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인간과 죄
(엡2:1-3)
1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과 하나님의 고집과 집념이 어떠한 것인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처지에 있는 인간들을 어떻게 높이셨는가를 기록하고 있고, 이해를 돕기 위해 인간은 도대체 어떤 자들이었는가를 1절에서3절까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구절들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집념과 고집과 그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것인지를 잘 파악해야겠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하버드 대학에 꼭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공부는 안 하고 틈만 나면 TV만 봅니다. TV를 보는데 아버지가 오시더니 “우리 아들 공부 안하고 TV보네, 아버지는 우리 아들이 하버드 대학에 꼭 들어가길 원하는데 , 이렇게 TV만 보면 하버드 못 들어갈 텐데 , 아버지 가슴이 너무 아프다. 다 내가 잘 못 가르친 탓이지 뭐“그러시면서 자기 눈알을 하나 뽑았습니다. 아들이 너무 충격을 받고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충격이 가시자 아들은 또 게을러졌고 이번에는 게임에 푹 빠졌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빠가 아이가 게임 하는 중에 곁에 가서 ”우리 아들 또 게임하네, 그러면 하버드는 어떻게 가지?
다 내 잘못이지 뭐” 그러면서 이번에는 자기 귀를 썩썩 잘랐다고 해 보자고요. 그 아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내가 하버드 대학 못 가면 언젠가 우리 아버지 심장을 꺼내들고 달려들지도 모르겠다.” “애시 당초 놀 생각 말고 열심히 공부 해야겠구나” 그러겠지요.
그 아들은 그 아버지의 집념과 고집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그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하버드에 들여보낼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요?
우리 하나님께서 그러셨다니까요. 우리를 천국에 들여보내시기 위해서 아들을 죽여 버리셨어요.
그 하나님의 집념과 고집과 사랑과 그 일을 이루시는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사도 바울은 2장1절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낮은 곳에서 얼마나 높은 곳으로 올려놓으셨는지를 그리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은 우리에게 4가지 메시지를 준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가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의 상태를 묘사해 줍니다. 어떤 상태지요?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상태.
두 번째로 어째서 인간이 이런 상태에 빠졌는지를 설명하지요. 그것은 원죄와 상관이 있는데 그 원죄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살펴 볼 것입니다. 그 원죄라는 것의 결과로 우리를 다스리는 어떤 세력이 있게 되었고 우리는 그 세력을 좇아 살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죄에 빠진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공중의 권세를 잡은 지금도 역사 하는(에네르게오)악의 원리를 따라 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거기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도 몇 가지 살펴보았지만
세 번째로 이 상태와 조건이 실제적으로 어떤 것을 가져왔는지를 조금 더 공부하고
네 번째로 하나님께서 그런 상태에 있는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공부하겠습니다.
그리고 원죄 론을 들어서 어째서 인간이 이런 상태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죄에 빠져 죽어있는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2절에서 “너희가”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었다“고 에베소 교인들에게 질책을 합니다. 그러나 3절에서 곧 ”우리도“ 라고 이방인 뿐 아니라 유대인도 역시 그 죄에 빠진 사망의 상태에 있는 것임을 천명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류는 불순종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죄는 바로 불순종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에 대한 반역이요 거역을 우리는 죄요, 불순종이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단순히 수동적이고 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능동적이요 적극적이며 활동 적이요 의도적인 것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중간 지대에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를 안 짓고 선을 선택하면서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자유 의지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아담이 가지고 있었던 그 자유 의지는 타락한 이후에 인간에게서 사라졌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안 지을 수도 있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하게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마귀의 손아래에서 눈이 멀어있는 상태입니다.
(고후4:3-4)
3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죄인은 악은 의도적으로 행할 수 있지만 선은 의도적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우주에는 한 악한 정신이 있으며 인간은 그 악한 세력의 종입니다.
더더군다나 그 불순종은 어디서 배운 것이 아니라 “본질상”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3절에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은 “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였다는 것입니다.
(시51:5)
5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우리는 날 때부터 죄 중에 출생합니다.
(롬7:18)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성경은 이렇게 모든 인간은 죄 중에 태어나서 선을 행할 수 없는 상태로 난다고 합니다.
(롬5:12)
12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는데 그 후손들이 모조리 죄인으로 나더라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세요.
