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12) 예수 안에서 (엡1:7)

은바리라이프 2013. 10. 4. 14:13

(12) 예수 안에서

(엡1:7)

7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지난주에는 우리가 거룩에 관해서 공부했으니 이번 주에는 7절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구절을 공부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함께 공부한 것처럼 우리는 구속을 받아 거룩한 자가 되었고, 또 그 거룩을 향해 달려 갈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속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오늘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에베소서는 4절에서 6절까지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고, 7절에서 12까지에 성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으며, 13절에서 14절까지에서 성령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성경을 잘 읽어보면 그 모든 일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성경은 일관성 있게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엡1:4-14)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셨고, 성자께서 실행에 옮기셨고, 그 것을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시키러 성령하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이루어지고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요? 그래서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다시피 우리의 구속사를 기록해 놓은 성경이 모두 ‘예수’를 설명한다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떠나서는 단 한발도 전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만을 구원의 길이라 주장하는 것이며, 다른 이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너무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댑니다. 심지어 같은 기독교라고 우기는 사람들 속에서도 다른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다양성 속에서 일치되는 것을 찾아 서로 서로 화합하는 사랑의 운동을 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코미디 프로에서도 군대에 간 신병이 주일날 종교 행사에 나가고 싶어 하니까 교회 다니는 고참이 초코파이 하나로 교회에 가겠냐고 유혹을 합니다. 그러니까 초코파이를 먹고 싶은 신병 왈 ‘나를 오늘부터 그리스도인이라 불러주세요’합니다. 그러다 법당에 다니는 고참이 초코파이 두 개에다 요구르트 얹어주니까 갑자기 ‘나무아미타불’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그렇게 초코파이 정도로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우스개 거리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게 현대 사회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초코파이만 먹을 수 있다면 하나님도 좋고 부처님도 좋다는 식의 종교관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다원적 종교관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런 다원적 종교관에 많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행복과 안녕을 약속만 해 준다면 어느 종교도 무방하다는 것이 오늘날 많은 이들의 신앙관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 욕하지 말고 서로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교회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신자들이 원하는 초코파이를 주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생명을 선물 받는 것입니다.

참 복음을 아는 자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만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고집스럽게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먼저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행4:12)

12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이거보다 어떻게 더 잘 설명합니까?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실존, 우리의 죄 된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면 예수로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께서 저를 대신하고 대표해서 십자가에서 죄를 도말해 주시는 방법 말고는 제가 구원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무조건 예수님만 붙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배타적이 될 수밖에 없고 독선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길도 있을 수 있다고 관용과 포용을 베풉니까?

물론 우리 기독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나쁜 의미로서의 배타적이며 독선적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싼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 한 종류의 성경 번역본만이 참 하나님의 말씀이고 다른 성경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악마의 성경을 쓰는 사람들이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거야 말로 독선이요, 배타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오직 문자적으로만 풀어내는 극단적인 세대주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신앙고백, 사도신경 이런 것은 완전 무시해 버립니다. 여러분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는 바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일목요연하게 잘 요약해 놓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니요. 벨직 신앙고백이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 이러한 신앙고백들은 모두다 당시의 이단들이 기독교를 왜곡시키려 엉터리 교리를 주장한데 대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반박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하셔서 숙지하셔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요즘은 ‘한글판이 진짜냐 영문판이 더 영감이 있는 것이냐‘로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고 욕을 먹어도 싸지요. 복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신들이 우기는 것만 진짜라고 주장하는 그러한 자들, 그들은 진짜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복음, 즉 예수의 보혈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고 다른 이름은 천하에 없음을 천명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배타적이며 편협하며 고집이 세고 독선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기에 나오는 말들인 것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소위 지성인들과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급속하게 번져 가는 것이 앞서 언급해 드린 ‘종교 통합’ 혹은 ’종교 다원주의‘라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예수님의 신성이 부인되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하셨던 모든 기적과 이사들이 현대의 과학으로 입증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예수님은 그저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위대한 스승의 한 사람으로 전락이 되어버렸고, 아울러 모든 종교는 다 한 목적을 향해 가는 것이므로 그런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의 삶을 본받아 열심히 노력하고 수행하면 우리는 구원에 이르고 해탈을 할 수 있다는 소위 종교 통합을 부르짖는 것을 가리켜 ’종교 다원주의‘라 합니다.

