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선교사/성막

<구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존 R. 라이스, 강정보역/기독교문서선교회

은바리라이프 2017. 9. 5. 19:08

나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 곧 출애굽기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연구함을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세가 내게 대해 기록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과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 곧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이 의식적 율법에 묘사된 그리스도가 계심을 알게 된다. 여러분은 갈라디아서 3:24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라고 기록된 말씀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율법이 그리스도에 관해 묘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광야에 있던 성막 안에 계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성막은 천막이며 넓이가 15피트, 높이가 15피트, 길이가 45피트의 간편한 구조물이었다. 이 성막 안에 두 개의 방이 있었는데 하나는 길이가 30피트이고 넓이가 15피트의 크기로서 성소라 불리웠고, 다른 방은 성소에서부터 휘장으로 구별된 방인데 길이가 15피트, 넓이가 15피트, 높이가 15피트의 크기로서 지성소라 불리웠다. 이 성막은 백성들이 몰려와서 설교를 듣는 공화당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뜻이 있었다. 성막에는 제사장들이 들어가서 어떤 희생이 이루어졌고 하나님 자신이 설계자가 되사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 상세히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9:1~5을 읽어보도록 하자.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그에 대한 설명은 출애굽기 26장에 말씀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이 성막 안에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구세주가 여기에 묘사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벽은 금판으로 되어 있으며 끝에 세워져 있었다.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판자들은 완전히 금으로 덮였으며 네 깃 천과 가죽으로 싸여있었다. 내부에 있는 두 방은 휘장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첫째 방이 성소였고 안쪽에 있는 둘째 방이 지성소였다. 이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만이 속죄일에 속죄의 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바깥쪽에는 희생에 쓰는 놋제단과 큰 놋대야 또는 씻는 곳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성막의 뜰을 이루는 울타리나 커텐이 쳐져 있었다.

(1) 내부를 덮고있는 수놓은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천적 본성을 묘사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는 성막 자체와 그 덮개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출애굽기 26장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너는 성막을 만들되 양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지니 매 폭의 장은 이십팔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그 양장 다섯 폭을 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하고...”(출 26:1~3).

가장자리에 청색실로 된 고리를 만들어 그것들을 연결했다. 나는 그 후자에 대해 언급하려고 하는데 이 덮개는 무엇인가? 성막을 덮고있는 첫 번째 덮개는 아름다운 꼰실로 된 세마포 천이었다. 이 세마포는 주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묘사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음매가 없는 옷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주신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준비하시는 의의 흰 옷에 관해서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마포는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을까! 성막을 덮고있는 이 내부의 덮개는 아래를 내려다보는 천사의 모양들이 백색, 청색, 자색 그리고 홍색실로 수놓아져 있는 것이었다. 이것 역시 예수님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 세마포 덮개는 성막의 가장 내부를 덮고 있는데 열 폭이 서로 연결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들은 청색실로 된 고리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다. 성막을 옮겨야 할 경우에는 이 덮개들을 분해하여 돌돌 말아서 운반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 천의 한 부분은 성소를 덮고 두 번째 부분은 지성소를 덮었으며 역시 고리로 묶었던 것이다.

오, 이 훌륭하게 짝을 이룬 세마포는 아름답고 거룩하고 죄없으신 구세주를 묘사했던 것이다. 이 세마포는 지성소에 들어가도록 허락받아 제단과 놋대야가 있는 곳까지 이르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외부에서 보는 사람은 아무도 그 우아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것이지만 오직 내부에 들어간 사람만이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천막의 가장 장엄한 내부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가 금고리로 연결되었는데 금은 신성을 묘사하는 것이다.

(2) 염소털로 된 두 번째 덮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성막 지붕의 두 번째 겹은 염소털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출 26:7).

이 앙장은 좀 긴 편이며 열 폭 대신에 열한 폭으로 되어 있어서 늘여질 때 다른 막을 완전히 덮어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염소털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성경 가운데 나타난 염소는 우리의 죄를 담당한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다. 레위기 9:3과 15절에 염소는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물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제사장을 위한 속죄제물은 송아지나 수소였지만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물은 염소였던 것이다.

