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믿음의 왕 노릇, 은혜의 왕 노릇
(창15:7~17)
7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
8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9 주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씩을 가지고 오너라."
10 아브람이 이 모든 희생제물을 주께 가지고 가서, 몸통 가운데를 쪼개어,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비둘기는 반으로 쪼개지 않았다.
11 솔개들이 희생제물의 위에 내려왔으나, 아브람이 쫓아 버렸다.
12 ○해가 질 무렵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13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14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며, 그 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
15 그러나 너는 오래오래 살다가, 고이 잠들어 묻힐 것이다.
16 너의 자손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을 만큼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7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니,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
우리는 지난주에 창세기에 나타난 이신칭의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의인은 인과율(因果律)에 의한 행위로 말미암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배웠지요? 아울러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는 믿음은 믿음을 발휘하는 자에게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임도 확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로서의 믿음을 객관적 믿음이라 하고 그 객관적 믿음에 의해 성도의 삶 속에서 발휘 되는 믿음을 주관적 믿음이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롬1:17) 그러니까 성도의 의인됨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작품인 것입니다.
그러한 이신칭의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는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6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아브라함이 또 다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입니다.
(창15:8) 8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했던 6절까지에서 하나님은 당신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후손에 대한 약속의 성취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시고 오늘 본문 7절에서 땅에 대한 약속의 성취에 대해 또 다시 확인을 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분명 6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고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이라 하나요? 하나님의 말씀에 ‘증거를 보여주세요.’하고 조르는 걸 믿음이라 합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이잖아요? 아브라함은 지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 그전에 6절에서 그에게 믿음이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가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아브라함의 불신앙이 뒤 따라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국어사전에 나오는 것처럼‘아무런 의심 없이 신뢰하는 것’으로만 정의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에 그러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상대방을 신뢰하는 것을 우리는 주관적 믿음이라 하는 것이고 그러한 주관적 믿음이 나올 수 있도록 먼저 선행적으로 주어지는 객관적 믿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아브라함을 의롭게 한 믿음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객관적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객관적 믿음에 의해 주관적 믿음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믿음은 발휘하는 자에게서 생산되어 발휘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어떤 강한 힘에 의해 끌려가는 형국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믿음을 가리켜 ‘고삐를 쥔 자에 의해 끌려가는 것이 믿음이다’라고까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구원의 전 과정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고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은혜의 왕 노릇’이라는 아주 적절한 언어로 표현을 합니다.
(롬5:21)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사람을 지배한 것과 같이, 은혜가 의로(개역: 왕노릇 하여 ) 사람을 지배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11장까지에서 타락한 인간들이 어떠한 거대한 손에 붙들려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가 왕 노릇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섬기며 살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으로 덮쳐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은혜가 아브라함을 죄의 상징인 바벨론, 갈대아 우르에서 뽑아내시고 그를 약속의 땅으로, 모리아 산으로 몰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바울이 말하는 은혜의 왕 노릇인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1장까지가 죄의 왕 노릇에 관한 이야기라면 12장부터 전개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은혜의 왕 노릇에 대한 기술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의인되게 했던 아브라함의 믿음 또한 은혜의 왕 노릇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류는 왕 노릇하는 죄의 종이 되어 죄가 지향하는 목적지인 ‘스스로 왕이 되어 하나님을 무시하고 대적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죄의 세력을 결박시켜 버리고 창세전에 택해진 한 무리에게 불가항력적으로 부어져서 그들을 죄의 종 된 자리에서 구출해 내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시켜 가시며 끝내는 완성시키시는 것입니다. 그걸 구원이라 하는 것이고 그러한 구원의 표본으로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내용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엡2:8‐9)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의인이 되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 이니라
이렇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것이고 그 의인되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위에서 왕 노릇하시면서 우리를 통치하시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의 자녀로 성숙시켜 완성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왕 노릇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놓고 ‘이제 죄에서 구해주었으니 나머지는 너희들이 열심히 해서 완성해라’하고 뒷전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완성이 되는 날까지 유효한 것입니다.
(롬5:9~10) 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에 빠져 원수 되었던 자들에게 아들의 피를 부어 그들을 살려 내셨다면 이제 죄의 자리에서 빠져나온 의인들을 더욱 신경 써서 완성시키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 죄에서 해방된 자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반드시 성숙시키시고 완성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살으심의 구원인 것입니다.