칼 라너가 ‘익명의 그리스도’라는 책에서 ‘포용주의’와 보편 구원론을 주장한지 얼마 안 되어서

폴 니터가 ‘다원주의’라는 것을 학문화 시켜 발표를 했고 지금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신학교 교수가 대놓고 그러한 주장을 하다 신학교에서 쫓겨나는 사태가 발생하고 종교 다원주의가 신학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라 혼란이 있을 때,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의 비교 종교학과 주임교수인 오 강남 이라는 사람이 ‘예수는 없다’라는 책으로 기독교계에 직격탄을 날렸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믿는 그런 신비적이며 신적인 예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서를 통해 이 땅에서 모범적인 시민으로 잘 살 수 있는 교훈이나 받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기독교계는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어떤 예수를 믿고 있는지가 정립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직격탄을 맞고도 뭐가 틀리고 뭐가 맞는 소리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무렵 한국의 큰 교회 목사님이 불교 대학인 동국대학교 불교 대학원 특강에 가서 기독교와 불교에 모두 다 구원이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했고,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부르짖으며 일약 한국의 스타목사님이 되신 분이 자기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오강남 교수를 신심이 깊고 훌륭한 신학자라고 칭찬을 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한국 기독교를 비롯하여 세계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버리고 훌륭한 삶을 살다간 성인, 인간 예수를 본받아 살겠다고 무리를 지어 정통 기독교를 비웃고 있습니다.

그러한 종교다원주의를 따르는 수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일선 목회의 현장에서 그런 사람의 아들 예수를 가르치고 있으며, 이 시대의 지성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오직 예수만을 부르짖었던 어머니의 신앙을 어리석은 맹종이라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다고 하면 학과에서 웃음거리가 됩니다.

서양에서도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가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하버드와 예일 등 청교도 신앙의 본산이었던 곳이 불교를 비롯한 동양의 신비에 무너졌습니다.

캐나나 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anada)의 총회장으로 선출된 빌 핍스가 1997년 11월2일자 Ottawa Citizen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캐나다 연합교회 실행위원회가 빌 핍스의 말에 인준을 하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원래 천주교가 지금의 기독교보다 더 배타적이었습니다. 오직 천주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가르쳤었습니다. 개신교 목사가 어떻게 해서 미사에 참석하게 되면 성찬식의 떡도 안줬습니다. 마귀 취급을 했습니다. 오직 베드로의 법통 후계자라고 하는 로마 교황의 권위 속에 들어 있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타라서 카톨릭은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인 교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타 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선언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그 후에 로만 카톨릭은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관대함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천주교인들은 피정을 통해 자신들을 돌아보는 수행과 실천의 종교로 방향을 틀어버렸기 때문에 불교나 힌두교 같은 수행과 실천의 종교를 무시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 세계종교 연합(WCC)에 이어 한국에서는 (URI)라는 종교연합 단체가 세워졌고 수녀와 원불교 교사들과 찬불가를 부르는 여인네들이 모여 합창단을 만들었습니다. 삼소회라고 부르더군요. 그리고 그들은 종교 간의 화해라는 명목 하에 수시로 함께 연합 수련회를 가집니다. 지난번 한국에서 있었던 수련회 강사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한국 복음주의 진영의 유명한 목사들 이었습니다. 그 개신교 목사님들이 그 종교연합 단체의 수련회에 가서 무슨 강의를 했을까요?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셨을까요? 그러셨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고집스럽게 예수만을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렇게 조롱합니다.

‘나이가 어릴 때는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줄 안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무지의 소치이다. 나이가 들게 되면 자기 아버지보다 인격적인 면에서 경제적인 면에서 외모에서 더 뛰어난 다른 아버지들이 보이게 되고 그 때에는 우리 아버지가 최고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만이 최고이고 다른 종교는 무시하는 그런 행동은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더 공부해 보면 다른 종교에서 기독교보다 더 귀하고 훌륭한 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되고 그 때에서야 기독교만이 최고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어릴 때 우리 아버지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크면서 보니까 우리 아버지보다 나에게 더 친절하게 대해주는 이웃집 아저씨가 더 좋은 분이란 걸 알았다고 치자고요. 그 분이 주는 초콜릿과 내게 보내주는 상냥한 웃음 때문에 정작 자기 친아버지를 버리고 이웃집 아저씨를 따라가서 살겠다고 하는 아이가 정상이겠습니까? 이가 썩을까봐 초콜릿을 자주 사주지 않고 공부를 못하면 불이익을 당하는 사회에서 잘 성장해 주기를 바라서 회초리를 들고 공부를 시키는 아버지에게서 그 사랑의 실체를 깨닫고 끝까지 그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이가 정상입니까?

