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35) 아버지께 나아감 (엡2:14-18)

은바리라이프 2013. 10. 4. 18:43

(35) 아버지께 나아감

(엡2:14-18)

14(왜냐하면)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지난 수개월 동안 1장 후반부부터 “믿는 우리를 향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에 대해서 사도의 진술을 따라 공부해 오고 있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에 대해 우리가 알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킵니다. 하나는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자들이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절대 살아날 수 없음을 우리에게 주지시키면서 사도는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사도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있었던 높디높은 담을 하나님께서 그 분의 능력으로 허물어 버리셨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합니다.

지난주에 공부했던 부분이지요?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도 없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이었고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던 자들이었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다” 고 진술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설명합니다.

그리고는 14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거기에 개역 성경에는 빠져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가르” “왜냐하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13절까지에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하나로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을 기술하고 거기에 대한 원인, 이유를 14절부터 기술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예수 그리스도는) 화평이시기 때문이다”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밝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평의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서 이방인과 유대인, 잘난 자와 못난 자,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별을 없애버리시고 그들 사이에 있는 긴장감과 두터운 벽을 헐어버리시고 화평과 평화를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절에서 13절까지에서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자들이었고 그렇게 죄 속에 묻혀있는 자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분열이 있게 마련인데 14절, 화평의 하나님께서 그 크신 능력으로 그 둘 사이의 분열을 종식시키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열시켰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분열시켰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을 원수 관계에 놓습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적인 국면입니다.

오늘 날 여러 국가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자주 만나고 회담을 하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4자 회담, 6자 회담 이런 것을 왜 하는 것이죠? “평화롭게 살기”위해서입니다.

평화를 지키자는 것이죠. 서로 화해하고 전쟁을 없애고 사이좋게 살자는 것입니다. 왜 그런 회담을 일부러 해야 하지요? 인간은 생래적으로 자기와 다른 자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 세계는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터입니다. 여러분, 전쟁이라는 것을 잘 생각해 보세요. 영화나 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 전쟁이야기를 많이 들 보셨을 겁니다. 승리를 하던 패배를 하던 전쟁 당사자들은 결과적으로 보면 아무 이득이 없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미친 짓들을 하는 것입니까? 전쟁은 그야말로 미친 짓이에요. 인간의 죄악이 가시적으로 표현이 된 것 중에 가장 극치의 미친 짓입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다른 이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죽이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이 뭡니까? 교만과 이기적인 자기애입니다. 모든 전쟁은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커다란 전쟁 말고도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작은 전쟁들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포탄과 탱크만 없지 파괴력은 동일합니다. 죄인들은 그들의 말로 행동으로 다른 이들을 암암리에 공격하고 죽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적대적인 죄인들에게 찾아오셔서 어떤 한 무리를 건져내셨고 그들을 화평케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다른 이웃들과도 화평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개처럼 여기던 이방인들과 하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헬라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야만인으로 여겼던 유대인들과 하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리건대 세계의 지도자들이 아무리 모여서 회담을 하고 회합을 가져도 절대 세계는 평화로워지지 않습니다. 정말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고집스럽고 독한 유대인들을 변하게 만드신 하나님밖에는 평화를 이루실 분이 없습니다. 그 교만하고 이기적인 헬라인들을 변하게 만드신 하나님만이 평화를 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분쟁이 끊이지 않고 평화가 없으신 분들은 회개하세요. 그리고 예수를 바로 믿으십시오. 분명 예수님은 화평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데 여러분은 계속 분쟁 중에 계시다면 그거 뭔가 이상하지 않으세요?

사도는 계속해서 진술을 이어갑니다. 화평 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화평케 하시기 위하여 그들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다고 합니다.

