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9) Union Christ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3:27

(9) Union Christ

 

(세례 ‘밥티조’는 어떤 외부의 영향으로 영구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세례’‘밥티조’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예수 안에다 우리를 넣어버리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보십니다.  성경은 복음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환난은 결국 소망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에 환난이 올 때 ‘아, 난 정말 그리스도인이구나.’하고 자랑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천국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이 세상을 살아내면 세상은 그 꼴을 도무지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져 주고,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면 그들은 반성을 하거나 존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얕보고 더 밟아 버리는 세상의 힘의 원리로 우리 성도들을 대하기에 그 것은 우리들에게 환난이 되는 것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는 아버지에 대한 신앙고백이 하나입니다. 바른 교리 아래서 바른 아버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형제 됨의 유일한 근거는 바른 교리입니다. 바른 교리 아래서 바른 하나님을 고백하는가? 그 것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계1:9-10)

9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형제요 예수 안에서 환난과 그 나라와 인내에 여러분과 더불어 참여한 사람인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한 탓으로, 밧모라는 섬에 갇혀 있었습니다.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 안에서 내 뒤에서 나팔과 같이 울리는 큰 음성을 들었는데

 

이제 8절까지 요한 계시록의 서론이 끝나고 요한은 본격적으로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2장부터 써내려 갑니다. 그전에 1장9절부터 20절까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를 합니다. 9절에서 요한은 먼저 교회에게 자기의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소개를 합니다. 이 것은 단순히 요한의 소개일 뿐 아니라 바로 ‘성도란 누구인가?’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본문9절에 있는 ‘예수의’라고 번역이 된 ‘엔 크리스토’는 원래 ‘예수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예수의 환난과 예수의 나라와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하면 생각나는 교리가 있지요? 바울 신학의 백미‘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christ’입니다. 이 ‘union christ’(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잘 이해하시면 오늘 본문은 저절로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해되지 않으면 이 요한 계시록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만 한군데만 찾아보겠습니다.

 

(롬6:3-5)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죽었고 장사되었고 다시 살리심을 받아 부활을 했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면서 ‘세례’를 이야기합니다. 세례에 대해서는 우리가 자세하게 공부를 한바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이해를 위해 잠깐 복습을 할까요?

여러분은 지금부터 물을 뿌리거나 물에 잠그는 세례는 다 잊으세요. 그러한 물세례 의식은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의 표시이듯이, 성령 세례를 받은, 거듭난 자들의 상징적인 의식이며 선포일 뿐입니다. 카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례 안 받고 죽으면 지옥 가느냐? 천만에요, 세례 안 받아도 하나님의 백성은 천국 갑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례는 다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세례’ 라고 번역이 되는 헬라어의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밥토’ ‘물에 푹 담그다’라는 말과 성경에 나오는‘밥티조’ 라는 두 단어입니다.

‘밥티’“는 단순히 물에 담그는 행위가 아니라 어떤 수단에 의해서 일어나는 변화 즉, 어떤 방법을 가해서 사물의 본질이나 성격이 변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헬라 사람들이 피클 만드는 방법을 써 놓은 책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피클을 만들 때 오이를 끓는 물에 담그고 (밥토) 식초용액에 영원히 담가야 한다(밥티조, 영구적인 변화)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세례(밥티조)는 물에 담근다는 의미보다는 담가서 변화된다는 것에 더 강조점이 있은 것입니다.

세례 ‘밥티조’는 어떤 외부의 영향으로 영구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세례’‘밥티조’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례와 union christ를 좀 더 쉽게 설명을 한 구절이 있습니다.

 

(고전10:1-4)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보세요, 홍해를 건넌 것을 성경은 이스라엘의 세례로 표현을 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세례가 단순히 물에 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넜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면서 신발도 젖지 않았습니다. 정작 홀랑 젖은 사람들은 애굽 군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 고린도 전서10장 에서 이스라엘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 왕의 노예로 있다가 홍해에 빠져 그 애굽 왕의 종들은 다 죽고 홍해를 건넌 후에는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 속하여 하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살아 올라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셔서 사랑하는 종 모세를 건져  내시면서 이스라엘을 그 모세 안에다가 넣으셔서 그들을 모두 모세로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의 실존은 불가능하고 불순종하는 애굽의 종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모세를 통해서 보시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겨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들이 여전히 불가능하고 불순종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안으로 던져 넣으셔서 의로운 예수로 여겨서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예수 안에다 우리를 넣어버리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는 분명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부활 한적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킨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예수 님 안에 넣으셔서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산 것처럼 여겨 주십니다. 말이 안 되지요? 그래서 성경은 복음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 실감하고 지각한 사람들은 그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신학에서는 그러한 것을 내포적 대신 ‘inclusive representative' 라고 합니다. 로마서로 가서 조금 더 자세하게 이해를 해 보지요.

