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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 롭 라이너 감독, 잭 니콜슨ㆍ모건 프리먼 주연의 <버킷 리스트>

은바리라이프 2012. 12. 4. 07:06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  

롭 라이너 감독, 잭 니콜슨ㆍ모건 프리먼 주연의 <버킷 리스트>  / 구미정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께서 자기 마을에 오신 것을 알고, 마르다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는데, 손님 접대에 바쁜 언니와 대조적으로 동생 마리아는 예수의 발 곁에 앉아 말씀을 듣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불평하니, 예수의 대답인즉,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눅 10:42) 하더란다.

이 짧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단연 마르다다. 다소 철없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마리아에 비해, 마르다는 대단히 헌신적이고 이타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은 마리아를 두둔하고 마르다를 나무라는 것처럼 보이니,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마르다는 손님을 모셔 들였고, 부지런히 접대했다. 그러다가 문득 저 혼자만 바쁘게 동동거리는 모양이 억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하고 예수께 부탁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건 부탁이 아니라 응석이고 투정이었다. 언니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동생의 전유물인 그것을 마르다도 한번쯤은 부려보고 싶었다. 예수라면 내 마음을 알아주시겠지, 내 편을 들어주실거야 ······. 적어도 그 순간 예수는 마르다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 주어야 했다.

헌데 돌아온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언니를 도우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르다를 위로하지도 않는다. 위로는커녕 오히려 자극하고 도전한다. 지금 이 순간 자기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여 즐겁게 누리는 마리아에게 무슨 잘못이 있냐는 거다. ‘많은 일’로 염려하는 대신에 자기에게 ‘필요한 일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마르다에게 커다란 깨달음이 되었을 것 같다.

두 남자가 같은 병실에 누워 있다. 하나는 흑인 정비공이고, 다른 하나는 백인 갑부다. 바깥에서라면 만날 확률이 거의 없고, 친구 될 확률은 더더욱 없는 두 사람이 형제보다 더 끈끈한 우정을 나눈다. 어쩌다가 이런 기적이 일어났을까? 죽음 때문이다. 각자 길어야 1년 내지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 의사의 냉혹한 시한부 선고가 이들을 순식간에 무장해제시키고, 죽음이라는 공통 운명에로 돌려세운다. 서로를 경계 짓던 흑백과 빈부의 차이가 단박에 소거되고 마는 기적이란 죽음 앞에서나 가능한 일! 오호라, 그래서 성 프란시스코는 죽음도 은총이라며 반갑게 맞이했구나.

자동차 정비사 카터 체임버스(모건 프리먼 역)는 마르다를 닮았다. 사십 평생 가족들 뒷바라지에 자기 꿈은 포기한 지 오래다. 역사 교수가 되고 싶어 대학에 들어갔건만, 여자 친구가 임신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생활 전선에 뛰어 들어야 했던 그. 줄줄이 자식을 낳고, 그 아이들이 자라서 다시 가정을 이루는 걸 지켜보는 낙으로 건실하게 살아왔다.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손자들을 훈장처럼 거느린 그는 티브이 퀴즈쇼를 보며 귀신 같이 척척 정답을 알아맞히는 것으로 잃어버린 꿈에 대한 상실감을 달랜다. 

그런 카터에 비하면 재벌 사업가 애드워드 콜(잭 니콜슨 역)은 한 세상 자유롭게 참 잘도 살았다. 남들은 각각 한 번씩 하기도 어려운 결혼과 이혼을 그는 무려 세 번씩이나 했을 정도로, 자유롭기는 무지 자유롭게 살았다. 하지만 그의 자유는 항상 어딘가 엉성해 보인다. 그렇게 숱한 염문을 뿌렸어도 그의 침상을 찾는 사람은 의사와 비서 말고는 아무도 없다. 싸구려 병원 급식 대신에 최고급 호텔식으로 우아하게 식사를 하지만, 그의 위장은 그런 산해진미를 소화시킬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커피 고르는 입맛도 까다로워서,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공수해온, 전 세계 총생산량이 1년에 고작 300킬로그램밖에 되지 않는다는 코피 루왁을 즐기지만, 그 지상 최고의 커피가 고양이 똥에서 만들어진다는 건 까맣게 모른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벌고, 쾌락을 증대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생의 목적인 것 마냥 거드름을 피우는 애드워드는 사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것만 빼면 동정이나 연민의 대상이 전혀 아니다. 

영화는 마치 죽음 앞에 선 두 인생 중에 어느 쪽이 더 행복해 보이냐고 묻는 듯하다. 글쎄, 행복이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고 비교 우위적 속성이 있으므로, 애드워드는 카터를, 카터는 애드워드를 서로 부러워할는지 모르겠다. 이 두 사람은 각자 서로의 결핍을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드워드는 카터가 갖지 못한 부를 가졌고, 카터는 애드워드가 갖지 못한 가정을 가졌다. 만약에 죽음이라는 계기가 없었더라도, 그들이 자신의 결핍을 그토록 진지하게 반추할 수 있었을까?

