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17) 신자여, 진정 하나님을 아는가? (엡1:15-19)

은바리라이프 2013. 10. 4. 14:22

(17) 신자여, 진정 하나님을 아는가?

(엡1:15-19)

15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Holy Spirit)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에베소서 1장1절에서 14절까지의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과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의 계획에 대해서 총 정리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 되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고,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대상, 주인공은 인간으로, 그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완성시키시기 위해 그 인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붙여 버리셨고 그들에게 이 땅을 살아 낼 수 있는 힘으로 성령 하나님을 보증으로 주셔서 우리에게 하늘의 것들을 조금 맛 볼 수 있게 해 주셨음을 감격 속에 확인했습니다.

14절까지 그 모든 것의 결과로 우리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15절의 믿음과 사랑입니다. 신자들은 성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성자 하나님의 그 희생의 실천과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운 내주하심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며 사랑을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예수 안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I heard about your faith in the Lord Jesus’

우리는 때때로 믿음을 잘 못 정의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열심과 헌신을 믿음의 척도로 삼는 때가 왕왕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항상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해서 알아야 ‘믿음’이 가는 것입니다. 대상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도가 이야기하는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권과 그 분이 온 천하 만물의 주인이신 것,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인 것, 그 분이 하나님이신 것, 온 천하가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며 온 천하가 그 앞에서 입을 가리고 잠잠해야 되며 티끌과 재를 뒤집어쓰고 그 앞에서 회개해야하는 존재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자신의 목숨을 끊으시면서 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과 관계없이 열심과 정성을 근거로만 하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늘 혼선을 빚습니다. ‘내가 이렇게 정성을 들였는데도 내게 응답을 안 하시다니’

‘내가 가진 것 다 드렸고 내가 할 수 있는 정성은 다 바쳤는데도 나의 원하는 것을 안 해 주신단 말인가’ 늘 여기에 걸리는 것입니다.

(눅11:24-26)

24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우리는 얼마든지 열심을 내고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근거한 열심과 선행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다시 허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 앞에 끌려간 다니엘의 세 친구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풀무 불에서 자기들을 건져주시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만을 예배하겠다는 그것이 바로 신자에게 요구되는 믿음인 것입니다. 내가 요구하는 것을 해결해 주지 않으면 금방 fire해 버리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내가 소원하는 것이 들어지지 않은 것이 내게 유익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사람을 우리가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삶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들어지지 않은 것이 훗날 생각하면 복된 일이었음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경험합니까?

예전에 건강이 안 좋았던 신 장로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전에 하나님께 그렇게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 매달렸었는데 하나님께서 2년을 꼼짝없이 묶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기로 성경을 깊이 연구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체험하는 계기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때 만일 장로님께서 원했던 대로 건강이 금방 좋아졌다면 다시 세상의 즐거움 속으로 빠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대학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 정말 모든 사람들이 저는 톱스타가 될 거라 했었습니다. 서울 대학교 학생이라는 배경도 있었고, 가창력도 풍부했고,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대학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기 때문에 방송국에서도 밀어줄 것이고 해서 저는 분명히 된다고들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 풀렸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제가 학생 신분으로 스타가 되어서 이러 저리 몰려 다녔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안 된 것이 저에게는 복이 된 것입니다.

믿음은 오직 예수 님 안에서의 믿음이어야만 합니다. 성경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빌3:3)

3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육체를 신뢰하지 않으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숨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믿는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신 일도 하사불성’ 하면서 믿고 구하면 꼭 이루어진다는 식의 믿음은 억지일 뿐입니다.