 

(롬6:8-11)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11절의 ‘여길 지어다’는 헬라어로 ‘로기 조마이’입니다. 그 단어에서 reckon 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입니다. 그 말은 그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겨 주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갈3:27)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성령에 의해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은 이제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접붙임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나무 가지를 잘라서 다른 나무의 표피를 가르고 거기에 붙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접붙임을 한 나무 가지는 이내 그 나무와 한 몸이 됩니다.

그 가지는 이제 그 나무와 모든 생명의 현상을 같이 하게 됩니다. 같이 바람에 흔들리게 되고 같이 꽃을 피우고 같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나무가 죽으면 같이 죽게 되고 그 나무가 땅에 묻히면 함께 묻히는 것입니다.

(롬11:17)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우 리가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께 접붙임이 되면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함께 죽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함께 부활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실 때 우리는 함께 그 곳에 앉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갈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만 연합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든 부분에 연합된 것입니다.

그 삶이 어떤 삶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환난의 삶을 살다 가셨습니다. 배신과 따돌림과 조롱과 핍박을 당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그도 예수님과 똑같은 환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포악하기로 악명이 높은 도미티안 황제 때 사도 요한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밧모 섬에 유배를 가서 그 열로 한 나이에 광산에서 부역을 했다고 합니다. 환난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로서 ‘예수 안에서’ 그 환난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환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뜰립시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억압’‘압제’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tribulation’입니다. 라틴어로는 ‘triblum’ 탈곡기라는 말입니다. 고대의 탈곡기는 아래에다 홈이 나 있는 철판을 깔아놓고 위에서 빗살무늬의 철판으로 비비는 것이었습니다. 성도의 환난은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다 면 여러분도 바로 그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시게 됩니다.

 

(요16:33)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행14:22)

22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딤후3:11-12)

11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고후1:5-9)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계2:8-10)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 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7:13-14)

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게 되어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환난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5:3-4)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을 합니다. 우리가, 환난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3절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는 구절을 보세요. 거기서 즐거워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카우카오마이’입니다. 이 말은 ‘자랑하다, 뽐내다’의 뜻입니다. 신자는 환난을 자랑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환난을 자랑할 수 있게 될까요? 이유가 4절에 나옵니다.

‘~을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알기 때문에 환난이 자랑이 됩니까?

그 환난이 인내를 이루고 인내가 연단을 이루고 연단이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환난은 결국 소망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에 환난이 올 때 ‘아, 난 정말 그리스도인이구나.’하고 자랑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3절에서 환난이 인내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내’‘휘포모네’라는 말은 단순히 ‘꾹 참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휘포모네’는 정절을 지키며 변치 않고 어디에 굳게 서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신자에게 있어서 환난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굳게 서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성령에 의해 거듭난 신자는 환난을 당하면서 힘들어하는 자신을 보면서 ‘난 정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있지 않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이 세상에서 정말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안 계시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환난은 새로 거듭난 자기 안에 공존하는 죽을 몸, 옛 성품을 자꾸 쳐서 약화시켜줍니다. 그렇게 우리는 환난을 겪으면서 육신을 약화시키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고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휘포모네’ 환난이 인내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욥42:5)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환난을 통과하고 욥이 한 말입니다. 환난은 우리 신자들을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욱 굳게 서게 만듭니다.

 

그리고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연단(단련)이라는 말 ‘도키메’는 ‘어떤 목적에 부합하도록 질이 검증된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철도를 만들 때 철로에 쓰일 쇠를 만들 게 됩니다. 그 쇠는 철로로 깔리기 전에 수십 톤짜리 하중을 견딜 수 있는지 미리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검증을 받아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철로에 쓰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환난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인내는 그를 검증된 자로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단’‘도키메’는 우리의 소망을 더욱 구체적으로 붙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 신자는 환난을 ‘자랑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 진리를 이렇게 동일하게 설명합니다.

 

(약1:12)

12        시험(페이라스모스)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연단)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니까 환난은 우리의 소망을 굳게 붙들게 만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환난이 올 때 ‘신자들아 기뻐하라’하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도 동일한 명령이 나옵니다.

 

(약1:2)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벧전4:12-13)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페이라스모스)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의 삶에 환난을 허락하십니다. 말려주지 않으십니다.

 

(빌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고난을 없애 주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들 원하는 것 다 들어주겠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변치 않는 평강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환난은 그러한 유익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환난이 필연적이냐 하면 우리는 세상과 원수인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9절 후반부를 보시면 사도 요한이 왜 밧모 서에 유배를 당하는 등의 환난에 처하게 되는지가 확실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계1:9)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왜 밧모 섬에 귀양을 가게 된 것입니까? 왜 요한이 환난을 당하고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입니다.

우리도 전에 그랬습니다만 아담의 후손으로 오는 죄인들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자들을 당연히 못 마땅히 여깁니다. 모두가 한 통속이 되어서 죄를 짓고 있는데 어떤 무리가 그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환난과 핍박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상이 그들을 가만히 둘 리가 없지요.

