 때에 더 큰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었다. 2. 둘째번 약속을 받을 때의 환경 창세기15:1에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란 말로서, 또 둘째번 약속은 시작된 다.즉,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 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그를 이끌고 밖으 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 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 와로라." 이것이 둘째번 약속의 말씀이었다. 첫마디의 " 이 후에"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말은 첫번째 약속을 받을 때의 " 롯이...떠난 후에"란 말과 잘 호 응되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한 후에 크신 상급으로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는 또 다음 어떤사건 후에 그에게 크신 상급을 약속하셨을까. 이제 그것을 살 펴 보기로 하자. 창세기 14장은 롯이 소돔 땅에 가서 거할 때에 시날 왕 아므라벨의 연합군이 소돔과 고모라를 쳐 왔을 때에 되어진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소곰과 고모라의 왕이 패하였을 때 그곳의 모든 재물과 양식은 빼앗기고 롯도 포로가 되었고 그 재물과 가족들도 다 빼앗겼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 은 집에서 기르던 사병 318 명을 거느리고 원수들을 쫓아가서 그들을 치고 롯 을 구원했다. 모든 "재물과 부녀와 인민들을 다 찾아왔다.(14:16). 이 때에 구 원을 받은 소돔왕은 아브라함에게 사례하여 하는 말이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창14:21)했다. 이러한 소돔 왕의 제안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그것을 깨끗이 거절했다. 창14:22에 보면 "천지의 주재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이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했다. 아! 이 얼마나 깨끗한 거절인가. 본래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세상의 상징이었다. 그들의 부괴와 영화는 세속적인 향약의 상징이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에서 오는 기쁨을 원치 않았다. 그는 그것을 깨끗이 거절하였다. 거절한 이유인즉 그것을 취하여 내가 부자가 되면 소돔 왕 네가 나로 부자 되 게 하였다는 그런 말을 남기로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부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싶었던 것 이다. 이것이 곧 아브라함의 신앙이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해 보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거절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그의 상급이 되셨다고 선포하셨다.창15:1의 [이 후에]란 바로 그러한 일들이 있어진 [후에]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이 소돔 왕의 제의를 거절한 바로 그 후에 하나님의 크신 축복과 약속이 있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15:1)고 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은 원수들을 이긴 후에 오히려 두려워 했음을 본다. 그들이 대오를 다시 정비하여 쳐 올 것을 무서워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는 그를 격려했다. 두려워 말라고 했고,"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셨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캄캄한 하늘을 우러러 보게 했다. 하늘의 저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하시면서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다.그리고 가나안을 그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을 삼게 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위에서 본바와 같이(창13:1-13) 아브라함이 이방 사람들 앞에서 골육이 서로 다투게 된 것을 슬프게 알고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함을 보신 하나님께 서는 그에게 첫 약속을 상급으로 주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제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 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 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열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13:14-17). 그러나, 또 다음 하나님께서는 그가 죄악된 소돔의 부귀를 거절했음을 보았 을 때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방패가 되시며 또 지극히 크신 상급이 되심을 확약하시면서 두변째의 약속을 주셨던 것이다. "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했었고, 계속해서 가나안을 그 와 그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을 삼게 하셨다. 그러면 그 첫번과 둘째번의 약속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차이는 먼저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의 동서남북을 바라보라"(13:14)는 말과 "하늘을 우러러...보라(15:5)는 말에게 오는 것이 아닐까? 첫번 약속의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녀에게 주리라는 것과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으리라는,ㄴ 것은 육신의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고 거기에서 그의 후손들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이라면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는 그 말은 영적 가나안의 영적 신령한 믿음의 자녀들의 별과 같은 창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육신의 가나안의 기업을 말하 때는 그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라" 했고 "땅의 티 끌을 능히 셀 수 있을 찐대 그 자손고 셀 수 있으리라" 하셨는대 이것이 아브 라함의 육신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왕상4:20) 하늘의 셀 수 없는 별 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어질 아브라함의 영적 신령한 자녀들을 가리킴이 아닐까. 창15:5에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는데 여기 "네 자손"이란 원어는 복수가 아닌 단수이다. 