‘만일 아이가 커가면서 아! 어른들은 모두 똑같구나. 자기 친아버지만 최고로 여기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야. 이 세상에는 우리 아버지보다 더 좋은 아버지가 많으니까 우리 아버지만 좋다고 하는 것은 바보짓이야.’하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가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떻게 그 자녀들을 사랑하셨는지를, 어떻게 그 분의 아들로 삼아 주셨는지를 모르는 그야말로 무지의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지 마호멧의, 부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비교 종교학이라는 것은 종교의 비슷한 공통점을 연구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점만을 보기 때문에 모든 종교가 다 한 길로 통하고 있다고 이야기들 할 만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교들과 다릅니다. 우리는 그 다른 점을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목숨 걸고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6X6=36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35라고 우기는 사람들의 답을 옳다고 인정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6하고 35하고 한 끝 차이인데 그냥 비슷한 거라고 넘어가자는 회유에 동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배타주의 ,독선주의라는 것은 여러 개가 비슷한데 그 중에 한가지만을 가지고 우기는 것을 배타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탁월하게 차이가 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은 배타주의라 하지 않고 ‘당연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난 당연히 마틴 기타와 소리나 기타의 차이를 압니다. 그래서 소리나 기타 열 개를 줘도 마틴 기타 한 대와 안 바꿉니다. 그것을 배타주의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종교에서만 그런 소리를 합니까? 저는 기독교의 탁월함을, 아니 유일함을 알기 때문에 다른 것에 눈 돌릴 가치를 못 찾겠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타주의요 독선주의로 몰아 부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들은 ‘종교란 것은 코끼리를 만지는 소경들이 코끼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모두 하나를 이야기 하지만 다른 부분을 보고 있기 때문에 의견이 다를 뿐’이라 합니다.

누구는 코끼리를 기둥 같다고 하고, 누구는 코끼리를 나뭇잎 같다고 하고, 누구는 코끼리를 뱀 같다고 한다는 것이지요. 다 다르다는 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코끼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고 언젠가는 완전한 코끼리를 깨닫고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온다는 것인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성경을 통해 ‘코끼리 전체의 몸’을 보았습니다. 코란이나 불경도 남 못지않게 읽어 보았지만 거기서는 코끼리 모양을 한 지푸라기들만 건드리다 돌아왔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디로부터 이렇게 역사에 던져졌으며, 왜 이 역사를 살아가야 하며, 어떠한 존재였고, 어떻게 될 뻔했는데 어떤 분의 도우심으로 구원을 받았고,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저는 다 압니다. 다리만 아는 것도 아니고 귀만 본 것도 아니고 정말 그 코끼리 전체를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일반은총으로 주어진 진리의 일부분, 다리나 귀나 꼬리만 가지고 자기들이 가진 것이 최고인양 떠드는 사람들을 향해 ‘당신들 그렇게 가면 큰일 난다’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방 부대에 가면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는 고참들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전방 부대에는 아직 제거되지 않은 지뢰들이 곳곳에 있어 길이 아닌 곳을 다니다가 6.25때 묻어둔 지뢰를 밟아 다리가 잘려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네, 마찬가지입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세요. 괜히 이 종교, 저 종교 기웃 거리지 마세요. 그러다 정말 큰일 납니다.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아는 우리도 그들이 가는 길 곳곳에 묻혀있는 지뢰를 보기에 안타깝게 외치는 것입니다. 다리만 잘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저주의 불 못에 빠져 버리는 것이 안타까워서 외치는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급물살을 타고 종교다원주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는 악마적 유혹일 뿐입니다.

