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 믿는 자의 세 가지 표지(II)
(요8:21~47)
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 하려는가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 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 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 함이로다
44 너 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우리는 지난주에 30절 까지의 말씀을 통해 구원과 참 행복에 있어서의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열망해야 하는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가 어떻게 인간 세상에 투영되어 나타나는 지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의 자랑과 자기증명을 위해서는 그들의 이웃을 언제든지 살해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고 자기들의 자랑과 인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는 그게 하나님일지라도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추악한 삶이었습니다.
주 님은 자기들의 의를 자랑하며 그들 스스로 그렇게 쌓고 있는 의가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죄 속에서 살다가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는 사형 선고를 하신 후 ‘그러나 내가 십자가에 들리고 영광스러운 승귀를 한 후에는 너희 중에 택함을 받은 이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의 율법지킴과 절기 준수를 기각 시켜 버리시고 당신의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이 주어지게 됨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주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그 때 많은 이들이 믿었다는 어구를 통해 믿음은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며 구원은 그 믿음을 통해서만 올 수 있다는 것을 메시지로 전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는 31절부터 정말 믿는 자들의 표지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며 가짜 믿음을 가진 마귀의 자식들의 특징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그 첫 번째가 ‘내말에 거하는 자’이고 두 번째가 ‘진리를 아는 자’이고 세 번째가 ‘자유케 된 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첫 번째 특징인 ‘내 말에 거하는 자’는 말씀과 삶이 괴리의 상태에서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 그런 사람이 아닌 말씀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했지요?
그리고 믿는 자들의 두 번째 특징인 ‘진리를 아는 것’은 ‘진리는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해서, 즉 인간의 자격이나 업적 등에 의해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 구원과 참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복음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과 기쁨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들로 참 행복의 절정인 구원에조차 이를 수 있다고 믿고 행하는 이들은 진리를 아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이 두 번째 특징까지 공부를 했지요? 오늘은 믿는 자들의 세 번째 특징인 ‘자유케 된 자’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주님은 지금 믿는다고 하면서 자유하지 못한 자들은 진짜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자유 한 자인가를 확인해 봐야겠지요?
여러분, 자유가 뭡니까?
인류의 문화사를 돌이켜보면 인류의 모든 역사는 자유를 추구하는 자유운동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미국의 노예 해방이라든지, 조선이 일제 36년에서 해방된 사건이라든지, 마그나카르타에 의한 존 왕으로부터의 영국 국민들의 해방, 미국의 독립,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 대 혁명 등 세계의 역사는 억압하려는 자들과 자유를 얻으려 하는 자들의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자유를 위한 투쟁이 이쯤 되었으면 이제 자유에 대한 갈망이나 몸부림이 줄어들어야 할 텐데 인류는 점점 더 자유를 향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세계 곳곳에 돌고 있는 전운(戰雲), 과격해 지는 시위의 현장, 현재보다 나은 상대적 행복의 추구 등 모든 것의 근저(根柢)에는 그 모양은 다르지만 ‘자유의 성취’라는 영원히 풀지 못할 인류의 숙제가 그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인류는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는데 자유에 대한 갈망은 더 커져만 가는 것입니까? 인간들이 자유에 대한 정의를 잘못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를 정의하기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막는 억압의 대상에게서 벗어나,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자유라 합니다. 내가 묶여 있는 속박과 규제로부터 벗어나 내 힘을 발휘 할 수 있는 상태를 자유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견 맞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자기들이 무엇에 의해 묶여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엉뚱한 것들을 대적으로 오인하여 저항을 하는 삶을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읽어 보시면 우리 인류가 해방되어야 하는 억압의 주체는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반복해서 ‘너희가 죄 속에서 살다가, 죄 속에서 행하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간들은 죄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인 죄가 시키는 대로 살다가 그가 삯으로 주는 사망을 받아들고는 영원한 어두움 속에서 이를 갈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자유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8:32-36)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그렇게 아담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세상의 주인은 죄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원하는 모든 자유의 성취는 체제가 바뀐다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속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구속하는 죄가 있는 한 구속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를 구속하는 죄가 있는 한 진정한 자유가 없다’는 브루너의 말은 정확히 옳습니다.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은 절대 자유를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엉뚱한 자유를 위해 목숨을 겁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시작된 마귀의 속임수였습니다.
