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힉소스(Hyksos) 라고 불렸던 히브리 족장들 ... 1.

2006.03.18 18:22 | 바이블-고고학 | 제임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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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사브낫바네아)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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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때보다 40년 전 쯤에 기록된

애굽의 파피루스 문서가 최근에 알려졌다.

이 조각난 기록은 감옥 문서인데

그 당시 감옥 제도가 쓰여 있고

뒷면에는 어떤 애굽 집에 속한

75명의 종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s

그 중에 45명은 아시아 사람으로

애굽에 팔려 온 종들이다.

요셉도 그후에 이들처럼 팔려 온 것이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 온 요셉이

30세의 젊은 나이에 대제국의 총리가 되었을까?

이를 뒷받침해 주는 뚜렷한 역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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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힉소스 역사 이야기를 읽어보면 ....

번영하던 이집트의 중왕국(12,13왕조)이 갑자기 세력이 약해지면서

지방 통치자들의 분할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 때에 힉소스(Hyksos; 목자 왕들, 이국의 통치자)라는

셈족으로 이루어진 민족이 아시아 팔레스틴 쪽에서

말과 병거를 몰고 쳐들어 왔다.

그때가 기원전 18세기 중엽으로

그때로 부터 약 150년간(약 1720-1570 BC)

이집트의 두 왕조(15,16왕조)는 가나안에서 쳐들어온

힉소스라는 이민족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때 그 틈을 타 묻어온 많은 집단의 족속들이 있었다.

힉소스가 이집트를 정복할때 많은 힘을 실어 준 집단이 있었다.

그 집단이 훗날에 히브리 노예로 ...이스라엘 민족으로 불리워 졌다고 한다 ...

힉소스족은 그들은 수도를 동부 아바리스에 정하고

이집트와 서부 아시아를 다스리며 힉소스(Hyksos) 왕국을 세우고

파라오로 군림하게 된다.

기원전 1640-1530년에 나일강 델타 지역에 세워진, 아바리스는

힉소스 왕조의 지배층은 가나안에서 이주한 가나안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이룬 왕국은 위 처럼 이집트에서 세워진 최초의 외국인 왕조로 유명하다.

이집트인들에게는 이 외국인 국가 경험이 후대 역사에서 "트라우마"로 작용해

'가나안인들에 대한 끊임없는 봉쇄정책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한편, 15왕조 파라오는 힘을 실어 준 집단을 위하여

이집트 델타 지역 동부지역인 "고센'땅을 주었다고 한다.(협정,조약)

검은빛을 띠고 있는 비옥한 토양이라 그들은 풍요를 즐기며 살았다고 한다.

(그때 까지는 노예로 살고 있지 않고 있었지만,

남쪽에 밀려서 살던 이집트 원주인들이 힉소스의 16왕조를 다시 쫓아내고

17왕조를 세워 그 이집트 파라오 치하에 들어 가면서 부터

히브리인(편의상 불렀음) 들은 물론 이집트 원주민을 제외한 노예로 삼기 시작했다.

요셉은 고센을 통치하던 히브리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리라 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 노예가 재무장관이 될 수 있었겠는가.....

고고학자 타베트 박사는

"요셉의 이름은 동전에 두 가지의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다"면서

"하나는 그의 원래 이름인 `요셉'으로, 다른 하나는 파라오가 재무장관이 된

그에게 선사한 이집트식 이름인 `사바 사바니'"라고 ....

[2]

이 때에 요셉은 애굽인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창 39:4)가 되었다.

그러나 무고(誣告)를 입어 투옥되었다(창 39:20).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기원전 13세기쯤의

애굽의 세티 Ⅱ세(Seti Ⅱ) 때 기록된 파피루스(d' Orbiney)에

두 형제 아누비스아와 바티스 (Anubis and Bitis)이야기에서

다른 형태의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요셉은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창 40:1-23)을 만나게 된다.

이 두 직분은 애굽어를 히브리어로 풀어서 쓴 것이다.

그것은 당시에 실제로 있었던 궁중 관리의 직분이었음이

애굽의 고대 문서에서 확증되었다.

감옥의 총무가 된 요셉은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였다.