그것은 여럿을 가리킴이 아니요, 곧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갈라디아 3:16에 보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킴이라고 했다. "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 들이라 하지 아니 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 스도라"(갈3:16) 했음을 본다. 분명히 아브라함은 캄캄한 하늘의 뭇별을 우러러 보았을 때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 생겨질 영적 후손들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 같은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 의 의로 여기셨다"(창15:6) 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감사하자. 본래를 이방 백성이었던 우리가 이제는 그저 "땅의 티 끌 같은 후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아브 라함의 영적 후손들이라 생각할 때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부기>위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의 받은 언약 즉 "....내가 네 자손을 땅의 티끌 같이 하리라..."는 것과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두 개의 언약을 구태어 구별하여 전자는 아브라함 의 육신의 가나안에서의 번성을 약속함이요 후자는 그의 영적 믿음의 후손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적 축복을 약속함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지나 친 영적 해석이라고 하는 자들이 있을 줄 안다. 즉 그들은 꼭 같은 내용의 약 속을 대구적으로 땅과 하늘. 티끌과 별로 표현한 것 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구별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이 둘째번 언약이 주어진 직후였다.(창15:5,6)는 사실과 둘째는 "땅의 티끌 같으리라"는 그 첫 약속은 열왕기상4:20에 보면 벌썰 솔로몬 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암시되어 있 기 때문이다. 제 4 장 아브라함과 여호와의 상급 아브라함은 지극히 큰 상급을 받은 믿음의 조상이었다. 지극히 큰 상급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곧 그의 지극히 큰 상급이었다고 창 15:1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상급만이 아니라 그의 방 패가 되신다고 하셨다.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여호와께서는 저를 건지셨고 가 정이 완전히 파탄할뻔한 그러한 위경에서 하나님께서도 친히 저의 방패가 되어 주셨던 것이다(창12:14-20). 아브라함은 시날왕 아므라벨과 그의 연합군을 쳐서 이긴 후 사랑하는 자기의 조카 롯과 그 가족들만을 구원한 것이 아니다. 소돔왕과 고모라의 왕은 물론 이요, 그들의 백성들과 재물들도 다시 찾았다.(창14장) 그 때에 소돔 왕이 아 브라함에게 이렇게 제의 했다.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은 당신이 취하고 사람들만을 내게 보내 주소서" (창14:21).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유명한 대답 을 우리 신자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될줄 안다."아브라함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라함을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가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 하리라"(창14:23,24). 이러한 그의 대답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 세상의 상징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부귀를 거절한 것은 깊은 의미를 가지는 것 이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의 부귀가 그리워 따라 간 사람이라면 아브라함은 찾 아드는 그것마저 거절한 사람이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거절한 이유는 그것 뿐 만 아니었다. 소돔과 고모라의 재물을 받아들임으로써 부자가 되었다는 추한 말을 그는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부귀는 오직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어진 것임을 그는 세상에 선포하기를 원했었다. 그는 자기의 부귀를 통해서 도 오직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부라함을 크게 축복하셨다. 창15:1에 "이후에 여호와 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하셨다. 아! 이 얼마나 놀라운 상급인가! 이때 이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셨던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셨던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아브라함 이후 오고 오는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하나의 신앙생활의 좋은 모범으로서 깊이 명심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세상의 향락과 죄악 된 영화와 부귀를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친히 저들의 상급이 되어지고 방패 가 되어진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이기도 하다. 히11:24,25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 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 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하셨다.모세도 역시 아브라함과 같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악의 낙을 거절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저를 축복하여 믿음 의 지도자로 삼으신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 무슨 상급을 요구했었던가. 창15:2에 보면 " 아브라함 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 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했었다. 계속해서,"아브하함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 이니이다"(4절)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 그리웠다. "나는 무자하오니" 하면서 아들을 구했다.본문 에 나타낸대로 그에게는 집에서 길리운 다메섹 소년이 있었다. 엘리에셀이라 는 이름인 그는 후일에 이삭의 아내를 얻기 위하여 메서포타미아로 보냄을 받 아 리브가를 데려온 아브라함의 종과 동일한 인물이라고 성경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집의 모든 소유를 맡아 늙도록 충성한 종이었다. (창24:1-2). 아브라함은 그를 자기의 상속자로 삼기로 일찌기 결심하는데 홀연히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 즉 롯을 떠나보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 보라....