예전에 빈센트 필이 쓴 positive thinking이 기독교 안에 흘러 들어와서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한참 강조를 하고 다니셨습니다. 인간이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생활하는 것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 나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열심이 우리의 신앙의 잠재력을 개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를 죽이고 주를 믿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을 거꾸로 뒤집어 버린 이단 사설입니다. 그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라고 그들의 말이 다 옳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믿음은 맹신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그런 사람은 늘 불안합니다)그저 맹신하는 사람들 있지요? 그것은 coueism (auto suggestion)자기 암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믿는 거야, 믿는 걸 거야, 믿는 것이어야 만해’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그리스도(savior)일 뿐 아니라 ‘주’ 이십니다. 주라는 것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 분이 주인이고 우리는 종입니다.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나요? 내가 목적과 목표는 다 정해 놓고 하나님은 방법으로만 동원하고 계시지는 않나요? 이거 저거 해야 하니까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게 주인에 대한 태도입니까? 어떻게 우리가 주인에게 이것 저 것 명령을 합니까? 종은 주인이 하라는 대로하는 자입니다. 자기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주인을 설득하는 자가 아니라 주인이 시키는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종입니다. 우리는 그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가치와 목표에 대해서 스스로의 주장이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인생의 목표와 가치를 자기 나름대로 이미 정한 자들입니다. 그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늘 주인에게 아버지에게 묻고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자가 어린아이같이 주 예수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사랑’을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전에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딛3:3)

3우리도 전에는 어리석고, 순종하지 않고, 미혹을 당하고, 온갖 정욕과 향락에 종노릇 하고, 악의와 시기심을 가지고 살고, 남에게 미움을 받고, 서로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가 에베소 교회에게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모든 성도들을 향한 너희의 사랑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사랑이 있었습니다.

(벧전1:22)

22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우리는 그 진리로 말미암아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자들은 그 주인이신 예수께서 하라고 일러놓으신 명령을 지키기를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이 모든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된 자들을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합니다. 왜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시고 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왼편 뺨을 맞거든 오른 편 뺨도 대 주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교인이 길을 가고 있는데 주차해 있던 차가 갑자기 후진을 해서 범퍼를 받았다고 합니다. 분명 후진하던 차의 잘못이었는데, 경미한 차 사고에서는 목소리 큰사람이 이긴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는지 내리자마자 소리를 치더라는 겁니다. 당신이 전방주시 태만으로 사고가 난 것이라고 “절대 못 물어줘” 그렇게 소리를 지르더랍니다. 그래서 “아주머니, 그렇게 억울하세요?” “그럼요 억울하죠.” “그럼 그냥 가세요.” 그랬더니 금방 얼굴이 풀리면서 “혹시 목사님이세요?” 그렇게 묻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런 아량이 요구됩니다. 왜요?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듯이 이제 우리는 곧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부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아는 자들이 작은 것 손해 보지 않으려고 혹시 예수 믿는 자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몇 대 더 맞고 손해 보는 것이 그렇게 목숨 걸 만큼 중요한 것 아니니까 겉옷을 달라면 속옷도 줘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 적인 삶에 연연해서는 안 되는 자들입니다. 뺨 한 대 맞으면 가서 죽도록 패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잠깐 동안의 화를 해결하려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매튜 헨리의 아버지 필립 헨리와 그의 어머니의 사랑이야기가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필립 헨리와 매튜 헨리의 어머니가 처녀 총각 시절에 사랑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 집안은 대단한 가문이었고 매튜 헨리의 아버지는 별 볼일 없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매튜 헨리의 할머니가 그 딸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사귀는 필립 헨리가 어디 출신이냐?”고 물으셨답니다. 매튜 헨리의 어머니는 불후의 명언을 남깁니다.“어머니 저는 그가 어디 출신인지는 몰라요. 하지만 그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는 알아요.”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가야 할 그 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 방향성을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에 만연하는 생존 경쟁은 그들이 가진 것이 둘이 먹기에는 너무 부족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소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 갖겠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나누어주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가진 것은 아무리 나누어도 부족하지 않은 풍성한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풍요는 그만큼 큰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는 예수 안에서의 믿음과 사랑이 발휘되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계속해서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엡1:15-19)

15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의 성숙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믿음이 있고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계속해서 자라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사도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는 영광의 아버지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대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라는 말에는 참으로 소망 어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우리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영광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가 영광스럽다는 것은 아들 또한 영광스럽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릴라 아들 고릴라, 짱구 아빠 짱구..이듯이 우리는 기도를 할 때 영광의 하나님 아버지하고 부르는 것 자체가 내가 필요한 것, 내가 갖고 싶은 것이 채워지지 않고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비극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전제 되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영광의 아버지께서는 반드시 나를 영광스럽게 만드시고 마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욥이 그 고난 속에서 “너의 가는 길을 오직 저가 아시나니” 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요구가 들어지지 않더라도 나의 가장 좋은 길을 하나님만이 아시고 그 길로 이끄실 것이기에 난 어떤 결과가 주어지더라도 만족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말입니다.

