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문화에 의해 우리의 의식이 바뀌는 걸까, 아님 우리의 의식이 변화하면서 외국문화를 그 만큼 친숙하게 몸에 배인 듯 느끼는 걸까… 미국드라마의 영향으로 우리드라마 역시 변화하고 있으며 심지어 우리들의 생활마저 변화하고 있다. 미디어 등을 통해 노출된 사건들이 유사범죄로 일어나듯 요즘 봇물 터지듯 방영되는 미국드라마 일명 “미드”를 보고 우리도 “문화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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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가 왜 이 “미드”에 빠져있는지 생각해보자.
요즘은 정말 “미드”의 전성시대이다. 여러 미디어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그렇게 보도하고 있다. 그에 대한 말들도 분분하다. “국내 드라마와는 비교도 안될 막대한 자본을 투입한, 한편의 영화 같다”라는 수식어는 기본이다. 드라마 천국인 우리에게 “한국드라마의 위기”라는 말까지 나도는 것을 보면 정말 그냥 간과하기는 힘든 시추에이션 인 것이다.


“미드” 신드롬은 조금만 다시 생각해봐도 그것이 얼마나 거품인가를 알 수 있다. 미디에서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미드를 보고 있고, 문에 FTA가 개방된 이 시점에 미드는 한국드라마에 큰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라고 분석하고 있지만, 어처구니 없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미드는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통해 열풍이 불어 닥치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소수의, 네티즌들을 사이에서의 움직임이라 보는 편이 옳다고 봐도 무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미드신드롬”이라고 떠들어 대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소재의 다양화”나 “시각적 즐거움”처럼 단순한 이유들로는 해결도지 않을 것 같다. 그 내면에는 좀더 복합적인 이유가 숨어있다. 일단은 미디어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 지금은 다매체 사회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뉴미디어의 출현은 올드미디어인 TV를 경계하게 했고 인터넷의 등장은 TV를 거의 좌절에 빠지게 했다.


더 이상 드라마를 접하는 창구는 한정적이지 않게 된 것이다. 최근 SBS가 석호필을 내세운 대표적인 미드 “프리즌브레이크” 방영을 선언했지만 이미 다운받아서 보고 소장한 일명 “미드족”들에게는 별 의미 없는 일이다. 이런 이 인터넷의 출현은 단순히 드라마 다운로드 기능의 수준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새롭게 변화한 네트워크의 흐름이 존재한다. 일부 네티즌들에게 신드롬과도 같은 미국드라마가 한국드라마의 위기로 인식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변화된 매체의 등장과 함께 더 소수로 수용자들이 분화되는 한 보편적 대중을 상대로 한 드라마는 더 이상 승산이 없게 된 것이다.
솔직히 보면 “미드”는 시대의 흐름상 운 좋게 맞아 떨어졌을 뿐, 미국드라마가 인기를 얻지 않았다 하더라도 기존 방식을 고수하는 한국드라마는 위기를 맞았을 것이다. 아니 이미 위기를 맞았다. 대중이 파편화된 시대, 드라마가 평론의 대상이 되는 이 시대에 아까 말한 보편적 대중을 대상으로 한 드라마는 변화가 필요하다. 여기서 변화란 단순히 카메라 효과나 막대한 자본의 투자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장르영화” 같은 시도만이 돌파구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왜 “미드”가 우리의 구미에 맞았을까….?
“안 봐도 뻔한” 한국드라마와는 다르게 “신선하다”라는 의견이 앞 설 것이다. 단순히 드라마 소재가 다양하다고 신선하다라는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메디컬드라마나 법정드라마, 수사드라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있어왔다. 80년대를 주름잡던 우리드라마 수사반장과 CSI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우리드라마 아줌마와 위기의 주부들 역시 다른 점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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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소재는 부차적인 이유로 밖에 생각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그런데 왜 우리드라마는 식상하고 미국드라마는 신선한 걸까? 그것은 아마도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의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깊은 원인은 너무나 뻔한 구조를 지닌 드라마의 형식이다. 인물들간에 갈등이 발생하여 최고조에 이르다가 하강하여 결말을 이루는 형식 말이다. 국내 드라마 중“신선하다”라는 평을 받은 드라마들은 대부분 이런 형식을 비껴간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 드라마들 역시도 갈등을 통해 극을 진행 시켜나가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미국드라마는 이런 면에서 너무나 다른 형식을 보여준다. 인물간 갈등은 배제되어있다. 주인공 역시 한 인물이 아닌 다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CSI는 아예 팀으로 움직인다. 프리즌브레이크 역시 탈옥을 위한 팀으로 구성된다. 위기의 주부들은 6명의 주부들을 내세우고 있으며 섹스앤더씨티 역시 4명의 뉴요커를 앞세우고 있다. 설령 하우스나 그레이아나토미 같은 특정 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딸 만큼 한 인물이 부가되어야 하는 드라마들 마저 각 캐릭터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어떠한 갈등과 그 해결이 극 진행의 재미를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각 인물간의 유기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자 여기서 보자. 한국드라마가 식상한 것은 늘 똑같은 대립되는 구조의 형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틀에 얽매여 있기 때문인 것이다. 추리 같은 재미나 트릭을 풀어가는 재미를 부여하는 것은 2차적인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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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발빠르게 문화적으로 진화 아니다 변화한다. 그렇게 변화하는 우리를 따라잡기 위해 국내드라마가 미국드라마와 같이 유기적 인간관계를 도입할 이유는 없다. 다만 전형적인 틀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네 명의 주인공이 얽히고 설키는 사랑이야기는 보고 싶지 않다. CSI나 프리즌브레이크를 만들 필요는 없으나 프렌즈나 위기의 주부들은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최근의 동향들은 기존의 틀을 벗어나 좀더 다각화된 시각을 보여주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이렇게 한국드라마도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렇게 문화도 나아가는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