(창3:1~5)
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마귀가 무엇으로 하와를 속입니까? 선악과만 먹으면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하나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자유’를 상급으로 걸어 하와를 속이고 있습니다. 하와는 마귀에게 속아 오늘날의 인류가 정의하고 있는 그 ‘엉터리 자유’에로의 갈망에 선악과를 덥석 물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하고 싶었던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 최초로 찾아온 것이 형제간의 살인이었습니다. 인간이 정의하고 추구하는 세상 적 자유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한 것이어서 그 자유의 열매는 나 아닌 다른 존재들의 살해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절대자에게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자유를 향한 죄인들의 공통된 염원이 오히려 역사 속에서 다툼과 전쟁과 분열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적으로 간주하며 그 것들로부터의 해방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되어 다른 이들을 통제하는 자리에 앉고 싶다는 야망을 안고 태어납니다. 성경이 그러한 것을 한 마디로 무어라 칭합니까?
‘죄’라 칭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자랑하고 증명하기 위해 태어나고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은 죄 속에서 태어나, 죄 속에서 살다가, 죄 속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을 죄의 종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기까지는 그 죄가 지향하는 ‘나도 하나님처럼’이라는 자아숭배의 목표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에 닿으려는 시도를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7장과 8장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러한 모습을 그대로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과 가능성을 놓지 못하고 율법을 지키고 절기를 준수하여 구원에 이르고 선에 이르겠다는 그들의 모습, 율 법을 들어 자신들을 증명하고 자랑하기 위해 자신들보다 못나 보이는 가련한 여인과 자신들의 어두움을 지적하는 주님을 살해하려 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죄의 종이 되어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하는 죄인들의 특징을 그대로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 죄의 종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하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눅4:18~19)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님은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하셔서 바로 당신이 포로 된 자 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주러 오신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주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라 말씀하시곤 바로 당신이 자유케 하시는 아들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에 의해 자유하게 된 사람들은 무엇으로부터 자유하게 된 사람들입니까?
죄로부터 자유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죄는 뭡니까? 죄 란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창조된 피조물이 하나님이 부어주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거부하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주관하고 이끌어가겠다고 하며 그러한 힘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모든 생각과 시도와 행위들을 가리켜 죄라 합니다.
따라서 죄에서 자유하게 된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풍성히 채워질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올바로 자각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신이 부인되고 하나님께 속박되는 것을 자유라 하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마귀의 자식이라 불렀을까요?
(요8:44)
44 너 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조금 전에 우리가 창세기 3장에서 확인한 것처럼 마귀의 거짓말은 ‘너희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으니까 너희의 힘과 지혜와 가능성을 의지해서 행복과 만족에 도달하도록 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은 고리타분하고 지루하고 자존심 상하는 삶이니까’입니다. 거기에 속고 있는 자들이 마귀의 자식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신들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하고 율법지킴과 절기준수를 들어 간음한 여인과 주님을 살해하려하는 그들을 가리켜 마귀의 자식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요한복음 7장과 8장을 통해 공부한 것처럼 믿는 자들이 참으로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옳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입니까? 옳음이라는 것을 규정하는 객관적 판단 기준이 뭡니까? 사회법인가요? 윤리입니까? 도덕인가요? 기독교에서 ‘옳음’의 유일한 판단기준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초막절 등의 절기를 지키며 종교 행위 들을 열심히 한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율법에 명하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순종하여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그건 율법에 근거한 객관적 옳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객관적 옳음이 나의 자랑과 자신의 존재 증명에 쓰이게 될 때 그것은 항상 나 아닌 다른 이들의 상해와 살해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외식이라 합니다.
우리는 전에 이미 마태복음 6장을 통해 외식하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영광을 위해 (마6:2) 남에게 보이기 위해(마6:5), 다른 말로 자기 자랑을 위해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뱀들, 독사의 새끼들’이라 부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국 자기 숭배 교에 빠진 자들이지 절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15:7~8)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기 영광을 위해 행하는 그 어떤 선해 보이는 일도 다 외식이며 그러한 외식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는 듯해도 마음은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저주받을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에서 해방이 되어 하나님께 속박되고 진정한 자유자가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이들의 삶은 어디로 수렴이 되어야 할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수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나 이외의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인가 아닌가가 내가 하는 일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나음과 옳음과 자랑과 증명을 위해 남을 해치는 행위가 어찌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자유케 된 자들의 삶일 수 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죄의 종이며 죄 속에 살다가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그러한 죄의 종들을 자유하게 하기 위해 당신이 오신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은 자들은 그 자유로 남을 섬기는 삶을 산다고요.