13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바울은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죄라는 것은 그 죄를 규정짓는 법이 있어야 죄로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빨간 불에는 서야 한다는 법이 없으면 빨간 불에 아무리 달려도 티켓을 먹을 이유가 없습니다.
분명 아담과 모세 사이에는 수천 년의 갭이 있습니다. 그럼 율법이 주어지기 전인 그 사이에는 “이것이 죄다“라는 율법이 없었으니 그 동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죄를 안 지은 것이냐?
“아니다. 지었다“가 바울의 대답입니다. 바울은 아담 이후로 계속해서 사망이 왕 노릇하더라는 것으로 죄의 근거를 삼습니다. 사망은 죄의 삯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있기 전에도 계속 사람은 죽더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죄를 짓지 않은 영아들이 죽습니다. 아기들은 자기의 의지를 발동해서 죄를 지을 기회가 없었던 자들인데도 죽는 것입니다. 죄의 삯으로.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는 날 때부터 타고나는 원죄가 있다는 것을 강하게 피력하는 것입니다.
(롬5:18-19)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성경은 이렇게 원죄를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전15:21-23)
21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아담은 전 인류의 머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의 머리이신 것처럼 아담은 전 인류의 머리였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모두 죄를 지은 것이고 예수님의 은혜로우신 사역으로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하나님 나라로 옮겨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예전에 동양학을 공부하시던 우리 선배의 아버님께서 예배당에 처음 방문하셨을 때 한복에 도포를 입고 앉아서 원죄를 설교하던 목사님께 “거 개 똥 같은 소리 그만 좀 하쇼.”라고 하시고는 다시는 예배당에 발을 안 들여 놓으셨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요. 저도 그 때는 속으로 ”그 아저씨 말씀한번 잘 하신다” 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에 대해서 , 아니 저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원죄에 관한 교리는 진리 중의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심리학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은 원래 선하고 가능성이 있는데 좋은 본을 받지 못하고 나쁜 영향을 받아서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선한 것들을 잘 개발하고 훈련하면 인간은 얼마든지 선하게 바뀌게 된다는 것이 심리학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체벌이 없어졌습니다. 때리지 말고 왜 아이가 저렇게 되었는지 “놓고 분석해서 그 결과를 가지고 고쳐나가자“ 그럽니다. 그래서 아이들 다 망쳐 놓았습니다.
성경은 아이들이 잘 못하면 패라고 합니다. 패서 , 맞는 게 무서워서라도 못하게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죄 중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심리학의 최고봉이 누구입니까? 프로이드 아닙니까? 그는 왜 그렇게 불행하게 살다가 갔습니까? 불가지론자로서 왜 그는 행복하지 못하고 마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떠나야 했습니까? 하버드 대학의 니콜라스 교수가 쓰신 루이스 대 프로이드라는 책에 보면 프로이드의 영향을 받아 불가지론자로 살던 CS 루이스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느낀 행복과 자유와 끝까지 인간적인 심리학을 의존했던 프로이드의 불행이 극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환경과 여건을 잘 만들어 주고 좋은 모범을 보게 되면 인간이 정말 선하게 되겠습니까?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환경이 어디였습니까? 에덴이었습니다. 인간은 거기서 타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환경을 만들어 주면 인간이 타락을 안 할 수 있겠습니까?
불순종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순종을 해야 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순종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가 자기 인생의 왕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담이 최초에 저지른 죄 아닙니까? 그러나 인간은 애초에 만들어지기를 하나님과 관계하며 그 분 안에 있을 때만이 진정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도 참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예전에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 다 하고 살 때하고 지금 하나님 만나고 하고 싶은 것 절제하면서 살 때하고 어느 때가 더 속 편하십니까? 지금이지요. 이게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 됨의 증거이기도 하고요.
저는 지금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합니다. 제 친구들이 저를 볼 때는 어울리지도 않는 목사가 되어 가지고 고생만 진탕한다고 합니다만 저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고 그 영원한
나라에서 문명과 문화가 있는 나라에서 새로운 몸을 입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면 너무 행복해져서 혼자 씨익 웃는다고요.
