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기독교적인)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사도신경은 삼위일체론적으로 구성된 고대 기독교의 신조문이다. 이 진술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사랑의 하나님이 세 형태로 병렬화되어 있다. 사도신경의 언어로 교회의 신앙을 고백한 그 당시의 피세례자와 오늘날 예배 시 이 신앙고백을 갱신하는 기독교인은 이를 통해서 단순히 교회전승의 구체적인 진술을 반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이를 믿고 따른다는 사실을 피력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개 현실성을 신앙 고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우리의 운명을 그의 운명과 일치시킨다.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특권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 추가적으로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바치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며, 또한 교회와 세례의 중재를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된 것과 같다. 궁극적으로 마태의 세례 명령에 소급되어있는 (마 28:19) 신앙고백적 진술의 삼위일체론적 구성이 신앙고백의 개인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고대 기독교의 다른 구성적 신앙고백 형식과의 투쟁에서 그 신학적 정당성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이집트와 에티오피아 지역에서는 다섯 항목으로 구성된 신앙고백양식이 전승되었다. 이 양식은 2세기의 소아시아 신앙고백에까지 소급되며,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과 더불어 교회, 또한 세례행위와 연결된 죄의 용서나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대한 기독교적인 희망을 거론한다. 후에 오늘의 사도신경 형태로 발전된 3세기 로마 공동체의 세례고백은 삼위일체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러한 신앙진술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 무언가를 본문으로 받아들였다. 그것들을 세 번째 항목인 성령에 대한 고백에 병렬시켰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근원적으로 신앙고백의 전승에서 삼위일체적인 세 주제가 핵심이며, 따라서 교회와, 그리고 세례 받을 때 얻게 되는 죄의 용서, 또한 기독교의 희망이 성령 항목에 귀속된다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이 세 번째 항목에 설정되었다는 것은 교회의 현존적 구조가 거룩한 차원에 볼 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발현되고, 또한 믿는 자들에게 부여된 영적 영역으로서 신앙고백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다. 1564년 로마의 교리문답은 사도신경 본문에서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credo ecclesiam(교회를 믿는다)라고 정확하게 표명함으로써 성령‘을’ 믿는다는 신앙고백(credo in Spiritum Sanctrum)과는 구분했다.* 기독교인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으로서 삼위적 현실성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똑같이 (credere in의 의미에서) 교회‘를’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교회의 오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신앙고백을 바친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영이 활동하는 장으로서 교회에 신앙고백을 바친다.
*라틴어로 ‘내가 믿는다.’라는 뜻의 credo가 전치사 in을 (독일어 an에 해당됨) 수반할 때는 단순히 믿는다기보다는 그 절대적인 존재를 확신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에서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과 (여기에는 in이 사용된다) 교회를 믿는다는 표현은 (여기에는 in이 사용되지 않는다) 그 믿음의 층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망은 가장 오래된, 즉 2세기에 이미 착상된 술어에 잘 표현되어있다. 이 술어는 신조문을 교회에 대한 언급과 연결시킨 그것이다. 즉 교회의 거룩성은 세속 세계로부터 구별되는 것이며,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이고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성서적 전승에 따르면 신적인 영역에 속하는 모든 것,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 그에게 묶여있는 모든 것은 거룩하다. 이 경우에 거룩성이 세계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계 중심에서 교회가 하나님과 그의 오심을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기독교의 성육신 신앙에 해당하는 문제다.