성경은 속죄염소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두 마리의 염소를 취하여 한 마리는 제물로 죽이고 그리고 다른 한 마리에게는 제사장이 손을 그 머리 위에 얹어 상징적으로 백성들의 죄를 그 염소 위에 전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염소는 광야로 끌려나가고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멀리 우리 죄를 옮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소의 털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청산해 주시며 대속의 사역을 이루시는 그리스도를 묘사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도다...”(고후 5:21)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그리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히 9:28)라 말씀하고 있다. 결코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 죄인으로 간주되시고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상에서 달려죽으셨다. 그러므로 염소털막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대속의 사역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것이며 속죄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것이다.

(3)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은 우리의 희생이신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지금은 성막 덮개의 셋째와 넷째 겹에 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를 만들지니라”(출 26:14).

성막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 셋째 겹은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안에 있는 세마포 덮개와 염소털로 된 덮개를 완전히 덮는 큰 덮개이다. 오, 숫양의 가죽이여! 이것은 죄인을 위해 피흘려 희생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적한 것이었다. 숫양이나 어린 양은 언제나 피흘리는 희생을 묘사했다. 그러므로 유월절 어린 양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희생은 어린 양으로 드려졌던 것이다. 이 숫양은 바로 그 피흘리는 희생을 묘사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붉은 물이 들여져있다. 내가 아는 대로는 그것이 하나로 덮여있는데 그 밑에는 자줏빛과 진홍빛 게루빔이 아름답게 수놓여 있는 흰 세마포 덮개가 있고 바로 그 위에 염소털 덮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묘사하는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덮개가 있는데 그것이 염소털 덮개를 덮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예수님을 묘사하며 이 성막이 하늘의 성막과 하나님의 현존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보혈은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묘사되는게 틀림이 없는 것이다.

(4) 해달의 가죽은 외부세계에 의해 요청되거나 평가되지 않은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지금은 성막의 넷째 덮개인 바깥 덮개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를 만들지니라”(출 26:14 하반절).

해달의 가죽은 아름답지가 않다. 그리고 단조로우며 흐릿하고 모호한 모래색깔을 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밖에서 해달 가죽의 모호한 색깔의 털을 볼 수 있도록 그 해달의 가죽을 가장 윗덮개로 덮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왜 그렇게 했을까요?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시길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라 했다. 예수님은 다만 촌사람이라 불리우셨고 갈릴리에서 온 자라고 불리우셨고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사람들이 말한 바 있다. 예수님은 가난하셨고 시기관과 바리새인 중의 하나와 같지 아니했다. 주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셨다. 주님은 오셔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들과 고난당하는 자들을 묘사하셨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회개하지 아니한 사람들에게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으시는 것이다. 문을 통과하고 제단을 지나가고 성막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만이 내부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죄를 대신 담당한 자로서 세상에 오신 주 예수의 인성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해달의 가죽은 사람들이 거듭날 때까지 세상이 주 예수의 인성 안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비웃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성경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의 죄에 대해 소경이 되어 있으며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에 쾌락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구세주는 불신앙의 세상에 대해서 내부에는 너무나 놀라우리만큼의 아름다움이 감추어져 있으나 외부에는 매혹적인 데가 전혀 없는 해달의 가죽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성막의 네 겹의 덮개 안에 예수님이 묘사되어 있다. 아름답게 짜여져 세마포에 금과 주홍색으로 덮여있고 천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내부는 완전하고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나타낸 것이다. 그 위에 숫양의 털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자와 속죄의 염소와 속죄 제물로서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은 구세주의 속죄의 피를 묘사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외부에 있는 해달의 가죽 덮개는 외부세상에게는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하시는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면에 있어서 주 예수님의 인격의 사중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5) 널판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묘사한다.

“너는 조각목으로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어 세우되 각 판의 장은 십 규빗, 광은 일 규빗 반으로 하고 각 판에 두 촉씩 내어 서로 연하게 하되 너는 성막 널판을 다 그와 같이 하라”(출 26:15~17).