해리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이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의 일입니다.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께서 시장을 지나고 있는데 구세군 사역자들이 시장 어귀에서 한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구세군 사역자들은 금방 그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을 알아보고
즉석에서 설교를 부탁드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육체적인 부활을 통해서 어떻게 죄인들을 구원하시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고 있던 어떤 신사 한 분이 명함 뒤에다 무엇을 적어서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기독교를 반대하는 연설을 하고 다니던 무신론자요 불가지론 자였던 유명한 초기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 명함 뒤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선생 나는 당신과 다음과 같은 문제로 토론하겠다는 도전장을 냅니다. 다음 주일 오후4시 아카데미 과학관에서 “불가지론과 기독교의 대결”이라는 제목으로 공개 토론을 합시다. 비용은 내가 다 대겠습니다.“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은 그 카드를 큰 소리로 회중들에게 읽어 주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이 도전에 매우 관심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다음 주일 3시에 이미 다른 집회에서 설교를 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서두르면 네 시쯤이면 여기 과학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필요하다면 그 집회에 다른 강사를 소개시켜주고 이 토론에 참여하겠습니다. 그러나 토론을 하기 전에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증인을 몇 명 데리고 왔으면 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주장하는 불가지론과 무신론을 믿고 성경과 기독교를 무시하기로 한 어떤 사람이 구제불능의 삶에서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어 그 삶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한 사람 데리고 오시오. 그리고 가난하고 곤고하고 품행이 바르지 못하여 사창가 같은 데서 정욕의 노예가 되어 부패한 삶을 살다가 결국 모든 걸 탕진하고 죄의 삶 때문에 파산하고 파멸된 여자, 그러나 어느 날 선생이 주장하는 불가지론과 무신론에 대한 강연을 듣고 “아, 하나님은 없는 거구나”하고 깨달아 그 지저분한 삶 속에서 건져내져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여자를 한명 데리고 오시오. 만일 선생께서 불가지론이 해낼 수 있는 표본으로 이런 두 사람을 데리고 오실 수 있다면 저는 다음 주에 그런 사람 100명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저는 제가 앞에서 묘사한대로 죄에 빠져 시궁창 같은 삶을 살다가 선생이 비웃고 있는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구원받고 행복한 자유인들을 그 토론의 자리에 증인들로
세우겠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한 소녀가 외쳤습니다. ‘선생님, 저도 갈게요.’
구세군 사역자가 외쳤습니다. ‘우리 구세군에서 40명 보내겠습니다.’
여기저기서 그렇게 변화된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고 나섰습니다.
그 신사는 손사래를 치며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진짜 행복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 속에서 오는 것입니다. 진짜 자유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을 사는 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저는 매일 저녁마다 맥주 컵에다가 소주를 반병씩 부어서 한 잔 쭈욱 마시고 밥을 먹었던 사람입니다. 지금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었고 그럴 수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짓을 못 한다고 해서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제가 항상 그렇게 술을 마실 수 있었던 때를 자유라 합니까? 그 것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버린 지금이 자유입니까? 꼭 그렇게 술을 마셔야만 했던 때를 가리켜 죄의 종이었던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자유더라는 것입니다. 그 진짜 자유를 알면 남들이 볼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정말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서 미국까지 배를 타고 여행을 한다고 해보자고요. 아마 몇 달은 걸릴 거예요. 며칠은 배 안에서 경치도 구경하고 좋겠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이 주일이 지나면 점점 답답해 질 것입니다. 걸어서 조금만 가면 배 고물 벽이 나옵니다. 사방 어디로 걸어도 더 이상 넘어가지 말아야 할 난간이 있습니다. 자유롭지 못하지요? 정말 자유로운 곳은 어디입니까? 아무리 가도 막힘이 없는 곳? 바다 속이지요. 그 때 만일 승객들이 자유롭고 싶어서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쳐 가기로 한다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죽어요.
배 안에서 제한된 자유이지만 선장의 지시에 잘 따르고 배를 의지해서 목적지에 잘 도착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배 위에서 저 아래 상어에게 쫓겨서 다리 한 짝 잘리고 팔 한쪽 너덜너덜하게 되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야, 참 자유롭다, 진짜 재미있겠다.” 한다고요.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 사는 순간 죄인은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삼아 그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진정 평안과 안식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제 눈에는 전부 상어한테 물어 뜯겨서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보이는데 그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오히려 저한테 자랑들을 합니다. “너 이런 거 할 줄 알아? 너 이런 거 있어?”