니케아 신조와 4세기의 다른 헬라 신조양식에서 특별하게 진술된 교회의 일치(Einheit)는 교회의 거룩성과 서로 연관된다. 하나의 교회 안에서 이루어질 모든 기독교인의 일치는 자신이 이룰 수 있다고 기대해볼만한 목표가 아니다. 이 목표를 현실화하려다보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기독교로 하여금 어딘가 상처를 받게 한다. 모든 기독교인이 일치하지 않는 한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완전한 의미를 결코 실현하지 못한다. 한 하나님과 한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그 교회의 거룩성은 절대적으로 일치를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 대한 신조의 언급 방식이 기독교의 종파적 분리와 대립적이었다는 사실은 현실적 교회조직에 대해 노골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참된 교회가 불가시적이어야 한다거나 신자들의 가슴 속에서만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구적인 형식에서 실질적인 형태를 얻는다는 것은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기독교 교회의 본질에 속한다. 이러한 형태화를 위해서 기독교는 역사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교회는 교회와 그 친교 가운데서 활동하는 신적인 사랑의 본질이 기독교인의 분열 때문에, 혹은 기독교적 삶의 자세가 도착됨으로써 사람들에게 희미해져버린 때 보다는 그 본질이 명백했던 시기에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 신조가 실제적인 기독교의 분열에 맞서 교회의 일치를 강조했다는 것은 현재의 교회 기구에서 신앙적 교회가 충분한 모습을 갖추지 못했으며, 따라서 모든 기독교 종파로 하여금 보다 분명하고 적절한 친교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교회가 현재 거대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를 갖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교회 일치에는 교회의 보편성, 즉 카톨리시티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카톨리시티라는 그리스어는 유니버살리티*를 의미한다. 교회의 유니버살리티를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역시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한다. 교회는 사회에서 사회의 다른 조직과 구별되어 끊임없이 개체적이고 특별한 기구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 조직체와 더불어 인류의 한 부분임을 주장한다. 실제로 특별하게 꾸려진 교회 조직에서 중요한 점은 그 생명 영역의 다원성 가운데서 전체 인간의 운명과 위기에 대해서 개방적이라는 사실이다. 교회의 유니버살리티는 현재의 교회로 하여금 교회다움의 협소한 틀과 국가, 종족, 계급의 틀을 뛰어넘어 인류 전체를 바라보도록, 또한 전체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살아가도록 압박한다. 고대 교회의 신조 교리교육은 카톨릭적이고 유니버살한 교회개념을 4세기에 받아들였다. 이 개념은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 유감스럽게도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신조문에서 교회에 대한 술어는 사도적인 전통과 니케아적인 전통의 신조를 올바르게 번역하지 않고 ‘기독교적인 교회’라는 특징으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이런 형식의 신조는 오늘날에도 역시 여러 예배에서 사용된다. 실질적으로 교회는 오늘날 자신의 자명성을 획득하기 위한 준거로서 최소한 기독교인들만의 에큐메니칼 일치를 뛰어넘어 고대교회 당시의 기독교인들과 같은 기준에서 인류 전체를 유니버살하게 조망해야만 한다. 이러한 유니버살한 조망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
*보편성(Allgemeinheit), 카톨리시티(Katholizität), 유니버살리티(Universalität)는 기독교회의 보편적 본질을 뜻하는 일군의 개념이다. 기독교회는 한 개체 교회가 독립적으로 온전한 교회일 뿐만 아니라 전체로서 한 교회를 구성하며, 더 나아가 세계와의 우주론적인 지평을 잃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한국 개신교회가 극단적으로 분파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또한 세상과 이원론적 입장을 견지한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크게 훼손시키고 있는 셈이다.
니케아 신조에서 네 번째로 거론된 교회에 대한 술어와 준거라는 점에서 볼 때 기독교회는 오직 카톨릭적이고 유니버살한 교회이어야만 사도적인 교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는 이 문제가 구체적으로는 명시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도의 사명이 모든 인간의 한 하나님인 그분의 이름으로 이미 전체 인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하나님에게 들림 받은 이는 사도들을 파송한 부활한 분이다. 따라서 교회의 유니버살리티와 사도적 사명의 신실성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교회의 사도적 성격은 역사적으로 많은 세대의 기독교인들이 믿었던 바와 같이 교회가 사도시대의 형편과 사고방식을 가능한대로 변함 없이 유지한다는 데 달려 있는 건 아니다. 변화는 역사발전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교회가 전체인류를 지향하는 사도적 사명에 묶여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계속 수행해 나간다는 것이 결정적인 요소다. 이 사명은 선교를 이방인 선교사들이 수행해야 할 특별한 과업이라고 미루어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생명에 대한 교회의 진술에서 수행되어야만 할 그것이다. 이럴 경우 인류에 대한 기독교적 사명에서 ‘세계’만이 아니라 교회의 변화를 위한 일종의 역동성이 발생한다. 이처럼 교회의 정체성과 변화는 사도적 사명을 수행하는 과업과 상호 연결되어있다.
