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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직 목사의 신학과 설교

은바리라이프 2020. 6. 16. 08:34

이명직 목사의 신학과 설교

정인교 교수(서울신학대학교)



I. 들어가는 말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성결교회는 1907년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이래 장로교 감리교와 더불어 한국교계에 복음전파의 기수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특히 막강한 외국 교단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구한말부터 이 땅에 복음전파의 기득권을 행사해온 다른 두 교단과는 달리 김상준 정빈이라는 한국인 전도자의 구령열에 동양선교회의 한국선교 계획이 조합된 선교의 발상과 그 진행이 구체적으로 열매맺은 것이 성결교회라고 한다면, 길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세간에 그 어떤 복음에 대한 확정적인 이미지가 고착되어있던 그 정형의 틈을 파고들면서 토대를 다진 그 자생적 생명력은 매우 인상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결교회는 타교단의 명확한 신학적 입장과 노선에 비해 신학적인 색채와 신학배경의 불명확성으로 인해 한국의 근대사에서 적지 않게 기여해온 그 업적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어 온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런 평가의 경미성은 물론 어떤 면에서 한국교계에 기득권을 쥐고 있다고 자부하는 교단들의 우월적 자만감에 기인하는 바도 없지 않지만 동시에 신학적 입장을 구체화 체계화 신학화하는 데 소홀했던 성결교회 자체의 책임 역시 적지 않다 할 것이다. 최근 들어 성결교회의 자생적 성격에 대한 토론이나 성결교회의 역사연구를 통해 우리를 바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진행되는 것은 비록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본 연구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우리의 과거를 진단함으로 우리의 현재와 미래 입장을 조명하려는 취지에서 시도된 것이다. 과거를 알지 못한 현재는 언제나 허구의 정체성으로 기울기 쉬우며 나아가 바람직한 미래의 좌표 역시 설정할 수 없다. 이런 작업은 일차적으로 교리신학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야 하겠지만 그러나 동시에 다른 분야들과의 유기적인 공조체제 역시 그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시급히 시도되어야 하는 것이 성결교회의 설교에 대한 이해이다. 모름지기 설교란 모든 신학과 사상 그리고 시대상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결정체이다. 따라서 성결교회 강단에서 외쳐진 설교를 분석하게 되면 우리 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복음의 성격과 지향하고 있는 복음의 실천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동시에 복음과 시대상황이라는 설교의 두 핵심요소의 상관관계에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가가 나타나게 되고 이것은 바로 우리 성결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에 접근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이 바로 이명직 목사이다. 성결교회 내에서 이명직 목사는 '성결교단을 이룩한 성결의 기수요 남녀 교역자를 양성한 유일한 사부'로 추앙받아 왔다. 또 다른 교단에서도 이 목사는 '일생을 바쳐 많은 그리스도의 일꾼을 양성하여 한국교회의 건설과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별히 한국성결교회를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교조로서 존경을 받은 인물'로 인정되어왔다.

이런 평가가 아니더라도 이명직 목사는 1916년 교단신학교의 교수로 봉직한 이래 평생을 교역자 양성에 헌신하였기 때문에 성결교회 교역자는 대부분 그의 제자요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단정하여도 크게 무리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명직 목사는 신학자로서 행정가로서 교단의 초석을 다지는데 깊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오늘의 성결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연구함에 있어 이 명직 목사를 떠나서는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본 소고에서는 이 명직 목사의 생애를 통해 공인으로서의 그의 삶이 얼마만큼 성결교회의 역사와 동일한 궤도를 달리고 있는가를 살펴보는데서 시작할 것이다. 이 작업에 이어 우리는 이명직의 신학과 사상적 경향성을 약술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바탕으로 그의 설교가 어떤 양상을 보이고 있는가에 관해 설교내용적 측면, 설교의 형식적 측면 그리고 설교전달의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II. 이명직 목사의 생애와 성결교회

본장을 통해 우리가 살펴보려는 것은 이명직 목사의 생애가 성결교회의 역사와 어떻게 궤를 같이 했나 하는 것과 또 그의 삶의 단면들을 통해 그에게서 나타나는 신학적 사상적 경향성과의 연관성이다. 그의 생애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이명직은 1890년 12월 2일 서울 특별시 종로구 중학동에서 아버지 이승태 씨와 어머니 박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일설에 의하면 이명직의 조부는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고 하는데 확인된 바는 없다. 대개의 한국가정이 그러했듯 이명직은 완고한 유교사상에 물든 부모 밑에서 7세 때인 1897년부터 서당과 가정에서 한학을 수학했는데 이런 유교교육은 후에 그의 사상에서 국가와 기존 질서에 대한 순응적 경향성과 적지 않은 연관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또한 설교에서의 윤리적 엄격성에 대한 강조나 설교어법의 훈시적 성격 역시 이런 초기 교육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처음 기독교에 접한 것은 종로에 있는 황성 기독교 청년회 학관에 입학하면서 부터였지만 기독교에 본격적으로 몰입하게 된 것은 1909년 정치학공부를 하기 위해 무단 가출 형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YMCA총무로 있던 김 정식을 만나면서 부터였다. 같은 해 김정식의 안내로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한 이명직은 그때까지 세례를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1909년 5월 3일 성령강림절에 나카다 쥬우지 감독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이로서 이명직은 김상준 정빈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세 번째로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한 인물이 되었다. 이 수학 기간 중 이명직은 슐함머 씨의 순회집회에서 중생을 강조하는 설교를 듣고 자신에게 중생의 체험이 없는 것을 깨닫고는 학교에 결석게를 내고 독방에 들어가 철야와 금식기도를 통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사명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구령열에 불타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런 그의 경향성은 그가 배운 체험적 신학성향과 더불어 이후 그의 신앙과 신학에서 체험을 강조하는 것으로 자연스레 나타나게 된다.

이명직은 이와 유사한 영적인 체험을 그가 경성성서학원 교수로 있던 1920-1921년에도 다시 한번 하게된다. 정 상운은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젊은 목사 이명직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대받는 전도유망한 목사로 성장했으나 그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떠났다. 그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인기있는 목사가 되는 것에 만족하여 애국을 주창하고 자유시대를 부르짖으며 많은 독서를 하였다. 그는 10년 가까이 중생의 체험을 잊고 생활하다가 1920년 겨울 동양선교회 감독 길보른과 자기 동료목사들에게 지나간 자기 허물과 실수를 고백하고 영적인 구도행각을 재개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가을 어느 날 자신의 성결을 위해 골방문을 걸어 잠그고 성결의 확신이 있기까지 기도하였다. 문을 잠그고 기도한지 3일째 되던 저녁에 주의 음성이 임하고 그의 거룩하심을 체험하는 순간적인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이명직 목사 한사람의 성결체험은 그대로 성결교회의 신앙정체를 형성하여 나갔고 성결교회의 교리정치와 조직에 있어서도 그는 초창기 성결교회 신학형성의 교부가 되었다".