 

(계20:4)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사람들은 목 베임을 받는 것과 같은 고통에 던져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환난에 동참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도 동참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해서 우리는 그 나라에 동참해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6절을 공부할 때‘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에서 쓰인 ‘포이에오’가 과거 시제라고 했지요?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하나님 나라로 지어져 가고 있고 앞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골1:13)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약2:5)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 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우리는 이렇게 이미 하나님 나라에 동참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자체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제 Made in Heaven이 된 것입니다.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난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하나님 나라에 동참한 자들에게 환난과 참음이 요구됩니다. 이 구절만 보아도 후 천년설과 전 천년설 주의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을 은 환난도 없고 시험도 없는 천년 왕국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땅에서 그 나라에 동참한 자들에게는 환난과 참음이 요구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교회시대가 바로 천년왕국입니다. 그 천년 왕국은 환난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천년왕국을 ‘대 환난 기’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니까 혹자들이 말하는 7년 대 환난 기는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시110:1-2)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면서 그 주님은 ‘원수 중에서 다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원수들 사이에서 천국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천국의 삶임과 동시에 악의 무리 속에서 견뎌내야 하는 환난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이 세상을 살아내면 세상은 그 꼴을 도무지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져 주고,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면 그들은 반성을 하거나 존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얕보고 더 밟아 버리는 세상의 힘의 원리로 우리 성도들을 대하기에 그 것은 우리들에게 환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이 땅을 살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원리로 통치되어지고, 그 십자가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하여 사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그 하나님 나라는 가시적으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성도들입니다.

나라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도 아니고 영토도 아니고 누가 다스리느냐? ‘통치권’ 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을 살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순종하기를 노력하는 자들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그 통치에 순종하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원수들, 대적들이 함께 공존합니다. 그래서 그 통치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사는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들이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가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그들은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인내하며 각인의 눈이 그 나라를 볼 수 있는 바로 그 날을 기다립니다. 이게 바로 사도 요한이 9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그 분의 환난에 동참하고 그 나라에 동참하며 예수님의 참음에 동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만 연합이 된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와도 연합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한 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피가 흐르고 한영을 소유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너희의 형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는 피를 나눈 자를 말합니다. 한 아버지를 둔 한 핏줄입니다. 한 맏형을 둔 피붙이입니다.

 

(롬8:29)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우리 맏형이십니다.

 

(히2:11-12)

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그러니까 교회는 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교회라는 곳에서 섬기는 하나님은 참 여러 종류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교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는 아버지에 대한 신앙고백이 하나입니다. 바른 교리 아래서 바른 아버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형제 됨의 유일한 근거는 바른 교리입니다. 바른 교리 아래서 바른 하나님을 고백하는가? 그 것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한 형제입니다. 한 핏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가 오버랩 되어있는 교회시대를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과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함께 어우러져 살아나가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또 하나의 가족이 있습니다. 이 가족은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가족입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진짜 여러분의 형제들 자매들입니다.

 

(고전12:25-26)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이렇게 우리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신자가 거듭날 때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께서 죽은 영을 깨워 놓으셔야 합니다.

두 번째로 그 영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야 합니다. 말씀이 들어가 생명이 잉태됩니다.

세 번째로 그 잉태된 새 사람은 자라야 하는데 어디서 자랍니까?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느끼지 않으세요?

교회가 모일 때 여러분은 자라나게 됩니다. 열심히 모이기를 힘쓰세요. 그래서 성경도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를 나눈 형제들이 자매들이 서로를 아껴주고 격려하고 조언해주며 서로의 시금석이 되어주고 하면서 자라 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영적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직 가시적으로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반드시 속히 올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인내하며 참아야 합니다. 흔들리시면 안 됩니다.

 

(마10:22)

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8:24-25)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

(계3:10)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잘 참으세요. 잘 견디세요. 예수께서 이기셨습니다. 우리도 이길 수 있습니다. 아니요, 반드시 이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계신 여러분, 정말 그 나라 백성답게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사십니까? 그 통치에 순종하느라 환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그 환난을 당하면서 ‘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이구나.’하면서 그 환난을 자랑하고 계십니까? 힘들지만 소망을 바라보며 잘 참고 계십니까? 정 힘이 드시면 옆을 보세요. 여러분의 형제들이 자매들이 그렇게 잘 참으면서 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보며 힘을 얻으세요.

 

 그리고 여러분도 환난 속에서 다른 형제들에게 사도요한처럼 이렇게 외치세요.  ‘나 김 성수는 여러분의 형제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환난과 그분의 나라와 그 분의 참음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느라 이렇게 힘겹게 세상과 싸우고 있지만 저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늘 은밀하게 교제하며 환난 속에서 오히려 그분의 힘찬 응원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 말씀을 사랑하는 여러분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형제인 요한이 오늘 우리에게 하는 말씀의 요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