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89. 영생은   (요17:2~3)

은바리라이프 2013. 10. 4. 12:44

89. 영생은

 

(요17:2~3)

17:2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1)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육체에게'

17:3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과연 영생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떠한 이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영생은 지금도 살 수 있는 삶인지, 아니면 우리가 죽고 부활한 뒤에나 오는 것인지에 관해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영생을 한 마디로 정의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말이 이해가 가세요?

 

사람들은 ‘영생’하면 대개 ‘영원히 사는 것’을 생각합니다. 즉 부활과 영생을 함께 생각하여 죽은 자가 다시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존재하는 것을 영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인가 하면 현재와 영생을 별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결국 현재는 나중에 주어질 영생을 위해 예수를 믿어주는 과정으로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영생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잘못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영생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라는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물론 신자는 부활하여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산다는 것은 신자에게만 주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자들이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요5:29)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 6장 28절에서 배웠지요? 그렇다면 악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말씀을 안 드려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선한 일을 한 사람과 악한 일을 한 사람이 모두 다 부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행24:15)

15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렇게 부활은 선한 일을 행한 자나 악한 일을 행한 자 모두에게 주어지는 일입니다. 다만 생명이냐, 사망이냐가 다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부활이되 생명의 부활이 있는 반면 사망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영생을 단지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여러분, ‘영생복락’이라는 말 좋아하시지요? 영생은 복이며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영생이 무엇이기에 신자에게 복이 된다는 것일까요?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성실하게 존재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력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하나님의 뜻대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피조물들에게 충만하게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복’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존재의 상태를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영생을 ‘다가올 세대의 생명’이라고도 하고 ‘신적 생명’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영생’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라 정의를 해도 되겠지요?

그런데 그 삶은 하나님의 크심과 그 분의 성품과 그 분의 능력을 알며, 자기 자신의 무력함을 아는 것에서 비로소 격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영생을 가리켜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피조물 중, 도덕적 피조물인 천사들과 인간들 사이에서 불순종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 합니다. 죄는 영생의 삶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영생은 순종을 전제하는 삶인데 불순종이라는 죄가 들어오면서 도덕적 피조물들에게 주어진 그 영생이 파괴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라고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대신에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하나님마저도 자신의 종으로 삼아 사는 자아숭배의 삶을 택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한 자아숭배의 삶, 불순종의 삶을 사는 죽은 자들에게 다시 생명을 허락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다 도말하시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의 삶, 즉 영생을 완벽하게 살아내시고는 그 삶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은혜의 선물로 전가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죄 없는 삶, 순종하는 이의 삶인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요6:51,54)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의 덕분으로 영생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여전히 이 죄악의 세상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일정 기간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영적으로 죄와 무관한 사람들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 자들이 되어 영생을 소유한 이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육신의 몸과 죄악의 세상의 영향 아래에서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 여전히 사망의 세상에서 사망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어떻게 영생을 삽니까? 그게 가능한가요?

 

이제부터 고민을 좀 해 보자고요. 영생은 죄가 없는 상태이며, 순종의 상태를 말합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성품이 투영된 신적생명이며, 다가올 세대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우리는 영생의 삶과는 전혀 다른 불순종과 죄악의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좇아 살려고 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며 우리의 뜻에 그 분의 뜻을 맞추려 합니다. 그건 순종이 아니잖아요? 순종의 범주를 벗어난 것은 영생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에게 영생을 살라고, 영생을 취하라고 요구를 합니다.   

 

(딤전6:12)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 하였도다

 

영생은 이미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하면서 한쪽에서는 영생을 취하라고 강력하게 요구를 하십니다.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이를 악물고서라도 순종의 삶을 살아내라는 것인가요? 혀를 깨물면서라도 죄를 멀리하라는 것인가요? 만일 그런 것이라면 어느 정도까지 살아내야 영생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까? 어느 정도까지 순종을 해야 합니까? 커트라인이 있을 것 아닙니까?

 

(신18:13)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 하라

(약2:10)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이게 바로 하나님이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의 커트라인입니다. 그렇다면 영생을 취하라는 말이 과연 완전한 순종과 완전한 율법지킴을 향하여 분투하며 애를 쓰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영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이 땅에 계시하러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자로, 순종한 자로 영생을 살 수 있는 길은, 이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내신 후 우리 성도들에게 무상으로 전가시켜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성도가 이 세상에서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 칭하신 곳이 또 있습니까? 여기 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당신을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자기계시를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영생은 메시아이신 예수의 오심의 이유를 알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당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 칭하신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을 사는 유일한 길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영생은 환경과 조건이 변하고, 그로 말미암아 행복과 평안이 오는 그런 것, 혹은 우리의 삶이 순결하게 업그레이드되어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고 무력한 자신의 삶을 폭로당하며 면목 없이 사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죄가 사해졌고, 완전한 순종의 사람으로 여겨주셨다는 믿음으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비록 이 모양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힘에 의해 반드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완성이 될 자신의 종말적 현실을 굳게 믿는 것을 영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자신이 이 죄악 된 세상에서 겪고 있는 모든 상황들이 자신에게 영생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주관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 상황에 순응하는 삶,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현실을 인정하고 이겨내는 것, 그것이 영생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영생을 사는 이들은 그렇게 행복하고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면목 없고, 죄송하고, 몸 둘 바를 모르는 그러한 자기 인식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꼭 붙들고 사는 그런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한 자기부인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십자가 뒤로 꼭꼭 숨어 버리는 삶이 바로 영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렇게 사셨잖아요? 그렇게 영생을 사는 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철저한 자기인식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요5:24)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3:14~16)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36)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렇게 죄인들은 자신들의 영생에 전혀 기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을 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의 공로만을 믿고 의지하는, 영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행13:48)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영생이 누구의 손에서 작정이 된 것이지요? 하나님입니다. 영생은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작정이 된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의 순종의 삶을 창세전부터 계획하고 확정하고 계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영생의 시작도 하나님이요, 영생의 수여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딛1:2)