1911년 5월 한국선교의 시급함으로 인해 동경성서학원을 가졸업한 이명직은 같은 해 개성교회 전도사를 시작으로 성역에 발을 들여놓은 후 1914년 4월 22일 조선성결교회 최초로 김상준 이장하 강태온 이명헌과 함께 제 1회로 목사안수를 받게된다. 이후 박제원에 이어 부여 규암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한후 1916년부터 경성성서학원 교수 겸 사감으로 본격적인 신학교육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명직 목사의 생애가 성결교단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기 시작한 것은 바로 1916년을 시점으로 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면으로 설명이 될 수 있는데 일례를 들면 이명직 목사가 일본으로 떠나기 이태 전 이미 김상준 정빈 두 사람에 의한 전도관 시대가 시작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영향력은 후발 주자인 이명직에 비해 강력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서학원 교수명단을 보면 1912 -1913년 토마스 정빈 이장하 토마스 부인, 1914-1915년 토마스 김 상준 이장하 토마스 부인에서 알 수 있듯, 김상준 정빈은 약 2년 정도 학교에서 가르쳤던 것 이외에는 더 이상 교수로서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이명직의 경우는 1916년이래 그가 서울신학대학 명예학장으로 추대되던 1965년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학교를 떠난 적이 없다. 이것은 물론 여러 가지 정치적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명직이 학교에 교수로 자리잡게 되면서 성결교회의 진로 및 신학적 경향성과 관련된 주요한 역할들을 본격적으로 맡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명직의 생애를 좀더 접근하여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여러 각도에서의 조명이 가능하다:

첫째는 신학자로서의 이명직 목사이다. 그는 교단의 발아기와 성장기의 과정에서 사중복음이라는 성서의 근거를 자신의 체험가운데 새롭게 성결교회의 집약적 교리로 발전시켰다. 비록 그는 오늘날 이야기하는 학문적 신학의 정식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적은 없지만, 자신이 배운 복음적 신학을 나름대로 체계화하여 성결교회 신학과 신앙노선을 정립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이다. 1958년 미국 아주사 대학으로부터 명예 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이런 그의 역할에 잘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같은 맥락에서 교육가로서의 그의 역할을 들 수 있다. 상술한 것처럼 이명직은 1916년 경성성서학원 교수로 봉직한 이래 단 한번도 학교를 떠난 적이 없이 교단 교역자 양성에 일생을 헌신해왔다. 학교에서는 구약신학을 필두로 다양한 여러 과목을 강의하였으며 신앙과 학문 인격으로 많은 학생들의 사표가 되었다. 이런 면에서 이명직은 교단 신학교를 일군 분이요 지키고 키운 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셋째로 우리는 행정가로서의 이명직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30살 되던 1920년 경성성서학원 부원장으로 9년간 행정에 관여했으며 1935년에는 경성성서학원 원장으로 1942년에는 경성 신학교 교장으로 1951년 서울 신학교 교장 1959년 서울신학대학 학장으로 교육 행정의 중추를 담당했다. 또한 학교행정 뿐 아니라 그는 교단의 행정가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29년 39세의 나이로 성결교회 감독에 취임하여 5년간 시무하였고 1933년 성결교회 제 1회 총회장 1934년 2회 총회장 1938년 6회 총회장 1939년 7회 총회장 1941년 동양선교회 재단이사장 등 교단 행정과 정치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이런 중심적 위치로 인해 이명직 목사는 교단 부흥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인고의 계절을 지내야 했던 한국의 근대사와 맥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던 성결교회의 수난에 있어서도 책임적 위치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문필가로서의 이명직 목사를 평가할 수 있다. 이명직은 기독교 잡지로서 문서전도와 신앙교육에 크게 공헌해온 성결교회 기관지 "활천"을 1922년 창간하고 오랜 기간 주필의 자리를 맡아 하나님 말씀을 활자화하는 출판사업을 선도했다. 그는 구약영해전집 구약총론 구약 4천년사 신약사경보감 신학대강등 무려 34종에 이르는 각종 저서를 남길만큼 여러 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김 정호는 이명직 목사를 회고하면서 강의 시간 이외의 모든 시간을 독서와 저술하는 데 집중하였고 언제나 공부하는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우리는 이제 마지막으로 인격과 신앙의 측면에서 이명직 목사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명직 목사의 제자로 지근에서 그의 삶을 지켜보았던 김정호는 이 부분을 이렇게 회상한다:

"이명직 목사님은 고결한 인격자였다... 항상 접견하여 뵐 때마다 깨끗하심을 느꼈다. 물욕 탐욕 야심 교만 자고 공명심 악심 등의 불의 불결이란 없으심을 보았다... 그 분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나는 신학재학 중에 선생님의 기도하시는 생활을 직접으로 매일 보았다. 夜中 3시만 되면 기상 기도하시는 소리가 은근히 들려왔다. 기숙사 내 방 옆방이 선생님의 서재였다. 그 생활 전체를 옆에서 볼 수 있고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의 기도전체는 주시옵소서가 아니었다. 그 전 기도는 고백이었다. 잘 한 것은 하나도 없나이다. 전부가 악입니다. 불의뿐입니다. 앎은 없고 모르는 것뿐입니다. 요구가 있었다면 살려 주시옵소서 약하오니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를 아버지의 것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로서 밤을 새우시면서 기도하시는 때가 매년 3,4차례씩은 있었다".

이런 회고를 차치하고라도 생전의 이 목사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고매한 인품과 학과도 같은 단아함 그리고 몸으로 우러나오는 성결을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이명직 목사는 자신이 믿고 추구해온 성결의 복음을 자신의 몸으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 목사의 생애에 대한 조명과 평가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것처럼 그는 성결교회 의 신학을 정초하는 것에서부터 교단 교역자 양성 그리고 교단의 행정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이것은 그만큼 성결교회와 이명직 목사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것은 역설적으로 교단이 짊어져야 하는 모든 영욕의 평가와 역사의 절대치 역시 바로 이명직 목사의 그것일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III. 이명직 목사의 신학과 사상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이명직 목사의 신학과 사상의 경향성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명직 목사는 본래 성서학자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의 저작은 성서신학을 넘어 조직신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기 때문에 이 짧은 지면에서 그 모든 것을 다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성결교회 신학의 결정적 구형요인으로서의 이명직 목사가 갖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신학적 특색과 그의 사상적 경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성서적 복음주의

정상운은 한국 성결교회사 1권에서 형성과정에서 드러난 성결교회의 특징을 성서적 복음주의, 선교우선 주의, 사중복음의 강조로 요약하면서 조종남의 견해를 빌어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을 "성서의 권위를 중요시하고 성서에 기록된 내용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봉하는 신학"으로 정의한다. 이런 견해는 이명직 자신이 정의하는 복음주의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복음주의란 이 성서를 그대로 믿고 성서 그대로 살자는 것이 곧 복음주의로 이것이 바로 한국 성결교회의 특성을 이루는 요지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성서는 그 자체로 구원에 족하다는 입장을 대변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런 입장이 지나쳐 사변적인 신학을 부정하는 반지성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했다는 정 상운의 지적은 일견 타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명직의 신학을 정의함에 있어 사용한 이런 '성서적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그가 지향한 신학의 특성을 요약한 말임에는 틀림없지만 이것을 한 꺼풀만 파고 들어가면 그의 신학 전체가 선교사들의 그것을 그대로 승계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먼저 1929년 이명직에 의해 발간된 "조선성결교회의 신앙개조"와 1926년 필그림 성결교회의 "장정" 조항을 비교해 보면 제 1절 하나님(필그림 제 1조) 2절 예수 그리스도(2조) 3절 성신(3조) 4절 성경은 구원에 요족함(4조) 5조 원죄(5조) 6절 자유의지(6조) 7절 칭의(7조) 8절 성결(8조) 9절 칭의후 범죄(9조) 10절 교회(10조) 11조 성례(12조) 12절 세례(13조) 13절 성만찬(14조) 14절 신유(15조) 15절 재림(16조) 16절 운명(17조)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필그림 성결교회의 장정 "사람들이 알아듣는 방언을 회중 가운데서 말함"(11조)이 빠져있을 뿐 그 모든 순서와 내용이 동일하다. 이외에도 경건생활 사회건덕생활 교인의 자세 혼인관계 규범준수 교회행정 같은 조례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전수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한 동양선교회의 신조와 이에 대한 이명직 목사에 의해 기술된 성결교회의 신학특징을 살펴보면 이러한 소위 "계승신학"적 성격이 뚜렷이 나타난다. 동양선교회의 신조는 1. 성경의 전체 영감을 믿는다 2.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다 3.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듭남을 믿는다 4. 그리스도의 보혈과 속죄함을 믿는다 5.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믿는다. 6. 중생 후에 믿음으로 순간적 성결과 원죄의 씻음을 믿는다. 7. 크리스챤의 신유의 특권을 믿는다. 8. 몸의 부활을 믿는다 9. 천년전 재림을 믿는다 10. 구원받은 자의 영생과 구원받지 못한 자의 영멸을 믿는다 등의 10개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상의 신조는 이천영이 간파한 대로 근본주의적인 극단파 칼빈주의의 신조도 아니요 당시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조도 아닌 순수한 신앙적인 신조를 중심한 복음주의 신앙노선을 따라 영혼구원에 목적을 둔 신조임이 분명해 진다.