교회의 다층다기한 ‘속성’, 즉 거룩성, 단일성, 카톨릭성, 사도성은 그 본질에서 이미 완성되거나 상존하는 기구의 특성들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그 안에서 자신의 본질을 현실화시키려고 노력해야할 선교 운동의 시금석이다. 여기서 말하는 본질은 교회를 결정짓는 요소다. 오늘날 교회의 고유한 본질은 각기의 시금석을 통해서 이미 남김없이 진술되고 있는가? 더구나 교회는 이미 거룩하고, 하나이며, 유니버살하고 사도적인 사명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을 적용시켜야 할 어떤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미 고대교회 시대 때 교회개념을 조명해야할 사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사도신경에서는 이 의미가 ‘성도의 교제’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 이 부가어는 우선 4세기 말 쯤에 세르비아 지방에서 발견되며, 갈리아(고대 프랑스 지역, 역주)에서도 사용되었고, 결국 로마에서도 고대 세례고백과 연결되었다. 이 의미가 오늘날에는 대단히 불명확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16세기 이래로 성도의 교제를 가리키기도 하는 성도라는 단어를 신약성서가 사용하는 언어방식에 따라서(롬 1:7, 고전 1:2, 고후 1:1, 엡 1:1, 빌 1:1, 골 1:2, 등) 주로 기독교인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성도의 교제는 기독교인의 교제를 의미했다. 그리고 교회개념은 사도신경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역시 기독교인이 상호간 교제를 나눈다는 사실을 통해서 성격화되었다. 1530년 아우그스부르크 신조에서는 이에 근거해서 교회개념의 기초를 결정했다. 즉 교회는 성도의 회집(congregatio sanctorum)이라고 말이다. 루터나 다른 개혁자들에게 이런 표현은 신자들의 회집(congregatio fidelium)과 동일한 의미였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조의 진술을 상술한 독일어 판에서는 교회를 ‘신자들의 모임’(CA Ⅶ)이라고 했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조에 나온 그 뒷 항목에서도 역시 교회는 ‘모든 신자들과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언급되었다.
‘성도의 교제’라는 어법의 근원적 의미는 물론 다른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신자들이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자기들 끼리 모였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미 현재 신적인 구원이 완성된 하늘에 참여해 있는 거룩한 순교자들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모였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통해서 모든 기독교인들도 역시 미래에 그 구원에 참여하도록 약속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표현양식은 기독교인을 영원한 구원과 연결시켜주는 예전, 즉 ‘상타’(sancta)로 이해되었다. 이는 곧 고대교회에서 행한 예배생활의 핵심인 성만찬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성도’*이라는 단어가 순교자를 뜻하기도 하고 성례전을 뜻하기도 한다는 두 해석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무게로 다루어져야 한다. ‘성도의 교제’라는 부가어는 교회를 기구로서 자리매김한다. 그 기구 안에서 구원을 중재하는 신적 신비에 참여하고 이미 구원 얻은 순교자들과의 교제를 획득하게 된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를 설명하면서 표현하고 있듯이, 코무니오 상토룸(성도의 교제)에 대한 궁극적이고 인격적인 의미가 모든 기독교인에게 확장되었다는 것은 바울이 말하는 신학적 특징과 신앙고백양식과의 연결을 통해서 모든 기독교인을 ‘부름 받은 성도’라고 일컬음으로써 확대 재생산된 신앙고백적 구조라 하겠다.
*독일어 Heilige는 성자라는 뜻으로도, 성도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사도신경에 진술된 ‘성도의 교제’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성도의 모임과 친교라는 뜻이긴 하지만 이미 구원받은 하늘의 성자들과 교제한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아우그스부르크 신조가 교회의 본질을 설명할 때 사용된 성례전 집행이라는 표현이 바로 성자의 반열에 참여한다는 고대적 표현양식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곧 사도신경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고백적 전승사가 심층적으로 작용한 증거들이라 할 수 있다.