오죽하면 유명한 무신론자이며 인본주의자인 마거니타 래스키가 Punch에 실린 그의 논설에서

‘현대의 기독교는 내가 부정할 필요가 없는 그런 저급한 종교가 되어버렸다. 현대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가르침은 예수나 성례와 전혀 상관이 없는데 왜 그들은 여전히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고 성례를 집행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나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과거의 기독교는 적어도 일관성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는 일관성도 자존심도 모두 버린 껍데기다’이게 웬 개망신 입니까? 무신론자들에게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기독교는 다른 종교처럼 자력 종교가 아닙니다. 나는 도저히 불가능함을 깨닫고,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구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입니다.

기독교 안의 종교 다원주의자 들은 대승기독교를 외칩니다. ‘대승 기독교’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대승불교’ ‘소승불교’라는 말은 들었어도 ‘대승 기독교’라는 말은 첨 들었습니다. 원래 ‘대승’ 이라는 말은 불교가 석가모니가 죽은 후에 여러 파로 갈리어져 서로 자기들의 교리가 옳다고 하고 있을 때, 그들 소승 불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일어난 불교운동입니다. 산스크리트어 ‘마하야나’란 말에서 온 것이 ‘대승’이란 말입니다. ‘많은 사람을 태울 커다란 탈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불교는 일체 중생을 위한 것이니 싸우지 말고 하나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빌려 ‘대승 기독교’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아니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불교 용어를 빌려 대승기독교가 뭡니까? 그들은 교파나 교리로 심지어 다른 종교와도 다투지 말고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여 하나가 되자는 것인데, 종교학의 창시자인 막스 뮐러의 말을 빌려 ‘하나의 종교만 아는 자는 아무 종교도 모르는 자‘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유의 하나님이시다. 힌두교의 하나님이시고 불교의 하나님이시며 기독교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종교란 삶의 현장에서의 실천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지 오직 자기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고집은 이제 전 근대적 발상이니 버려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들은 사랑의 정신, 화평의 정신으로 사회참여를 합니다. 해방신학과 민중 신학을 지지합니다. 그들은 역사 난관 론을 주장합니다. 종교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잘 살아내면 이 인류의 역사는 낙관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예수의 은혜로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은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지고지순한 사랑의 삶을 살다가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전선에서 투쟁하여 민중의 행복과 평등을 이루어 내야 한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것 하는 데 시간을 쏟으면 안 됩니다. 성경은 상위 권위에 굴복하라고 하십니다.

(롬13:1-2)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한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정부가, 위정자들이 백성들을 실망시키거나 아니면 배반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요즘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정부를 보면 바로 그렇습니다.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정부의 권위에도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까?

만일 우리가 북한에 태어났다면 김정일의 권위에도 순종해야 하는 것인가요? 국민의 세금으로 공무원들이 월급을 받습니다. 국회의원들을 비롯해서 정부 관료들도 모두 세금으로 월급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치는 뒷전이고 뒷돈이나 챙기고 이권에나 개입하고 새만금 사업이다 뭐다해서 혈세를 낭비하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세금이 제대로 쓰이지 않고 오히려 불경건하고 부도덕적인 데에 쓰이고 있다고 해서 세금을 안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떠세요? 분명 성경은 그럼에도 상위 권위에 굴복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다 따를 수도 없고 어디까지 따라야 하고 어떤 것을 거부해야 하는지 우리는 분별하고 있어야 하겠지요? 확실한 설명을 위해 한군데를 더 찾아보겠습니다.

(요19:10-11)

10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지금 이 구절에서 정부의 권위는 그 자체의 어떤 고유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부의 권위는 파생된 권위이며 따라서 책임도 갖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빌라도의 권세가 가이사 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권세, 권위로 해석되는 단어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 째로 ‘뒤나미스’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 자신의 폭발적인 힘을 뜻합니다.

그 말에서 다이너마이트, 다이나믹이라는 말이 파생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그 말이 쓰였습니다.

(롬1:16)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권세) 됨이라

두 번째로 권세(능력)이라고 번역되는 말이 ‘크라토스’ 입니다. 그것은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합법적인 권위 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서로 가보지요.