이명직은 그의 "성결교회 략사"에서 한국성결교회를 동양선교회와 동일한 노선에 선 것으로 간주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신학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혹시 동양선교회는 엇더한 교파이며 또는 엇더한 게통인가 알고저하는 사람도 잇슬줄 안다. 그런대 우리 동양선교회는 결코 창립자 자신(創立者 自身)이 어느 교파에서 반대하고 니러남도 아니요(빌립보셔 1: 15) 무삼교리에 불평이나 불만이 잇서서 새로온 교리를 창도(唱導)하고 니러남도 아니오 오직 감리교회의 개조(開祖)인 요한, 웨슬네를 니어니러나 곳 초시대(初時代)의 감리교회와 갓치 중생(重生), 성결(聖潔) 신유(神癒) 재림(再臨)의 복음을 고됴(高調)하며 미신자(未信者)의게는 진격덕(進擊的)으로 전도하야 뎌들을 바른길노 인도하고저함이니 곳 우리의 교리나 정신이 순초시대 감리교회로 인뎡하야 틀림이 업슬지니라".

이명직 목사는 여기에 덧붙여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의 신앙개조는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로 말매암아 나타내심과 요한, 웨슬네의 성경해석의 근본? 교리와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를 토대로 주강생 1925년에 공포하야 성서학원과 모든 교회와 신도들의게 가라처 영구하도록 직히는 신경으로 하나니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밝히 드러나듯 이명직 목사는 - 비단 이 목사 한 사람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 조선 성결교회를 교리와 조직 면에서 동양선교회에 속한 일종의 동일 계열로 인지하고 있으며 그들의 입장을 가감없이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우리 성결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집필한 이명직 목사의 신학적 입장이 어떠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웅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입장에 따라 이명직 목사가 지향하는 신학의 제 성격 역시 선교사들에 의해 수입된 보수적 복음주의의 색채를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

그의 신학은 모두가 성서를 바탕으로 철저히 성서적 토대 위에서 풀어가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의 신학적 입장은 그가 저술한 "신학대강"(1952년)에 자세히 나타나있는데 그것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 영이시며(요 4, 24) 빛이시라(요일 1, 5).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생존하시는 하나님(렘 10, 10; 살전 1, 9; 요 5, 26)으로 원리나 원칙 힘을 창조하시는 분이며 그분안에 생명이 있다 그는 무한하시고 인격성을 가지신 영원한 존재이며 편재하시며 전능하신 분이다.

2. 그리스도 - 그리스도는 우주의 창조시라 창조는 하나님의 역사인고로 이 일을 행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무소불능하사 우주만물을 무에서 창조하야 있게 하시며 그 만물을 섭리하시며 자연계를 관할하시며 마귀를 쫓고 병자를 고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며 무소부재하사 우주에 충만하시고 만물에 충만하시고 우주각처에 일시에 계시고... 영원무종하시며 無所不知하사 인간의 비밀을 아시고 그 심중에 품은 생각도 아시고... 하나님과 동등이시니 아버지와 한가지로 높임을 받으시고 그 일흠으로 세례를 주고 예배와 신앙과의 대상이 되시니 그 신성이 확실하니라.

3. 인간 - 인간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잇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앗다... 그러나 .. 정욕으로 인하야 마귀와 성질을 그대로 받아가지고 영생에 대하야는 죽고... 죄의 법 곧 사망의 법(롬 8, 2)에서 살게되었으며 악신 마귀로부터 아바지와 아달의 관계를 맺게 된다... 중생의 체험을 얻지 못하면 허위의 인생이다.. 나의 죄를 회개하고 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리사 희생되신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다.

4. 성서관 - 구약의 내용은...1600년간에 48인에 가까운 기자들이 성신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기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기 게시를 주셨으나 저희가 다른 이방인들과 같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한 속히 깨닫지 못한고로 그 자기 게시는 점진적으로 수천년간에 저의 경험을 통하여 주셨나니라. 이 경험과 게시는 하나님의 선민들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이것이 곧 구약이니라. ... 신약성서는 성신의 묵시로 약 100년간에 8인에 의해 기록되엇으며 신학자료에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다... 성경의 영감에 대하야 현재 교회를 크게 곤혹케하는 것은 즉 성경의 문자적 영감이라는 것이니 이 말은 성서의 일자 일구라도 영감아닌 것이 없음으로 만일 이것을 받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함이니라. 그러나 성경의 영감은 이런 의미로 해석될 것이 아니라 영감이라는 것은 영적 사실에만 한할 것이니라. 성경기자가 영적 사실이외에 역사적 사실 과학적 사실에 관하여 기록할때에는 자기의 지식을 토대로 하고 기록 여부를 성신의 감화 하에서 그 지시대로 기록하엿고 내일과 인간이 경험치 못한 신령한 일을 기록할 때에는 완전한 영감으로 기록한 것이니 성경은 어느 편이나 성신의 감화로 기록된 것이니라.

이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명직의 신학적 입장은 그 자신의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선교사들로부터 받은 것을 가감없이 수용한 것이다. 특히 성서에 바탕한 신학전개에서 볼 수 있듯 이명직 목사에게 있어 성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잇는 것이었다. 조종남 박사는 "성경을 사랑하며 성경의 순수성을 지키려 노력했던 것이 초창기 지도자들의 한결같은 특징이며 자유주의적 비판적인 성서연구방법을 아주 경계하였다'고 밝히면서, 그것이 긍정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결과적으로 '학문적인 성서연구의 길을 좁히거나 폐쇄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 같다"고 진단했는데 이런 진단의 중심에 이 목사가 핵심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은 명약관하(明若觀火)하다 할 것이다.

2) 사중복음의 전파와 고수

성결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사중복음이요 이것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교단해산이라는 어려움까지 감내해야 했다. 이정근도 한국 성결교회에서의 사중복음이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으로 대표되는 사중복음이 교리가 아닌 단순한 전도표어라 하더라도 이것이 성결교회의 판별적 전통 즉 다른 교파와 성결교회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한국 성결교회는 물론 기독교와 보편적인 전통도 가지고 있고 복음주의의 공통적 전통도 가지고 있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 이 사중복음은 성결교회를 특징짓고 성결교회의 행동반경을 만드는 요소였다".

그렇다면 교단형성과 성장의 중심부에서 신학을 구형하고 교단행정의 책임자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이명직 목사에게서도 이 사중복음이 중요한 자리를 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다. 물론 이 사중복음은 이명직 목사나 우리 성결교단이 창작한 것이 아닌 매우 복잡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또 이명직 목사가 이것을 처음 성결교회에 도입한 인물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사중복음이라는 씨앗의 파종이 이 목사에 의해 되어지진 않았다 하더라도, 이 사중복음이 성결교회에 뿌리를 내리게 되고 숙성하게 되기까지 이명직 목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명직이 주장하는 사중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명직은 중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중생이란 타락하여 나려가고 또 나려간 인생을 다시 고결하고 영성적인 본래의 지위에 복귀시키고 심령의 곤고에서 해탈하고 심령의 죽음에서 부활되어 신인격을 창설하는 것이 중생이다". 그는 중생이란 영적인 변화로 원상회복하여 신인격이 창조되는 것으로 보면서 모든 인간이 영혼이 죽은 상태 그리고 아들의 자격을 상실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중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중생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 성신의 능력, 회개와 그 성립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제시한다.