(엡2:14-15)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막힌 담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율법을 가리켜 “원수 된 것“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율법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이요 우리 인간이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는 최선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그 율법은 오히려 인간에게 올무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에게 율법을 주셔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구나, 우리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려 했는데 유대인들은 그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면서 자기들만이 선민이라고 거들먹거리면서 다른 사람들을 원수로 대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가 자세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자기가 제물이 되셔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시고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심으로 그 율법을 완성을 시켜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구원이 유대인들만 지키던 율법과 제사를 통해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른 이방인들에게도 유효하게 만들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둘 사이를 원수로 만들었던 율법은 예수님의 몸으로 인해 폐하여 졌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평이신 주님은 원수 되었던 율법을 몸으로 폐하셨을 뿐 아니라 그 둘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창조해 버리셨습니다.

(엡2:15)

15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교회는 화평케 되기 위해서 단순히 그 막힌 담만 헐어내진 것이 아니라 그 분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드릴게요. 대영제국과 미국을 보자고요. 예전에 대영제국 하면 영국본토와 웨일즈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을 다 통틀어 대영제국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각기 국가의 형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족성도 각기 달랐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 각국의 민족들이 모여서 이룬 나라입니다. 이곳 미국에도 영국사람, 이태리 사람, 독일사람, 한국사람, 일본 사람, 멕시코 사람 아주 다양한 민족이 삽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원래의 국적을 포기해야 미국시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 시민은 옛 국적 뿐 아니라 옛 국가에 소속된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이 미국은 여러 민족이 각기 자기 나라의 민족성과 국적을 갖고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미국이라는 나라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담이 허물어진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전혀 다른 사람들로 재창조된 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예수를 알기 전에는 어떤 사람은 부자로 있었고 가난한 자로 있었습니다. 예수를 알기 전에 어떤 사람은 굉장히 잘 난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아주 못 난 사람으로 취급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교회라고 할 때는 그러한 여러 부류의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개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이제 완전히 다른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하고 화평한 새로운 창조물로 다시 태어난 분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서로 차이가 없기에 화평이 가능한 것입니다. 차이가 있으면 늘 질투가 있어요. 그러나 교회는 서로 평등하기 때문에 화평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둘로 한 새사람이 된 하나의 유기체가 된 것입니다. 옛 것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갈3:28)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메튜 헨리의 아버지 필립 헨리의 이야기를 한번 해 드렸었지요? 필립 헨리는 아주 가난한 기독교인이었고 메튜 헨리의 어머니는 귀족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어느 날 메튜 헨리의 어머니가 그의 남편을 자기 부모에게 소개시켜야 할 날이 다가왔을 때 그 메튜 헨리의 어머니 부모님께서 그 메튜 헨리의 어머니에게 물었답니다. 이 남자가 어디서부터 왔느냐? 어디 태생이냐? 고 예의 귀족들이 묻는 질문을 했답니다. 그 때 메튜 헨리의 어머니가 한 유명한 말이 있지요? “나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해요. 그러나 나는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아요.“

이제 어디로부터 나온 옛 사람은 없어졌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고 있는 새 사람만 교회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영원을 향해 가고 있느냐?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가 중요하지 옛 날에 집에 금송아지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아무 문제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자꾸 이 사실을 놓칩니다. 그래서 자꾸 화평이 깨지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에도 그러한 예들이 있었지요?

초대 교회 때의 예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의 잘 못이 뭔지 한번 되짚어 보겠습니다.

초대 교회 때도 교회 안에 출신에 따른 파벌이 있었습니다.

(행6:1)

1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초대교회 안에 헬라 파와 히브리 파가 존재했습니다. 그러니까 즉각 화평이 깨지고 원망이 일어납니다. 헬라 파 히브리 파 뿐 아니라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까지 있었지요? 바울은 그 사실을 개탄했습니다.

심지어 여러분은 가족들까지도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싸우고 갈라선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들의 화평이 깨졌지요?

