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 '팝의 교황', '팝의 디바'로 불림. 대중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미술뿐만 아니라 영화, 광고, 디자인 등 시각예술 전반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주도하였다. 살아있는 동안 이미 전설이었으며 그의 작품과 더불어 워홀이라는 인물 자체가 팝을 대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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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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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활동분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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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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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 |
주요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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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 수프 Campbell's soup》(1962), 《두 개의 마릴린 The two Marilyns》(1962),《재키 Jackie》(1964), 《마오 Mao》(1973), 《자화상 Self-Portrait》(1986) |
주요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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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조망》,《앤디 워홀의 철학》, 잡지《인터뷰》창간 | | | |
본문 |
1928년 8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피츠버그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졸업 후(1949년) 뉴욕에 정착하여 잡지 삽화와 광고 제작 등 상업미술가로 큰 성공을 거둔다. 1960년 기존의 상업미술 대신 순수미술로 전환해 배트맨, 딕 트레이시, 슈퍼맨 등 연재만화의 인물시리즈를 그린다. 그러나 고상한 예술만을 중시하던 당시 뉴욕의 화상들로부터 외면 당하였다. 1962년 뉴욕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에서 열린 '새로운 사실주의자들 New Realists' 전시에 참여해 주목을 받았다. 워홀은 수프 깡통이나 코카콜라 병, 달러지폐, 유명인의 초상화 등을 실크스크린 판화기법으로 제작하였다. 그가 선택한 작품 주제는 대중잡지의 표지나 슈퍼마켓의 진열대 위에 있는 것으로 워홀은 그것을 그의 스튜디오 '팩토리(The Factory)'에서 조수들과 함께 대량 생산하였다. 워홀은 1963년 첫 영화 《잠 Sleep》을 촬영하였다. 1965년에는 영화 만드는 것에 전념하기 위해 회화와의 작별을 선언했다. 그는 총 28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1968년 팩토리 일원이자 그의 실험영화에 등장하기도 했던 발레리 솔라니스에 의해 저격당하고 극적으로 살아났다. 솔라니스는 후에 "그는 내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통제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1970년대부터 사교계나 정치계 인물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1972년 《마오 Mao》시리즈로 다시 회화제작에 전념하였다. 1983년 장 미셸 바스키아와 친분을 맺고 함께 작업하였다. 1987년 2월 22일 담낭 수술과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워홀은 현대미술의 아이콘이다. 살아있는 동안 이미 전설이었던 그는 동시대 문화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이를 시각화해내는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워홀은 자신의 예술을 '세상의 거울'이라고 했다. 스스로 기계이기를 원했던 워홀은 기계와 같은 미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기계를 통해 무한히 복제되는 세계 속에서 그의 이미지도 그의 명성과 함께 증식을 거듭한다. 주요 작품은 《캠벨 수프 Campbell's soup》(1962), 《두 개의 마릴린 The two Marilyns》(1962),《재키 Jackie》(1964), 《마오 Mao》(1973), 《자화상 Self-Portrait》(1986) 등의 실크스크린과 영화 《잠 Sleep》(1963), 《엠파이어 Empire》(1964),《첼시의 소녀들 The Chelsea Girls》(1966) 등이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