이명직은 성결에 대해 "성결이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마음이 깨끗한 자라 하심과(마 5, 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할 지어다 하신 말씀과(마 5, 48)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고 거룩함을 좇으라 거룩하지 않은 이는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 14) 하신 말씀에서 일어나는 사상으로 즉 무죄하게 사는 생활"이라고 설명한다.그러나 그는 절대적 성결이란 지고지결하신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성결을 상대로하여 우리 성도가 원하는 성결, 즉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성결인 상대적 성결만이 가능하다고 보면서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직 말씀과 성신 에수의 보혈과 기도 그리고 믿음으로 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는 성결에 대해 점진적 성결이 아닌 순간적 성결을 주장한다: "유전죄가 없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일을 믿는 그 순간에 소멸되는 것이요 정욕이나 습관은 자신의 책임에 있나니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성결케 되나니라"

이명직은 신유에 대해 "신자가 질병이 있을때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경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대상하야 그 병을 고쳐주실 줄로 믿고 기도하야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받는 것(시 103, 3)"으로 정의한다. 신유는 하나님의 뜻이요(요삼 2) 속죄의 일부이다. 그는 인생이란 어차피 죄인인고로 부활하기 전까지는 질병이 없을 수 없다고 본다. 이명직 목사 자신은 스스로 신유라 내세울만한 체험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주변에서 본인이 직접 목격한 체험의 사실에 대해 인정하는 것을 그의 설교에서 볼 수 있다.

사중 복음 가운데 성결과 더불어 이명직 목사가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재림이다. 이것은 일제하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한국성결교회의 독특성과 정체성을 지켜온 버팀목이라는 것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이 명직은 우리 성도의 정체성 성도가 가진 소망의 차별성에서 찾는다. "이 세상사람들의 희망은... 다 세상에 속한 것이며 흙에 속한 것이며 육에 속한 것이로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그러한 비열하고 무가치한데 속하지 않고 오직 하날에 속한 것이며 上에 속한 것이며 영에 속한 고결한 소망 성경에 이른바 행복스러운 소망이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림하심이라". 이 명직 목사는 요 14: 1-3에 약속된 재림의 언약을 바탕으로 예수의 재림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실한 언약이라고 믿으며 선과 악을 심판하시기 위해(마 25, 31), 성도에게 찬송을 받으시려고(살후 1, 10), 정의를 세우시기위해(시 2, 9) 그리고 신부를 영접하려(요 14, 3) 재림하실 것으로 확신한다. 그는 예수의 재림이 구름타고(마 26, 64) 호령과 소래와 나팔로 내림하실 것(살전 4, 16)이라는 성서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예수의 재림시에 무덤에 있던 자들이 그 소리를 듣고 부활할 것임을(요 5, 25) 믿는다. 그는 주의 재림을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주의 재림은 한 사건이라도 2막에 분하나니 제 1막은 공중까지 재림하셔서 교회를 휴거하심과 제 2막은 휴거된 교회를 다스리시고 다시 지상에 재림하심인데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래와 하나님의 나팔로 공중에 재림하시면 자던 성도는 부활하고 생존한 성도는 영화하야 공중에 들려 그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야 무한한 영광을 받을 터이나 지상형편은 대환란이 일어나서 편안이 없게 될지니 이 일이 약 7년간 계속한 후 천만성도와 성도를 다스리시고 다시 지상에 나타나실터인데 지상에 내림하신후에 될일은 적 그리스도와 사단을 결박하야 무저갱에 쓰러넣고 정의를 건설하신즉 평화가 해수같이 넘치게 되리니 이것은 하나님의 묵시하신 바니 확호한 언약이니라(요일 3, 1-20)".

이명직 목사는 1-2차 세계대전의 흉흉한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재림의 징조라 해석하면서 '지금이야말로 마땅히 경성할때요 그리스도께서 내림하시는 중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지금 우리의 형편이 근심질고와 환난풍파로 규정하고 그 모든 고통과 비관을 역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을 바로 이 재림에서 찾으며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제시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명직 목사가 이해하는 사중복음은 철저히 성서적이며 복음적이다. 그가 주장하는 사중복음 속에는 영혼에 대한 지고한 관심과 사랑이 알알이 배여있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이 또한 선교사들에 의해 제시된 사중복음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스펜서(Spencer J. Palmer)는 한국 신학에 대해 "청교도적인 열심과 웨슬레의 열정을 지닌 미국 선교사들이 지도하는 프로그램의 영향 속에 근본주의가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평가했는데, 이명직 목사의 경우도 예외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성결교회와 동양선교회의 밀접한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그리고 그렇게 고착화된 전통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아마도 이것이 이명직 목사의 한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체제질서의 순응성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명직 목사는 인품의 고결함이나 학문적 신앙적 기여에서 성결교회의 사부로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성결교단 및 교단신학교의 행정 책임자로 오랜 세월을 봉사하면서 교단과 학교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분이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명직 목사의 사상적 행보에는 후진들의 입장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면면도 발견되는 게 사실이다.

우선 그의 글에서 나타나고 있는 기독교와 국가 간의 관계이다 그는 1939년 활천 주간의 자격으로 쓴 권두언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히고 있다:

"국민에게는 일치단결과 국가를 애호함과 순종하는 것과 의무이행...국가를 애호하는 정신을 요한다... 또 국민에게 요구하는 것이 순종이다 롬 13장 1-2절에 在上者에게 순종하라...만사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또 그 책임은 그 정부에 있는 줄 앎이니라...그런데 국가총동원이라는 것은 요컨대 國家有事之秋에 일치단결을 도모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그리스도교회는 信敎自由의 특전을 夢한 일본의 신민이다. 신민이 된자는 다 총동원에 가입된 자이다 그럼으로 금비녀 指環등 장식품을 매장하여두지 말고 정부에 매도하는 것이 당연하다... 기독신자도 국민의 일분자요 교회도 국민범위내에서 교회이니 신교자유이외에 다른 특전이 잇을 줄로 생각지 말고 더욱 힘서 오유됨이 없기를 바란다".

"만일 정부로부터 출전을 명받으면 그대로 순종하여야 할 것이요 구차한 평화론이나 계명을 방패로 할 것이 없다. 평화는 싸움후에 있을 것이다. 금번 사변에 관한 모든 사항 곧 몸으로 할 일이나 시간으로 할 일이나 물질로 할 것이나 주저치 말고 蟻忠(의충)이나마 다하여야 할 것이다"."국가업는 종족이 업을 것이며 국가업이 우리의 존재가 업을 것이다. 上으로 萬世一系의 천황을 모시고 정부지도자와 육해군의 보호로 인민이 안전행복의 생활을 하고 있지아니한가 국가는 내집이요 내몸이다. 국가에 대한 우리의 임무와 책임이 얼마나 중차대한 것을 깨달아 이 비상시에 처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이명직 목사가 교단의 수장으로 또 교단 기관지인 활천의 주간으로 활동하면서 남긴 기록들이다. 당시 모든 잡지들이 일제의 철저한 검열 하에 있었고 또 일제가 강제적으로 잡지와 활자매체들을 선전도구로 이용하던 상황이었기에, 필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쓰여졌을 개연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활천의 폐간에 즈음한 이명직 목사의 글에서는 이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우리가 눈물을 머금고 폐간할 때의 환경은 즉 일본이 전쟁결과로 생산력이 핍절하여 집물을 통제하게 되엇다. 매월 60면되던 것을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지면을 삭감하엿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지면을 반면하여 15면으로 간행하라하더니 또다시 반감하라 하엿을 뿐 아니라 최후에는 장로회보 감리회보 구세신문과 합동하라 하였다. 둘째는 일본천황은 하나님이라 해서 소위 황도를 선양하라는 주문과 무슨 기사든지 전쟁에 협력하는 기사만 기재하라하니 그런 주문에 응하여 활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할 바에는 페간하는 것도 사양할 것이 없고 아까울 것이 없엇다"