예전을 실행함으로써 성자들의 반열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상은 종교개혁자들의 교회이해에서도 역시 사실상 단숨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조는 교회를 성도들(혹은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성격화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아가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와 더불어 복음이 순수하게 선포되며, 거룩한 예전이 복음에 따라 충실히 실행된다.” 종교개혁 정신에서 복음 설교와 예전실행을 통해 바로 “성자들의 반열에 참여하게 된다.”는 고대양식이 출현했다. 즉 신자들이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이다. 예전적 교제의 고유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례와 마찬가지로 성찬식을 통해서 중재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된 사람은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서 발생한 구원에 참여할 것을 희망하다. 종교개혁자들의 이해에 따르면 인간을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고 그에게서 발생한 구원과 중재하는 것은 교회의 과제다. 교회는 이에 덧붙여 설교와 예전으로 섬긴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고대교회와 일치한다. 놀랍게도 아우그스부르크 신조의 형태가 사도신경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직 설교가 예전과 더불어, 혹은 그에 앞서 명쾌하게 거론된다는 것뿐이다. 여기서 분명한 바는 종교개혁교회가 특별한 방식으로 말씀의 교회로서 이해된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 고대교회의 신조에서 주목될만한 것은 오직 예전만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라 하더라도 예전의 개념이 그 당시와 중세기까지 그리고 오늘보다 훨씬 확대된 의미로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분명한 교회 의식(儀式)만이 핵심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高중세기까지 신앙의 전체 내용이 예전의 개념, 즉 ‘신적인 신비’로 요약될 수 있었다. 12세기에 후고 폰 생 빅토르는 파리에서 <기독교 신앙의 신비에 대해서>(De sacramentis christianae fidei)라는 제목으로 교의학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교회법은 구원사적 신비의 연관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이 구원사적 신비를 통해서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다. 성도의 교제라는 것은 신적 구원신비와 교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에게 가능한 일이 되었으며, 그것의 고유한 의미가 그와의 친교를, 그리고 그를 통한 하나님과의 친교를 가능하게 했다.
‘성도의 교제’라는 표현에 대해 우리가 지금까지 전개한 논의는 교회를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로서, 즉 선교와 교회의 일을 통해서 중재되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로서 이해하게한다. 이러한 교회의 일은 개개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보장한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하는, 그리고 그를 통해서 성취된 구원에 참여하게 하는 중재자라는 일반적인 이해는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를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한 특징과 연결된다. 이러한 특징은 특별히 프로테스탄트적이라 할 수 있다. 교회를 구성하는 것은 다른 그 무엇 보다 주교들과 교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교권주의가 아니라, 모든 신자의 모임이라는 명제가 근본 의미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만인제사장직은 그 토대다. 물론 교권에 대한 루터의 이해에 따르면, 즉 하나님에 의해 정초된 설교권이라는 이해에 따르면 사도시대 이후로 있어왔던 것처럼 신자들의 공동체를 회집할 필요가 있다(CA Ⅴ). 이를 통해서 신앙이 발현된다. 교회행정은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중재하는 데 필요하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통해서 신자들은 다시 한 번 상호간 친교적 관계를 이루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신자들 상호간의 친교는 불가분리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기독교인끼리의 친교가 갖는 이러한 상호관계를 통해서 교회의 가장 내적인 본질이 규정된다. 이러한 특징은 물론 사적으로만, 그리고 세상과 등진 채 마음으로만 경건하다는 의미에서 오해받을 수 있다. 그 특징이 실제로 예수와의 친교인데도 예수의 사신과 활동에 연관된 지평이 드러나지 않고, 따라서 신자들이 나누는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암시해야만할 지평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에게 속한 미래 지평이며,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다. 이로써 교회라는 말(에클레시아)의 근원적 의미가 밝혀지게 되며,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공동체가 구약 성서적 사유와 맺게 된 연관이 밝혀진다. 이 구약적 사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뜻한다(왕상 8:55). 에클레시아라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은 교회가 이스라엘의 약속된 후계자임을 드러낸다. 교회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말론적 공동체로 인식했다. 이러한 공동체로서 교회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도래를 기대하는 것에,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것에, 그리고 하나님의 메시야인 예수와의 일치에 자신의 현존적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성도와의 교제로서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런 지평에서만 적절하게 진술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미래인 것처럼 교회의 미래다. 그런데 교회는 어거스틴 이래로 그리스도의 나라와 일치하는 것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러한 자리매김은 종말과 하나님의 나라가 개시되기 전 메시야의 천년 왕국이 시작한다는 유대적-기독교적 기대와의 연결고리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어거스틴은 메시야 왕국을 교회의 시대와 동일시함으로써 이러한 전(前)천년설*적 표상의 모든 종말적 드라마를 제거했다. 이러한 동일화에는 물론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는 분리될 수 없으며, 양자는 교회가 좇아야할 미래를 특징짓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미래는 교회의 현재를 이미 규정하고 있다. 교회의 선포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는 사실상 현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통치는 인간을 하나님의 통치로 불러내고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지상적 활동 이외의 다른 목표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속 유지한다. 이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교회에서 현재적으로 통치한다는 사실이 보장된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삶에서 행해지는 기독교인들의 친교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는 교회보다 우월하다.