꿈 이야기에서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위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각종 구운 식물이 있다."

(창 40:16, 17)

이 설명 역시 고대의 애굽 무덤의

모형 목각에 뚜렸이 나와 있어

성경의 기록을 입증하고 있다.

요셉은 2년의 옥중 생활 끝에 총리직과 아울러

"곡식 창고장"까지 겸하는 중책을 맡게 된다(창 41:40).

이러한 직책은 당시의 직분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요셉과 관련된 수레(또는 병거)와 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기원전 18세기 중엽에

힉소스 족들이 애굽에 쳐들어오기 전에는

병거나 말을 타는 습관이 소개되지 않았다.

이것은 힉소스의 시대인 것을 분명히 입증한 것이다.

요셉은 애굽인 파라오가 아닌 이스라엘과 같은 셈족인

힉소스 민족이 애굽을 통치할 때 그 파라오 밑에서 총리를 지낸 것이다.

바로가 요셉에게 지어 준 애굽 이름인 "사브낫바네아"(창 41:45)는

당시에 통용되었던 인명이었다.

근대의 애굽 발굴물 중에서 이 이름이 드러났다.

총리와 곡물 총 책임자가 된 요셉은

7년의 풍년기 동안 전국의 곡식을 창고에 저장해 두었다(창 41:46-49).

기원전 15세기에 속하는 고대 애굽의 수도인 테베의 한 무덤의 벽화에서

추수한 곡식을 기록하는 관리들의 그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어

이 사실을 입증시켜주고 있다.

요셉이 섬기던 힉소스 족속의 파라오는

제 16왕조에 속한 키안 또는 카안(Khian 또는 Khayan)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이름이 애굽의 상형문자로 쓰여진 것이 발견되었다.

[3]

7년 대풍년에 이어 7년 대흉년이 이집트와 팔레스틴 전역에 극심해 졌다.

이에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두 차례에 걸쳐

요셉의 형제들에게 귀한 예물을 주어

이집트 총리를 방문하여 양식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창 42, 43장).

야곱의 열 아들들은 이집트에 도착해서

총리가 된 이복 아우 요셉을 몰라 보고

그 앞에 예물을 드리고 엎드려 절한다(창 42:6, 43, 26).

이러한 사실은 기원전 15세기 테베에 있는

세벡-헤텝의 무덤 프레스코 벽화에서 그 가능성을 볼 수 있다.

그 벽화에는 팔레스틴(시리아 지방)에서 온 셈족계 아시아인들이

그들 땅의 예물들을 손에 들고 이집트 궁전에 와서 바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요셉의 형들의 당시 사건이 사실임을 입증한다.

[4]

야곱은 애굽에 와서 17년을 살았으며 147세에 죽어 장사되었다(창 50:1-3).

야곱의 장례법은 그 당시의 애굽의 장례법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요셉의 "수종의사"(창 50:2)가 나오는데

당시 애굽에는 고도의 의술을 가진 의사가 있었다고 희랍의 기록에 나온다.

요셉은 야곱의 시체에 "향 재료를 아비의 몸에 넣게" 했다.

그것을 넣는데 40일이 걸렸다는 것은

당시 애굽의 특수 장례법, 즉 미이라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애굽의 초기 역사에는 향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시체를 그저 말려서 처리했다.

제 11, 12 왕조와 힉소스 통치 때에는 처리방법이 발달해서

시체를 소금과 천연 탄산소오다로 처리했다.

죽은 사람의 내장을 제거하고 그곳에

고무진이나 방부제를 채워 넣는다(창 50:2, 3).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전신을 붕대로 감고 미이라 모양을 만들었다.

그 후에 한 개 또는 그 이상의 나무 상자에 넣고 난 후에

다시 2-3개의 직사각형 나무관 속에 넣어

바위를 깎아 만든 굴무덤에 장사했다.

무덤에 장사할 때 그가 평소에 쓰던 물건들도 함께 넣었다.

미이라를 만드는 데 40일이 걸렸고,

애굽의 습관대로 70일을 울었다.

요셉도 110세에 죽은 후에 같은 방법으로 장례를 치루었다(창 50:26).

이와 같은 기록은 당시 애굽 장례 풍습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신계훈, 조대연, 고고학과 성서배경, 59-62 참조).