9절과 10절에 공히 ‘더욱’ ‘much more’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요? 바로 그것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 되어 죽어 있던 자들을 아들의 목숨을 주어 살리셨다면 이제 살아난 자들을 ‘더욱’당신의 백성으로 완성해 가시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은혜의 왕 노릇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임한 그 은혜의 왕 노릇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께 택해진 그 때부터 일까요? 그럼 그 전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삶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택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해 택해진 사람입니다.
(엡1:4‐5)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은혜의 왕 노릇의 시작과 끝)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렇게 아브라함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에 의해 택해진 사람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이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은혜의 왕 노릇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어 그가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에도 유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왕 노릇은 그를 모리아 산으로, 아니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로 몰고 가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예수를 믿기 전의 삶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 하에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착착 움직여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의 역사는 시작부터 종말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 아래에서 그 분의 계획대로 움직여지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왕은 모든 것을 계획하고 관장하고 통치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라는 왕이 창세전부터 하나님 백성들의 왕이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은혜는 창세전에 그 은혜의 수혜자들을 모두 미리 정하셨을 뿐 아니라 그 은혜의 왕 노릇으로 말미암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그 과정 또한 미리 계획해 놓으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은혜가 왕이니까요. 쉬운 말로 구속사 안에서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그 사건의 때는 은혜의 왕 노릇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 하나님의 작정에서 벗어나 우연히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수요일 요한복음 성경공부 때도 공부한 내용이지요? 공교롭게도 오늘 창세기 본문에서도 그 은혜의 예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을 보세요.
(창15:13‐14,16) 13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14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며, 그 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 16 너의 자손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을 만큼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모세는 아브라함보다 500년이나 뒤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500년 뒤의 일을 미리 다 계획해 놓고 계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애굽에서 400년이나 머물러야 하는 이유도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찰만큼 찬 뒤에 그들을 심판하셔야 하기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400년간이나 종살이를 해야 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모리 족속의 죄가 관영하게 될 때도 이미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전에 나오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때가 하나님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께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에게 찾아가셔서 그를 불러내시는 사건과 그 때까지, 그리고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들어가게 되는 때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게 되는 때까지, 그리고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찰대로 차게 되는 시기까지 창세전에 이미 다 그림으로 그려놓고 계신 것입니다. 그게 왕 노릇하는 은혜의 주권인 것입니다.
(롬8:28~30)(표준 새 번역) 28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 29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당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대가족 안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30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잘 보세요. 하나님은 미리 정해 놓으신 당신의 백성들을 창세전에 택하시고 그들을 이 역사 속에서 부르시고 그 부르신 자들을 이미 영화라는 완성의 자리에까지 앉혀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이 창세전부터 우리의 삶에 개입하여 우리의 완성의 자리인 영화의 자리까지 집요하게 우리를 좇으며 결국에는 완성을 시키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 모든 시제들이 완료시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은 이미 시작부터 완성까지 하나님의 작정 속에 다 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은혜의 왕 노릇은 개인의 수명까지도 주관하고 계십니다. 본문 15절 보세요.
(창15:15) 15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수명까지도 정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관장하시고 완성해 가시는 주관자이시며 한번 계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내시는 고집스런 분이시기에 오늘 본문의 내용처럼 아브라함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어리광을 부려도 그를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계속 설득하시고 가르치시고 심지어 증표까지 주시면서 그를 이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의 왕 노릇이며, 믿음의 왕 노릇이며,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왕 노릇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6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에게서 생성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하시고 주도해 가시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에게서 믿음이 아닌 것 같은 행동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그 믿음을 발휘하는 사람 측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라면 아브라함처럼 믿음이 있는 자로 호명이 된 사람은 끝까지 믿음의 행위만 내 놓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이기에 믿음을 받는 사람 측에서는 잦은 실수와 불신앙의 모습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잦은 실수 속에서도 은혜의 왕 노릇은 우리를 집요하게 이끌어 반드시 우리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함이 나오게 만드시고야 마십니다.