*예수의 재림이 이루어지기 전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천년 동안 이루어진다는 교리가 곧 천년기설, 혹은 전 천년설(Chiliasmus)인데, 이는 요한계시록 20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전 천년설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제로 역사 가운데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예수의 재림 이후에 역사의 피안에서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통치와는 구별되는 종말적 사건이다. 판넨베르크가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교회와 일치시킴으로써 이 천년기설적 표상을 부정했다. 참고적으로, 예수의 재림 이후에 천년왕국이 실행된다는 주장을 후 천년설이라고 한다면, 어거스틴처럼 천년기설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을 무 천년설이라고 일컫는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계의 미래인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미래도 되기 때문에 교회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함으로써 인간 사회, 그리고 全 인간 세계와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와 연관해서 생각해볼 때 세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교회의 자명성을 확고히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성자의 반열에 참여한다고 해서 세계로부터 도피하여 공동체적 세계와 단절되어있는 종교 영역으로 숨어들면 안 된다.
일련의 지상 세계를 해체하고 끝장낼 하나님의 미래적 통치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의 기대는 정의와 인간다움이 지배해야할 미래적 평화왕국에 대한 희망 가운데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는 다니엘서(단 7:13)에서 보면 고대 근동에서처럼 지상 세계의 본질을 성격화하는 짐승형상 대신에 인간형상을 통해서 상징화되었다. 교회는 이제 마지막 때의 공동체로서 사람들의 모임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들은 이미 지금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미래를 기대함으로써 하나 된 이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도 하나님-나라의-희망이라는 지평에 속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야말로 최종적인 구원에 들어갈 첫, 유일한, 그리고 포괄적인 조건이라고 선포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교회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통치할 미래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 인간들의 친교라 할 교회는 하나님과 그 나라의 미래에 대한 희망에 의해 이미 각인되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유대 공동체의 역사를 계승한다. 오직 예수를 통한 이러한 희망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일하고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이로써 이스라엘 민족공동체의 한계가 돌파되었다. 더 이상 특별한 이스라엘의 전통이 아니라 예수가 선포했던 것처럼, 그리고 예수에 의해서 사랑의 영으로 현재하는 것처럼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희망만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따라서 교회는 모든 나라에서 모여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교회는 기독교 역사에서 자주, 그리고 운명적인 귀결로서 이스라엘의 선택과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치 이스라엘이 끝장나버리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았다고 했다(롬 11:1). 기독교회는 이스라엘과 대립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교회는 오히려 감람나무인 이스라엘에게 접붙임을 당했다(롬 11:17 이하).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선민 역사는 전체 인류에게 확장되었다.
