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존 뉴턴

그리스도의 가벼운 멍에

은바리라이프 2018. 5. 20. 09:55

<그리스도의 가벼운 멍에>

(존 뉴턴, 1725~1807, "Amazing Grace"를 지은이)

                                                                 (이심주 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9-30)

자신이 쉼이 필요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자만, 본문에서 복음이 말하는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의사의 의술을 인식하지만 아픈 사람만이 의사를 간절히 찾는다. (마 9:12) 주님은 우리에게 쉼을 주시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자신에게 나아오도록 초청하신다. 우리는 자신이 실제로 힘들고 무겁게 짐을 지고 있다고 느끼지 않으면 주님의 초청에 관심을 조금도 기울이지 않는다! 사람이 복음을 들어도 그토록 심한 무관심으로 반응하는 이유다. 죄가 병적 해악이 크고 영혼을 꽁꽁 묶는데, 그런 효과 가운데 하나가 우리를 마치 제정신을 잃고 자신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처럼 괴이할 정도로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령이 설복하시는 능력으로 그런 무감각한 상태를 제거해 주실 때, 이는 영혼에게 복된 시간이다. 무감각으로 인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그런 상태에서 영혼을 건져내줄 유일한 수단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게 된 상태였는데 말이다. 자신의 유책함과 죄로 인해 자신이 겪어 마땅한 결과를 깨닫는 일, 이것이 한 죄인에게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징후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괴롭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예외 없이 함께한다. 무거운 짐을 지고 고단해지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일로 인해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그분의 멍에를 짊어지려고 의지(뜻)하게 된다.

“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멍에는 사람이 일에 쓰기 위해 동물에게 씌우는 것을 뜻한다. 주님은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께 해야 할 일과 그 일에 대한 우리가 본성적으로 갖는 편견, 이 두 가지를 멍에를 통해서 언급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고난과 비난 그리고 죽음을 당하셨지만, 우리에게 ‘오라’하며 초청하신다. 주님이 우리를 필요하셔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없이는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오히려 주님을 차가운 마음으로 대한다. 주님을 가혹한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주님과 결혼한다면, 쾌락과 이별을 고하고 끊임없이 절제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런 규칙이 너무 혹독하고 주님의 법도 너무 살벌하다 생각한다.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우리 자신의 계획을 따르는 것이 행복해질 수 있는 더 좋은 길이라 생각하게 된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함으로 가득하고 사랑으로 뜨거운데, 그런 주님을 향해 그렇게 생각하다니, 이는 불공평하고도 도의에 어긋난 일이다. 그런 우리의 생각이 도덕적 부패함과 소경됨 그리고 타락을 강력하게 증언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주님은 여전히 말씀하신다. “내게 오라.”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두려워하지 말고, 나를 시험해봐라. 네가 ‘멍에’라고 생각하던 것이 실은 참된 자유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를 섬기는 일에서 네가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여 멀리하던 일은 전혀 무거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길은 즐거운 길이요 (나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기’(잠 3:17) 때문이다.”

나는 내가 섬기는 청중들이 주님을 섬기는 일이 완전한 자유라는 사실을 그들 자신의 복된 경험을 통해서 검증할 수 있다고 소망한다.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은 우리의 스승이요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종이 된다. 주의 명령을 지키지 않고 “주여, 주여”(눅 6:46) 외쳐봤자 헛된 일이다. 주님을 아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에게 기쁨을 드리고 싶어 한다. 자신이 고안한 방식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준과 법칙으로서 성경에 계시된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서 말이다.