바나바의 조카 마가 때문입니다. 마가는 그 전 선교 여행 때 낙오한 자였습니다. 바울은 그런 불성실한 자를 데려갈 수 없다고 했고 바나바는 마가가 자기 조카라는 이유 때문에 그를 옹호하고 나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가족이라는 혈연이 개입이 되면 교회는 반드시 분란이 생깁니다. 한국의 큰 교회들에서 담임 목사의 후계자로 제일 먼저 꼽히는 사람이 그 목사의 아들입니다. 물론 그 아들만큼 훌륭한 사람이 없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단지 담임 목사의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에 favor를 받는 것은 분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혈연까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창조물로서의 신분에 자꾸 익숙해 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과거가 여러분을 붙들지 못하게 하셔야 합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눈물이 쏙 빠지게 면박한 사건이 있지요?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는 이방인들과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을 때 베드로는 교회 안에서 이방인들과 먹다가 그들이 오자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교회 멤버들의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여러분의 신앙도 교회의 분열을 초래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과 이제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금이 그어져 있는 것 아십니까? 은근히 자기의 신앙을 재는 사람들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고전8:9-13)

9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신앙의 연륜이 깊은 사람은 오히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더욱더 조심하고 그 약한 사람들이 실족치 않게 배려해야 합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게 실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신앙이 어린 사람들을 위하여 너희는 고기를 안 먹을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번쩍이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교회에는 분열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12:12-26)

12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20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24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25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26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신앙의 연륜이나 은사의 크고 작음이 여러분의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골고루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재물이 많고 적음에 따라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약2:1-4)

1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4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차별을 하게 되면 교회의 화평은 금방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파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신분을 따라 차별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혈연도 때에 따라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빈부로 사람을 나누어서도 안 됩니다. 신앙의 연륜도 교회를 나누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화평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이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화평 이신 예수께서 먼데 있는 이방인들에게 “가까이”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공히 평안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17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공히 평안이 필요했다는 것은 둘 다 죄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서 57장을 인용한 구절이지요?

(사57:19)

19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20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21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약속의 성취입니다. 악인들의 마음속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마치 요동하는 바다와 같다고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바다가 왜 그렇게 요동합니까? 왜 바다에는 파도가 있는 것이지요? 왜 바다는 간조와 만조가 있지요? 그 한 원인은 달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원인은 반대편의 지구의 중심에서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이 두 힘이 바다를 가만있게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변에는 늘 지저분한 미역과 불가사리가 떠다니는 것입니다.

우리 죄인의 마음속에도 그들을 끌어당기는 두 힘이 있습니다. 하나는 양심이라는 우리 안에 흔적처럼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는 죄의 세력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늘 불안하고 쫓기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인들 중 어떤 사람들에게 화평이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평안을 선물하셨습니다. 우리를 끌어당기는 다른 세력인 죄의 세력을 처참하게 죽여 버리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속고 있지요? 아직 이 죽을 몸(사륵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우리의 옛 습관과 경향을 죽여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우리의 새 신분을 자꾸 명확하게 알아가므로 해서 그 요동하는 바다와 같은 속임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평강을 찾아가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이제 그의 진술의 클라이맥스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엡2:18)

18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표준 새 번역)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그 모든 것이 어떻게 결론으로 맺어집니까? 그 모든 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쉬운 말로 하면 이제 우리가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1년에 한번 대 속죄일에만 대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에 이제 수시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 들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가 되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언제든지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사실인지 아세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일의 클라이맥스가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참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그저 나의 필요를 나보다 힘이 센 어떤 존재에게 알리는 것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조르면 장땡인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좀 더 깊고 좀 더 고급한 것입니다. 우리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우리가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속히 안 해 주시는 것이 많습니다.

(눅18:1)

1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이 말씀은 항상 기도를 해도 밤낮 부르짖어도 기도의 응답을 안 해주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도를 하는 데도 아주 무너져 버리게 그냥 방치해 두시기도 합니다.

(요11:1-4)

1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3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그러므로)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께 기도를 합니다. “오셔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를 고쳐주소서”,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바로 안 가시고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하십니다. 그게 무슨 심통이십니까? 왜 바로 가서 고쳐 주시지 않으십니까?