[5]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생활

기원전 18세기 중엽에 셈족 계통의 아시아인들인

힉소스족들은 애굽을 침공하여 14왕조를 무너뜨렸다.

애굽은 약 150년간(1720-1570 BC) 이 민족의 의해 다스려졌다.

이 기간 동안 요셉 덕분에 기근을 피해 이민 온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일강 삼각주 동쪽의 고센 땅

지금의 와디 튜미랏(Wadi Tumilat)을 차지하여 번영을 누렸다(창 47:6).

그러나 요셉이 죽고 얼마 후 애굽에서는 대정변이 일어났다.

당시의 힉소스 왕, 파라오 아포피스(Apophis)가 애굽인으로서

테베의 지방 장관이였던 세켄레(Sekenre)를 죽인 사건을 계기로

그 아들들에 의해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형 카모세(Kamose)에 이어 동생 아모세(Amose)가

힉소스 왕국의 수도 아바리스를 빼앗았다.

힉소스족은 150여년 만에 애굽에서 쫓겨나서

남부 가나안 사루헨(수 19:6)에서 버티다가

애굽 군대에 의해 포위 3년만에 패망하였다.

이 기록은 애굽왕 아모세의 부하 군인 중의 하나인

왕의 이름과 같은 장교 아모세가 자기가 독립 투쟁에 참가해서

공을 세운 기록을 네갑에 있는 자기 무덤에 글로 써 둔 것을

거의 4000년만에 발굴함으로써 밝혀졌다.

그는 독립 투쟁에서 세운 공로로

왕에게서 받은 19명의 노예들의 이름을 무덤 비명에 써 놓았다.

그 중에는 히브리인들을 포함한 셈족의 이름이 있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취급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애굽의 독립 전쟁에서 성공한 제 18왕조는

힉소스 시대에 번영을 누렸던

이스라엘 자손을 미워하고 보복하기 시작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 1:8)은

파라오 제 18왕조를 가리키는 역사적인 표현으로

성경 기록과 완전히 일치한다(상동, 63).

4. 힉소스(Hyksos) 라고 불렸던 히브리 족장들 ... (2)

2006.03.22 07:54 | 바이블-고고학 | 제임스강

http://kr.blog.yahoo.com/cocolandkr/376

요셉과 힉소스(Hyksos),그리고 이집트 - 1

1. 크눔호텝3세 무덤의 힉소스 벽화 :

기원전 1900년경

12왕조 당시 영주였던 '크눔호텝'의 무덤에는

37명의 힉소스들이 눈 화장품을 팔러

이집트를 방문했음을 보여주는 벽화가 있다.

그들은 가나안지방 출신으로 요셉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채색옷과 독특한 수염 때문에

이집트인들과는 쉽게 구별된다.

2. 베니 하산의 바위굴 무덤 :

중부 이집트에 위치한 베니 하산(Beni Hasan)에는

중왕국시대인 11~12왕조의

바위굴 무덤 39기가 절벽 중턱에 있다.

3.야곱(야쿱~헤르)의 스캐럽 도장 :

창세기의 야곱이라는 이름과 같은

`야쿱~헤르'가 새겨진 스캐럽 도장이

1969년 이스라엘에서 발견됐다.

기원전 1750년 경의 것으로 밝혀졌다.

(하이파 박물관 소장·왼쪽).

이것과 거의 같은 스캐럽 도장이

1930년대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이집트의 파라오를 표시하는

타원형의 테두리가 있다.

(베를린의 이집트박물관 소장)

5. 힉소스(Hyksos) 라고 불렸던 히브리 족장들 ... (3)

2006.03.30 09:09 | 바이블-고고학 | 제임스강

http://kr.blog.yahoo.com/cocolandkr/398

[1]

우리는 성서를 통해 이집트가

예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피난처가 되어왔음을 알고 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가족은

가나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아 기근이 들자

물이 풍성한 이집트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고,

신약시대 예수의 가족은

헤롯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도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예로 팔려갔다가 총리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른 요셉이야말로

이집트의 성서적 배경을 가장 잘 나타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중세 이후 이집트를 여행했던 유럽인들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요셉의 곡식창고'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으로부터 흘러나와

저지대인 파이윰 오아시스의 호수로 흐르는 하천을

아랍어로 `바흐르 유셉',즉 `요셉 하천'이라고 부른다.