따라서 위의 글에서 나타난 이명직 목사의 사상도 강제적 타의적 상황 아래서 쓰여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교단의 지도자로서 교단을 이끌고 유지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던 이 목사로서는 자신의 의사나 신학적 입장보다는 교단의 존폐문제를 먼저 생각했어야 했고, 그 결과 후대에 미혹적인 시각을 남길 수 있는 여지를 보일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런 합리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명직 목사의 신학 및 사상의 일단에 관해서는 우리의 판단을 모호하게 하는 부분이 남아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우선 그의 저작 가운데 민족의 문제를 추론할 만한 내용이 전무하다는 것과 상대적으로 일제에 순응적인 기록들만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사실은 재림의 교리고수나 성경의 권위보존을 위해서는 교단의 존폐를 무릅쓰고 항거했던 이명직 목사의 모습과 확연히 대조되는 부분이다. 더욱이 강제적 환경에서 일제에 찬동하는 글을 쓴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논거를 펼치기 위해 굳이 많은 성구를 인용하고 성경에 의지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런 부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최근에 발견된 법원기록 역시 이명직 목사의 사상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당시 이명직 목사와 순사 하야시 시게오 사이에 오간 대화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 형 사: 예수가 유대에 재림하여 이루는 나라를 천국이라 하는가?

 

  • 이 목사: 아니지요 틀립니다. 천국은 미래 즉 우리들이 죽어서 우리들의 영만이 가는 곳을 소위 천국이라 하는 것이고 천국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은 물론 천국은 현세와는 전연 관념이 다릅니다.
  • 형 사: 그러면 예수가 유대에 재림하여 만든다는 나라는 무엇이라 하는가?
  • 이 목사: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 형 사: 지상천국이라는 것은 없는가?
  • 이 목사: 아닙니다. 우리 신도들은 지상천국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 형 사: 증인은 소화 16년 2월 19일 금화성결교회에 출장왔을 때 말세에 대해 설교한 일이 있는가?
  • 이 목사: 아니요, 절대 없습니다. 그런 비상식적인 설교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 설교는 지금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 형 사: 당신은 어느 나라 국민인가?
  • 이 목사: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 형 사: 유대의 독립은 조선의 독립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 이 목사: 전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 신자들과도 물론 관계가 없습니다. 조선독립 운운한 것은 절대 꿈꿀 일이 아닙니다.
  • 형 사: 신자로서 신사참배를 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닌가?
  • 이 목사: 아니지요, 우상숭배는 아닙니다. 인간의 형태라든가 혹은 동물의 형태인 것은 우상으로 볼는지 모르지만 신사에는 그런 것이 없음으로 우상은 아닙니다. 문부 대신도 종교와 신사는 전연 별개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우리 신도들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국민으로서 참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의 가르침은 저들 장로회와는 전연 그 취지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중앙에 일본군복을 입은 이명직 목사의 모습이 특이하다.(출처: 성결광장)

 

이상의 기록에는 이명직 목사의 천국관과 대일본에 대한 시각 그리고 종교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사고가 망라되어 있다. 이 기록만으로 본다면, 적어도 우리는 이명직 목사가 종교와 신앙을 철저히 이분법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철저히 부인하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또한 당시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일제의 통치라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함으로 오늘날 그런 시대와는 동떨어진 입장에서 흔히 제기할 수 있는 민족이나 애국사상과도 관계가 없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체험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이명직 목사의 이런 진술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내릴 입장에 있지 않다. 그의 진술 곳곳에서 성결교회나 신자들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음을 염두에 둔다면, 교단의 책임적 위치에 있는 그의 고뇌의 소산이라고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추론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술이 후대를 사는 우리로 이명직 목사의 사상을 논함에 혼돈을 야기시킨다는 것은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이명직 목사를 가리켜, "일제 당시와 해방 이후 그 시대가 만들어준 하나님의 사람이었으나 그 시대를 이끌어 가는 역사의 주체자로서, 선각자로서 언뜻 말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작은 아쉬움을 남긴다"라고 평가한 것은 무작정 부인할 수만은 없는 아쉬움이리라.


IV. 이명직 목사의 설교

이제 우리가 이 장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명직 목사의 설교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명직 목사가 그 오랜 기간을 교단 교역자 양성에 실질적인 책임자로 활동했었다면 신학뿐 아니라 설교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영향력과 모범이 되었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지근 거리에서 이명직 목사를 직접 체험했던 김 정호 목사는 그를 평가하는 가운데 '대설교가'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신학생들에게 설교를 가르치실 때 설교를 잘하게 되고 성공하려면 성경본문설교를 꼭 해야 한다, 곧 설교 성공의 비결이란 본문 설교라고 강조하셨다. 선생의 설교는 언제든지 어린아이라도 듣도록 쉬운 말로 하셨고 물론 본문 설교를 하셨고 중생 성결이란 용어는 아니하셔도 내용의 뜻은 중생이며 성결이며 재림을 증거하셨다. 그리고 설교의 감화력 인화력이 커서 듣는 자들이 많이 회개하였으며 성결의 은혜를 받는 자들이 늘 있게 되었으며 그 은혜로운 설교를 듣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1915년 경부터 일제 말엽까지 무교동 성결교회에서 매주일 오후 2시에는 꼭 성별회로 시내 각 성결교회는 연합적으로 모였으며 타 교파 목사 장로 신자들도 많이 모이게 된 것은 이 명직 목사님이 설교하신다 가자 가자 자연 선전이 되고 또 되고해서, 이 명직 목사의 설교에는 불이 떨어진다 능력이 있다 생수가 흐른다 마음이 평안해진다 기쁨이 생긴다 소망이 생긴다 나는 그 설교에서 구원의 확증을 받았다등의 여론과 선전이 되곤 하였다".

물론 이런 평가는 학문적인 분석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한 원로 목사의 개인적인 견해가 첨가된 증언적 성격이 강한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단순히 신학자로서만 자리매김한 것이 아니고 능력있는 설교자였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손택구 목사도 이명직 목사 설교집 서문에서 그의 설교를 "순전한 성서신앙 그대로의 순복음에서 우러나오는 명쾌하고도 평이하고 대중적이면서도 체험적인 설교로서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가는 능력있는 설교"라고 평가한다. 이런 평가를 차치하고라도 그의 설교를 연구하는 것은 이명직 목사 개인의 설교뿐만 아니라 성결교회 설교의 한 원형을 밝힌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 작업이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다루게 되는 설교들이 인쇄된 설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실제 강단에서 행해진 설교가 갖는 다이내믹이나 현장감 생동감을 배제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은 우리가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이 연구의 한계이다.

1) 설교 내용의 분석

이명직 목사는 안수받은 직후 부여 규암교회와 서울 아현교회에서 목회한 경력이 있지만 그 이외의 전 생애는 교단 신학교에서 교수로서 봉직했었다. 물론 때때로 전국 각 교회에서설교할 기회를 가졌던 게 사실이지만 그가 남긴 대부분의 설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목회현장에서의 구체적인 회중을 대상으로 한 설교와는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오히려 교수요 활천의 유력한 집필자였던 이 목사의 위치상 그의 설교 대상은 일차적으로 목회자와 신학생이었고 그리고 활천의 구독자인 불특정한 독자들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그의 설교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일반 목회에서 말하는 구체적인 대상을 전제하지 않고 목회자와 신학생 그리고 불특정한 독자를 회중으로 하는 '교수'로서의 설교는 자연 그 설교의 주제 선택을 일반 설교와 달리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설교가 보여주는 내용상의 첫 번째 특징은 교리설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엄요섭은 "한국교회 설교의 시대적 형태론"이라는 글에서 이명직 목사의 설교를 가리켜 "초대교회의 설교자들이 복음이 말씀 위에서 전파되도록 기독교의 진리와 교리를 해석하고 전달한 것같이 기독교의 진수를 이해시키는 데 중점을 둔다"고 평가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지적이다. 즉 그의 설교는 일차적으로는 목회자와 신학생들이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전파할 수 있도록, 나아가서는 모든 성도들이 온전한 복음 위에 서도록 안내하고 교육하는 소위 교육설교적(Lehrpredigt)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설교가 다루는 주제들은 주로 기독교의 일반적 교리에 집중되어있다. 가령 "백석"이라는 설교에서는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라는 기독론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우리의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세상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삼현"이라는 설교에서도 역시 본격적으로 그리스도론을 다룬다.

