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 예수님의 기도와 눈을 뜬 자들의 기도(I)
(요9:26~31)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 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눈을 뜨게 된 소경이 바리새인들에게 대단한 조직신학적 교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죄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소경은 창세 이후로 아무도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근거로 창세 이후로 이 세상에 온 자들이 모두 죄인들임을 선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하여 소경인 자신의 눈을 뜨게 한 분이 있으니 그 분은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셨다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죄인이 아닌 것이며 31절의 말씀대로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이 소경의 주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 분을 못 알아보고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바리새인들을 죄인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소경의 주장은 아주 논리적입니다.
소경이 자신의 주장에 담고 있는 복선은 이러한 것입니다.
‘당신들이 지금 나의 눈을 뜨게 해 준 분을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있는데 그건 지금 당신들은 당신들 스스로를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결과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 눈을 뜨게 한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이 죄인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는 예수님이다.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냐?’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기도를 들으시나요?
(롬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경은 사실 우리가 무엇을 구할지도 모르는 기도에 있어서 문외한임을 밝힙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를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했는데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는 분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우리 성도들의 모든 기도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걸러져서 멋지게 그 분의 기도로 바뀌어 하나님께 올라간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5: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표준 새 번역)
그가 그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을 때에,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히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계8:3-4)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잘 보시면 예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데 그 기도가 그냥 올라가지 않고 어떠한 향연(향의 연기)과 함께 섞여서 하나님께 올라가지요? 그 말은 성도들의 모든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섞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즉 향연과 함께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들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를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 것입니다.
(딤전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8: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당신의 기도인 향연을 섞어서 그 기도를 경건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주님의 기도로 만들어 하나님께 올려 보내신다고 하시는데 그 기도는 무엇으로 수렴이 되겠습니까? 분명히 우리의 기도는 점점 변하여 우리 주님의 기도 화할 텐데 그 기도의 내용을 알아야 우리도 올바른 기도를 하는 데에 힘을 쓸 것 아닙니까? 지금부터 한 번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우리의 기도는 궁극적으로 어디로 수렴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먼저 누가복음으로 가 보겠습니다.
(눅18:1~8)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 성도가 항상 기도해야 할 것이 있음과 그 기도의 응답이 속히 오지 않는다고 해서 낙망하지 말라는 주님의 권고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과 선한 하나님의 대조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끈질기게 반복되는 과부의 강청과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comparison이 아니라 contrast입니다.
이 비유를 하나님께 끊임없이 강청하여 조르면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나님도 두 손 두 발 다 드시고 결국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그런 강청기도의 능력으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비유는 전혀 그러한 내용이 아닙니다.
기도는 양이나 횟수에 의해 그 응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지금 이곳에도 단순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기도의 횟수나 기도의 시간에 감동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며 백 일 기도, 천일 제단, 사 십일 금식기도, 한 달 철야기도 등의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건 하나님을 잘 못 알아도 한 참 잘 못 안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상황과 진심과 여건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많이, 무조건 오래, 무조건 끈질기게 기도한다고 해서, 강청을 한다고 해서 마지못해 응답을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식물인간이 된 아들을 위해 밤낮으로 금식하며 열심히 기도하던 어머니가 그렇게 30일이 지난 후 탈진을 해서 밥을 먹고 다시 기운을 차려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아들이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고 해 보세요. 어머니가 아들을 보내며 ‘하나님께서 우리 아들이 이 죄로 어두운 세상에서 더 이상 머무는 것이 안쓰러우셨는가 보다.’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 아들의 요절(夭折)을 통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또 그로 인해 슬퍼하면서도 천국의 소망으로 기쁘게 아들을 보내는 가족들로 인해 천국 백성들의 믿음을 세상에 보이시려나 보다.’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먼 훗날 그 어머니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왜 그 때 제가 그렇게 열심히 강청하여 기도를 했는데도 우리 아들을 먼저 데려가셨어요?’하고 물었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그 때 네 아들을 살려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네가 겨우 30일 지났는데 금식을 깨고 밥을 먹더라. 한 열흘만 더 참지 그랬어. 그랬으면 내가 살려 주었을 텐데. 안타깝지만 지난 일이니까 잊어버려라’하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이 다스리시는 나라에 영원히 함께 사시겠습니까?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여러분이 똑같이 사랑하는 두 명의 자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녀석은 무언가가 갖고 싶으면 길바닥에 누워서 부모가 그 것을 사 줄 때까지 조르는 막무가내 형의 아이이고 한 녀석은 자기가 갖고 싶은 게 있어도 속으로 꾹 참고 부모님의 경제 사정과 다른 형제들에 대한 배려로 부모님께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 순종형의 아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언제나 그 두 아이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고요. 그럴 때 여러분은 막무가내로 길바닥에 누워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야 마는 그런 아이의 부탁만을 들어주십니까? 그리고 부모님을 생각하고 다른 형제들을 배려하여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 아이는 평생 아무 것도 안 사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기도의 정당성이나 유익함 등을 고려하지 않으시고 무조건 간절하고 절박하게 땡깡을 부린다고 다 들어주신다면 이 세상은 얼마못가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기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강청하고 졸라서 얻어내는 방법이 아닙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그렇게 조르면 주신다는 식의 유치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 내용을 잘 보시면 불의한 재판관과 선한 하나님, 그리고 과부와 택한 자, 그리고 강청과 밤낮 부르짖음으로 대조가 되어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아주 불성실한 재판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성실한 자가 과부의 강청이 귀찮아서 그의 소원을 들어 줍니다. 그것과 대조해서 선하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은 택한 자들이 밤낮 부르짖고 있는 그 내용을 이미 아시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밤낮 부르짖지 않아도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대조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멈추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한다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들의 기도의 내용을 이미 알고 계시고 반드시 그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기에 너희가 한 번만 기도해도 그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지만 택한 자들은 항상, 열심히 그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쉽게 가시적으로 응답되어지지는 않을 것이므로 기도하면서 낙망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7절과 8절을 보시면 그 기도의 내용이 ‘택한 자들의 원한’입니다. 그리고는 그 기도에 대한 비유 뒤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이상한 결론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비유에 나오는 성도들의 원한이라는 기도는 믿음에 대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가 항상 낙망치 말고 해야 하는 기도와 하나님이 찾으시는 믿음의 상관관계가 무엇일까요?