예수와의 일치 가운데서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며 그 미래를 현재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친교로서 교회는 새로운 인류의 시작이다. 이 인류는 하나님의 미래와 그의 사랑을 의지한 채 인간의 운명을 이미 여기서 받아들이며 모든 인간을 위해서 그 길을 제시한다. 따라서 교회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가 아니라 全인류의 미래인 것처럼 교회의 미래다. 그러나 교회는 지금 이미 예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이들, 그리고 이러한 기다림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들의 친교다. 그리스도와의 친교로서 교회의 본질적 운명은 역시 하나님-나라의-희망이라는 지평에 그 거처를 둔다. 경건이 왜곡된 구원 이기주의의 목표가 될 때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훼손된다. 만약 그리스도와 관계된 교회의 친교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의 친교에서 하나님 나라의 지평이 망각된다면 세계 도피적 신비연맹에 밀착된, 즉 종교적 욕구나 성직주의적인 구원조직을 공동으로 실행해 나가기 위한 연합에 밀착된 종교성이 발전할 뿐이다. 교회가 자신의 내적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좁은 틀을 뛰어넘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와 관계될 경우에 자신의 세계적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전 인류를 위한 교회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더구나 이 경우에 중요한 것은 인간이 더불어 살아야할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형태에 대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은 구약성서가 쓰여진 이래로 평화와 정의를 지향하는 문제였으며, 이로써 인간적으로 인간과 더불어 진실하게 살아가는 삶을 지향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역사적으로 작용하는 영역의 주변부에 머뭇거리면서 정의, 그리고 사회의 정치-사회적 질서에 대해서 무관심하면 안 된다. 오히려 교회는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성취될 인간의 미래적 운명을 위해서 현재 사회의 법질서에서 무언가 바람직한 형태를 획득할 수 있도록 진력해야만 한다.
물론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한다는 전망에서 볼 때 교회는 사회적 삶과 개인적인 삶의 그 어떤 현재적 생명형식도 최종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그것보다는 이미 확정된 개개의 형태와 사물 가운데서 잠정적이고, 열려진 하나의 단계만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단계는 사실상 퇴보나 몰락의 위험성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요점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의 지평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기준이다.
과거에 아주 명료하게 인식되었던 교회의 거룩성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세상 사건 사이에 어떤 특징적인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있다. 거룩하다는 뜻은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다.’기 보다는 오히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세상에 대해 자신의 자유를 초월적으로 고양시켰다는 점에서 거룩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자유에서 나오며, 그 사랑이 지향하고 있는 인간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거룩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게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거룩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현존의 세계와 구별되며,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기독교적인 삶의 형식을 포함해서 모든 현존하는 것들이 잠정적이라는 인식은 하나님의 미래를 향한 선회의 이면이다. 다른 한편 교회의 거룩성은 성서적 하나님의 거룩성이라는 특별한 관점에서 볼 때 세계로부터 구별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서의 하나님은 그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세계 안으로, 세계를 위해서 오신다는 점에서 거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거룩성은 기독교적 사랑에서 완성된다. 그러나 그 거룩성은 모든 유한한 현실성이 잠정적이라는 인식과 연결되어 있으며, 창조적 갱신의 능력을 갖고 있다. 모든 유한한 것의 잠정성은 틀림없이 교회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고유한 행태에 관하여, 그 질서에 관하여, 그리고 그 삶에 관하여 의식하게 한다. 교회의 거룩성은 거듭해서 갱신되는 개혁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이 개혁은 기독교 역사의 초기형태로 되돌아감으로써 그동안의 역사를 단절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신과 역사에 의해 이미 열려진 하나님이 통치할 미래를 향해서 갱신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교회사를 회고해 보면 교회의 거룩성이라는 징표가 불분명하고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는 한편으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자주 삭막한 방식으로 분리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세상 가운데서 흡사 영속적이기나 한 것처럼 교리와 체제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세상으로 하여금 그 잠정성을 기억하게 하는 일에 무책임했다는 점에서 매우 분명한 특징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피의 폭력에 이르기까지 인간적인 통치 형식과 방법을 이용했다. 그리고 교회는 세계 도피적 경건성을 유지함으로써 비인간적 사태를 알게 모르게 고착시키는 일에 항상 거듭해서 타협적이었다. 교회의 거룩성은 하나님이 통치할 미래 앞에서 모든 지상적인 것의 잠정성과 연약성을 깨닫고 그 깨달음이 바로 사랑의 창조적 동인과 연결되는 곳에서 드러난다.