"주의 재림과 우리의 준비" "롯의 처를 생각하라"에서는 임박한 주의 재림을 시대적 상황을 들어 설명하면서 성도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재림론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죄악을 대적하라"와 "회개에 대한 강화" "죄" "내속에 거하는 죄" "회개"에서는 인간의 부패성과 죄의 문제를 다룬 죄론을 설교의 주제로 삼으면서 성도의 회개를 촉구한다. "큰 구원" "중생" "음부가 구령자로 변함" "성결을 어떻게 체험할까"에서는 구원론과 성결론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밖에도 "이심(二心)" "구인(舊人)"등의 설교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심도있게 파헤친 인간론을 다루고 있다.

두 번째로 이명직 목사의 설교가 보여주는 내용상의 특징은 신유를 제외한 중생 성결 재림이라는 주제가 뚜렷하게 부각된다는 점이다. 즉 위에서 그의 설교를 교리적이라 규정했는데 실상 그의 모든 설교의 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세 가지 요소이다. 그의 설교를 읽다보면, 단 한가지 색을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 것은 바로 중생 성결 재림이라는 것이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모든 설교의 기저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명직 목사의 설교는 철저히 중생의 복음과 성결의 복음만을 강조하고 있고, 그것은 다시 주의 재림을 위한 전제로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활천에 수록된 초기의 설교로 올라갈수록 재림이라는 주제가 매우 빈번하게 강조되면서 중생과 성결를 범주화시키는 구조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시 한국 성결교회가 주장했던 복음의 성격이 바로 재림을 중심으로 한 중생과 성결에 모아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환원하면 초창기 한국 성결교회의 신학이나 신앙 그리고 설교의 특색이라는 것은 철저히 재림에 모아졌고, 이 재림을 전제한 중생과 성결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일제의 통치 하에 삶의 의미나 보람 장래에 대한 희망이 단절된 상태에서 유일하게 성도를 지탱시키고 의미있게 살아갈 이유를 제공하는 유일한 대안이 곧 재림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중생 성결이 재림이라는 카테고리안에서 재림의 준비와 조건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명직의 설교 "주의 재림과 우리의 준비"이다. 그는 이 설교를 통해 지금의 시대를 성구를 인용해 위태한 시대(딤후 3, 1), 여름이 가까이 온 시대(눅 21, 29이하) 자다가 깰 때(마 25, 16)로 규정하면서 "천하의 대세를 보던지 유대의 민족적인 부흥을 보아서 이 시대는 주의 재림의 시기가 가까이 온줄로" 알고 "안일을 탐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싸움을 할 때요... 세상을 개량하고 사회를 개량하는 사업보다 깨어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할 때요, 이때는 금전을 사랑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여 일할 때요 이때는 교세확장보다 영혼을 구원하야 그리스도의 신부를 만들 때"임을 주장한다. 즉 이 목사는 임박한 종말에 대한 인식 하에 모든 것의 우선 순위를 이 종말의 준비에 모을 것을 촉구한다. 이명직은 이런 재림을 위한 준비로 어두운 일을 버릴 것 즉 중생의 체험을 강조한다. 이 중생은 탐식하는 것이나 육체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생명과 희락과 능력을 얻음으로 가능함을 밝히고, 이어서 광명한 갑옷을 입을 것, 즉 적극적으로 성결의 은혜를 받을 것을 주장한다: "그런즉 우리가 아무리 도덕을 잘 준행한다 하여도 광명한 갑옷이 아니요, 빛되신 그리스도를 입는 것이 광명한 갑옷이다. 이 광명한 갑옷을 입은 사람은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공중에서 영접하리니 계 19, 7.8절의 세마포가 이 갑옷이다."

따라서 이 설교에서 보는 것처럼 시대징조를 통한 재림에 대한 인식과 중생과 성결을 통한 재림의 준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그의 설교는 청교도적 윤리의 엄격성이 선도의 실천윤리로 강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미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의 신학적 윤리적 성향이 청교도적 엄격성을 가지고 있었고 철저히 문자주의에 가까운 성서적 윤리를 주장했었다면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이명직 목사에게서 이런 사고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의 설교의 일단은 그가 주장한 실천윤리의 엄격성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방탕은 죄악 부패에서 나오나니 가령 우리 신자라 하면서 활동사진이나 연극장에 구경 다니는 것은 방탕한 일이다. 극장은 음부와 탕자의 앉는 좌석이요 결코 성도의 앉는 자리가 아니올시다. 장기두는 일과 바둑두는 일과 소설보는 것도 방탕한 일이올시다. 교회예배당에서 연극도하고 무도와 활동사진도하고 가극도하고 청년남녀학생이 신성한 강단에서 色과 음성을 팔아먹는 음악회도 방탕한 일이올시다". "만일 身이 깨끗하지 못하면 영과 혼이 성결하였다는 것은 의문이니 영혼이 성결하면 육체가 깨끗한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의복과 기타 장식도 거룩할지니 단순한 것으로 위주로 하는 것이 주의 뜻이며 이것이 심령이 거룩한 자의 사실이니라. 그뿐 아니라 얼굴을 담베락으로 인정하는지 허연 분을 회칠하듯 쳐득 바르고도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기생, 갈보모양으로 오가는 김공 이모는 날좀 곱게 보아달라는 듯이 광고판같이 치켜들고 다니는 꼴하고야 어찌 하나님의 자녀이며 깨끗한 심령에서 나온 일이랴...아 한심한 일이 아닌가 또는 연극장 출입을 평심으로 하는 일이 있다하니 말지니라. 주의 성명을 더럽히지 말지니라. 연극장은 죄인의 공회석이요 죄악의 매개소이니 거룩함을 입은 육체로는 그러한 처소에 출입함이 일종의 죄악이라 아니할 수 없느니라"

이러한 엄격한 신앙의 실천은 결국 성결이라는 성도의 정체성을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이며 세상 속에서 살되 구별되게 살아야 하는 성도의 자세를 일컫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일제 하에서 시민의식이 저급한 상태에 있던 일반의 상황과 식민지상황 하에서의 자포자기적 삶의 행태가 만연했던 것을 염두에 두면, 비록 오늘의 시각에서는 과도한 감이 없지 않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시대적인 정당성을 갖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청교도적 윤리의 엄격성에 따라 다니는 새로운 율법화의 위험과 문화접맥적 시도의 책임을 안고 있는 기독교 신학의 차원에서 보면, 이런 엄격성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넷째 이명직 목사의 설교에서는 목회자와 교회에 대한 관심과 권고가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것과 같이 이 목사의 지도적 입장을 염두에 둘 때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지적하는 내용을 보면 이미 선교초기에도 오늘날의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지적되는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물론 회개치않고도 세례문답이나 외면 세례를 받을 수 있고 성경공부만 하면 교역자가 될 수도 있으나 이후에는 주를 만날때에는 큰 문제가 되느니라". "육체를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깨끗할지니 가령 어떠한 소위 교인 소위 교역자 중에는 바둑두고 장기두는 것을 여전히 하며 심지어는 화투까지라도 하면서 신성오락이다하며 돈내기는 아니라하나 참외 또는 과자내기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금일에 어찌하야 신자에 부흥이 없는가하면 기도가 없는 까닭이며 교회에 부흥이 희한한 까닭은 기도가 없는 까닭이라. 신자 개인이 기도를 알지 못하고 교역자도 기도를 등한히 생각하고 안일만 탐하고 교회도 기도에 능력을 잃어버린 이상에 다시 부흥이 임할 기관이 없느니라". "만일 금일에 심령계가 부진하고 교회가 건조하고 개인의 영혼에 주림이 있다하면 그는 즉 하나님의 말삼을 듣지 못함으로 기근이 든 것이다. 혹은 강단에서 주일 아침에 하나님의 말삼은 가라치지 않고 사회주의 연애사상을 휼변 암시로 선전하며 혹은 사회개량이나 생활향상이니 하야 자기의 포부를 자랑코저하며 웅변을 시험하야 청중의 환영이나 사고자하며 혹은 무식한 언론으로 고금의 객담괴화를 인하야 부녀자와 어리석은 사람의 감정을 농락하는등 기괴한 일이 없지 않은 것이다. 만일 이러한 현상으로 오래 계속된다면 심령계는 영영 파멸되고 말 것이다. 복음을 전하라 하나님의 말삼을 전하라 복음을 뿌리거든 하나님의 말삼으로 물을 대라".