(히2:14)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권세)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바울이 로마서에서 권세에 굴복하라고 한 그 권세는 ‘엑수시아’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합법적인 권위라는 뜻입니다. 합법적인 권위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한 권세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정부는 신적인 인정을 받아 통치권을 행사하니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양이가 쥐를 죽일 권세 세균이 세균을 죽일 권세까지도 어느 것 하나, 하나님께로 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 그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책임까지 부여된다는 말입니다. 그 책임 있는 권위를 옳게 쓰지 못했을 때는 당연히 벌을 받게 됩니다. ‘엑수시아’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책임이 따릅니다. 예수님도 빌라도에게 네게 권세를 주셨지만 그 권세에는 그 주신분의 도덕적 기준에 맞는 책임이 따라야 하는데 너는 그렇지 못한 결정을 내렸으므로 ‘죄 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권세를 주었다고 자기 마음대로 막 쓰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의 몫이고 우리는 그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길을 갈 때 차가 하나도 없고 위험한 요소가 없는데도 스피드 리밋이 20마일이라면 그렇게 가야 하는 것입니다. 정부가 세금을 어떻게 쓰던 그것이 법이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옳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이므로 체제를 전복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경찰에게 주어진 그 권위에도 우리는 굴복해야 합니다. 공직자들에게 주어진 권세에 따라야 합니다. 자동차 주행 속도 잘 지켜야 합니다. 존 캘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악한 통치자들에게까지 복종해야 한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한 바대로 자기들의 공직을 정직하고 바르게 수행하는 방백들의 권위에 뿐 아니라 어떤 수단을 통해서든 일을 통제할 주장 권을 가진 자들 심지어 방백의 직무를 조금도 수행치 않는 자들의 권위에도 복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말도 안 되는 무식하고 무지한 지도자들이나 상위 권위자들을 통해서 고난도 만들어 내시고, 억지도 만들어 내시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양육하시고, 악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도 폭로하시는 등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위 권위자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세계 선교 대회에서 ‘김정일 체제 하에서는 예수를 마음 놓고 못 믿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기도로 전복 시켜야 지요‘라고 외치시는 어떤 선교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김정일이 다스리는 북한에서는 예수를 못 믿습니까? 북한에 진짜 기독교인이 많을까요? 이 풍요의 땅에 진짜 기독교인들이 많을까요? 그건 여러분의 심중에 대답해 보세요. 여러분 정말 이 곳에서 예수 때문에 목숨을 거실 일이 있습니까? 정말 예수 때문에 목숨 걸 일이 닥치면 자신 있으세요? 그런데 북한에서는 그런 신앙인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무조건 다 따라가야 하나요? 상위 권위자들의 하는 것은 무조건 다 따라야 합니까?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 그 한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지요?

첫 번째로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계명에 위배되는 것은 절대 따르면 안 됩니다. 그 계명에서 유추되는 도덕 기준도 어겨서는 안 됩니다. 상위 권위자가 사람을 죽이라고 한다고 해서 살인을 저질러서는 안 되잖아요.

그리고 두 번째로 복음전파에 관해서 방해를 받게 될 때는 그 권위에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대로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큰 소동이 났고 예루살렘의 장로들과 관원들과 대 제사장들 앞에 즉, 공회에 소환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조사했고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병자가 나았고 예수님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참 복음을 그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그 이적이 너무도 분명하여 그 관원들도 부인을 할 수 없었기에 제자들에게 다시는 그 도를 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는 판결을 하고 문제를 수습했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행4:16-21)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불과 얼마 전에 예수를 못 박아 죽여 버린 원흉들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절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방해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 이외에는 모든 권세에 다 복종했습니다.

바울이 사람을 모아 로마를 몰아내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지도 않았고, 사도들이 열심히 로마와 싸우는 열심당원들과 동조하지도 않았습니다. 노예제도를 없애자고 민중을 선동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종들아 상전들을 대할 때 주님께 하듯 하라’고 충고를 했습니다. 왜요? 그 종의 자리에서도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 무럭무럭 성숙해 갈 수 있으니까요. 사도는 그런 세상적인 계급이나 이데올로기, 처지나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회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잘 성숙되어 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은 체제가 바뀌고 이데올로기가 변한다고 해서 오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이 땅에 지상 천국이 올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도가가 바뀐다고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공산주의 민주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어야지 체제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노예제도를 놔둬야 하나 없애야 하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예제도가 있어도 주인이 노예를 가족처럼 여기고 단순히 이 땅에서의 역할에 따라 우리가 지금은 노예고 주인이지만 저 하늘나라에 가면 다 같은 천국 시민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면 그게 뭐가 나쁩니까?