현세계의 잠정성은 인간의 공생을 위한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질서와 더불어 고유한 기구로서 교회의 현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하나님의 통치가 성취된 새로운 예루살렘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기구나 성전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계 21:22).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함께 하심으로써 모든 생명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세계에서는 인간의 삶이 신적인 결정에서 여전히 소외되어있기 때문에 인간의 운명이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서 그 친교가 받아들여지는 어떤 특별한 기구를 여전히 필요로 한다. 어떤 특별한 종교적 기구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는 일반적인 세상의 삶에서 인간의 운명이 여전히 현실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칼 맑스의 종교비판에 대한 교회의 답변이다. 교회는 인간들로 하여금 현존재자들의 잠정성을 극복하는 인간적 운명을 기억하게 하며, 또한 고유한 진리가 소외된 현재로부터 최종적인 구원에 참여하도록 중재한다. 이럴 경우에 교회는 세상으로 하여금 그 잠정성을 진지하게 기억하게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와의 친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미래를 향해 통로를 열어두도록 할 수 있다. 교회가 그 고유한 잠정성을 기억하고 있다면 말이다.
교회의 사도적 사명, 그리고 단일성과 보편성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열려져있는 하나님 통치의 구원론적 미래에서 실질적인 기초를 획득한다. 지속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의 사명을 기초하고 있는 사도의 선교적 과제는 전인류의 구원론적 미래가 예수의 역사에서, 그리고 특별히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서 이미 발생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모든 인간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보편성은 교회의 고유한 형태를 위한 준거이기도 하다. 이 경우에 교회는 참된 가톨릭적인 형태로서 이미 성취된 게 아니라 여전히 보편적 운명*을 완전히 실현하기 위한 도상에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형태는 이런 운명의 표현일 수 있으며, 따라서 스스로 이미 가톨릭적일 수도 있다. 교회는 이러한 형태를 제시함으로써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의 일치에서 상호간 가톨릭적이어야 한다는 운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가 분리되어 있는 한 교회의 다원성 가운데 있는 교회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일치에 적합하도록, 그리고 하나 되게 하는 사랑의 영에 적합하도록 인류 공동의 운명을 실현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심각한 왜곡 현상만 보일 뿐이다. 교회는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로서만 자신의 거룩성을, 또한 모든 사람의 한 하나님이며 主인 분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보증할 수 있다. 교회는 이 거룩성에 대한 숙고를 통해서만 완전한 일치로 돌아갈 수 있다. 하나님이 통치할 미래와 한 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에 맞서있는, 그리고 교회의 자명성을 위한 모든 귀결들과 신적 사랑을 드러내주는 영과의 연대에 대립해있는 교회 질서와 교리의 잠정성**을 인식하고 있을 경우에만 기독교 공동체 사이의 차이들은 그 분리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럴 경우에만 점차 확대되는 교회간의 상호 승인과 공동 작업의 과정이 자유로워지며, 획일화가 아닌 기독교인의 새로운 일치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현실적 과정이 자유로워진다. 이러한 상호간의 승인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신조를 파괴하지 않고도 가능하려면 다음과 같은 경우이어야 한다. 즉 이 승인이 기독교의 과거와 순교적 교회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진실할 경우에, 그리고 신앙적 인식과 생활태도의 다층적 형태들이 진리의 단일성으로부터 이해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에. 여기서 말하는 다층적 형태들은 하나의 희망과 하나의 신앙을 여전히 잠정적으로 다르게 인식하고 형태화하는 그것이다. 기독교인은 성자의 반열에, 그리고 한 하나님의 구원론적 진리에 공동으로 참여함으로써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사실의 차이를 뛰어넘어 이런 희망과 신앙에 묶여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보편적 운명(die universale Bestimmung)이라는 말은 교회가 최종적으로 이루어야 할 상태를 뜻한다. 교회는 여전히 도상의 존재이지 스스로 완전한 어떤 형태이거나 존재일 수 없기 때문에 보편적 결정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Bestimmung을 ‘운명’이라고 번역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 이외에도 규정, 정의, 결정, 숙명, 예정된 목적, 지정이라는 뜻도 있다. 말하자면 그것이 되어야할 그 무엇을 가리킨다 하겠다.
**교회질서와 교리형태의 잠정성(die Vorläufigkeit kirchlicher Ordnung und Lehrgestaltung)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기독교가 분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기독교의 가시적 형태들이 영구불변의, 천상의 존재론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그런 주장들이 충돌하여 기독교가 분열되었으며, 지금도 그런 악순환이 계속된다. 세상만 잠정적인 게 아니라 교회마저도 그렇다는 점을 인정하고 교회의 일치성, 사도성, 거룩성, 보편성을 회복해나가는 일이 교회 갱신의 첫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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