황대식 목사는 그의 학위논문에서 이명직 목사의 설교특징 중의 하나로 "교회에 대한 설교를 한다. 사회적으로 격변기였던 시대에 이명직 목사는 교회의 책임을 통렬하게 제시한다. 교회의 금일의 부패는 회개한 신자가 적기 때문이며 신자가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교역자가 회개의 문을 전하지 않고 회개를 설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미래의 교회의 부패상을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명직 목사는 교회의 부패가 일차적으로 목회자의 부패로부터 기인한다고 보면서 교회부흥의 척도를 목회자의 자세 여부에서 본다. 아마도 이런 그의 훈계와 경고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졌던 지도적 위치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성결한 삶이 더욱 영적 권위를 보장한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영적 신앙적 그리고 삶의 모범에서 오는 권위로 스승의 역할을 감당했던 이명직 목사와 같은 인물을 가졌던 그 당시의 교회와 성도는 오늘 우리가 갖지 못하는 행복을 소유했던 것이다.

2) 설교의 형식 분석

본 연구를 위해 조사한 이명직 목사의 설교를 보면 총 35편의 설교 중 성경구절 1절을 본문으로 택한 것이 9편, 2절이 1편 3절 이상이 18절 본문없는 설교가 8편에 이른다. 이것은 초창기 설교본문이 대개 1절 위주로 되어있는 일반적 성향과 비교해 보면 매우 다양한 본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본문길이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명직 목사 역시 '시대의 아들'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즉 본문의 길이가 어떠하든 그의 설교 착안점은 본문의 한 단어 혹은 한 표현에 집중한다. 본문이 긴 경우에도 이 경향은 거의 예외없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어 다른 본문 구절들은 설교에서 거의 취급하지 않고 있다. 또 설교본문이 없는 설교도 8편에 이르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활천에 기재한 글의 성격이 본격적인 설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모호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성경본문을 가진 설교와 마찬가지로 이런 류의 설교에서도 이명직 목사는 하나의 주제를 앞에 내건 뒤 여러 성구와 자신의 신학적 지식을 동원해 펼쳐나가는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본문있는 설교와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주제적 제목설교' 즉 하나의 주제를 본문에서 취하든지 아니면 직접 본문으로부터 하나의 제목을 주제로 처리하여 그에 따라 설교를 진행하는 방식은 그 당시 선교사들이 보여준 설교형식의 전형이었을 뿐 아니라 한국교회 강단의 특징이기도 했다.

"백석"이라는 설교를 보면 본문을 계 2, 17로 잡은 뒤 본문(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힌돌을 줄터인즉 그 돌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중에서 힌돌(구역 성경에서는 백석으로 표현)이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선정한 뒤 백석의 의미를 설명하고 그것을 받는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사죄의 증거, 능력과 승리, 혼인의 약속등 3개의 대지속에서 다양한 성구를 토대로 전개한다.

따라서 이명직 목사의 설교 형식을 결정짓는 가장 큰 특징은 '주제적 제목설교'라 할 수 있다. 이런 설교 방식은 단 한가지의 주제를 한편의 설교를 시종하여 다룬다는 점에서 전달적인 면에서의 장점을 가질 수 있다. 또한 당시의 회중들의 지적 수준이 오늘에 비해 낮았던 것을 생각하면 적절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의 설교에 하나의 본문을 정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설교의 진행이 설교자 자신의 사고에 주로 의존하게 되는 이런 류의 설교는 성서적 설교를 지향해야 하는 강단의 당위에서는 지양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이명직 목사의 설교는 철저히 연역적 구성에 의존하고 있다. 그는 설교서두에 자신이 다루려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히면서 설교를 시작하여 그것을 논리적인 연결의 맥으로 연결한다. 가령 예를 들어 "회개"(마 3, 2)라는 설교를 보면 먼저 회개란 무엇인가를 서론에서 다룬 뒤 회개가 한 개인의 신앙에서 갖는 역할을 두 가지로 정리한 뒤 회개를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의 문제로 차분히 풀어가고 있다. "중생"(요 3, 1-15)이라는 설교 역시 동일한 방식을 보이는데 서두에서는 중생의 정의를 규정하고 중생의 방법을 다섯 가지 소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처럼 그의 설교는 설교의 명제를 서두에서 처리하고 그것을 구체적인 성경의 예증 내지는 경험상의 예화를 들어 설명하는 연역적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은 다시 대지를 중심으로 설교의 몸말을 만들어 나가는 한국교회 설교의 전통적인 본론 서술 방식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거의 예외없이 2-6개의 대지로 세분되어 있다.

모든 설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대지 설교의 경우는 세밀한 논리의 전개라는 특징이 장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데 이 목사의 설교는 아마도 그런 논리적 구성의 전형으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이러한 연역적 구성에 대지로 몸말을 만들어 가는 설교구성은 교육적 측면에서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며 특히 회중들의 지적 수용도가 낮을 경우 적합한 방식이다.

말할 내용을 앞에서 다루고 그것을 순차적으로 설명 내지는 반증해 나가는 이러한 방식은 일견 회중들의 흥미와 집중을 유지하고 자극하는데 어려움을 안을 수 있다. 특히 이 목사의 설교는 그 다루는 내용이 대부분 딱딱하고 건조한 교리적인 주제들이라는 점, 또 그의 사역 자체가 교육자로서의 범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철저한 일방적 주입으로 특징지워지는 '서당교육'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인격적 위엄 등의 요소로 인해 설교라기보다는 일종의 강의 - 어떤 반대나 이론도 제기할 수 없고 그저 선생의 권위아래 일방적으로 복속하고 듣기만 하는 류의 -라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가 연역적 구조나 대지 설교가 가질 수 있는 어떤 지루함이나 흥미반감의 위험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는 성서를 포함한 해박한 그의 지식과 논리적인 연결 그리고 그의 거절할 수 없는 인격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술적인 면에서 설교를 일방성의 인상을 탈피하게 하는 탈피한 변증 논쟁적 구조로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가령 앞에서는 단언적으로 한 주제에 대한 단안을 내림으로서 설교가 설교자 개인의 일방적 주장으로 흐르는 것 같지만 그것을 풀어 가는 과정에서 여러 다른 다양한 견해들과 오해들 이론(異論)들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설득해 나가는 방식을 이 목사는 즐겨 사용한다.

우리는 그 구체적인 예를 "죄"라는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죄에 대한 억측과 오해를 가지고 잇는 일이 적지아니한 줄로 안다. 어떠한 사람은 전연 부인하여 말하기를...죄는 사람이 이름지어 놓은 것이지 죄 그 자체가 잇는 것은 아니라 한다. 가령 음식은 주린 자가 먹는 것이 합당한 일이다. 그런데 주린자가 음식을 먹고자 하는 경우에 돈이 없다, 그러면 돈이 없다고 죽어야 하느냐? 주린 자가 음식을 먹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소위 법률이라는 것이 잇어서 진리 그대로 순종한 사람을 무전취식이라고 정죄를 하니 죄는 사람이 자기 중심으로 법이라는 조문을 만들어 놓은 까닭에 의인이 악인이 되는 일이 잇다고 말한다. 또 죄라는 관념은 약자의 병적 심리라고 하니... 또는 죄를 실재물로 확인항는 동시에 원망하기를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심이 다 옳고 아름답되 죄를 창조하신 것은 크게 유감스러운 일이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다".