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그렇지요? 영생은 하나님에 의해 창세전부터 준비되고 작정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작정이 역사 속에서 실현이 되는 것이 바로 성도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시면 되는 거예요. 그게 영생을 사는 삶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뭐 대단하게 이 세상에서 이루어 내려 하지 마세요. 율법에 묶여 자신을 너무 비하하지도 마세요. 왜 호세아 선지자가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며 지켜내려 애를 썼던 이스라엘에게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외쳤겠습니까? 율법으로는 영생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사로는 생명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알라고 외친 것입니다. 여호와를 알고 너희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절대 율법으로, 제사로, 선한 삶으로 하나님의 영생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니까, 여호와를 아는 것으로 영생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즉 성경을 잘 지켜서 영생에 이르려 했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율법의 성격이 그렇듯이 성경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예수의 필연성을, 십자가의 필연성을 깨달아 알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성경에서 영생을 얻으려 하지 말고, 즉 그거 지켜서 영생에 이르려 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계시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요5:39~40)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성경은 예수의 필연성을 가르치시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거기에 적힌 것대로 살아내어서 구원에 이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몇 가지 비유를 들어서 영생의 본질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는데 그 중,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영생의 본질을 확인해 보고 오늘 공부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곡해를 하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이웃 사랑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 사랑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라 영생의 본질에 대한 설명인 것입니다.

 

(눅10:25~29)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묻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능통한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서는 뭐라 하더냐?’하시며 다시 되물으십니다. 그랬더니 율법사가 훌륭하게도 신명기 6장의 쉐마로 율법을 잘 요약하여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바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아주 잘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네 대답이 옳으니 이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거기까지만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의 몫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잘하면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잘 보셔야 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커다란 반전이 있습니다.

 

그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즉 자신은 충분히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누가 내 이웃입니까?’하고 묻습니다. 누가 이웃인지 말만해주면 다 사랑해 버리고 말겠다는 기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이웃을 스스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절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절대 이웃이 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웃은 자기들과 같은 민족, 혹은 자기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믿고 자기 민족으로 편입이 된 사람들에 한해 이웃을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민족과 종교가 같고, 한 가지 뜻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그런 사람들만을 이웃으로 규정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쉬웠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사는 자신 있게 ‘누가 내 이웃입니까? 말만 하세요. 제가 가서 죽도록 사랑해 버리겠습니다.’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영생의 본질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눅10:30~37)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어떤 이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을 만치 맞았습니다. ‘거반 죽은’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헤미다데스’는 ‘거의 죽다, 완전히 기진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강도 만난 사람은 숨만 겨우 쉬고 있는 상태로 완전히 자아방어 능력을 상실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당시에 아주 유명한 강도 출몰 지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성전이 있는 곳이었고 여리고는 제사장들과 레위인 들이 약 만 이천 명 정도가 살고 있는, 성전 섬김이 들의 집단 거주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노린 강도들이 수시로 출몰을 하여, 제사장들이나 레위인 들이 마차나 말 등에서 절대 내리는 일이 없었고, 도보로 다니는 사람들도, 무리를 지어서 다니거나 길에서 멈춰서는 일없이 바삐 오가던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강도들의 미끼가 길에 던져져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길에 넘어져 있는 사람들을 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지켜지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강도들의 일행이, 강도를 만나 신음을 하고 있는 여자나 노약자로 가장해서 길에 누워있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길을 가던 사람들이 길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보고서도 그냥 바삐 지나가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강도만난 사람이 거의 죽어서 누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를 묻는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만난자의 이웃이냐?’라고 되물으시지요?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은 그 율법사를 누구에 비유하고 계신 것입니까? 강도만난 자에 비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고,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고 하는 율법사에게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네가 바로 은혜와 긍휼을 입어야 할 강도만난 자’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본주의에 빠져 율법지킴을 구원의 방법으로 알고 있는 이들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그 상태가 바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강도만난 자로 비유되고 있는 율법사는 무엇을 강탈당한 상태라는 것입니까? 강도만나 거반 죽어있는 자가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라면 그 강도만난 자는 무엇을 빼앗긴 상태입니까? 하나님을 잃은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은 자들을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라고 하니까요.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야 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가 뱀(마귀)이라는 강도의 속임수에 속아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죽어있는 상태가 바로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강탈당한 채 죽어 있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이 뻗칩니다. 구약의 율법과 제사를 상징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강도 만나 거반 죽은 자를 보도고 그냥 지나갑니다. 손도 못 댑니다. 그건 율법과 제사로는, 하나님을 잃고 거반 죽어있는 상태인 강도 만난 자를 절대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쳤다고 해서 그들의 매정함을 나무라는 데에만 집중하면 안 됩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 들은 성전으로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길 아니면, 제사를 지내고 집으로 내려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 부정한 것을 만져서는 안 되는 성전의 섬김이 들이었고, 율법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나 마차에서 내리거나, 멈추어서 얼쩡거릴 수 없는 그런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강도만난 사람은 강도들의 미끼일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을 반응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은 긍휼의 마음보다는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다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제사장들과 레위인 들을 매정하고 매몰찬 자들로 몰아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제사, 즉 행위는 절대 강도 만난 자를 도울 수 없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웃 사랑은 사람의 행위에서 생산되어 나올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사마리아인이 다가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유대 땅입니다. 유대 땅에서의 사마리아인은 개 취급도 못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 유대사람들의 원수였습니다. 오죽하면 유대인들은 너무나 장사가 안 돼서 굶어 죽기 일보 직전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위험한 땅에 율법주의의 이방인이자 유대주의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곳은 율법의 땅의 상징인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잇는 유대 땅입니다. 그곳은 성전과 그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거주지를 잇는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강도들의 땅이며 원수들의 땅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그곳에서 그 누구에게 붙들려도 죽음을 당하게 되는 그런 곳입니다.