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3:14-17)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계시를 받은 후 벌써 많은 세월은 흘렀어도(창14장 참고) 하나 님께서는 그에게 씨(아들)를 주시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나타나셔서 크신 상급을 약속하시니 그는 무슨 상급을 주시려는가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혈육의 아들 뿐이었다. 긋언 무슨 아들이 없는 고독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기에게 주어진 하 나님의 언약을 이어받을 상속자가 그리웠던 것이다." 동서남북의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그는 분명히 받았건만 상속자인 아 들이 없이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사실 이것은 그의 신앙의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보라!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구하는 자에게 주시되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이시었다. 육신의 상속자를 구하던 아브라함에 게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상속자를 구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상속자 뿐 아니라 영적 상속자까지도 주셨다. 육신의 아들을 그리워 하던 그에 게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아들 뿐만 아니라 메시야를 주셨던 것이다. 창15:5에 보면 "내게 씨를 주지 아니 하셨으니" 하며 탄식하던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시면서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다. 여기[네 자손](원문의 씨,단수)이란 말은 복수가 아니라 단 수이다. 그 단수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까. 그 육신의 아들 이삭이 외아들이 었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일까. 물론 현실적으로는 사라가 낳은 이삭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신약의 사도 바울은 이 약속을 그렇게 간단하 보지 않 았다. 갈라디아서 3:16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 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 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 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했음을 본다. 그 자손이란 복수 아닌 단수 곧 그리스도를 가리킴이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와서 비로서 [ 그 자손](원문은 단수로 씨)을 그리스도로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 도 벌써 그것을 알았다. 그는 "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리라"했을 때 육신의 아들만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것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장차 나타날 자기의 씨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 과 같은 많은 후손들이 영적 가나안을 상속할 것을 믿었었다.(히11:13). 그러한 신앙은 진실로 성령의 지도로 생겨진 믿음이 아닐 수 없다. 아브라함은 본래 일찍부터 하나님을 섬긴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보게 하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계시를 통하 여 그 자손이란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임을 믿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 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때 이 후 아브라함은 육신의 가나안 보다도 하늘의 가나안을 더 사모하는 믿음의 조 상이 되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11:15,16)했었다/ 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는 하나님의 명형을 순종하기 위하여 정든 산천 부유한 고향 땅, 그리운 형제친척을 버리고 떠난 것만 아니었다. 그는 나그네 의 곤고한 생활 중에서도 세상으로 오는 모든 부귀와 영화를 오직 여호와의 이 름을 위하여 헌신같이 버리는 순결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이러한 그에게 하나 님께서는 친히 그의 크신 상급이 되어 주셨고, 땅의 가나안만 아니라 하늘의 가나안까지도 그와 그 후손들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셨다. 제 5 장 아브라함의 실수 위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슬프게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만 실수하 여 첩을 얻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된 경로는 다음과 같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15:5)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었다. 그때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셨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 의로 여기심을 받을 만큼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시혐에 그만 실패했다. 즉 그 시험이란 이렇다. 세월은 흘러 그 가 가나안에 들어와 약속을 받은지도 어언 10년이 지났건만 아들이 없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첩으로 준 때는 아 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10년 후이었더라"(창16:3) 10년을 더 참지 못하여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기 위하여 첩을 얻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그 아내 사람의 권면을 따른 때문이었다. 창16:2에 "사래가 아브 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치 아니 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 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하셨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따라 하갈을 첩으로 얻었다. 이것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은 지난 날에도 벌써 여러 차례의 작지 않은 시험들을 당했었다. 어떤 시험에도 잘 이겼으나 어떤 경우에는 넘어지기도 했다. 먼저 그가 이겨 온 시험들을 보라. 1.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창12:1)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그는 순종했었다. 그것은 그는 그것을 순종하므로 잘 이겼다. 이로써 그는 하 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2. 