[2]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했다기보다는

무력으로 이집트를 점령했다는 사실은

신약시대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한 작품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당시 이집트의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매우 번성했다.

그 도시의 아피온이라는 한 이집트인이

'유대인들에 대항함'이라는 글을 통해,

출애굽 당시 유대인들이 문둥병자들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로부터 쫓겨났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서는

금으로 만든 당나귀를 만들어놓고 숭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치욕적인 비난에 대항해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을 발표했다.

그는 그 글에서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를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이 한때 이집트를 통치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유대인을 옹호하거나 반박하는 모두가 인용했던

마네토라는 인물은 기원전 3세기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으로서

이집트의 역사를 그리스시대까지

모두 30왕조로 나누어 저술한

이집트 최초의 역사가였다.

비록 그의 역사책 원본이 남아있지 않고

요세푸스에 의해 부분적으로 인용됐을 뿐이지만,

힉소스라 불리는 이방민족이

다름아닌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그의 저술은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에 의하면,

힉소스 민족은 북쪽에서 쳐들어와 많은 도시들을 불사르고

신전을 파괴했으며 이집트민족을 학살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멤피스를 점령해 수도로 삼았다가

아바리스라는 도시를 건설했고,

나중에 이집트에서 쫓겨날 때는 그들의 재산을 모두 가지고 나가서

유다 지방에 예루살렘이란 강력한 요새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3]

1824년 영국의 윌킨슨(G.Wilkinson)은

이집트 중부지방의 한 유적지인 베니 하산에 들러

절벽 중턱에 만들어진 바위굴 무덤들을 조사했다.

모두 39개나 되는 무덤의 주인들은

대부분 중왕국시대인 11왕조와 12왕조시대의

지방 영주와 귀족들이었다.

그 중에서 `크눔호텝'이라 불리는 한 영주의 무덤 벽에는

농사짓는 모습과 사냥하는 장면,

다양한 동작으로 두 사람이 레슬링을 하는 모습 등

당시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이 매우 생동감있게 표현돼 있었다.

그는 벽화 중에서 이집트인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독특한 턱수염이 있고 화려한 무늬로 짜여진

통치마를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주목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산양 한 마리를 붙들고 있었으며,

그의 이름은 힉소스 `아비샤'로 기록돼 있었다.

또 그림의 위쪽에는 `37명의 힉소스들이

눈 화장품을 팔기 위해 이집트에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윌킨슨은

그들을 통해 아브라함을 비롯해 창세기에 등장하는

히브리 족장들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무덤은 기원전 1900년경 건설된 것이므로

어느 정도는 연대상으로도 가능한 추론이었다.

비록 이름은 다르게 나타났지만,

이집트의 한 무덤벽화에서 히브리 족장들을 연상시키는

가나안 출신 유목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3]

히브리 족장들 중의 하나인 야곱은

`스캐럽'이라 불리는 이집트의 도장에서

그 이름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최고신은 태양신 - `라'였다.

이른 아침에 짐승의 똥을

공처럼 둥글게 뭉쳐서 굴리고 가는 말똥구리를

그들은 태양신의 운반자로 여겨

풍뎅이 형상의 부적을 만들었으며,

도장에 새겨서 반지에 끼고 다녔다.

1930년대 예루살렘에서 수집돼

베를린의 이집트박물관에 소장된 한 스캐럽에는

`야쿱~헤르'라는 이름이

파라오를 의미하는 타원형 테두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1969년 이스라엘의 항구도시인 하이파 근처

쉬크모나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스캐럽에도

상형문자로 분명하게 `야쿱~헤르'가 표기되어 있었으며,

베를린에 있는 것과 거의 같은 모습이었다.

함께 출토된 토기들을 통해 그 무덤의 주인공인

야곱이 기원전 1750년 경의 인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또다른 스캐럽에는

이집트 15왕조의 파라오임을 증명하는 표시와 함께

야곱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그는 힉소스 왕조의 2대 왕으로서

기원전 1600년 경의 통치자였다.