이런 방식은 결국 형식적으로는 설교자 한 사람의 모노로그일 수밖에 없는 설교, 회중은 아무 이의제기 없이 그저 일방적으로 듣고 있기만 해야 하는 일방성 일직선의 상황 속에서 설교자가 회중들의 이견(異見)과 질문을 자신의 입으로 대언하는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포괄적인 의미에서 회중들을 설교의 진행에 동참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집중력의 이완을 극복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목사는 회중을 인정하고 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을 설교의 진행 속으로 끌어들일 때에 설교의 전달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그의 설교형식에서 본론의 대지를 전개시켜 나가는 진술방식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명직 목사의 설교가 하나의 형식으로 되어있는 기계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가 즐겨 사용하는 전개방식은 본문내용소개 + 회중 접맥 + 각성촉구 + 명제정리 + 재 촉구로 요약할 수 있다. 가령 "엘리사의 간구"(왕하 2, 1-8)라는 설교는 이런 방식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이것을 위의 도식을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본문소개 - 저(엘리사)에게는 뒤를 돌아볼 그 아무것도 남아있는 물건이 없었다. 자기의 소유 전부를 바치고 완전한 헌신을 하였다.

 

  • 회중접맥 - 아,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헌신이 있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헌신을 하였다 하면서 슬슬 뒷 예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 각성촉구 - 우리는 저 엘리사와 같이 후고의 여지가 없이 전부를 불로 태워 버리고 오직 주 예수만 따라가자.
  • 명제정리 - 누구든지 성신이 없는 헌신은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요 자기를 위한 것이며 영적이 아니요 육적인 것이다.
  • 재촉구 - 오 형제 자매여 엘리사와 같은 철저한 헌신을 하였는가? 또한 저와 같이 성신을 받았는가? 받지 못하였으면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겸손한 마음으로 힘써 구하라.

위의 전개방식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 명직 목사는 성서본문을 회중에게 접맥시키며 과거와 현재 '그때와 여기'를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자신의 설교명제를 반복적으로 적용, 숙지시킨다는 점에서 장점을 갖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일반적으로 성경을 대하는 태도, 즉 설교를 성경에 대해(about bible)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할뿐 '성경으로부터 회중에 대해'(from the bible about hearer) 이야기한다는 이해는 등한시하는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전자식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성경은 정통주의(Orthodoxie)가 이해했던 것처럼 단지 하나의 생명없는 교과서나 사례모음집 정도 밖에는 되지 못할 것이다. 비록 성경에 대한 이해 자체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가지는 않는다 해도, 적어도 설교의 진행에서 본문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나'하고는 상관없는 객관적 관찰대상으로의 의미를 넘어서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회중이 성경본문에 나오는 인물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그 사건을 자기의 것으로 보는데서 출발하게끔 하는데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3) 설교전달의 측면

설교는 성경을 기초로 한 기독교적 연설이다. 이 명제를 염두에 둔다면 설교는 연설이 가져야 하는 수사학적인 기법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같은 내용을 갖고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어떤 기법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전달의 효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명직 목사의 설교를 분석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나타난다:

첫째로 그의 설교에서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말하는 정서적 긴장감을 야기시키면서 회중들로 전달자의 의도를 받아들이도록 호소하는 방식인 소위 위협적 호소(fear or threat appeal)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방식은 전달자가 메시지에서 수용자들에게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어떤 단서적 내용(content cue)을 제시해 주면 수용자들은 정서적 긴장감을 느끼게 되면서 해소방안을 찾게 되는데 이때 전달자가 그 해소방법의 하나로 자신의 주장을 권고해주면(reassuring recommandation) 수용자들은 이것을 잘 수용한다는 것이 이 방식의 골격이다. 이 방식은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명직 목사가 목회자와 회중들에 대해 훈계적 권면적 내용으로 접근할 때 특히 눈에 띄는데 먼저 현상에 대한 비판이 나온 뒤 성경에 따른 성도와 교회의 본질 제시 그리고 실천적인 적용의 순으로 진행된다. 이것은 이 목사가 가진 지도적 위치와 모범적인 삶 그리고 그의 고매한 인격으로 인해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할 수 있다.

둘째 이명직 목사는 이성적 전달방식(logos appeal) - 전달자가 자신의 신념이나 의견을 주장할 때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실증적 자료나 논리적 자료들을 그 메시지에 제시해 줌으로써 수용자들로 하여금 전달자의 견해를 쉽게 수용하도록 하는 방식 -을 즐겨 사용한다. 전통적으로 이 기법은 삼단논법이나 예증에 의해 구체화되곤 했는데 이 목사의 경우에는 빈번한 예화의 사용과 성구인용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가령 "큰 구원"이라는 설교를 보면 매 대지가 원리천명시에는 성구를 인용하고 그것을 풀어 설명할 때에는 구체적인 예화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전달방식은 그가 애용하는 대표적인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이명직 목사는 여러 수사학적 기법을 그의 설교에서 능숙히 사용하고 있다. 해석학적 문제이긴 하지만 그는 비유법과 알레고리를 아주 빈번하게 사용하며 복음을 설명하는 주요 도구로 삼는다. "가을의 복음"이나 "여름의 복음"은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매우 다양한 수사학적 기법을 설교에 동원한다. 가령 반복법과 열거법 점층법이 한 사안을 회중들에게 충분히 납득시킴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기법이며 질문의 반복은 회중들을 대화의 파트너로 끌어들이면서 설교에 동참하고 반응하게 만드는 기법이라면 이 모든 것들을 그는 자신의 설교에서 이러한 기법들을 자유롭게 활용하고 있다. 이것은 그 당시 설교에 대한 온전한 교육이 全無했던 상황이었음을 염두에 두면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이명직 목사는 설교가 갖는 연설로서의 특질을 알고 설교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구어체보다는 문어체 위주의 문장들과 지나치리 만치 긴 문장들 그리고 알레고리적인 해석의 연속 등은 설교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V. 나오는 말

한 인물의 신학과 사상 그리고 설교를 평한다는 것은 많은 위험이 담긴 작업이다. 그리고 언제나 미완성의 작업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도가 여전히 필요한 것은 그 불완전한 작업으로부터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현재와 미래의 좌표를 설정할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짧은 연구를 통해 이명직 목사의 신학과 설교 안에 오늘 우리 성결교단의 신학과 설교가 그대로 농축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았다. 그것은 자랑스러운 것이고 동시에 본받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아쉬운 것이고 지속적인 연구와 배전의 노력을 요구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그가 보여주었던 성결한 삶과 인격적 구도자적인 성직자로서의 삶은 오늘의 우리가 뒤따라야 할 모범임에 분명하다. 또한 그의 설교가 지닌 깊이와 논리성 그리고 연성과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전달의 효력 역시 오늘의 우리 설교자들이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명직 목사의 신학과 사상에서 웨슬레의 신학과 신앙의 계승을 표방하면서도 실상 웨슬레의 신학과 신앙이 가지는 사회접맥적 성격을 간과하고 한 개체로서의 성도의 삶으로 복음의 의미를 축소시킨다는 인상을 남겨주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설교의 폭이 지나치게 성도 개인의 테두리로만 국한해서 나타나는 것 역시 발전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깊이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그리하여도, '시대의 아들'로서 성결교회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장 인간다움과 가장 목사다움을 동시에 보여준 이명직 목사야말로 우리 교단이 영원히 품어야 할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