(빌2:12~13)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대로,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13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염원하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보세요. 이렇게 은혜의 왕 노릇은 그저 우리를 바벨론에서 건져내시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은혜의 왕 노릇은 우리 안에 소원을 두게 하시고 행하게 까지 만드시는 왕 노릇입니다. 완성의 자리까지, 영화의 자리까지 집요하게 우리의 고삐를 이끌고 계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바로 그 은혜가 여러분을 통치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교회에게 이런 감격스러운 낭보를 전합니다.
(롬8:35~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36 성경에 기록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 앞에서 우리를 끌어내릴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동안에 자주 나타났던 그의 어처구니없는 불신앙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놓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의 연약한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때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삐져나오는 불신앙의 모습들 때문에 고민하셨습니까?
표준보다 한참 모자라 보이는 여러분의 믿음 생활 때문에 자괴감을 느끼지 않으셨어요?
괜찮습니다. 믿음의 주도권은 하나님의 은혜가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 여러분의 고삐를 꽉 움켜쥐고 계시며 반드시 여러분을 완성의 자리에 앉히고 마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우는 사자처럼 노리는 마귀의 공격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나요?
그럼요.
(약4:5‐7) 5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살게 하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 한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합니다.
7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러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시기하기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교만한 자, 즉 마귀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오죽하면 천사 장 미가엘도 마귀와 접변(接辯)하면서 그를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유9)하고 뒤로 물러섰겠습니까? 바로 그 무시무시한 마귀의 세력이 우리를 삼키려고 전력을 다해 궤계(詭計)를 꾸미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의 왕 노릇이 마귀의 궤계를 훼파(毁破)하고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실 것임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의 삶 속에서 마귀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나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인데 마귀가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나는 분명 은혜의 왕 노릇 아래에서 은혜에 의해 통치를 받고 있는 사람인데 마귀가 승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하고 저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때 루터의 방에는 눈에 보이는 마귀들이 들끓었다고 하지요? 루터는 검은 개를 아주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루터가 잠을 자기 위해 이불을 들추면 꼭 루터가 싫어하는 바로 그 검은 개들이 이불 속에서 루터를 보며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몇 번은 그 개들을 들어서 창밖으로 내 던지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수시로 옷 장 속에서 여자 아이가 자기를 노려보며 음침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루터가 글을 쓰고 있노라면 곁에서 어떤 목소리가 ‘너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하면서 루터가 감추고 싶어 했던 실수나 비밀들을 줄줄이 폭로하기도 했답니다. 그 때 루터가 들고 있던 펜을 벽에다 집어 던지며 ‘그래 난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도 주님이 날 구원하셨다’라고 했다지요? 그 때 벽에 뚫린 펜 구멍이 아직도 루터의 생가에 보존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죽는 날까지 신경쇠약 치료를 받았습니다.
루터가 그러한 일들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루터는 상당히 오랜 기간 그렇게 사단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잠시 출장을 가신 것일까요?
제가 신학교에 처음 입학하고 몇 달 동안 겪은 일입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제 입에서 제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는 나쁜 놈’이라는 말이 계속 쏟아져 나왔습니다. 제가 저의 입을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때가 처음입니다. 입으로는 계속해서 ‘예수는 나쁜 놈’을 중얼거리면서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하나님, 이거 제 진심 아닌 것 아시지요? 왜 이런 말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쏟아져 나오지요? 하나님 이거 좀 막아주세요’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나중에는 도저히 통제가 되지 않아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 말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웃음이 나더라고요. 하나님은 왜 저의 의지와 상관없는 그러한 것들을 막아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즉시 들어주지 않으셨을까요?
사도 바울은 어때요? 사도 바울에게도 사단의 공격이 엄청났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12장을 보시면 사도 바울에게도 사단의 가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사단의 가시를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사자를 막아주셔야 하는 분 아닌가요? 그런데 사단의 사자를 막아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사단의 공격을 주도하고 계십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마귀의 공격을 막아주시지 않으셨다고 말을 합니다.