그 율법의 땅, 강도들의 땅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이방인, 율법의 화신인 유대인들의 원수가 사마리아인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안위와 유익을 위해서는 거반 죽어가는 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 형식적인 율법과 제사의 땅에 진짜 선한 이방인이, 원수들의 땅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위험을 무릅쓰고 원수를 살려냅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원수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생이며,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인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이웃인 예수에 의해 사랑을 받고, 섬김을 받아 주어지는 것이라는 구원과 영생의 본질을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의 땅, 죄인들의 땅, 율법의 땅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십자가의 삶, 은혜의 삶을 가지고, 원수인 강도 만난 자들을 구원하러 오신 이 세상의 이방인인 선한 예수가 바로 그 사마리아인으로 비유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면목 없는 강도만난자의 모습으로 영생으로 가야 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평생을 인본주의라는 뱀의 아가리 속에서 살아온 죄인들은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자신의 영생에 자기도 뭔가를 기여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오직 은혜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처럼 낯설고 미운 것입니다. 아니 원수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일 강도를 만나 예루살렘 길에 쓰러져 있던 그 사람이 조금의 힘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았을까요? 절대 안 받습니다. 왜 치사하게 남의 도움을, 그것도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습니까? 그게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나선 타락한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게 되었지요? 거반 죽었거든요. 거의 죽어서 사마리아인이 이리 굴리면 이리 구르고, 저리 굴리면 저리 구르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거부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항복하지 않고 있는 성도들이 바로 그 자리로 해체되어 가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할 때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헤미다네스’ 거반 죽여 버리십니다. 그게 자기부인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그렇게 거반 죽어, 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의지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만을 의지하여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에게 내 뜻, 내 꿈, 내 비전, 내 야망, 내 의견, 내 주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속 우리를,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헤미다네스’ 거반 죽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의 은혜만 붙들라고, 이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십자가라는 하늘의 삶의 원리를 들고 이 땅에 오신, 세상의 이방인이신 예수를 붙들라고 우리를 거반 죽이시는 것입니다. 왜 죽은 자들이 자신들이 죽은 자라는 걸 인정하지 않고 마치 산자들처럼 기고만장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세상에 대해 살아있고 하나님에 대해 죽은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진짜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산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티끌처럼 겸손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펄떡 펄떡 뛰는 당신의 백성을 거반 죽여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거부하시면 안돼요.

우리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져 주라고, 당해 주라고, 섬겨 주라고, 십자가를 지라고, 용서해 주라고, 요구하시면서 우리를 치유하고 계시는 그 선한 사마리아인인 예수의 말씀을 듣고도, ‘이 이방인이 왜 이렇게 낯선 이방나라 말만 하고 있는 거야?’하며 계속 거부하다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철장으로 거반 죽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시키시는 예수님의 치료를 순순히 받게 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반복하여 외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십자가를 지라’

조금이라도 살아있으면 안 됩니다. 그건 영생 얻은 자의 삶이 아닙니다.

 

(마18:8-9)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을 의지하고 있다하더라도 다 잘라내시겠다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게 팔 다리라도 잘라내신다고 하시는데 하물며 돈, 명예, 자존심, 자식, 건강 이런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런 것을 힘 삼아 펄떡 펄떡 뛰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그냥 놔두시겠어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반 죽이십니다. 반드시 자기 부인을 시키십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어절의 진의가 무엇인지 이제 잘 아시겠지요? 어서어서 여러분의 티끌 됨을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공로만을 꼭 붙드세요. 그게 이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는 자의 올바른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