그렇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로 태어나는 죄인들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됩니다.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먼저 성경에서는 육체라는 단어를 여러 가지로 사용합니다. 3절에도 육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오는데 두 단어가 각기 나타내는 바가 다릅니다.
첫 번째로 성경에서 육체라고 할 때는 “죄의 상태 안에 있는 인간 본성,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가 “육”하면 보통 flesh고기만을 떠올립니다. 성경이 말하는 “육” “사륵스”는 단순히 고깃덩어리인 육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말로 하면 “바싸르”입니다.‘ 바싸르’는 ‘mankind’를 이야기합니다. 사람, 인류를 이야기하지요 , 그러니까 살아서 꿈틀거리는데 필요한 모든 인격, 성품을 포함한, 살아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말 ‘네페쉬’하고 비슷한 말이겠지요. “존재”는 존재인데 타락 이후 죄악 적인 본성의 충동을 받는 존재를 “육” “육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갈5:17)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성령의 능력과 감동과 역사를 거스르는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성경이 “육체”라고 할 때는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의 몸과 본성의 동물적 지체, 즉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의 선정적이고 감성적인 지체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3절을 다시 보시면 육체의 욕심이라는 말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은 동격으로 나옵니다.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러므로 보편적인 죄 된 육체는 몸이 하는 일과 마음이 원하는 것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육체의 욕심, 즉 죄인의 몸과 마음이 원하는 것으로 인해 죄(하마르티아)와 허물(파랍토마)이 우리 삶에 나오게 되어 우리는 죽은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원어로 보면 죄들, 허물들이라고 복수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몸과 마음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겉으로 나타나게 되는 모든 외적 증상들, 외적인 표징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욕심에서 그 욕심이라고 번역된 “에피뛰마아”도 복수입니다.
성경에서 “에피뛰미아”가 복수로 쓰일 때는 “금지되고 해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을 향한 강하고 긴박한 탐욕”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욕심, 탐심, 강한 소원이라고 번역이 된 “에피뛰미아”가 어디서도 쓰이는가 하면 누가복음 12장25절에서도 동일하게 쓰입니다.
(눅22:25)
15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그러니까 인간의 안에서 나오는 강한 소원이 다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욕구인 배가 고플 때 밥을 원하는 것이나, 졸릴 때 잠을 자고 싶은 것이라든가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배고플 때 무언가로 배를 채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즐거움입니다. 졸릴 때 푹 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육체의 욕구와 비교해서 죄가 되는 육체의 욕구는 무엇입니까? 바로 과욕!
타락한 인간들은 그 자연스러운 욕구가 절제가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끊임없이 쏟아 붓고 싶은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그 욕구는 죄인들 안에서 나오게 될 때는 모두 죄가 되는 것입니다.
(롬7:7)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여기서 탐심이라고 번역을 한 “에피 미아”는 예수님께서 간절히 원하셨던 그 원하심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예수님께는 아주 당연한 자연스러운 욕구가 인간들에게는 탐심이 되고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탐심이 죄라고 율법으로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것들은 자기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서 그것이 죄인 줄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쾌락과 즐거움이 죄입니까? 쾌락과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절제되지 못하는 쾌락과 즐거움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왜 창조 하셨습니까? 뭔가 시키실 일이 있으셔서 창조하셨나요?
사탄과 싸우는데 군사가 더 필요해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까? 왜 창조하셨죠?
복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 놓고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최상의 것들로 선물을 하시고 그것이 기쁘셨던 것이었습니다.
(엡1:3-5)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어떨 때 부모는 제일 기쁘죠? 자식이 껌 팔아서 돈 벌어오면 기쁜가요? 자식새끼 입으로 먹는 거 들어가는 거 볼 때, 제일 기쁩니다. 부모가 해 준 것을 자식이 기쁘게 잘 사용하고 누릴 때 부모는 제일 기쁜 것입니다.