막아주시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사단의 가시가 하나님의 족한 은혜의 결과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은혜의 왕 노릇에 사단의 가시가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어진 사단의 가시로 바울은 자만하지 않을 수 있었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자신의 약함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권 안에 들어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가 그 사단의 가시에 지지 않고 넉넉히 이기는 강함을 보여 주게 된 것입니다. 그게 약할 때 강함이라는 어구의 의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경험한 그 일로 인해 내가 지금 이렇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힘에 이끌려 저지르고 있는 것이 이것 하나뿐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것 말고도 떠오르는 것이 참 많았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살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며 집을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추월(追越)만 해도 무의식 적으로 긴 손가락이 펴질락 말락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용서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굳게 마음먹고 차 문을 열려고 하는데 누가 제 차 문을 조금 찍고 갔을 때 나도 모르게 저주의 말이 튀어 나오기도 했었지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습관들이나 중독들을 끊어버리겠다고 누누이 다짐하면서 그것들을 버리지 못하는 저 자신의 모습에 실망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돌발 적으로 튀어나온 것들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깨어있지 못할 때 우리의 옛사람은 어김없이 튀어나와 우리 속사람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우릴 끌고 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것은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 입에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 뱉어지는 ‘예수는 나쁜 놈’이라는 불경한 말을 하게 되는 현상과 내 의지를 거스르며 튀어나오는 옛 습관들이 무엇이 다르지요?
저는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정말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큰 일 나겠구나.’하는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마귀는 언제든지 우리의 옛 사람에 대한 연정(戀情)을 자극하여 우리를 자신의 종이 되어 자신의 말만 듣던 그 자리로 끌고 가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할 때 우리는 어느새 마귀의 종처럼 살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그 사건으로 그걸 배웠습니다. 고로 그 경험은 저에게 은혜였습니다. 은혜의 왕 노릇이 저에게 그러한 경험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그러한 경험들을 통하여 ‘그래 맞아, 난 그런 사람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날 사랑하시니 어떡하니?’라는 명언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어땠나요?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사단의 사자를 통하여 ‘나의 약함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속에 들어 있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복된 약함인가?’하고 그 약함을 이겨냈습니다. 그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지키심입니다.
그렇게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합력하여 나의 선을 이루어 내는 일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곳에 계신 분들 중에도 자신이 지금 마귀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겪고 계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마귀에게 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왜 하나님이 이러한 마귀의 공격을 막아주시지 않는가하고 의아해 하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어떠세요? 참 힘드시죠? 그게 여러분에게 환난이나 고난으로 인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러한 자각과 인식 속에서 ‘내가 왜 좀 더 정신 차리지 않았나?’하는 후회와 뉘우침과 회개를 해야 합니다. 아울러 ‘이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해야겠다.’는 결심도 하셔야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마귀의 공격까지도 하나님 자녀의 성숙에 선용하시는 은혜의 왕이시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내 손에서 내 백성을 빼앗아 갈 수 없다’(요10: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치열한 열심으로 우리를 지키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어떤 모양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유익입니다. 심지어 여러분의 죄까지도 여러분의 성숙에 유익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오, 복된 죄여’라고 외친 것입니다.
우리의 죄까지도 선용하셔서 우리를 자녀답게 만들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 그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 우리는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 우리는 결국 이러한 모습으로 완성됩니다.
(빌3:21) 21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우리의 낮은 몸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은혜의 왕 노릇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바로 그 일에 소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조변석개하는 믿음에 오래 참으십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라면 아브라함은 벌써 그의 죄와 불신으로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타지에서 횡사(橫死)하는 처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진노를 퍼 부으시는 분 이시니까요.
우리가 아브라함의 삶을 지켜보아서 알지만 아브라함도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면을 보아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진 자들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던 아브라함의 생에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여 그의 삶에 왕 노릇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은혜가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를 수지맞은 사람들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관심을 두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만 은혜로 왕 노릇 해 주십니다. 그 선택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그들의 죄로 저주를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들의 죄까지도 오히려 하나님께 선용이 되어 하나님 자녀로의 성숙에 유익한 도구로 사용이 됩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인생입니까? 이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암3:2) 2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여기서 ‘알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 ‘야다’는 ‘특별한 관심’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치매가 오셔서 다 잊어버리고 이스라엘만 아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수많은 나라들 중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그 하나님의 치열한 은혜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 내 백성 OO야, 난 세상이 역사의 주인공들이라 부르는 간디나 슈바이처, 나폴레옹이나 히틀러, 징기스칸이나 알렉산더,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사람들은 모른다. 난 OO 너한테만 관심 있어, 그러니까 내 사랑하는 자야, 이제 일어나 나와 함께 내 나라를 향해 가자’
우리 그 길을 힘차게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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