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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아는지식12-홍해

은바리라이프 2017. 2. 9. 18:19

그리스도를아는지식12-홍해

북쪽의 바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던 길에서 돌이키게 하신 후, 바알스본 맞은 편 바닷가에 진을 치게 하셨다. 바알스본은 '북쪽의 바알(주)'이란 뜻으로 바알의 산당이 있던 곳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런 곳으로 데려온 것은 의미심장하다. 즉, 누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지 알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곧 교회를 구원하는 것은 바알이나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걸 분명히 알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 사람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했다. 우리의 기억은 너무도 짧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새로운 시련을 만날 때면 우리는 늘 새롭게 두려움 속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른다(요일4:18).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데, 두려움은 믿음 없음의 증거이므로 지옥의 형벌에 처해지게 되는 것이다.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자기 자신’이다. 가치있는 ‘자기’, 잃을 것, 지킬 것이 있는 ‘자기’를 중시하고 숭배하면 두려움이 따르게 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은 애굽 군대, 곧 고난을 바라보았고, 그걸 극복할 수 없는 ‘자기’를 돌아보고 절망에 빠진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믿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

우리는 늘 망각한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인 것을 수시로 잊어버리고, 때로는 하나님이 계시긴 하느냐며 그분의 존재까지 의심한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고 바라보신다는 사실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그러한 진퇴양난의 고난 속에 처하게 한 이가 다름 아닌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홍해와 애굽 군대 사이, 그 고난의 자리로 몰아넣으신 것이다. 이 상황을 잘 이해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좋은 것 주시는 분인데 사탄 마귀가 나를 괴롭힌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이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나를 두렵고 괴롭게 하는 이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한다. 그게 다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는 것이다(요17:3). 하나님을 아는 자는 고난을 만날 때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마6:33).

진짜 아버지의 참사랑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알스본 앞으로 이끄신 것은 무언가 가르칠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될 당신의 백성들을 사지(死地)로 몰아 넣어서라도 반드시 가르칠 것을 가르치시는 분이다. 이것이 진짜 아버지의 참사랑이다. 하나님은 홍해 앞에서 이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이다.

“뒤는 애굽의 바로가 수많은 병거를 몰고 오고, 앞은 피할 곳 없는 시퍼런 바다다. 이 절망의 순간에 너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나만 믿고 의지해야지. 너희를 구원하는 건 우상도 아니고, 너희 자신도 아니고 오직 나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다 구원할거야.”

하나님은 늘 이런 식으로 일하신다. 그리고 그걸 성경 내내 보여주셨다. 성경을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읽어보라.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밝히 보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가만히 있으라(하라쉬).” ‘하라쉬’는 ‘침묵하다. (마음 판에)새기다’는 뜻이다. 즉,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의 진의는 이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튀어나오는 불만의 말을 멈추고 하나님의 뜻을 조용히 마음판에 새기라.’

좋으신 하나님이 성도를 고난의 상황에 처하게 하신 것은 다 뜻이 있는 것이다. 그때 성도는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된 선악 판단의 주체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 그 상황을 두려워하고 불만스러워하는 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그것이 ‘형통케 하시다(찰라흐 : 앞으로 나가다. 발전하다)’의 참뜻이다(창39:3).

참 성도의 기도

기도도 역시 마찬가지다. 기도는 ‘하나님 내 말 들어 주세요, 내 소원 들어 주세요’가 아니라,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자리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의 참뜻이다. 그래서 성도의 기도는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기도는 정반대다. 나의 소원이 이루어져야 기쁘고 행복하다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자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되어야 한다(마26:42).

하나님의 구름기둥 불기둥은 성도를 연단의 자리로 이끌어 간다. 성도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삶, 연단의 삶을 인생 내내 겪게 되어 있다. 내 뜻 죽이고, 내 가능성을 포기하고, 내 주체성을 차압당하는 삶을 살게 된다. 성도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알기를 원하시는 그 뜻들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기대나 소원과는 다른 ‘좁은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성도의 인생이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필연성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신약에서도 바다에서 제자들이 두려움에 휩싸여 예수님께 매달린 사건이 있다. 그때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고 잠잠케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셨다.

하나님 뜻이 바로 이것이다. ‘너희의 믿음 없음을 보라. 너희가 어떤 존재인지 알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성도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의존을 버리게 된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더욱 더 끌어안게 된다. 그것이 믿음이다.

이걸 깨달아 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성도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믿음을 키워가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자신이 믿음 없는 존재라는 걸 더욱 더 분명하게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필연성을 점점 더 분명하게 깨닫고, 그 깨달음이 더욱더 확고해 지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인 것이다. 이것이 ‘나는 쇠하고 예수는 흥해야 한다’는 말씀의 참뜻이다. 하나님은 이걸 가르쳐 주시려고 성도를 이 땅에 살게 하고, 이 역사를 운행하시고 계신 것이다.

조정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