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김성일 기독교문학
2008/04/16 13:37 http://blog.naver.com/wndqhrlehwk/110030149678 |
김성일씨의 신작이 나왔다 하면 들춰보지도 않고 냉큼 사곤 했었다. 그런데 내가 자라서인지, 대가리가 굵어져서인지, 이 '아브라함' 때부터 그 열기가 식어버렸다. 한국 기독교문학계에서 존중받아 마땅할 작품세계를 일궈내셨기 때문에 이의 제기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다. 그래도 느낀 점은 느낀 점이니까, 쓴다.
1. Lost in re-creation
아브라함은 분명 젊었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무엇인가를 지녔으리라. 진실에 대한 갈망이건, 한번 옳다 생각하면 악을 베어버리고 앞만 보는 의지건, 만민을 품을 듯 넓고 겸손한 마음 바탕이건, 뭐가 있었으니까 하나님의 눈에 턱 띄인 게 아닌가.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아브라함이 현명하고 능력있고, 무예까지 갖춘 건 좋은데, 공주의 흠모를 받을만한 매력남이며 군주를 위협할만한 실력자라. "다가오는 소리"에서 라합의 신분과 미모에 관계없이 그녀의 영적 목마름에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작가가 그녀의 지치고 삭막한 내면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슈퍼맨이 진리에 갈증을 느끼고 회심하는 예를 아는가? 내 육이 편하고 만인의 인정을 받는데 하나님이 뜬금없이 명령을 내려도 순종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수칸의 악에 떠밀려서, 호기심에서, 아브라함에게 '의'에 대한 본능적 순종성이 있어서? 이미 아담과 하와가 입증해 보이지 않았는가. 하나님과 완벽한 교류를 하고 있어도 인간은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축복을 선택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2. 제정신인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고 싶은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아브라함의 삶을 소설로 썼다면 분명 모리아산의 사건이 하이라이트다. 사건 하나하나가 그것을 위한 준비며, 훈련이며, 암시 아닌가. 그런데, 이 거창한 사건을 다루기가 너무 부담스러워서인지 소설에서 모리아산 부분은 별로 많지 않다. 이삭의 심리묘사는 없다. 아브라함은 결정을 내리는데, 그 이유는?? 너무 신학적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과는 틀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외로운 분이셨다' 가 이유다. 즉, 하나님의 외로움에 아브라함이 '한편'이 되어 드리기로 결정을 내리는 거다. 이 이유는 김성일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도 계속 나타난다. 작가의 신앙관이자 가치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른 작품들에서는 그럭저럭 앞뒤가 맞아 떨어졌는데, 아브라함에 와선 맥이 빠진다. 나는 내 아이를 바쳐본 적이 없어 말할 자격이 없는지 몰라도, '하나님의 외로움'이 전부가 될수 없다고는 말하겠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고독해서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의 사랑이 너무나 완전하고 충만해서, 그분은 자신의 사랑을 나눠주고, 더욱더 충만하게 하기 위해 그러셨던 게 아닐까. 인간이 없어도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은 하등 달라질 게 없지 않나. 인간은 하나님이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는 분이시다. 아브라함은 '동정' 에서 아들을 바치지 않았다. 성경은 '믿음'에서 바쳤다고 여러번 말한다. 하나님의 의, 권능, 사랑, 구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었다고.
3. 그두라
아무 증거도 없으니 그두라의 소생이 이삭 전인지, 후인지는 나같은 사람이야 주장할 바가 못된다. 하지만,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 그토록 잘못이었다면, 그두라의 자녀들은 왜 잘못이 아닌지. "약속" 전이라서? 모르겠다. '장자' 에 대한 설득력을 떨어뜨린다는 생각이다.
4. 그래도 재미는 있다. 1권은 특히 일반 소설들마냥 읽혀지고, 고정관념과는 아브라함의 청년 때 모습이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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