작곡가가 왜 작곡을 합니까? 안 하면 누가 때립니까? 화가가 왜 팔리지도 않는 그림을 열심히 그립니까? 혹 어떤 사람이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자기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때 왜 가차 없이 거절을 합니까? 좋아서, 기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 인간을 만들어 놓고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 안에서 마음껏 즐기고 행복해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것이 지나쳐 하나님을 잊고 자기의 쾌락과 행복과 즐거움만을 좇다가 다 망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절제를 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지나친 욕심을 내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배고픔을 달래고 목마름을 달래고 잠을 자는데 있어서도 절제를 하지 못합니다. 지나친 욕심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그 먹는 것이 인간을 끌고 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인생을 겁니다. 다른 이들을 밟고 올라섭니다. 인간은 쾌락을 위해 범죄를 저지릅니다. 청소년 범죄의 90% 이상이 유흥비 마련을 위한 것입니다. 쾌락이 인간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마약은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것이 사람을 끌고 갑니다. 지나친 식욕, 탐욕, 수면 욕 모두 죄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나오는 강한 욕구는 무엇이 있습니까? 비전, 야망, 꿈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야망은 사람을 충동질하고 지배합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간판을 단 곳에서 목사들이 꿈과 비전과 야망을 전합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광분합니다. 죄 성을 자극해서 사람을 모으는 것입니다.
인간은 명예나 평판을 얻기 위해서 질투, 시기, 악의, 교만, 혐오, 분노를 냅니다. 훌륭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전기문이나 자서전을 읽어보면 여러분은 금방 그들이 무엇을 위해 살다 갔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야망과 비전과 꿈을 이루기 위해 인생을 바칩니다.
그리고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즐겁게 해 줄 새로운 것을 쫓아갑니다.
(행17:21)
21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 느낀 것입니다. 그 곳 사람들은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으로만 시간을 쓰더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얻어 남들에게 자랑하고픈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식에 대한 욕심은 어떻습니까? 문학과 예술과 음악과 연극과 철학 , 왜 사람들은 그렇게 지식에 대한 욕심이 많습니까? 상대적인 우월감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죄인들은 자기를 위해, 왕이신 자기 자신을 위해 절제하지 못하고 치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죄의 근본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그 분께 불순종하며 자기 인생의 왕좌에 자기 자신을 앉히기를 원했던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콜 중독이나 마약 중독이나 커피 중독이나 일중독이나 도박 중독이나 인터넷 중독이나 쇼핑 중독이나 골프 중독이나 담배 중독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똑같은 죄인 것입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약 중독하고 커피 중독이 뭐가 다르죠? 똑같이 자기만을 즐겁게 하기 위한 죄입니다.
우리는 사회법 상 “죄”라고 정해 놓은 것만 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것을 하지 않는 자기는 꽤 괜찮은 사람으로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똑같이 우리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바를 탐욕스럽게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자기 행복만을 위해, 자기 욕심만을 위해 살아가는 죄인들인데 정말 사람들이 행복해 하며 사나요? 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못 느끼고 사는지 아십니까?
역설적이지만 죄인들은 인생의 목표를 “행복”에다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 그 가정의 최고 목표를 “행복”으로 잡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그 행복을 위해 노력해 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다가 그 행복을 깨는 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 못 참습니다. 서로 속으로 “저 인간이 조금만 노력을 해 주면 우리 가정은 행복할 텐데”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목표한 행복이 모자라면 인간은 불행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너무나 간절하게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가정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 명령에 대한 “책임”이며 “순종”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의 행복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이듯이 가정의 목표 역시 “순종”과 “책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책임을 지는 법을 가정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남편은 예수님의 역할을 하고 아내는 교회의 역할을 하고 아이들은 그로 말미암은 언약의 후손의 역할을 하며 이 땅에서 천국을 배우고 오라고 우리에게 내려진 명령이며 거기에 반응하는 것을 우리는 “책임”이라고 하고 “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못난 남편이라 할지라도, “저 사람 때문에 내가 불행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남편이 커다란 실수를 했다고 해도
“에그, 이 병신아, 그럼 그렇지 네가 한 가지라도 잘하는 게 뭐가 있냐?” 그러면 여러분은 실패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이 범한 잘못이 뭡니까? 신랑으로 온 예수님이 바보같이 맨 날 얻어터지고 조롱당하고 심지어 자기들을 놔두고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향해서 이스라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런 무능한 인간, 저게 무슨 신랑이며 메시야냐?