롯에게 슬픔을 당하는 시험이 있었다.(창13:1-11). 그때에도 그는 모든 권 리를 그에게 모두 양보했었다.(창13:8-9).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길뻐하셨다. 그에게 가나안의 기업을 주시며 후손의 창성을 약속했었다.(창13:14-17). 3. 신앙의 용기가 있느냐 하는 시럼도 당했었다. 그는 318명의 적은 무리를 가지고 시날 왕의 연합군을 물리쳤다.(창14:1-16). 하나님의 의지하므로 오는 믿음의 힘이었던 줄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방패가 되어 주셨던 것이다(15:1). 4. 세상의 부귀와 영화의 시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겼다. 즉 소돔 왕 이 제공하는 큰 재산을 그는 거절했었다(창14:21-23). 그때 하나님께서도 그를 얼마나 기뻐하셨던가. 친히 여호와께서 그의 상급이라 하셨다(창15:1).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그의 후손이 창성할 것이다. 물론 먼후일의 일이지만 그는 사랑하는 독자를 바치라는 그 어려운 시함에도 이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넘어졌던 시험은 어떤 것이었던가. 먼저 일상 생활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하는 시험에 졌다. 즉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을 때 그는 약속의 땅을 계속 지켰어야 했지만 그는 가나 안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었다.(창12:10). 그는 아무리 궁핍하여도 모든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 겼어야 했건만 그렇지 못했다. 사실 우리가 일상생활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하 나님을 의지하고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아브라함에게 는 물론 순종도 있었도, 믿음의 용기도 있었다. 겸손한 양보도 있었고 물질의 욕심도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굶주림을 이기며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 하므로 모든 염려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을 바라보며 살아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드디어 시험에 못 견디어 애굽으로 내려 갔었다. 애굽에서 그는 큰 위경에 이른 때가 있었으나(창12:14-15) 하나님의 특 별한 권고로 그는 거기에서 무사히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창12:17-20). 다음은 오늘 본문에서 보는 시험이다."하나님께서 네 씨(자손)로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면 그는 그것을 믿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 기까지 견대고 참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10년 이상을 더 참을 수 없었다. 드디어 하나님의 거룩한 그 약속을 인간의 추악한 방법으로 이루려 했다. 마침내 하갈을 첩으로 얻어 아들을 보려했던 것이다. 하기는 아브라함도 사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전혀 믿지 못한 것은 아니었 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전혀 믿되 그 약속을 믿되 그 약속을 하나님의 방 법대로가 아니라 인간의 악한 수단으로 이루려 하였다는 거기에 그들의 실패가 있었다고 본다.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은 하나님의 거룩한 방법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적 인 방법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수눈 없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오기까지 참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지 못한데 그의 실패가 있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자주 느끼는 것은 약속을 바라보며 오래 참고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야곱의 경우에서도 그것을 본다. 창25:23에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자를 섬기리라"는 약속을 받고 태어난 아들이 곧 야곱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때를 허락하 시기 까지 그는 믿음으로 오래 참고 견디었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는 참지 못 했다. 인간의 속임수로 장자의 기업을 빼앗으므로 그 언약을 이루려 했다. 그는 그것 때문에 일생을 유리하며 고생하며 고생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잘못된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신 약 속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가 필여하다. 히브리서 10:26에도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여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 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심을 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반도시 오래 참았어야 했을 것인데 그만 10년에 지치고 말았다. 그가 첩을 얻은 결과도 물론 비참했다. 우선 가정에 불화가 생겼다.하갈은 사라를 멸 시했다 (창16:4). 사라는 또 하갈을 학대하여 내어쫓아야 했다(창16:6). 그 여 종 하갈의 후손과 사라의 후손 사이에는 늘 전쟁이 있어 천추의 원수가 되어 버렸다. 아브라함이 첩을 얻은 그 결과는 참으로 비극, 그것이었다. 어떤 사람들 중에 는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다처주의를 용납하시지 않았 던가 의심하는 자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경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철저한 일부 일처 주의이다. 말라기2:15에 보면 "여호와는 영이 유여 할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 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하셨다. 이것은 일부 일처이어야 한다는 뜻만 아니다. 오직 그래야만 경건한 자녀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아브라 함의 씨 중에는 드디어 불경건한 씬가 섞기게 되어 두고 두고 큰 불행의 근원 이 되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역사에 있어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거듭 말하거니와 아브라함이 첩을 얻은 것은 결코 하나님의 허용이거나 묵인이 아니었다. 분명히 그것은 그의 큰 실수 였다. 그러면 믿음의 조상인 그가 어떻 게 그런 실수를 범하였겠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가 아직도 옛 습관과 옛 풍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었가고 본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말려 들어간 옛 습관이란 어떤 것인가. 