자 보세요. 항상 기도해야 하는 택한 자들의 기도는 ‘택한 자들의 원한’입니다. 그런데 그 원한이 속히 풀리지 않아 성도들이 낙심을 합니다. 그럼에도 성도는 낙망치 말아야 합니다.
위 내용을 어디서 보셨지요?
(계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여기보시면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신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응답이 유보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요? 땅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세상에 의해 다 죽는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유보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도들의 신원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늘나라에서까지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겠어요? 죄의 소멸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기도입니다. 단순히 복수를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제가 요한 계시록 강해를 할 때 이 부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렸는데 기억이 나세요?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쳐서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 저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 한다’고 예수님과 동일한 기도를 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서는 마음이 바뀌어서 ‘하나님, 저 놈들에게 빨리 복수해 주세요.’하고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지요? 그리고 성도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목적지로 하여 성숙되어지고 양육되어지고 있는 것인데 성도들이 천국에 모여서 복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원한, 신원’등의 말은 성도와 성도의 삶에 완전히 반대되는 죄의 세력에 대한 묘사이지 절대 복수나 원수 갚음의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죄와 그 죄가 배태하고 출산해 놓은 사망과 사망의 증상들에 의해 고통 받고 있는 세상을 안타까워하며 어서어서 죄가 청소되고 우리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완전한 새 세상이 도래하기를 천국에서도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바로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기도를 항상 낙망치 않고 믿음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의 결론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로 끝나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사람들이 엉뚱한 것을 바라며 엉뚱한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경고의 말씀이겠지요.
우리 성도들의 기도는 결국 그렇게 죄와 악이 소멸된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수렴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바로 그러한 내용의 향연으로 덮어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필요한 것들로 우리의 삶에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필요를 따라 기도를 했을 때 주님은 그 기도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향연을 덮어 하나님께 올리시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맞추어 응답을 하십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의 기도처럼 자기 몸의 사단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 기도를 했는데(세 번은 단순한 횟수가 아니라 응답을 받기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를 한 것을 의미하는 히브리 관용구, 예: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하나님께서 바울 속에 이루어져야 하는 하나님 나라와 그를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의 병을 안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기도의 응답을 못 받았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는 예수님을 거쳐 하나님께 올려질 때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거룩한, 향기 나는 기도로 바뀌어 올라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하나님은 신실하게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기도는 반드시 다 응답이 됩니다. 단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응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쪽으로 응답이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비유도 쉽게 이해를 하실 수 있습니다.
(눅11:5~13)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 비유도 강청 기도에 관한 비유로 둔갑을 하여 성도들을 미혹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 비유 역시 강청 기도의 능력을 강조하는 비유가 아니라 친구는 혹시 귀찮아서 안 주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강청하지 않아도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친구란 그 어떤 관계보다 친밀하고 친숙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한 밤중에라도 찾아가 무언가를 요구하면 군말 없이 주어야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친구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밤이 너무 깊어서 모두가 잠이 들었을 때 친구가 찾아오면 때론 귀찮아 질 수도 있었겠지요? 그래도 친구관계는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라도 가져갈 수 있는 관계인 것입니다. 하물며 그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일 때는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아들의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께 무언가를 구할 때 아버지가 왜 안 주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친구와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원한다고 아무거나 막 주시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만 주십니다. 아들이 뱀을 달라고 한다거나 전갈을 달라고 한다고 해서 아버지가 그런 거 안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좋은 것을 구하는 데 왜 좋은 것을 안 주시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좋은 것이 뭡니까? ‘성령’입니다.(13절)
성령은 구하는 자에게 오셔서 무엇을 하시지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가십니다. 그 말은 아무나 성령을 구하면 무조건 성령이 임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성도의 기도로 성도의 삶 속에서 성령이 오셔서 이루시는 일, 즉 성도 안에서 구현이 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더욱 더 성숙되어져 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건 얼마든지 구하라는 말입니다.
보세요. 성도가 항상 기도하며 낙망치 말아야 하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전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기도입니다.
여러분, 느헤미야 1장을 보면 느헤미야의 기도가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 포로 4세 정도 되는 이민자입니다. 그는 그 때 페르시아의 여섯 번째 왕 아닥사스다의 술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하자면 경호실장이나 비서실장 쯤 되는 직급입니다. 그런데 그가 유대에서 온 하나니라는 자의 말을 전해 듣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름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로 잡혀오지 않은 유대에 남은 이들의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포로였지만 대 페르시아제국에서 크게 출세를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소식을 듣자마자 통곡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기를 ‘하나님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합니다. 느헤미야에게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명예나 재산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민 4세로서 유대의 말도 가물가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아닥사스다의 허락을 받아 2차포로 귀환의 선봉에 서서 고생길이 훤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기도는 모두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기도하여 이미 확보한 세상의 힘을 버리고 힘들고 고단한 유대 땅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함입니다.
계속해서 다음 주에 우리 성도의 기도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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