노사 갈등이 있고 노동자들이 불이익을 당한다고 해서 꼭 노동자들만 불쌍한 것입니까?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타버릴 지옥에 가야하는 불쌍한 자들입니다.

절대 밥 몇 숟가락 더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불쌍하지 않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불쌍하다는 논리는 다분히 세상 적인 관점인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고 돈이 많은 사람은 우월한 사람이라는 개념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를 모르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체제를 전복하고 지도자를 바꿔서 세상을 바꿔 보겠다는 착각은 버리십시오.

그러면 오히려 돈이 많아서 혹시 그 돈 때문에 예수를 간절히 바라지 못할 수 있는 간부들을 더 불쌍히 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가치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큰 음이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그러한 거룩의 삶을 경주하지 않고 틈만 나면 데모하고 노사 분규 일으키고 손가락 잘라서 피를 나눠 마시고 별 짓을 다 합니다. 전부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아서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의 지상 낙원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저 천국을 소망하며 오히려 손해보고 살겠다고 결단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는 사회참여를 핵심으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는 과정에서 사회가 영향을 받을 수는 있겠으나 그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수행과 득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천주교에서도 피정을 통해 참다운 자아를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불교도 참선과 수행을 통해 해탈을 꿈꿉니다.

그래서 불교에도 이판과 사판이 있고 천주교에도 수도사들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참선하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을 받고 그 예수를 믿는 것 이외에는 아무 방법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세요.

(행3:1-10)

1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기독교 내의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예수는 위대한 스승이며 소중한 윤리적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준 훌륭한 성인이므로 우리는 열심히 그 분을 본받아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개발하여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고, 타종교에서는 구원이 우리의 수행과 고행과 노력과 열심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위의 본문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그 앉은뱅이에게 ‘좋아, 친구 자넨 평생 제 발로 걸어 본 적이 없지만 우리가 고쳐 줄 수 있네. 자, 우리한테는 이런 치료 과정이 준비되어 있다네. 알겠지만 잘못은 자네한테 있는 걸세. 아예 희망을 잃고 근육을 써볼 생각도 안하지 않았나. 자네 자신이 노력해야 하네. 처음엔 아무 소용없는 짓처럼 보이겠지만 그래도 집중하면서 의지력을 동원해야 한단 말일세. 일단 오른쪽 다리근육을 움직여 보게. 천천히 발을 들어서 조금씩 움직여 보는 거야. 그 다음엔 왼쪽 다리도 똑같이 해보게, 그럼 서서히 회복이 되면서 힘이 붙는 걸 느낄 거고 마침내 설수 있게 될 걸세.’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라고 한 마디 했고 그 즉시 앉은뱅이는 일어나 걸었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이름’이라는 것은 예수의 ‘권세(power)’라는 뜻입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구원은 있을 수 있고, 그 예수를 믿으면 그 즉시 구원이 임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교사도 선생도 본보기도 아닙니다. 그분은 ‘구주’이십니다. 어떻게 훈련을 쌓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갈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예수는 단순히 여럿 중 으뜸이 아닙니다. 오직 그 분만을 통해서만 구원이 있습니다. 오직 한분 그 분만이 ‘구주’이십니다.

성경은 수행을 통해 도를 깨닫고 이 세상에서 이웃과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자비를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을 최고의 교훈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은 이웃과 화해할 것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봉사의 삶을 살 것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중심 주제가 아닙니다. 그들이 겁 없이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도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타락한 인간이며 그 죄라는 것이 얼마나 끈질기고 무시무시한 것인지 모르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자, 또 복음을 한 번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죄를 용납하실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에덴이라는 곳에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살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영원한 생명을 주겠지만 죄를 지으면 쫓아내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죄를 지었고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하나님은 본성을 거스를 수 없으신 분이시다. 그 분은 죄를 못 본체 하실 수 없다.

못 본체 한다는 것은 거짓을 행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거짓을 행하실 수 없으신 분이시다.