“내게 배우라.” 주님은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에게 스승이 되신다. 즉 주님은 위대한 스승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스승으로 따른다면, 우리는 그분의 ‘제자’ 혹은 ‘문하생’이 된다. 주님께 배우지 않으면 주님을 주님의 뜻에 맞게 섬길 수 없다. 고대 철학자들에게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며 그들의 이름을 따라서 불린 제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를 따른 피타고라스주의자, 플라톤을 따른 플라톤주의자들이 그렇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은 안디옥에서 처음 쓰였는데(행 11:26,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리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스스로 고백한 자를 나타낸다. 만일 우리가 진실로 지혜로워지고 싶다면, 즉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고 싶다면, ‘제자’ 혹은 ‘문하생’이 스승보다 높지 못하다(눅 6:40)는 사실을 인지하고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이 땅의 선생은 어느 누구도 완전하게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혹은 우리가 철저하게 확신할 정도로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반면 그리스도가 자신을 낮춰가며 가르치려는 사람들은 인간의 교육으로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운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가 되면 얻어지는 형용할 수 없는 이점인데, 그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위대한 스승이신 주님은 자신의 신령한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다. 다른 선생 혹은 교육 주제는 그렇지 못하다. 주제에 대한 타고난 재능을 어느 정도 가지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인간의 기술과 지식을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예수님은 영혼의 무뎌질 대로 무뎌진 마음을 열어 살아나게 하신다. 소경을 가르쳐서 보게 하시고, 귀머거리를 가르쳐서 듣게 하신다. 우리는 본성상 고집이 세고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할 능력이 없다. 주님은 우리 마음에서 돌을 제거하시고 지독히 어두워진 지성을 계몽하시고 영혼에게 제시한 숭고한 교훈에 맛을 불어넣으신다. 바로 이점에서, 다른 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님처럼 가르칠 수 있는 자는 없다. (욥 36:22)

둘째, 주님은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치신다. 인간의 학문에서 다뤄지는 주제들은 주님이 가르치는 주제와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하찮고 중요하지 않다. 경험과 관찰은 솔로몬이 한 말을 확증한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전 1:8~18) 마음이 은혜로 물들고 거룩하게 되지 않으면, 다른 모든 배움은 철저히 무가치하고 오직 “바람을 잡으려는 일”(전 2:17)이 된다. 인간의 학문은 시험을 겪고 있는 마음을 일으켜 주지도 못하고, 세상에 대한 집착을 약화시켜 주지도 못하고, 충동적인 감정을 제어해주지도 못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그로티우스(1583-1645, 네덜란드 법학자, 국제법의 시조)는 학문에 바친 인생 막바지에 고백했다. “아! 헛되이 고생하며 내 인생 전체를 허비하였구나.” 반면 예수님은 자신의 문하생들을 영생에 이르기까지 지혜롭게 훈련하시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 혹은 예수님이 그렇게 부르셨듯이 ‘어린 아이들’(마 11:25)에게 지식을 계시하신다. 이는 세상의 어떤 지혜도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셋째, 다른 선생들은 오직 사람의 머리에만 지식을 전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며 가르치신다. 철학자들은 덕, 아름다움, 선행, 공평에 대해서 훌륭한 진술을 많이 하고 그 문하생들은 철학자들의 진술을 따라 논쟁하는 것을 배운다. 하지만 그들의 화려하고 칭송받는 진술들은 빈껍데기로 된 관념에 불과하다. 생명과 능력을 결여하여 추종자들로 하여금 교만과 그것과 비슷한 악덕에 자주 놀아나게 한다. 교만에 빠진 추종자들은 무지를 이유로 들어 경멸한 ‘계몽되지 않은 자’들을 괴롭힌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참 제자들을, 그들이 아무리 불완전한 자들이라고 해도, 악과 불경건을 증오하고 버리도록 효과적으로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과 능력 그리고 온전한 정신을 불어넣으신다. 그들의 삶은 타인에게 모범과 유익이 되고, 그들의 죽음은 위로를 전하며, 그들에 대한 기억은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넷째, 예수님의 제자들은 항상 배운다. 인간의 삶에 일어나는 사건, 우리가 아는 사람들, 대화, 가족과 도시와 국가 가운데 예상치 않게 일어나는 사건, 이 모두는 교만과 허영에 놀아나 불의함 가운데 누워 있는 인간의 마음과 세상의 상태에 관해서 성경이 교훈한 것을 끊임없이 주석해 준다. 그런 교훈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고 잊지 말아야 할 위대한 진리가 반복하여 우리에게 제시되고 마음에 새겨지게 된다. 제자들이 배워야 할 교훈이 항상 그들 앞에 있고 그들의 스승이 언제나 그들과 함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리는 독특한 이점이다.