이 요한복음 11장 나사로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장입니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사로의 죽음으로 예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틀을 더 유하시고 나사로가 죽은 뒤 나흘째에 그 곳에 도착하십니다. 당시 랍비들은 사람이 죽으면 3일간 육체 주위에 머문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3일도 지난 나흘째에 간 것입니다.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죽어 있는 시체에게 가신 것입니다. 그 시체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게끔 그가 살아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살아 나오는 것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11:40,43,44)

40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3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이게 기도의 결과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기도가 응답이 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외면하고 무시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성도의 부활의 필연적인 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요구가 들어지느냐 안 들어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이끌어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맞다 면 여러분의 기도가 안 들어 지는 것도 때로는 여러분에게 유익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심으로 우리의 거룩을 만들어 가시고 때로는 기도의 응답을 뒤로 미루시면서 우리에게 기다림과 인내를 가르치시고 때로는 우리의 기도와는 정 반대로 일을 진행시키시기도 하시면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뭡니까? 여러분의 거룩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모든 기도의 응답은 그리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의 기도의 내용도 어떻게 바뀌어야 하겠습니까? 영적인 것을 구하는 기도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영적인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은 모두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일5:14-15)

14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확신은 이것이니, 곧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15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하나님께 구한 것을 우리가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간구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눅11:5-13)

5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6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7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귀찮게 졸라대면(수치를 면키 위하여) 마침내 일어나서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만큼 줄 것이다.

9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0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1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되어 가지고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12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13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친구가 밤에 찾아와서 먹을 것을 대접해야 하는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떡을 좀 빌리기 위해서 이웃 친구를 찾아갑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풍습에서는 친구가 아무리 한 밤 중에 찾아와도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찮을 때도 있을 거란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의 체면 문화에서 친구를 외면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창피한 일이기에 수치를 면하기 위하여 친구는 일어나서 떡을 줄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친구가 아니라 그게 아버지라면 오죽 좋은 것을 주겠느냐? 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조르면 준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에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라는 데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음껏 ‘구하라, 두드려라, 찾아라.’ 하고 기도를 촉구하십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에 맞게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되겠지요?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일단 13절을 보시면 “성령”이라는 힌트가 나옵니다. 영적인 것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친구의 비유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혹시 아세요?

(눅11:1-5)

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5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바로 주기도문에 붙어있는 비유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이 비유를 붙여 놓으신 것은 이러한 기도들은 아버지가 다 들어주신다는 말입니다.

(1)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하나님이 나라가 임하옵시며,

(3)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4)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내일의 양식)“에피우시오스”

(5)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6)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안에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다 무엇에 관한 기도입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본질은 우리가 필요한 무언가를 하나님께 조르는 방법이 아닙니다.

기도의 본질은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더욱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자녀답게 만들어져 가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게할디스 보스는 기도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는 사귐이다. 기도의 참된 의미는 여기에 있다. 기도를 통해 영이신 하나님과 사귀다보면 요청할 때가 있고 침묵할 때도 있으며 찬양할 때가 있는가 하면 묵묵히 하나님과 함께 일 할 때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사귐이며 이 모든 것이 기도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기도다. 이렇게 사귐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점점 더 깊이 참여하게 되고 점점 깊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며 우리는 점점 더 그 분을 닮아가게 된다.” 맞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의 몸과 영혼에 사용하시는 도구이고 우리 편에서 보면 바로 그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사용하는 도구가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믿음 생활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많은 신앙의 행위 중에 가장 강조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 반면에 가장 훈련이 안 되고 오용되고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보좌를 흔드는 기도,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 기도를 정복하라” 이런 책들이 버젓이 서점에서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올라 있을 만큼 기도는 오해되어지고 있고 실제로 오용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만큼 우리의 대적들이 그 진의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기도가 어떻게 오해되어지고 있고 우리는 어떻게 바르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교회의 기도의 관습은 아주 전투적이고 강렬합니다. 세계에서 새벽기도를 계속 하는 교회는 한국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금식기도, 작정기도, 특별기도 같은 것이 그렇게 강조되는 나라도 한국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도가 한국의 교회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john stott 목사님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기자와의 대담에서 “한국 교회는 기도로 부흥했고 기도로 망하고 있다.”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분이 무엇을 보신 걸까요?