사도가 18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가를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알려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 영광의 풍성한 자리까지 가게 될 것이란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영광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영광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증(계약금)으로 그 영광을 맛보게 해 주셨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달은 빛이 없지만 해의 빛을 받아 밝은 달빛을 내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영광을 본 자로서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에베소서 7번째 강해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사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하나님의 영광” 편을 참고 하십시오. 여기서는 간단하게 요약하여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자, 우리가 수시로 암송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 요리 문답1번을 암송해 봅시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지금 이 예배당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이 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 졌습니다. 만들어진 것은 분명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집니다.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것도 인간도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과학자들이 말하는 진화론은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창조된 것이 아니라 chance 우연히 탄생된 것이라는 것밖에 안됩니다. 우리는 유기물 복합체인 코아세르베이트로부터 출발하여 번개와 같은 충격이 없었으면 생겨나지도 못했을 그런 우연한 존재들이라 합니다. 그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한 것입니다.

동부에서 투신자살 하려는 어떤 여인네에게 지나가던 사람들이 차 안에서 길이 막힌다고 “빨리 뛰어내리라”고 소리를 치더라는 기사를 엊그제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날의 인명 경시 풍조는 이 정도입니다. 그게 다 진화론의 영향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 보십시오. “왜 사십니까” “왜 당신은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법니까?” “왜 당신은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십니까?” 그러면 대충 어떤 대답들이 나오던가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자식들 위해서” 그렇지요? 어떤 사람은 골프 핸디 줄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철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인간은 일생동안 세 가지 질문을 한다고 하죠?

what is man? metaphysical question 형이상학적 질문이죠. 형이상학이라는 것은 중국 역경의 계사 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형이상(形而上)자는 도라고 하고 형이 하자는 기라한다' 그 말을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metaphysics를 설명하려 하니 어려운 말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형을 뛰어넘는 경험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본질에 관한 궁극적인 원인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철학이라든지 신학, 논리학, 윤리학 등이 이에 해당하지요.

두 번째가 what is our problem? the question of ethics 윤리학적 질문이지요.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이 what can we do about it? epistemology 인식론적인 질문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을 모든 인간은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요?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타락을 하였지만 그들은 막연한 그리움 속에 하나님과 에덴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누구나 영원을 두려워하며 이상향을 동경합니다.

그래서 각자가 거기에 대한 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제가 전에 나이키 광고를 예로 들었었지요? 나이키의 광고 카피가 이러했습니다. ‘Life is short. Play Hard.’ ‘인생은 짧다. 그러니 열심히 놀자,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라는 뜻입니다.

그 광고 카피는 앞의 세 가지 질문에 정확하게 이런 답을 주고 있습니다.

1.what is man? Man is a temporally being.

2.what is our problem? Our life is too short.

3.what can we do about it? Play hard

그렇지요? 칸트는 그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을 합니다.

1.what is man? 인간은 모두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가지고 있다

2.what is our problem? 그 구멍은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는다.

3.절대자가 그 구멍을 막기 전에는 절대 인간은 그 허무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파스칼은 이러합니다.

1.what is man? 모든 인간은 심심하다.

2.what is our problem? 그 심심함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어마어마한 큰 그릇을 마음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로밖에 채워지지 않는다)

3.what can we do about it? 그 심심함은 절대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기 전에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그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인생을 바라봅니다.

1.what is man? 인간은 우물 속에 빠진 존재다 (위에서는 무서운 사자가 내려다보고 있고 아래에는 시커먼 용이 째려보고 있는 그런 진퇴양난의 우물)

2.what is our problem? 거기서 빠져 나와야 한다.

3.what can we do about it? 하나님만이 거기서 건져 내 줄 수 있다.