그 분은 본질상 죄와 어둠과 가까이 하실 수 없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반드시 죄를 지은 자들을 벌하셔야 한다.

그런데 죄를 지은 인간들은 그 하나님의 요구에 응할 수 없이 완전히 타락을 해버렸다.

그래서 도저히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인간은 마치 타이타닉호가 좌초되었을 때 그 빙하가 떠다니는 바다에서 꼼짝 못하고 누군가가 와서 건져주기만을 간절히 원하는 그런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서 건짐을 받아야 한다. 절대 우리 힘으로 육지로 헤엄쳐 갈 능력이 없다.

하나님은 거룩이 시기에 우리 죄인이 그 앞에 서면 우리는 드라큐라가 햇빛에 녹듯이 녹아버린다. 시내 산에서 죄가 해결되지 않은 자들이 하나님께 보이면 돌격하여 죽여 버리시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그 점도 없고 흠도 없이 그림자도 없으신 완전한 거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사죄를 하려고 해도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없다.

누군가가 우리 대신에 우리와 하나님의 중간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 홀로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려와서 이스라엘에게 이야기 해 준 것처럼 그러한 중재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과 대면해서도 살아남기 위해선 죄가 없는 존재여야 한다. 그리고 인간과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야 하며, 아울러 인간들의 대변인이 되기 위해서는 완전한 인간이어야 한다. 그런데 아담처럼 완벽한 사람도 타락을 했다. 인간 중에는 죄가 없이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 존재가 없다. 그런데 인간이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직접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이 완전한 인간으로 또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어주심으로 우리가 건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 주실 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셔야 한다. 마호멧은 사람이다. 석가모니도 사람이다. 강증산도 사람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분이시다. 그래서 기독교만이 구원의 길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절대 우리에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시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시범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그대로 살라고 요구하러 오신 분도 아니시다.

우리는 구조선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아무리 유명한 수영강사가 와서 헤엄치는 방법을 2박3일 강습을 해주고 간다 해도 인간의 힘으로 헤엄쳐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닌 것이다. 그만큼 죄인들은 의에 대해 힘이 빠져있고 , 게다가 하나님의 요구는 너무나 멀기 때문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우리에게 헤엄을 가르쳐서 우리 힘으로 바다를 건너 살게 해 주겠다고 오신 것인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건져내서 등에 얹고 예수님께서 헤엄을 쳐서 그 죽음의 바다에서 구출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바다를 다 건널 때까지 우리를 등에서 내려놓지 않으시겠다고 약속도 하셨다. 건져놓고 혼자 건너가신 것이 아니라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등에다 얹고 헤엄쳐 가고 계신 것이다.‘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여기에 어디 촛불 집회가 들어갈 구멍이 있으며, 여기에 어디 우리의 노력이 비집고 들어갈 구멍이 있습니까?

그러면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무엇을 하실까요? 우리가 고난당할 때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가 갈 길 잃어 헤맬 때 우리를 조명하시며 끝까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히2:18)

18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4:15)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봐야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모두 걸레짝처럼 더러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신분이 어떻게 이렇게 변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결심과 결단과 의지가 얼마나 오래 갈 것 같으세요? 우리의 의지로는 담배도 하나 제대로 못 끊습니다. 예전에 성욕을 걷어 내기 위해 거세(去勢)를 했던 어떤 기특한 무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자 신문에 ‘돈을 얼마든지 낼 테니 자기의 남성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기증자를 구하는 광고를 냈더라고요. 인간의 결심은 고작 이정도입니다.

(렘13:23)

23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전1:14-15)

14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15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구원에 도달 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가 좋은 책이 없어서 이 모양인가요? 좋은 문화기관이 없어서 이 모양입니까? 좋은 교육기관이 없어서 이 꼴인가요?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보기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교육과 훈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즉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열심히 연습해서 걸어라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즉시 일어나 걷는 것’이 구원입니다. 지금 믿으세요. 죄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저주와 심판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실 때 우리가 그 안에서 함께 죽었고 그 분이 모든 죄를 다 해결하시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하실 때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났습니다. 그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요구하시는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 자들이 되었고 그 예수 안에서 우리는 지금 이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원은 그렇게 오직 예수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허탄한 가르침에 속지 마세요. 정신을 차리십시오.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 아닙니까?