그럼 보겠습니다. 창조부터 내려오도록 하지요.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모든 인간의 삶에는 고난이 닥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짓게 되자 그들은 곧 죄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죄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전쟁, 질병, 분 냄, 다툼, 시기, 질투 모든 것이 다 죄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로마서 8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아들들의 나타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모든 피조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피조물은 지금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들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탄식하며 기다리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간에 모든 인간은 기도를 합니다. 자기의 불완전함과 부족함을 충족시켜 줄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입니다. 불교에는 3000배가 있습니다. 탑돌이가 있습니다. 108염주를 돌리며 기도를 합니다. 108번뇌라는 허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서 깨달음을 얻어 우주의 본질인 영원히 불변하는 존재에 합일되어 해탈을 이루게 되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슬람교도들도 기도를 합니다. 그들은 알라신의 계율을 따라서 기도를 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공로가 됩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힌두교에도 기도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원주민들과 인디언들도 어떤 대상에게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갈멜 산에서 엘리야와 대결했던 850명의 이방 선지자들 몸을 상하게 하면서 소리를 지르며 기도를 했습니다, 정 한수 떠놓고 알 수 없는 천지신명께 비는 어머니들의 간구 역시 기도입니다. 무당들이 작두 위에서 간절하게 신을 부르는 행위, 기도입니다. 월드컵 때 대한민국! 외치던 붉은 악마들의 염원, 기도입니다. 광화문 촛불 시위,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서 분신자살을 하거나, 할복을 하는 것, 더 나은 세상 더 많은 자유 함과 평등이 있는 세상을 열망하는 인간들의 염원이 담긴 기도입니다. 모두가 자기 안에 채워지지 않은 만족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종교, 철학, 사상, 이데올로기에도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들의 기도와 다른 종교나 철학, 사상, 이데올로기에 의한 기도가 같아서는 안 되지요? 그러면 뭐가 달라야 하고 뭐가 오해되고 있는지 한번 보자고요.

먼저 그들의 기도는 “인격적인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인들이나 힌두교 인들이 누구에게 기도를 하는 겁니까? 불교인들이 부처에게 기도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긴 요즘에는 불교인들도 부처에게 기도한다고 믿고 있습니다만, 불교는 그게 아니에요. 힌두교도 마찬가지 이지만 그들은 기도의 대상이 없습니다. 막연한 대상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범신론이라 하지요? 해도 달도 별도 벌레도 바위도 다 신입니다. 그 말은 모두가 다 신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슬람교는 이신론입니다. 이신론은 신은 인정하지만 우리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그런 신이 아니라 그 신은 우주를 창조한 후에 저 하늘에 앉아서 자연의 법칙에다가 모든 것을 맡겨두고 있는, 인간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 신입니다. 그들은 그런 비 인격적인 신관을 갖고 있습니다. 더구나 종교의 범주가 아닌 철학이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신에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 강렬한 염원을 담아 소원을 품으면 인간에게는 신념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남북통일, 독도 사수” “주체사상” 이런 것이죠. 그런 신념이 생기게 되면 인간은 그 신념에 대해 헌신을 합니다. 실제로 공산주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헌신을 했습니까? 민주화 투쟁을 위해 분신을 하는 사람들, 바로 헌신입니다. 그들은 목숨을 바치고도 전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도 이런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의 기도는 이렇게 인격적인 대상이 없기 때문에 기계적인 기도가 됩니다. 기계적인 기도가 되면 마치 vending machine에 동전을 넣으면 무언가가 나와야 되는 그런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무당이 굿 발이 서지 않을 때 돼지머리에 돈을 더 끼워 넣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야 신이 오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input이 많으면 out put이 많을 거라 생각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의 기도의 특징입니다. 기도의 행위를 더 적극적으로 하면 결과물이 더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밥을 굶는다든지 몇 년간 말을 하지 않는다든지,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소지 공양, 오체투지 이런 것을 하면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목소리를 크게 하면 더 많은 결과물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눈물을 애절하게 흘리면서 기도하면 더 응답이 잘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과격해 지고 과장되는 것입니다. 기계적인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방 선지자들이 이렇게 기도했었지요?