이스라엘은 그래서 망한 것입니다. 아무리 무능한 남편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역할로 가정에 주셨으면 거기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속이 터져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내는 순종을 배우고, 아량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며, 인내를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천생 연분을 만나서 어떤 면에서든지 완벽한 행복한 가정 이루어서 천년만년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을 통해서 천국을 배우고 천국 백성의 자질을 키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역할을 맡은 남편은 아내를 위해 언제든지 십자가에 달릴 준비를 하는 사람입니다.
옛날 페르시아 왕조실록을 보면 고레스 왕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장군의 아내가 반역죄로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뒤늦게 전쟁터에서 그 전갈을 받은 장군은 한달음에 달려 왕의 처소로 들어갔습니다. 그 장군은 고레스 왕에게 “제 아내 대신 제가 대신 죽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고레스 왕이 그 간청을 듣고 “너희들의 사랑은 죽음도 끊을 수 없겠구나.”하고 둘 다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손을 잡고 나가면서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아까 왕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때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 눈을 보았소? 얼마나 자비하신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는지 모르오.”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왕을 쳐다보지 않았어요, 저는 오직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단 한 사람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아, 리마리오도 아니고 굉장히 느끼하지요? 그렇지만 부럽죠? 그런 책임과 순종을 우리는 가정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멋진 이야기입니다. 고레스 왕 때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망치를 들어 자기 몸에 못을 박는 원수인 아내를 위해 실제로 죽어주신 남편이 바로 예수 님 아닙니까? 남편들은 그 예수님의 역할을 가정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아내가 되어서 남편을 행복하게 못 해줘? 난 정말 불행한 인간이야” 이러지 마시고 그럴 때 예수의 역할을 잘 해내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가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우리의 행복만을 위해서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책임을 다하고 우리의 욕심을 위해 탐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절제를 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전에는 우리도 똑같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의 욕심을 따라 세상의 풍속을 좇고 불 순종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네 번째로 하나님은 그런 상태에 있는 자들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공부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럼 이제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3절까지는 마치는 것입니다.
3절 보시면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진노를 발하십니다.
(엡2:3)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among whom we also all once lived in the lust of our flesh, doing the desires of the flesh and of the mind, and were by nature children of wrath, even as the rest:--
사도는 3절에서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그렇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이들과 같이”라는 말은 우리를 제외한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진노의 자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을 했을 때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화염검으로 막아버리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통해, 바벨탑 사건을 통해,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한 징벌들을 보면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 그래서 임박한 진노를 피해라“ 하고 외쳤습니다.
(요3:36)
36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롬1:18)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엡5:6)
6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이러한 하나님의 죄를 향한 진노는 지옥에서 최종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지옥에서 죄인들이 경험할 진노는 지금도 연장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은 지금 그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그 욕심을 따라 불안한 삶을 살다가 영원히 지옥에서 그 진노의 불에 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능력이 우리를 그 처참한 죄의 구덩이 속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아들을 죽이시고 다시 살리셔서 영광스러운 하늘나라 보좌에 앉히신 그 능력이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처지를 이렇게 늘 확인하고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게 하시기 위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 삶에도 아직 이러한 불순종과 탐욕을 가지고 있는 “육체”가 새로운 영과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여전히 옛사람, 옛 성품이라고 표현되는 “육체”가 남아 있습니다. 그 “육체”에 새 영이 들어와 있는 것을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요일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이렇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육체도 가지고 있고 새로운 영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늘 투쟁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뿅 하고 완전한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늘 투쟁하며 괴로워하며 한발 한발 가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육은 절대 선한 것을 하나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영은 절대 죄를 짓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늘 투쟁의 연속입니다. 왜 그렇게 놔두십니까? 너희들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죄와 싸워서 이기셨으니 예수님의 몸통인 너희들도 싸워서 이기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전투에 우리도 참가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미 다 이겨 놓은 싸움에 우리를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싸워야 하는 겁니다. 얼마나 더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험악하고 불가능한 자리에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 위대한 능력을 동원하셔서 우리를 건지신 것입니다. 정말 그 사실에 감격하십니까? 그러면 그 감격 안에다가 다른 작은 불평, 불만, 고통은 다 녹여 버리세요. 삶이 힘겹고 어려울 때마다 그 감격을 떠올리세요. 그리고 인내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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