그 조그만 도장들을 통해 야곱은

당시 가나안의 왕족들에겐 흔한 이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900년 경의

화려한 채색 옷을 입은 아비샤를 비롯한 37명의 힉소스들과

이스라엘 항구도시에서 발견된

기원전 1750년 경 한 도시의 왕이었던 야곱,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했던

기원전 1600년경의 파라오 야곱 등은

모두 창세기의 족장들을 역사적으로 조명해주는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들이다.

이집트 역사에서

힉소스라 불렸던 히브리 족장들은

파라오로서 1백여년간 이집트를 식민통치했다.

따라서 이제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자들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힉소스(Hyksos)의 이집트 지배

2009.12.31 01:12 | 바이블-고고학 | 제임스강

http://kr.blog.yahoo.com/cocolandkr/4155

힉소스 역사 이야기를 읽어보면 ....

번영하던 이집트의 중왕국(12,13왕조)이 갑자기 세력이 약해지면서

지방 통치자들의 분할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 때에 힉소스(Hyksos; 목자 왕들, 이국의 통치자)라는

셈족으로 이루어진 민족이 아시아 팔레스틴 쪽에서

새로운 활과 말이 끄는 전차 등 신무기로 무장한 병거를 몰고 쳐들어 왔다.

이집트의 두 왕조(15,16왕조)는 가나안에서 쳐들어온

힉소스라는 이민족에 의해 통치되었다.

후에, 살리티스는 멤피스를 장악하고 힉소스 첫 파라오가 되었다.

그때가 기원전 18세기 중엽으로

하-이집트로 부터 대략 150년간 -1720(1663)-1570(1555)BC - 통치 하였다.

그때 그 틈을 타 묻어온 많은 집단의 족속들이 있었다.

힉소스가 이집트를 정복할때 많은 힘을 실어 준 집단이 있었다.

그 집단이 훗날에 히브리 노예로 ...

이스라엘 민족으로 불리워 졌다고 한다 ...

힉소스족은 그들은 수도를 동부 아바리스에 정하고

이집트와 서부 아시아를 다스리며 힉소스(Hyksos) 왕국을 세우고

파라오로 군림하게 된다.

기원전 1640-1530년에 나일강 델타 지역에 세워진, 아바리스는

힉소스 왕조의 지배층은 가나안에서 이주한 가나안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이룬 왕국은 위 처럼 이집트에서 세워진 최초의 외국인 왕조로 유명하다.

이집트인들에게는 이 외국인 국가 경험이 후대 역사에서 "트라우마"로 작용해

'가나안인들에 대한 끊임없는 봉쇄정책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한편, 15왕조 파라오는 힘을 실어 준 집단을 위하여

이집트 델타 지역 동부지역인 "고센'땅을 주었다고 한다..(협정,조약)

검은빛을 띠고 있는 비옥한 토양이라 그들은 풍요를 즐기며 살았다고 한다.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인들을 전투에서 치는 장면

그때 까지는 노예로 살고 있지 않고 있었지만,

남쪽에 밀려서 테베를 거점으로 모여 살던 이집트 원주민들의 왕

아흐모세 1세(Ahmose I, "달이 태어난다")는

힉소스의 16왕조를 다시 쫓아내고 ,17왕조를 세워

그 이집트 파라오 치하에 들어 가면서 부터 히브리인(편의상 불렀음) 들은 물론

이집트 원주민을 제외한 노예로 삼기 시작했다.

요셉은 고센을 통치하던 히브리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리라 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노예가 파라오의 재무장관이 될 수 있었겠는가.....

고고학자 타베트 박사는

"요셉의 이름은 동전에 두 가지의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다"면서

"하나는 그의 원래 이름인 `요셉'으로, 다른 하나는 파라오가 재무장관이 된

그에게 선사한 이집트식 이름인 `사바 사바니'"라고 ....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기원전 13세기쯤의

애굽의 세티 Ⅱ세(Seti Ⅱ) 때 기록된 파피루스(d' Orbiney)에

두 형제 아누비스아와 바티스 (Anubis and Bitis)이야기에서

다른 형태의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Seti II replica stat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