(왕상18:26-29)

26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여러분 혹시 이런 기도하고 계시지 않으세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기도를 길게 하는 것과 짧게 하는 것 중에 어떤 것에 더 응답을 잘 해주실 것 같으세요? 소리 내어 애절하게 기도하는 것과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입도 안 벌리는 기도와 어는 것을 더 잘 들어주실 것 같으세요? 어떠세요? 우리 기독교 안에 이방 신을 섬기는 자들의 기도의 모습이나 철학이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에 관한 신념의 모습이 많이 침투해 들어와 있지요?

특히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그 역사가 100년밖에 안 되는데다가 불교와 샤머니즘, 무속 신앙이 짬뽕이 되어 혼합적 성격을 띠게 되어 기도가 그렇게 과격해 진 것입니다.

마치 사생결단을 내려서 안 들어주면 죽어 버리겠다는 식의 기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독교의 기도도 인간이 하나님을 어떤 방식으로든 감동시켜서 무엇을 얻어내려고 하는 식의 기계적인 기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감동을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물론 기도에 열심을 내는 것이 잘 못 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사기에서 입다가 “암몬과의 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시면 가장 먼저 마중을 나오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하나님을 감동시켜 승리를 얻어내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에 감동을 받아 이기게 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에게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나중에 그의 딸이 제일 먼저 마중을 오는 바람에 딸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입다가 옷을 찢으며 참담해 합니다. 그것은 객기입니다. 안 그래도 될 것을 괜한 객기를 부리다가 낭패를 당합니다. 우리는 절대 우리 힘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똑같이 아들을 바쳤지만 그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께 자식을 바친 것입니다. 다른 것입니다.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 열심인가를 먼저 확인하세요.

이렇게 죄인들의 기도의 특징 첫 번째가 인격적인 대상이 없는 기계적인 기도라면

두 번째로 그들의 기도는 자기들이 먼저 신을 찾아 부르짖어야 하는 기도입니다. 작두 위에서 춤을 추며 빨리 신이 나와 주기를 열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는 거기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주도권 자체가 기도 자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의 기도의 결과는 기도자의 특별한 정성이나 기도의 형식이나 유창한 말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성이나 우리의 표현 방법의 애절함 등으로 응답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믿슙니다” 왜 그렇게 강한 악센트를 넣으면서 소리치지요? 안 믿어지니까?

왜 “주여, 주여, 주여” 복창하지요?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이 안 믿어지니까?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주여’를 50번 복창하면 의심이 사라진다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그렇습니까? 제가 한창 종교 행위에 열심일 때에 정말 ‘주여’를 있는 힘껏 50번 반복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의심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아득하게 의식이 사라지던데요? 너무 힘을 써서요. 아닙니다. 기도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기도의 응답도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매달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거나 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응답이 온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분은 저 좀 소개시켜 주세요. 그 사람은 아마 예수님일 겁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구한 것만 들어집니다. 어떻게 우리 이 사악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잘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을 우리는 구합니다.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도 응답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사탄이 응답해 주는 것입니다. 사탄은 여러분에게 얼마든지 물질이나 명예로 응답해 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불교 신자나, 이슬람 신자들이 기도를 해도 병이 낫습니다. 누가 들어주는 것입니까? 사탄이 들어주는 것입니다. 예배당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꾸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의 성숙에는 아무 관심 없고, 소원이나 들어주시는 분으로 전락이 되어버리겠지요?)