아브라함 시대의 것으로 소위 하므라비 경전(Hamurabi Code)이란 것이 일찌기 발굴 되었는데 거 기에 보면 바벨론에 있어서는 아내 된 자가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경우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자녀를 얻어 자기의 자녀로 삼을 수 있다는 법이 허락 되어 있 다. 하무라비의 경전 밖에도 그러한 법률의 흔적이 다른 고고학적 자료에도 나 타나 있다. 그것은 모드 아브라함 시대의 그의 고향이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서 발굴된 자료들이다. 사라와 아브라함이 하갈을 그의 첩으로 얻게한 것은 그 러한 시대의 풍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속적 불신행동이었음이 확실하다. 우리는 이제 엄숙히 사도 바울의 다음 성구를 다시 한번 묵상하자, "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2-24). 제 6 장 아브라함의 시련 위의 본문들은 창세기 16장의 끝절과 17장 첫절이다. 16장은 아브라함이 하갈 을 첩으로 얻어 이스마엘을 낳게 된 기록이다. 그 때의 아브라함의 연령은 86 세였다고 그 끝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뒤이어 곧 따라 나오는 창세기 17 장 첫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99세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99세 때이란 곧 그 아내 사라가 이삭을 잉태하는 해이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본 후 다시금 이삭을 낳기까지 13년이란 긴 세월이 공백으로 뛰어 넘었음을 본다.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 동안의 아브라 함의 역사는 알 길이 없다. 진실로 침묵의 13년이다.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는 아브라함과의 교통을 끊었던 때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거두셨던 기간 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A.W.Pink). 비록 그것은 분명치 않다. 할찌라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성경은 그 13년간의 긴 세월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다는 사 실이다. 이러한 침묵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까? 흔히 히브리 사람들은 13의 수를 고난과 시련의 수라고 생각했다. 에스더 3: 12,13에 보면 하만이 유다 민족을 전멸하기로 결정하고 왕이 조서를 내린 날이 [정월 13일]이었고, 그것을 집행하기로 결정한 날도 "십이월 곧 아달월 13일" 이었다(이밖에도 창14:4, 창47:9등도 참고). 히브리 사람들은 그러한 일들을 생각하고 13의 수를 고난의 수 또는 시련과 반역의 수로 생각하는 풍속이 생긴 줄 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하나님의 친구라고 까지 불리우던 아브라함이 하 나님과의 교통이 끊긴 13년 긴 세월이야 말로 그 얼마나 괴로운 시간들었으랴! 그 기간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큰 시련의 기간이요, 깊은 반성의 기간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13년의 시련 중에도 오히려 아브라함의 믿음은 크게 자랐음을 본다. 로마서 4:19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했음을 본다. 그가 85세가 되던 해에 사라의 태를 믿지 못해서 첩을 얻어야 했건만 오히려 백세가 다 되어 그 믿음이 견고해졌다면 그 무엇 때문이었을까? 환난과 징계가 때로는 성도들에게 유익하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때에 오히려 믿음이 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끊긴 괴로운 13년, 그러한 때에 오히려 참고 기다리며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았다.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그와 13년이나 교통을 끊었었을까? 앞에서 말 한 바와 같이 13의 수가 무슨 고난의 수가 되어서 그 수를 채우기 위하여 그런 것은 아닌 줄 안다. 그러면 무엇일까. 그 대답으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 자. 첫째는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는 것을 기다림이요, 둘째는 이스마엘이 13세가 되기를 또한 기다리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로 "창17:24,25에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99세이었고 그 아들 이스마엘이 양피를 벤 때는 13세이었더라" 고 하심을 보아서 그렇다. 여기에서 보는대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99세였고 이스마엘은 13세 나던 해였던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그의 어린 아 들 이스마엘이 13세 되기를 기다리셨다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그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옛날부터 이스라엘의 풍 속에 남아가 나서 13세가 되면 성년의 예식을 행하는 법이 있었다. 그것을 ( 바르.미즈바)라고 부른다.그것은 남자로서 13세가 되면 비록 부모를 떠나 어디 를 가나 살 수 있다는 뜻으로 그런 예식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이제 13세가 되었다. 위에서 말한 소위 침묵의 13년이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13세까지 키우는 시간이었다. 이스마엘은 비록 언약 밖에 있는 죄악 된 혈육의 씨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셨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년의 해가 되기까지는 이스마엘로 하여금 고이 아브라함 의 품에서 자라게 했다. 흔히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 아들을 내 어 쫓으라"(창21:12)고 명령하심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하다. 그러나 그 렇치 않다. 물론 그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도 심히 그 아들 (이스마엘)을 위하 여 그 일이 (내어 쫓는 일)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라고 하였음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내어 보내는 이스마엘에게 얼마나 크 신 은총을 베푸셨던가를 우리를 알아야 한다.창17:20에 "...내가 그에게(이스마 엘)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찌라. 그가 열 두 방백을 낳은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물론 그 약속은 그의 당대에 다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본다(창25:12-18). 또 쫓 겨 난 하갈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긍휼을 베푸셨던가. 그가 처음 쫓 겨 났을 때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방성대곡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하나 님께서는 그를 위로하셨고(창21:18), 그의 눈을 밝혀 샘물을 보게 하셨다.