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36. 악극단 시절(상) [중앙일보]
처가 쪽 친척들에게 돈을 꿔 안면이 있던 모 악극단장을 찾아갔다. 60년대만 해도 악극은 영화와 함께 주된 오락거리였다. 가수.코미디언.악사들이 주요 도시를 돌면서 쇼를 했다. 그 무렵엔 10여개의 악극단이 활동했다. 악극단장은 영화로 치면 제작자였다. 물주가 돈을 대면 그가 50~60명 되는 팀을 꾸렸다. 나는 서울-대전-광주-여수-목포-순천을 도는 코스로 보름간 쇼를 하기로 하고 악극단장이 요구하는 대로 돈을 지급했다. 서영춘.배삼룡.백금녀 등의 코미디언과 도미.조석근 같은 가수, 김음률 댄싱팀 등 당시 인기 높은 연예인으로 공연단이 꾸려졌다. 예상보다 관객이 안 들어 서울 공연은 적자였다. 의기소침해서 다음날 대전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주요 출연진이 대전까지만 하고 돌아가겠다고 했다. 출연료를 사흘 분밖에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악극단장이 중간에서 속칭 '삥땅'을 친 것이다. 내가 따졌으나 악극단장은 능구렁이처럼 굴었다. 돈을 더 달라는 식이었다. 풋내기라고 얕보는 게 분명했다. 밖으로 나가 술을 한 잔 걸치고는 문방구에서 면도날을 하나 사서 돌아왔다. 손가락 사이에 면도날을 끼우고 "다 죽여 버리겠다"며 난동 아닌 난동을 부렸다. 다들 얼굴을 가리며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내가 워낙 날뛰자 단장은 예정된 일정을 채우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파리만 날렸다. 결국 마지막 공연지인 순천에서는 여관 숙식비는 물론 서울 갈 차비조차 없는 빈털터리가 됐다. 여관 주인은 빨리 돈을 구해오라며 독촉했지만 돈 나올 구멍이 없었다. 하나 둘씩 빠져나가고 악단장과 나, 악기 덩치가 커서 몰래 숨겨나갈 수가 없는 드러머와 베이스 등 5~6명만 '인질'로 남았다. 여관 주인이 두 손 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날 여관 마당에 가죽 점퍼를 입은 사내가 들어섰다. 청년 둘을 데리고 있었다. "단장이 누구요?" 나는 속으로 "옳다, 잘 됐다" 싶었다. 악극단이 돈을 못 갚으면 여관 주인이 지방 건달을 해결사로 쓴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차라리 한 판 붙고는, 그 틈을 이용해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중앙(서울)에서 온 단체이신데 흥행이 안 됐다니, 순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한 맘 금할 길이 없습니다. 여기는 내가 처리할 터이니 그냥 올라가시죠." 숙식비를 모두 자기가 내겠다는 거였다. 게다가 식당으로 불러 진수성찬까지 대접해주었다. 어찌나 고맙든지. 얼마 뒤 명동으로 그 가죽점퍼를 초대해 우리가 장악하고 있던 무학성 나이트클럽에서 거창하게 접대했다. 나는 '무릇 사내란 이래야 하는 거야' 라며 주변 건달에게 그의 '선행'을 한껏 치켜세워주었다. 건달세계에도 낭만이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
2005.01.30 18 |
'GG뉴스 > 문화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극 이미지 (0) | 2008.01.29 |
---|---|
자료사진들 (0) | 2008.01.29 |
2008/02/23 ~ 2008/02/24 국민악극 [울고 넘는 박달재] - 인천 (0) | 2008.01.27 |
'복고바람' 타고 중·장년에 어필…식상함, 창작성 결여 극복해야 (0) | 2008.01.27 |
악극은 제 인생의 전부라고 할 수 있어요 (0) | 2008.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