그런 일을 누가 하겠습니까? 사탄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고 응답이 주어지는 것으로 ‘그 기도가 참된 기도였다, 아니었다.’ 판단을 내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최근 어떤 정치인이 당 대표로 선출 된 후에 절에 가서 108배(拜)를 하고, 카톨릭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했고, 교회에 와서 기도를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자신이 속한 정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해달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보세요. 대상이 누구이든 상관없고 그 대상과 인격적인 관계도 없고 그저 자기의 소원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보궐 선거에서 그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누가 들어 준 것입니까? 부처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러한 한국교회의 기도를 간파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방 잡신을 섬기는 자들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어떤 시간에 어떤 모습으로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을 근거로 그 분 앞에 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금식기도? 그게 뭔지 잘 모르시면 하지 마세요. 그거 잘 못하면 단식 투쟁 되는 겁니다.

예전에 어떤 만화를 보니까 겉으로는 ‘믿습니다.’ 하면서 기도를 하는데 속으로는 “들어 줄래? 안 들어 줄래?”하면서 예수님의 팔을 꺾고 있더라고요. 그게 오늘 날 기독교인들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아주 잘 본 것이지요. 그건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는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1-3절까지의 말씀처럼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자들이었고 이방인의 뜰에서 까치발을 들고도 성소를 바라 볼 수 없었던 자들입니다.

창세기 3장24절에 보면

(창3:23-24)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 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인간이 타락을 하고 에덴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그 에덴은 화염검과 그룹들이 지킵니다.

성막과 성전에서 지성소가 바로 그 화염검과 그룹들이 지키고 있는 에덴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두꺼운 휘장에 금실로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거기는 일 년에 한번 대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도 피를 들고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이 지성소에 들어가 친히 하나님을 뵐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마27:50-51)

50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히10:19-20)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막는 저주의 휘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서 쪼개지고, 찢겨져서 그 휘장을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휘장 안 지성소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알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사정을 아뢰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기도를 하기 위해 앉아서 아버지하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감격에 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 분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까? 아니,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쓸 수 있는 단어였던 “아바”라는 말을 우리에게 쓰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롬8:14)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갈4:6-7)

6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아바 호 파테르” 아빠 곧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기도를 하실 때 기도의 언어를 택하실 때 너무 거창하게 궁중 용어를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분들이 되셨습니다.

이제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이 된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아빠를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빠가 들어가면 전부 붙어 앉아서 무슨 이야기들을 해요. 저희 집에서 저에게는 꼭 한국말을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어눌한 한국말로 재잘 재잘 이야기를 합니다. 솔직히 반은 못 알아들어요. 그런데 제가 거기다 대고 “야, 말 좀 똑바로 해” “어쭈 존대 말 안 해?” 그러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몰라도 다 들어줍니다. 말이 어눌해도 그 아이들이 아빠한테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다 알아요. 그리고 아이들이 이 시점에 뭐가 필요한지도 이미 다 알아요. 그런데도 그 아이들이 무언가 아빠한테 와서 이야기하는 그 자체가 그렇게 예뻐요. 그것이 바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적인 언어입니다. 내용이 뭔지 몰라도 너무 달지요? 그 언어에는 사랑과 신뢰가 함께 묻어있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크면서 부모와 자식 간의 언어가 정보언어로 바뀝니다. 무엇을 설명하고 이름을 붙이고 하는 언어이지요. 좀 더 지나면 설득적 언어로 바뀝니다. 그 것은 누구에게 무엇을 해라, 하지 말라 하는 식의 언어를 말합니다.

자식들이 품안에 있을 때는 엄마 아빠만 바라봅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 분들이 나의 필요를 완전하게 채워줄 것을 믿고 그 다정하고 사랑스런 아빠 엄마에게 가식 없는 언어로 대합니다. 그게 관계 적 언어입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아이들의 정신을 빼앗는 것들이 많이 생기지요? 만화영화 게임 딱지 구슬 장난감 이런 것들에게 정신을 빼앗깁니다. 지금까지 아빠 엄마에게 쏟았던 그 관심과 사랑이 다른 것에 집중이 됩니다. 당연히 관계 적인 언어는 줄어들고 정보언어와 설득적 언어로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에 필요한 것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언어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날 우리가 하는 기도의 언어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실 때 거창하게 “마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말 안 쓰셔도 됩니다.