(창 21:19).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참으로 크고 놀랍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창 21:19에도 보면 "하나님이 그 아이와 (이스마엘)함께 계시며 그가 장성하 여 광야에 거하며 홀 쏘는 자가 되었더니" 하신 말씀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하셨다고 하여 결코 그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물론 하갈을 같이 내어 쫓은 것도 이스마엘을 키우기 위하여는 부득 이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그 어느 사람에게도 미치지 않 는 곳이 없음을 알아야한다. 하나님은 그 어떠한 사람에게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 어떠한 사람에게도 가혹하게 학대하신 일은 없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배반하거나 받아 들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하는 것뿐이다. 언약 밖의 아들인 이 스마엘까지도 성년(13세)이 되기 까지 고이 아브라함의 품에거 자라게 했고 그 가 광야에 내어 쫓긴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하시며 그에게 창성하는 한량 없는 복을 주셨던 것이 아닌가. 또 다음 둘째로, 소위 침묵의 13년은 아브라함이 99세 되는 것을 기다리기 위 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로마서 4:19-21에 "그가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 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했음을 본다. 99세는 100세를 바라보는 해이다.연령이 100세이면 위의 셩경 말 씀과 같이 바라보는 해이다. 연령이 100세이면 위의 셩경 말씀과 같이 "죽은 것 같음"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태가 완전히 말라 "죽은 것 같이" 되었음을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때까지를 기다리게 했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로 하여금 인간의 무능함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 이 확실해지기까지를 기다려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려 하였던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기까지 특별히 그 마지막 이스마엘을 키우던 그 13 년간은 많은 회개가 있었을 것으로 안다. 특별히 불신앙의 씨요,죄악의 씨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스마엘을 키우면서 그가 자라는 것을 지켜 보았을 때의 아브라함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었을까.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그것을 상상할 수도 있겠다. 죄 없는 어린아이를 놓고 불 쌍히 생각하는 마음과 스스로 회개하는 마음을 그는 금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회개는 마침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깊은 신앙으로 점점 자랐을 것으 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침묵의 13년은 결코 헛된 공백이 아니었고 시련의 그 13년은 그의 믿음이 더욱 깊어지는 회개의 기간이었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죄악의 씨를 슬픈 마음으로 묵묵히 키우던 그 13년은 오히려 새로운 언약에 대 한 신앙을 키우는 복스러운 기간이기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함은 지나친 상상은 아닐 것이다. 제 7 장 아브라함과 사라 <창세기 18-21장> 위의 본문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도 늘고 사라도 늙었다. 사라는 완 전히 단산하였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잉태하는 힘이 어디서 왔을까. 히브리의 기자는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고 했다. 그렀다면 그는 얼마나 큰 믿음을 가졌기에 그러한 이적이 생길수 있었을까? 사실 성경에서 보는 대로 그는 그렇게 큰 믿음을 가졌던 여성 이라고 생각키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우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첩을 얻게 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창세기 18:10에 보면 두 사람(사실은 천사들)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 라 했을 때 그는 장막 뒤에서 숨어서 하는 말이 "내가 노쇠 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창18:12) 하며 속으로 웃었던 사람이다. 이 웃음은 불신앙의 웃음이요, 비웃음의 웃음 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 요 하느냐"(창18:13) 하며 꾸짖었음을 본다. 그는 거듭 "여호와께서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하며 그의 불신앙을 책망 하였다. 그 때에 사라는 그만 두려워 서 그 일을 승인치 아니하며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15절)했다. 그러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15절). 이것은 천사의 말이었다. 이러한 천사와 사라의 대화에서 그의 불신앙은 여실히 증명되었다고 본다. 즉 그는 자 기가 "믿음으로 사라 자신은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히11:11) 했음은 어찌된 일일까. 이렇듯 모순된 듯 보이는 거기에 사실은 깊은 진리가 숨어 있다. 사라의 마음 속에는 분명히 신앙과 불신앙이 함께 있어 서로 갈등이 있고 투쟁이 있었을 것 이라고 본다. 믿는 마음과 믿지 못하는 마음이 서로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비웃기도 하고 두려워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신앙은 승리 한 것이다. 그러므로 드디어 히브리의 기자는 그의 신앙만을 찬양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아브라함의 역사를 보아도 같다. 구약에 나타난 아브라함 에게는 실수도 많았고 허물도 많았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믿음의 조상으로 그의 믿음만이 케게 부각되어 있음을 본다. 롯의 경우도 같다. 그는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브라함을 슬프게한 사람이요, 소돔과 고모라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술에 취하여 불의의 두 아 들을 낳았단 사람이다.(창19:32-35). 모압과 암몬이 비로 그런 아들들이 아니 었던가 (창19:37,38). 그러나 신약성경은 롯의 불미스러운 것을 기록하지 않았 고 오히려 의로운 사람이라 일컬었음을 본다. 베드로후서 2:6,7에 "소돔과 고 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았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 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고 하셨는데 롯은 과연 그처럼 의로왔던가. 