6X6=36이지 6X6=35가 아니라니까요? 36에서 하나정도 틀렸는데 35도 비슷하니 맞게 해주자 는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교리를 배우시고 거기에 목숨을 거십시오.

(사45:20-22)

20이방 나라에서 살아남은 자들아, 모여 오너라. 다 함께 가까이 오너라. "나무 우상을 들고 다니는 자들과, 구원하지도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다.

21너희는 앞일을 말하고 진술하여 보아라. 함께 의논하여 보아라. 누가 예로부터 이 일을 들려주었으며, 누가 이전부터 이 일을 알려 주었느냐? 나주가 아니고 누구냐? 나밖에 다른 신은 없다. 나는 공의와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니, 나밖에 다른 신은 없다."

22땅 끝까지 흩어져 있는 사람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서 구원을 받아라. "내가 하나님이며, 나밖에 다른 신은 없기 때문이다.

(요3:36)

36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진짜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 있습니다. 그것은 편협하거나 독선적이거나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이 워낙 탁월하기에 다른 것과 비교하기도 싫은 것입니다.

속지 마세요. 껍데기가 화려하다고 해서 모두가 속이 실하지 않습니다.

st-font�20iy��� � ont-family:굴림;mso-hansi-font-family:굴림;font-weight:bold;">(고후5:19-21)

19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하나님은 그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아예 기억조차 하시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우리가 저지른 파렴치한, 남에게 몰래 숨기고 싶은 그 모든 죄들을 하나님께서 기억치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만 천하에 드러나면 천국에서도 얼굴 뜨거워서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레위기 16장의 수 염소 ‘아사셀’에게 죄를 전가시켜 저 보이지 않는 광야로 쫓아 보내심 같이 우리 죄를 보이지도 않게 없애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렘31:34)

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히10:17)

17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잃지 않으시면서 또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부어주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십자가에서 쏟게 만드셨습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문 6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쓰지 않고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로 쓰고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굳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을 쓰고 있는지 생각해 보셨어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쓰여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발적으로 쓰여 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사도 바울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고 표현을 한 의도가 분명히 있을 텐데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는데 그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 분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자 하나님’이란 것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습니다.

(마3:17)

17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17:5)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이렇게 우리 주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품속에 계시던 아버지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이었습니다.

(요1:18)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의 품속에서 하나님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죽이심으로 우리에게 구속이 주어졌다는 사실, 그 사실을 사도는 이러한 단어들을 동원하여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본체가 같으시며 본질이 같으시고 영광과 거룩과 모든 신성이 동일하신 분이셨습니다.

(히1:1-3)

1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토록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자 아들이 이 땅에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초라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서 완전한 축복을 누리고 계셨던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강보가 없어서 구유의 짚더미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셨고, 그 아들이 당연히 죄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아버지는 아셨습니다. 그리고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아들에게 벌레 같은 인간들이 돌을 던지는 것을 보셨고,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상처를 내고 배척을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아들을 조롱하며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조롱 속에서도 참으시는 것을 보셨고 그 사랑하는 아들이 아버지와의 단절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급기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 그 모습까지 보시면서 하나님은 견디신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한 사랑 안에 영원한 축복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그 지경까지 낮아지셨으며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의 분량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 사랑하는 자 안에서 구원을 얻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동일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17:23)

23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자기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진리입니다.

(골3:12)

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살후2:13)

13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주께서 사랑하시는 우리의 신분이 어떤 신분인지 조금 이해가 가십니까?

죄의 장막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해 할 수 없었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에게 떨어질 저주와 심판을 다 받게 하시고 우리의 죄가 되게 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여 버리심으로 그 죄의 장막을 찢으셨고 우리는 더 이상 정죄 받지 않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근거도 찾지 않으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이며 우리를 완전한 구원으로 만드실 완성된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나는 아직 그리스도인으로 부를 수 없어, 난 아직 그만큼 선하지 못해’ 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그 엄청난 은혜 앞에서 ‘난 지금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오직 그 예수를 의지하며 그분의 하신 일 안으로 숨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항복에서 우리의 수고와 열심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어진 공짜 선물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