(갈5:13)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이렇게 자유하게 된 성도의 삶은 ‘섬김과 종노릇’으로 특징 지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죄의 노예들은 절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들의 주인인 죄가 절대 그러한 섬김의 삶, 종노릇의 삶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롬6:20)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죄의 종들은 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이러합니다.
(롬3:10~18)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죄의 종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쁨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자랑과 자기 존재의 증명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돋보이고 드러나면 무엇이든지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신앙생활은 누가 잘났냐 누가 옳으냐를 증명하는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느냐에 대한 대답을 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하게 된 참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웃을 사랑해 주고 섬겨주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주장이 객관적으로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그 것이 다른 이들을 상하게 하고 아프게 하면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못 해? 나는 이렇게 성경을 많이 공부했는데 당신은 왜 그 정도밖에 못 돼?’ 이러한 권고가 옳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만일 그러한 권고가 자신을 자랑하고 남을 끌어내리는 결과로 이어졌다면 그건 죄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전10:26~33)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보세요. 성도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때 시중에 나오는 모든 고기는 우상에게 바쳐졌다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성도가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로 편 가름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표면적으로 성도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이 꺼림칙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필요하면 먹고 불필요하면 먹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선택과 행위는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아니냐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자유하게 된 성도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기쁨만이 그들의 관심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처지나 상황의 개선이나 발전이나 향상에 관심이 있지 않고 그 처지와 상황과 사건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에 관심이 있습니다.
가난한 상태에 놓인 자유자는 그 가난함 속에서 부유함을 구하는 것에 관심이 있지 않고 그 가난한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까를 더 먼저 생각합니다.
질병 속에 있는 자유자는 그 질병을 낫게 해 달라는 기도에 앞서 그 질병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질병의 치유에 관한 기도는 그 다음입니다.
그러한 이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그 인내와 섬김과 순종을 기뻐하신다는 확신이 들 때 그들은 희열을 느낍니다.
(행5:40~41)
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혔던 이들이 그 일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임이 확인이 되자 기뻐하면서 자기들을 채찍으로 친 사람들 앞을 떠났다고 합니다.
(행6:15)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공회 앞에 잡혀가 이제 곧 돌에 맞아 죽게 될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 같았습니다. 천사 같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한 일을 보세요.
(행7:59~60)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자기들의 옳음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율법을 들어 스데반을 때려죽인 유대인들과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며 죽은 스데반, 그 둘 중 어떤 사람이 승자입니까? 하 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원수까지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임을 알고 죽어가면서까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다 간 사람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는 아무 관심 없이 자기들의 명예와 자랑과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율법을 들어 사람을 때려죽이고 있는 그 무리들 중 누가 하나님 나라의 승자냔 말입니다. 당연히 스데반입니다. 그가 바로 자기 숭배라는 죄에서 자유하게 된 진정한 자유자인 것입니다.
제가 지금 반복해서 죄에서의 해방이라는 말과 자아 숭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말을 혼용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에서의 해방이 곧 자기 숭배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가 어디에 있습니까? 밖에서 들어오나요? 죄는 자기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자기가 죄 중에서 태어났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시51:5) 예수를 알기 전의 ‘나’라는 전 존재는 죄로 가득 차 있는 총체적 죄입니다. 따라서 죄에서의 해방은 나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가 ‘나’에 묶여 있게 되면 절대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로 다른 이를 섬기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죄에서 풀려난 사람은 그렇게 나에게서 풀려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왜 짓습니까? 나를 기쁘고 만족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짓습니다.
우리는 그 저주받을 ‘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사망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나 어떤 것을 선택 할 때에 먼저 ‘이것이 나를 위한 것이냐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것이냐’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유하게 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과 탐심을 따라 올라오는 욕구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자제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not able not to sin의 상태에서 able not to sin의 상태로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걸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의 자유는 나를 숭배하기 위해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얻어낼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언제라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나를 몽땅 바칠 수 있는 자유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 자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를 합니다.