아니다. 구약의 기록은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롯은 분명히 잘못이 많았었으나 신약은 그를 가리켜 의인이라 칭했다. 기생 라합의 경우도 같다. 그는 분명히 거짓말로써 정탐군들을 피난시킨 사람 이었다.(수2:4,5) 그 동기는 좋다 하겠으나 그 방법은 반드시 좋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의 거짓을 말하지 않았고 그의 신앙만을 높이 찬양 했다. 즉 히브리 11:31에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 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 하였도다" 했다. 이 어찌된 일들일 까. 나는 종종 구약과 신약의 이러한 차이를 놓고 생각해 본다. 즉 신약은 구 약의 심판대라고-- 이제 신약이 구약의 아브라함을 심판한다고 가상해 보자. [아브라함아, 너는 믿음의 큰 본을 보인 조상이었다.] 이런 판단을 받았었다면 아브라함은 무엇이 라고 대답 했었을까.[아니요, 저는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지 않아 첩을 얻은 일도 있었읍니다.] 이렇게 그가 그의 양십대로 대답했다면 그 때 신약성경은 또 무엇이라고 말했었을까. [아니야, 너는 믿음의 조상이야!] 이렇게 판결했었 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롯의 경우도 같고 사라의 경우도 일반일 것이다. 비록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일찌라도 그것은 태산 같은 허물을 용서받게 하고 드디어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다. 장차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도 그것은 같을 것 이다."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었고, 나그 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 (마태 25:34-36). 우리가 장차 이러한 판결 을 받았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의롭지 못함과 적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크게 칭찬하시어 의인의 반열에 서게 하실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의 막중한 은혜라고 할 수 밖에 없 겠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사라의 믿음도 그렇다. 그것은 많은 의심의 큰 보 자기에 싸인 작은 겨자씨 한 알 같은 것이었지만 마침내 그는 그것 때문에 큰 믿음의 어머니가 되었고, 죽은 것 같은 그의 태에서 이삭을 잉태하는 기적이 생겼던 것이다. 믿음의 위대한 능력이여! 아들이 없어 탄식하던 그에게 이제는 큰 기쁨이 왔 다. 이삭을 낳았을 때 그는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참으로 감사의 웃음이요, 기쁨에 넘치는 감격의 웃음이었다. 창21:5,6에 "사라 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그는 이렇게 기뻐했다. 신앙의 승리의 기쁨이었다. 처음 불신앙의 비웃음을 웃었던 그가 마침내 감격적인 신앙의 웃음을 웃게 되었으므로 그 아들을 이름 하여 [이삭]이라 하였다. 히브리 말의 이삭은 [웃음]이란 뜻이다. 이삭을 낳은 후 사라는 너무 기뻐서 하는 말이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 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창21:7) 했다. 여기에 하나 이상한 것은 사라가 [자식들]에게 젖 먹이겠다는 말이다. 사라는 오직 한 아들 뿐이었는데 어찌하여 자식들이라 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그 지방의 풍속을 잠깐 생각하여 봄이 좋겠다. 옛날 가나안 지방의 풍속에 자녀를 생산치 못하던 여인이 어떻게 아들을 낳게 되면 크게 잔채를 베풀고 이웃 동내의 여러 젊은 어머니들과 아이들을 불러 같 이 즐기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순서 중의 하나가 아기들에게 젖 먹 이는 것이라고 한다. 그 때 그 새어머니가 동내 어린이들에게 한 번씩 돌아가 며 젖을 빨게 함으로써 참으로 아기를 낳은 어머니란 것을 증명해 보인다고 한 다. 생각컨대 자식들에게 젖을 빨리울 때마다 동리 어머니들은 박수를 치고 같 이 기뻐하며 웃음의 꽃이 피어 퍼졌을 것이다. 그러기에 창세기 21:6에 "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 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하는 기록이 남게 되었을 것이다. 이삭은 진실로 사라의 웃음의 아들이었다. 잉태할 때에 웃었고 출생 후에 웃 었고 모든 여인들이 같이 모여 웃었고.... " 너희에게 겨자시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 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 " 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 이 없으리라(마17:20). 제 8 장 아브라함의 이삭 어린 이삭은 아버지를 따라 브엘세바에서 사흘 길을 걸어 드디어 멀리 모리아 산이 바라보이는 지점에까지 왔다. 늙은 아버지 아브라함은 데리고 오던 두 사 환에게 나귀에 실었던 나무를 내리게 한 후 하는 말이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 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 오리라." (창22:5)하고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불과 칼을 손 에 들고"(창22:6)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멀리 산길을 묵묵히 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가는 참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가정 어려운 최후의 시험이었 고,또 그 아들 어린 이삭에게 있어서는 가장 무서운 첫 시험이었다. 먼저 우리는 이 시험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얼마나 어려운 시험이 었던가를 우선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 보자. 1. 그 시험이 있게 된 때와 환경에 대하여 창세기 22:1에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 르시되...." 하는 말로 그 시험은 시작된다. 여기 깊은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내어보낸 후를 말한다. 인정 깊은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을 내어 쫓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을 때 그는 "깊이 근심했다"는 성경 기록이 있 다(창21:11).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5,6세가 되기까지 (창17:25 및 21:8-9 참고) 저를 품에 키운 아버지로서는 참으로 슬픈 일이요, 큰 근심이 아 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근심하는 그를 위로 하면서 하신 말이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21:13) 했다. 그리고 오직 이삭만이 약속을 이어받을 아들이 돌 것임을 일러 주시면서 소망을 갖게 했다.(창21:12). 그러므로 이제 그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내어 보낸 후 오직 이삭에게만 모든 애정을 기울이며 희망을 두고 살던 때였다. " 그 일 후" 란 바로 그러한 때를 의미한다. 