여러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계시는 여러분의 아빠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새벽 기도에서 어떤 성도님께서 기도를 하시는데 “아버지, 저 힘들어요, 힘들어 죽겠어요, 그리고 무서워요” 이렇게 기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것이 관계 적 언어입니다. 때로 너무 골이 나서 할 말이 없으시면 그냥 골 부리고 앉아 계시는 거예요, 때로 하나님께 삐진 마음, 섭섭한 마음을 드러 내놓을 수도 있어요, 침묵 속에서 감사를 드릴 수도 있고요, 때로는 신음함으로, 때로는 탄식하면서, 때로는 분명한 언어로 심지어 때론 의심도 하면서 내가 느끼는바 내가 원하는 바를 여러분의 가장 자연스러운 언어로 표현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하다가 말이 막히면 당황해 합니다. “아이고, 내가 이거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거 아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대화를 할 때 막히지 않고 좔좔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 사기꾼이 많습니다. 어눌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 안에 그 분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가만 확인이 된다면 괜찮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바른 기도를 할 수 있는가?

여러분 왜 기도를 할 때 집중이 안 되는 지 아십니까? 한 30분만 앉아있으면 생각은 세계를 한 바퀴 돌고 오지요? 마음은 온통 잡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거창한 미사여구로 하나님을 모욕하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서 복화술 하지 마세요. 그런 기도는 시간 낭비입니다. 왜 그렇게 집중이 안 되는지 아세요?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정말 자기 앞에 내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 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은 대화를 할 때 자기 앞에서 누군가가 잘 들어주고 있으면 집중해서 이야기를 잘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데 무언가 열중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미친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기도를 하시려거든 먼저 여러분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대상을 여러분이 확실하게 알고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인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초가 되어있지 않으니까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도 보시면

18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십자가의 복음을 깨달은 자들은 그 안에 성령이 계시고, 그 성령이 계신 자들은 그 성령 안에서 아버지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서낭당에서, 대웅전에서, 작두 위에서, 돼지머리 앞에서 기도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확실하게 살아 계신 것을 믿는 행위입니다. 살아있지도 않은 대상에게 무슨 아뢸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도는 복음을 명확히 알기 전에는 전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하고 의심합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복음을 모르니까 자기가 어떤 신분으로 바뀌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같은 사람의 기도도 하나님이 정말 들으실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명확하게 이해한 자들이 자기의 신분을 알게 되고 “난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 기도의 자리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방법이기 이전에 특권이며 신분의 확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먼저 복음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first part는 여러분이 말씀을 잘 들으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기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기도를 하기 위하여 또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여러분의 감정이 여러분의 영적 가이드가 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감정이 안 따라주면 절대 기도 안 하지요? 그러면 사탄이 계속 여러분의 감정을 가지고 장난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객관적인 시간을 정해 놓으시거나 공동체 안에서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기도하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기도나 예배나 헌금이나 찬양이나 사랑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감정에 따라 하고 안하고가 결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훈련하셔야 합니다.

총 정리를 하겠습니다.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가는데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진정한 나 자신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가시려고 하는 그 목적지를 향해 우리가 기도를 통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많은 어려움을 곤경을 놔두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없으면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고난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부르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장이다.“ 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문제들을 통해서 여러분을 바꾸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게 만드신 후 그의 기도를 통해 그의 내면을 바꾸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보좌를 흔들면 안 됩니다. 우리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를 그렇게 오래 믿고도 변하지 않습니까?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루에 기도를 얼마나 하십니까? 그러니까 안 변하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과 그 말씀에 근거한 기도만이 우리를 바꿉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새겨지고 그것을 activate시키는 것이 기도입니다. 아무리 좋은 약도 먹어야 효험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세요. 여러분의 거룩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