(롬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자유자들은 자신의 몸을 죄에게 드렸던 때와 같이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산제사는 살아있는 제물을 끌고 와서 회중 앞에서 죽이는 것을 산제사라 합니다. 죽은 제물은 이미 숨이 끊어져 모욕될 것도 없고, 자존심 상할 것도 없고, 수치 당함과 분노도 없습니다. 그러나 산 제물은 다릅니다. 산 제물은 대중을 모아놓고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수치와 고통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산 제물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올바른 신앙생활은 그렇게 모욕당하고 밟히고 손가락질 당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당해주고, 섬겨주고,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느라 그렇게 산 제물 취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산 채로 군중들에게 모욕당하시고 심지어 벌거벗겨지셔서 십자가에서 수 시간을 매달려 있었다는 것 기억하세요. 그게 산 제물의 표본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못 박은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외치는 자가 바로 산 제물로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권고는 이미 우리에게 그러한 능력이 주어졌음이 전제된 명령이라 했지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로부터 자유하게 된 우리 성도들이 그 자유에 대해 잘 알 지 못하고 잘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미혹하는 죄의 거짓말에 너무 쉽게 속아 의의 종들이 죄의 종처럼 살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로마서 7장 후반부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으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하고 탄식한 것 아시지요? 사도 바울도 자신의 언행과 생각을 돌아보면서 자신을 가리켜 ‘사망의 몸’이라 칭할 정도로 죄의 세력은 집요하며 강력하게 우리를 노립니다.
(롬7:14~25)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쉼프헤미: 동조하다)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 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안티스트라튜오마이,strategy :군사 행 동에 참가하다)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아이크말로티: 창으로 위협하다)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탈라이포로스: 어려운 노동의 결과로 기진맥진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자유하게 된 자유자들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마치 자신이 죄의 종이었던 때와 똑같이 그렇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고 죄의 속임수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롬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가 그렇게 맥없이 죄에게 당하고 있을 때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이제는 죄가 우리를 다스릴 수 없는데 왜 내가 죄의 거짓말에 속고 있는가? 나는 자유인이다’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확인하고 반추해야 하는 것입니다.
(롬5:20-21)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죄가 왕 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왕 노릇하며 우리의 거룩을 완성시켜 가고 계신데 우리가 어찌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을 수 있는가 하고 죄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롬6:15~23)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여러분, 우리는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신분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성도입니다.
그런데 죄는 호시탐탐 우리를 거짓으로 미혹하여 우리가 죄에게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잊게 하고 다시 죄의 종처럼 살도록 사로잡아 가려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의 신분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신분에 맞는 삶이 어떤 삶인지도 분별하여 알고 있어야 죄의 거짓말에 속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유입니다. 자유자는 ‘네가 네 인생에 왕이 되라,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는 마귀의 거짓말에 속지 않습니다. 참 자유자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꽁꽁 묶어 온전한 거룩으로 이끌어 가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아 숭배 교라는 무섭고 추한 잡교에서 벗어나 자신을 낮추고, 유명해 지는 것과 자기 자랑을 지양(止揚)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까? 왜 사람들은 이 역사와 공간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까? 그것이 정말 생명의 보람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죽음 이후의 삶이 불확실한 사람들이 잊혀지는 것이 두려워 나름대로의 불멸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낳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족보를 만드는 것도, 큰 업적을 쌓으려 하는 것도, 자식들에게 제사를 요구하는 것도 모두 잊혀지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이름을 내고 싶은 나약한 죄인들의 마음의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인간 스스로 불멸과 영원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자유자는 스스로 불멸을 추구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자신은 소멸되고 하나님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소멸 속에 잉태되어 피어나는 불멸이 진짜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잊지 마세요. 애벌레가 소멸되어 호랑나비가 탄생하듯이, 한 알의 씨앗이 소멸되어 찬란한 새 싹이 돋듯이 자연의 법칙 속에서의 소멸은 항상 불멸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소멸을 두려워합니다. 자기가 부인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게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소멸됨으로서 영원한 불멸의 첫 열매가 되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죄에게 속지 말고 우리를 부인하여, 다른 말로 자신을 소멸하여 불멸을 잉태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게 자유자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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