그럼 성경은 그 세 가지 질문에 대해 무어라 대합을 합니까?

1.what is man? 인간은 죄인이다.

2.what is our problem? 그래서 지옥 간다.

3.what can we do about it?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누군가 죄를 해결해 주실 분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해결 자가 오셨지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믿게 된 자들은 이제 그들 인생의 목적을 찾게 되는데 그것이 어떤 목적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19:1)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태양이 바다가 우주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과 그 분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럼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까? 성경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분입니다.

(요17:4)

4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을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 것으로 나타내려고 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거나, 세상에서 크게 성공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그런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면 하버드에는 모두 그리스도인들만이 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돈이 많은 사람도 당연히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버드에는 불교신자가 더 많고 세상에서 제일 돈이 많은 사람 빌게이츠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겠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까? 예수님은 못 생겼고 가난했고 고난 받고 배반당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런 한심한 인생이 또 있나요?

(사53:2-3)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우리 주님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생긴 것까지도 못 생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행진을 시켰습니다. 보좌에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듯이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 이름을 썼습니다. 마치 왕이 하는 것을 그대로 예수님께 시켰습니다. 조롱을 하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왕 중의 왕의 참 대관식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 길을 따라 하늘의 왕의 자리로 가신 것입니다. 그 영광으로 복귀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그 영광은 이 땅에서는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오해받고 배반당하고 고난 받고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구유에 못생긴 아이가 태어난 것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장면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읽었던 요한복음17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요17:4)

4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지 아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배반을 당하고 수난을 당하고 멸시를 받는데 그 원수를 사랑합니다.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를 해 줍니다. 그를 못 박은 자들이 이야기합니다.

“저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세상 누구도 할 수 없는 사랑과 용서의 삶을 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저들은 어떻게 저렇게 손해를 보면서도 바르게 살겠다고 버둥거리는가? 저들은 어떻게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삶을 사는가? 어떻게 저들은 저렇게 서로 사랑하는가?

어떻게 우리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 저들의 삶에서는 일어나고 있는가에 놀라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능력에 항복하게 되는 바로 그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 비추는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옷까지 다 빼앗긴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까지 감수한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자기의 신분에 맞는 책임과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은 보이셔야 합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우리의 마지막은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사람들입니다. 성공과 실패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영광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영광에 대한 확신에 찬 감격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보다 더 영적이며 근본적이며 중요한 것에 매달려야 합니다.

우리 영광의 아버지는 거룩하고 신령한 문제로 만나야 하는 분입니다.

그리고 충분히 기도한 다음에 “하나님 혹시 시간 나시거든...” 하면서 조금 첨언하시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사소한 것들로 씨름하지는 마십시오, 그런 사소한 것들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16절에서 19절 까지 에서 사도가 그렇게 진지한 기도를 드리는데,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교회에게 주어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미 구원받은 교회를 위해 이러한 기도를 하고 있음을 주시하여 보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천명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거듭 난 자들입니다. 영어로는 born again한 자들입니다.

즉, 영적으로 갓난아기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아기들은 자라야 합니다. 어떻게 자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 나라를 아는 지식으로 영적 성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도는 지금 교회를 위해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3:12-14)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네, 우리는 주님 만날 그날까지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3:1)

1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계시록에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계3:15-16)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습니까? 라오디게아는 인구가 많은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먹을 물이 부족했습니다. 라오디게아의 이웃에는 히에라 폴리스와 골로새가 있었습니다.

히에라 폴리스에는 안질에 좋은 뜨거운 온천수가 유명했고 골로새에는 차가운 생수가 유명했습니다. 그들은 양 쪽 도시로부터 수로를 이용해서 물을 대 먹었습니다.

그것이 라오디게아 까지 오는데 도중에 식었습니다. 찬물은 오히려 미지근해 졌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의 물은 그냥 마시면 사람들이 자주 토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히에라 폴리스의 뜨거운 물이 되거나 골로새의 차가운 생수가 되라고 하나님께서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믿으려면 확실하게 믿고 안 믿으려면 말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가 교회가 커지고 있고 부유해 지고 있다고 해서 안주하는 모양인데 아니다. 분발해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린다고 하시면서” 문을 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사람들 중에도 문을 열지 않고 자기가 여전히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을 넓힘으로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위해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의 풍성하심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영적인 기도 제목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소한 것들을 위해 기도할 시간이 남으십니까?