다섯째, 스승이신 주님은 제자들의 연약함과 둔함에 지치지 않으신다.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신다. 주님이 땅에서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 얼마나 온유하게 그들과 대화하셨는가! 주님은 제자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언제나 용납하셨다. 그들의 잘못을 인내하셨고, 지극히 온유한 마음으로 그들을 책망하며 교정하셨고, 그들이 배울 수 있는 만큼씩 가르쳐 주셨다. 한 발 두 발 단계적으로 인도하시고 어려운 진리에 대해서는 가르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셨다. 당시 제자들에게는 “어려운 말씀”(요 6:60)으로 느껴진 것들 말이다. 비록 주님이 지금은 영광의 보좌에 오르셔서 엄위하심으로 옷을 입으셨지만, 여전히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우리를 동정하시는 마음도 뜨거우시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지 못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땅에 계시는 동안 제자들에게 품으셨던 것과 똑같은 인내심과 동정심을 가지셨다. 우리가 인도를 받아 생각하는 주님이 바로 그렇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위대하심을 제대로 생각한다면, 부패한 입술에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감히 올리는 것마저도 우리 같은 피조물에게 매우 주제넘은 일로 비춰질 것이다. 반면 우리가 주님의 한량없는 선하심과 은혜를 깨닫는다면, 모든 어려움이 극복되고, 우리는 주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면서도, 자녀가 사랑하는 부모에게 자기 얘기를 할 때 가지는 확신으로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갈 자유를 느끼게 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예수님의 겉모습에는 가난한 자들과 불행한 자들이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겁주는 것이 하나도 없다. 마음이 낮고 혹은 겸손하시다, 라는 말씀은 크신 하나님께 바로 적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시편이 그렇게 증언한다.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시 113:6)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는”(사 57:15) 주님과 비교해보면, 피조물 간의 차이는 모두 사라져버린다. 주님은 천사의 경배를 주목하는 것만큼 땅에 떨어진 새도 아신다. 모든 피조물을 공평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은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신 주님께 속한 위엄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계급이나 재산 혹은 능력을 들어 자신을 주님께 내보일 수 없다. 주님의 그런 시선에서 아무도 예외로 비춰지지 않는다. 주님은 인간적인 영광에 대한 교만을 치유하기 위해, 겸손한 자리를 취하기를 기뻐하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즉 세상에 오셔서 구원하시려는 자들을 위해서 그리하신 것이다. 이점에서 주님은 자신의 모범을 들어 우리를 가르치신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7) 즉 가난하고 무명한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교만을 찢으시고, 이기심에서 우리를 치유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신다.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의 말씀을 영접한 자들에게 주님이 하신 교훈은 “그들 영혼에 쉼을 주는” 복된 효과를 지닌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에 쉼을 주신다. (1) 하나님을 의지하는 본래 자리로 우리를 회복시키심으로써 그렇게 하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에 진정으로 복종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떤 쉼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우리에게 세상의 헛됨을 보이시고, 불확실하고 자주 얻기도 어렵고 항상 불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을 뒤쫓는 일과,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욕구를 그만 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쉼을 주신다. (3) 이생의 삶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놀라운 기쁨과 소망을 주심으로써 쉼을 주신다. (4) 주님의 눈에 우리의 의무 이행이 바람직하고 실천적이고 유쾌한 것이 되도록,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심으로써 쉼을 주신다. 그러하니 본문에 나온 주님의 약속이 진실로 참되지않은가! 이런 사실을 맛본 자만이 주님이 주시는 쉼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가진 불행과 후해 그리고 두려움을 주님의 쉼과 정당하게 비교할 수 있다!

내 설교들 들은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이미 공언했다. 정말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 자신이 주님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는가? 교만한 자, 쾌락을 쫓는 자, 세상에 빠진 자는, 비록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고 교회에 출석하고 외적 봉사를 하더라도, 주님의 발아래에 앉지도 않거나 주님의 마음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주님이 주시는 쉼 가운데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만일 쉼을 얻지 못했다면 주님이 명령하신 것대로 쉼을 얻고자 했는지, 이런 것을 판단하는 자기검증은 오랜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만일 당신이 쉼 가운데 들어갔다면, 그 쉼은 영혼을 위한 쉼이다. 신령한 복이기 때문에 외적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런 쉼을 취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궁전 안에 있어도 쉬지 못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지내게 된다. 반면 주님의 쉼을 얻는다면, 지하 감옥에 있어도 행복을 느낄 것이다. 오늘이라 불리는 바로 오늘, 주님의 음성을 듣자. 주님께서 “내게 와서 배우라” 말씀하시는 동안 당신의 마음이 응답하게 하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렘 3:22)

*문장 교정할 시간이 없어 다소 어색하더라도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