그 때는 이삭도 벌써 소년 시절 을 넘어 청년기에 들어 선 때인줄 안다. 그것은 그가 아버지를 딸라 3일 길을 걸을 수가 있었고 나무를 지고 산길을 오를 수 있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제 아들의 결혼의 때를 기다리며(장차) 그 아 들이 이삭을 통하여 "땅의 티끌 같이" 또한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을 바라보며 즐거워 하던 때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제 바로 그러한 때에 이 어째 된 청천벽력 같은 명령인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에 가 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이것은 참으로 순종키 어려운 명령이 아닐 수 없었다. 2. 그 시험의 특별한 점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 시험의 특별한 점은 그 아들 이삭은 [사랑 하는 독자]라는 데 있다. 성경에서 보는대로 하나님께서도 번제로 바쳐야 할 이삭은 가리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임을 특별히 강조하셨다.(창22:2) 사실 이삭은 그가 100세에 얻은 아들이요, 그나마 유일한 약속의 아들이 아니 었던가. 돌이켜 보건대 이스마엘을 내어 보낸 그때에는 그래도 하나님의 위로 가 있었고 또 더구나 아직 품에 남아 있는 이삭은 큰 위로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는 그 때와 형편이 다르다. 진실로 감당키 어려운 무서운 시험이었 다.더구나 이석은 싱앙적인 면으로 볼 때에도 특별한 약속의 아들이 아니었던 가. 과거 이스마엘 내어 보내라고 할 때는 그 이유까지 알려 주셨다. 즉 그는 약 속의 아들이 아닌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지금 이삭은 약속의 아들임에도 그를 번제로 드려야 한다니 참으로 누가 보아도 알 수 없는 일이요, 당황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저 한 마디의 이유도,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곧 "번제로 드리라"(22:2)는 이 명령을 그 누가 곧 바로 순종할 수 있을까. 번제 로 드린다는 것은 아주 죽여 희생의 제물로 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그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또는 "땅의 티끌 같이" 번성할 수 있으며 누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사실 이 시험이야말로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혈육에 대한 [애정의 시험]만이 아니라 그의 언약에 대한 소망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버리는 [신앙의 시험]이었다. 그러나 그는 침묵 중에 순종했었다. 3. 아브라함의 침묵과 순종 창22:3)에 "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하 는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은 그가 하나님의 그 명령을 실천함에 있어 그 마음 이 참으로 긴장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땅으로 가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2절) 하신 말씀이 떨어지자 아브라함은 곧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준비를 서둘러 떠났다. 이 얼마나 놀라운 순종인가. 그는 그처럼 아침 일찌기 일어나기 위하여 밤을 새웠을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순종은 곡 시편에, "내가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지 아 니 하였나이다." (시119:60) 하신 말씀을 연상케 한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데 혈육과의 의논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갈1:15,16). 오직 그에게는 절 대의 순종의 길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4. 이삭의 침묵과 순종 어린 아들 이삭의 순종도 그저 놀랍기만 하다. 번제의 나무를 지고 걸어가던 이삭은 "불과 칼을 손에 들도" ( 창22:6) 두에 따라 오는 아버지가 (창22:7을 보면 이삭은 아브라함의 앞에 가던 것이 본명한 듯하다.) 의심스럽던지 입을 열어 하는 말이 "내 아버지여....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22:7) 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대답,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 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22:8) 하는 그말을 듣자 다시 말이 없었다. 드디어 그 두사람은 지시하신 한 장소에 갔다.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잡으려 " (창22:9,10) 할 때에도 이삭은 아무런 반항이 없었고 그저 침묵으로 순종했다. 참으로 사람으로서는 연상키 어려운 놀라운 침묵이요, 순종이었다. 이삭은 벌 써 성년(13세) 기가 휠씬 넘어선 사람이 아닌가. 그는 사흘 길을 걸은 후에도 나무를 지고 산에 오를 수 있는 육체의 힘을 가졌던 청년(?)이 아니었던가. 얼마든지 아버지를 반항하려 들면 힘이 모자란 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수족이 묶이고 그 몸이 번제단 위에 칼이 번쩍이는 그 밑에 놓여 지기 까지 가만히 있을 수 있었던가. 아무헌 의심도 없이 한 마디의 묻는 바도 없이 또는 반항도 없이 그저 순종만 할 수가 있었을까.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 이다. 이것은 비유컨대 이삭의 완전한 실질적인 죽음을 의미한다(히11:19). 우리는 이삭의 이러한 순종 앞에는 그저 숙연한 감을 느낄 뿐이다. 하나님의 지시한 모리아 산은 후일의 갈보리였다. 그리고 번제단을 쌓았던 그 곳은 바로 후일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섰던 그곳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묵묵히 번제단에 오른 어린 아들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그림자였다. 어린 몸이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을 향하여 오르던 그 모습 그대로가 곧 십자가 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여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의 그림자이다. 모리아 산에거 아들을 죽여야 했던 아브라함의 그 괴로웠던(?) 마음에서 우리 는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또 아버지의 뜻을 따라 묵묵히 피흘려 제물이 되려는 이삭에게서 우리는 그리스도 의 모습을 본다. 그러면 이제 그러한 신앙과 순종의 결과는 어떠했던가.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 에서부터 그를 불러 외쳤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여기에서 그들은 과겨에 체험치 못했던 놀라운 신앙의 큰 체험을 보았다. 그것은 곧 [여호와 이레 (!)]의 신앙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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