사도는 에베소 교회의 영적으로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자라나게 되기를 간절히 원 한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도 똑같은 기도를 합니다.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도 같은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더 깊이 알게 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안다”는 말은 부부가 그냥 피상적으로 안다는 말이 아니라 부부가 서로에 대해서 안다는 깊은 알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는 공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교회는 성경 공부에 열심인 교회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수요 성경공부, 금요일에 청년들 성경공부, 토요일에 리더들 성경공부, 주일 성경공부, 새벽 성경 공부 등등 참 많아요. 그러나 그것이 이론적이며 이지적인 지식에서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지식은 귀신들이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마8:29)

29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막3:11-12)

11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약2:29)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들도 가지고 있는 지식과 믿음을 사도가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가 구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격적이고 친밀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 지식은 행위가 함께 따르는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은 경외감이 따르는 지식입니다.

야복이 베델에서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에 계시거늘” 이라고 한 그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던 그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은 교통, 친밀, 동반 같은, 삶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지식입니다. 그런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 자녀로서의 특권의식이 있습니다. 그러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찬양하고 싶어 못 견뎌 합니다. 그러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느낍니다.

그러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매일같이 맛보길 원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은 아들 대학 붙여 달라는 기로를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업 번창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은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하듯이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합니다. 사슴은 식도가 셀로판지처럼 되어있어 물을 오래 못 마시면 식도가 붙어 죽는다고 했지요? 그런 갈급함이 있으십니까?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라고 부르짖었던 모세의 기도를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사야가 만났던 , 바울이 만났던, 아브라함이 만났던 그 하나님을 뵌 적이 있으십니까? 그 앞에서 그 크심에 놀라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그 크신 하나님을 뵈었다”는 고백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매일 매일 그 하나님을 알아 가는 데 갈급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로만 카톨릭은 성직자들과 수도사들만이 그 지식을 알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평신도들, 그저 사업에 종사하고 일상적인 업무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단적인 가르침입니다. 지금 사도는 “목사들, 장로들, 신부들” 만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수도사들” 만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인 모두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기“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히8:11) 우리가 잘 아는 새 언약입니다.

10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 이니라

정말 기도하려고 앉았다가 그 존전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너무 복받쳐 올라 “찬송하리로다.” 하면서 눈물을 흘려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바울처럼 자신이 예전에 좇던 모든 것들을 쓰레기처럼, 아니 오히려 “해”로 여겨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 영광스러운 얼굴의 광채 속에서 영원히 사는 날을 향해 가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그 지식이 날로, 날로 더하게 해 달라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 하듯이 갈망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17절에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라는 구절에서 정신이라는 말은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고전1:21)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요일3:6)

6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 하였느니라

(요1:10)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인식하는 생득적인, 생래적인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헬라의 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하여 당대의 천재들이 이지를 이용하여 그 하나님을 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말을 새긴 단을 본 것처럼 “뭔가 계시긴 계신 것 같은데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자기 지혜로 알지 못한다는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당대의 석학들이 “하나님은 없다”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저기 아프리카의 미개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지식과 이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2:8-12)

8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 하시느니라

11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 하느니라

12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께서만이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더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매일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기도하기가 힘이든지 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 몰라서 그렇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친한 친구와는 밤을 새워서라도 이야기 할 거리가 있습니다. 함께 밤새우고 다음 날 또 만나면 또 이야기 할 거리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과는 이야기 할 거리가 없지요? 하나님에 대해 모르니까 서먹서먹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 여러분, 교회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기도의 응답은 어떻게 받습니까? 이런 기도는 해야 되나요 말아야 되나요? 아직까지 그런 것으로 고민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 나라를 아는 지식이 우리를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게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 천국의 즐거움보다 더 급한 기도제목들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정말 하나님을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