조각목 혹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넓이가 27인치가 되는 널판이 있었는데 이 나무를 썩지 않으며 사막에서도 자란다. 매우 단단하며 옹이 투성이지만 널판을 만들 수 있었고 똑바로 세울 수도 있었고 다른 것과 서로 연결하도록 만들었는데 각 널판의 길이가 15피트이고 넓이가 27일치였다. 각 널판마다 밑에는 은으로 된 두 개의 받침이 있었다. 그리고 널판에는 그 받침에 알맞은 장부들이 있어 땅에 세워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 널판들은 나무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금으로 싸였던 것이다. 만약에 그것들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 틀림없다면 두 가지 사실을 묘사하고 있을 것이다. 첫째로, 성경 가운데 나무는 인간과 인간의 방법과 인간의 공적을 나타낸다. 인간의 공적이 멸망되려고 할 때 성경은 인간의 공적을 ‘나무, 건초, 지푸라기’ 같은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창세기 22장에 있어서 이와 동일한 진리를 말하는 또 다른 설명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나무를 쪼개고 이삭과 함께 모리아산까지 삼 일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이삭은 희생의 장소까지 그 나무를 운반했던 것이다. 그 나무도 불태워져야 하는 것이다. 오, 나무는 인간성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인간성을 대신하시는 예수님이 계신 것이다. 그 나무는 썩지도 않고 부식하지도 않는 특수한 나무이다. 그런데 그 나무가 순금으로 싸여진 것이다.

둘째로, 순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순금은 신성이요 나무는 인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금은 금이고 나무는 나무이다. 예수님은 인간이며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변화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인에게서 태어나신 신인(神人-God Man)이시다. 예수님은 스스로 종의 형체를 취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러므로 곧추세워져 있는 이 나무널판들은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널판에는 막대기를 넣어 함께 묶을 수 있는 고리들이 있었다. 금고리들은 널판을 덮은 금에 밀착되어 있었다. 위에 두 개의 막대기, 아래에 두 개의 막대기, 가운데는 긴 막대기 하나가 있어 레위인들에 의해 분해될 수도 있고 운반될 수도 있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함께 뭉쳐 장악하시는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띠들(조각목으로 만든 긴 장대)도 예수님을 묘사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 만물이 구성되기 때문이다. 성막이 순금으로 싸인 조각목 띠(장대)로 연결되고 결속되는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하나로 장악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는 하늘에 있는 태양의 위치에 태양을 장악하시고 지구의 궤도에서 지구를 장악하시고 뭇별들을 그 위치에 있게 하시고 달로 하여금 지구의 주위를 돌게 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땅의 만물이 예수 안에서 조성되었고 다스려짐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성막의 널판에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6) 성소

성막에는 두 개의 방이 있는데 분리되어 있다. 그 한가운데 휘장이 내려져서 두 방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가장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는 뒷방인데 사방이 15피트 넓이의 정방형이며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는 기둥에 매어있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기둥들에는 작은 금갈고리들이 있었고 휘장이 앞쪽으로 드리워져 있었는데 천사들의 모습이 수놓여진 아름답고 훌륭하게 짜여진 세마포 휘장이었다. 여기에 닫혀진 한 방이 있었는데 그 방은 죄인이 가까이 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방에는 문도 창문도 없었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 이외에는 아무 빛도 없었다. 그 영광의 빛은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에는 덮으셨던바 밤에 광야에서 성막을 덮었던 화염이며 하나님의 현존의 빛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 지구상에 그와 같은 성전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 하나님은 기독자 각자의 몸에 거하여 계시기 때문에 집안에는 계시지 않는다. 교회 건물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이 성소는 이 방 안에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현존하셨던 곳이다.

(7) 은받침은 구속을 말한다.

널판과 받침에 대한 성경구절 출애굽기 26:18~25을 살펴보도록 하자.

“너는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되 남편을 위하여 널판 스물을 만들고 스무 널판 아래 은받침 마흔을 만들지니...”(출 26:18~25).

성막에는 그 골격이라 할 수 있는 널판이 있었는데 땅 위의 모든 널판 밑에 은받침들이 있었다. 이 은받침들이 널판들을 넘어지지 않도록 보존시켜 주었다. 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은은 구속을 의미하는 금속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내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칠십삽 인이 더한즉 속하기 위하여 매 명에 오 세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하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민 3:45~47)고 하셨다. 그러므로 은은 구속의 돈 곧 속전이었다. 그것은 땅에 닿는 금으로 싼 널판들을 우리의 구속자로 묘사한 주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야곱이 고향을 떠나던 때에 땅에서 하늘에까지 닿았던 사닥다리를 기억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묘사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 은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구속을 위한 속전으로 지불되어야 할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자로서 오시며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되시는 것이다.

 

 

내용출처 : <구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존 R. 라이스, 강정보역/기독교문서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