한 손에 링거를 들고 병원 복도를 오가며 두 노인이 나누는 대화는 제법 계몽적이기까지 하다. 죽음학(thanatology) 수업이라도 받는 기분! 이 정도 교양지식은 뼈가 되고 살이 되니 가급적 밑줄 긋고 외워둬야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부정’이란다. 절대 그럴 리 없어, 뭔가 착오가 생겼을 거야, 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는 단계다. 그 다음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는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죽어야 하나, 식의 ‘분노’가 뒤따르고, 어떻게든 신을 구슬러 생명을 연장해보려는 ‘타협’의 단계가 이어지며, 깊은 우울증을 동반한 ‘좌절’의 단계를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죽음을 ‘수용’하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5단계 이론은 죽음학 연구의 대가로 널리 알려진 엘리자벳 큐블러 로스가 제안한 것인데, 애드워드는 카터가 이제 겨우 제1단계에 들어섰을 뿐이라고 놀린다.
그렇다고 애드워드가 달관의 경지에 있는 건 물론 아니다. 누릴 만큼 누리고, 즐길 만큼 즐겼으니, 생에 대한 미련이 없는 척 굴지만, 그에게도 해결해야 할 숙제는 있다. 다만 그것을 직시하는 게 고통스러워 의식 저편에 숨겨두었을 뿐. 꽁꽁 싸매서 밀쳐둔, 하나밖에 없는 딸과의 화해라는 숙제를 고약하게 후벼 파서 마침내 직면하게 만드는 건 당연히 카터의 몫이 될 것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밤, 카터는 대학 1학년 새내기 시절에 철학 교수가 내준 숙제를 떠올린다. 이름하여 ‘버킷 리스트’ 작성하기. ‘버킷’이란 콩글리쉬로 흔히 ‘바께쓰’라 발음되는 그것인데, 영어 표현에서 ‘양동이를 걷어차다’(kick the bucket)가 바로 ‘죽다’의 뜻이니, ‘버킷 리스트’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을 적는 목록인 셈이겠다.

천성이 고상하고 착실한 카터는 세상에서 가장 장엄한 풍경 보기, 가난한 사람 도와주기, 눈물이 날 정도로 웃어보기 등을 낙서하듯 적어 내려간다. 다음날 아침, 우연히 이 낙서를 보게 된 애드워드는 모름지기 버킷 리스트에는 가장 구체적이고 속물적인 내용이 담겨야 한다고 나름의 개똥철학을 펼친 후, 스카이다이빙하기, 팔뚝에 문신 새기기, 세계 최고의 미녀와 키스하기 등을 적어 넣는다. 이렇게 해서 작성된 두 사람의 공동 리스트. 그동안 병실지기로 동고동락한 두 노인은 효과 없을 연명기술에 남은 생을 저당 잡히느니, 차라리 폼 나게 즐기다 죽는 쪽을 선택하자며, 함께 동반 여행을 떠난다.

영화는 이 대목에서, 평생을 가족에게 봉사한 카터가 낯선 남자와 생의 마지막을 보내겠다고 선언하자 슬픔과 배반감에 몸부림치는 아내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죽어가는 자와 남겨지게 될 자 사이의 갈등을 어느 정도 부각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죽어가는 자에게 자신의 남은 생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허락하는 대신에, 남겨질 자의 감정까지 보살피라고 강요하는 건 무리한 부탁이 아닐까? 죽음은 일차적으로 죽어가는 자의 문제다. 남겨질 자에게 죽음은 다만 사랑하는 이의 소멸일 뿐이지만, 죽어가는 자에게 죽음은 온 세상의 소멸인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사건에서 가장 배려되어야 할 당사자는 언제나 죽어가는 사람 자신임을 잊지 말라고 영화는 우리에게 충고한다. 

죽음을 앞두고 카터는 비로소 난생 처음으로 가족을 위한 삶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가 하면 애드워드는 카터 덕분에 이제껏 자기 자신만 위해 살던 삶에서 벗어나 남을 위한 삶에 눈 뜨게 된다. 그 두 사람은 각자 자기에게 좋은 몫을 선택했다. 중요한 건 죽음 앞에서 정직해지는 일이다. 

‘위험사회’에 몸담고 사는 우리, 어차피 탄생에는 순서가 있지만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는 진리를 되새긴다면, 지금이라도 진지하게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봄이 어떤지. 해야 할 많은 일을 성취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일 한 가지를 해보고 죽는 것이 행복한 인생인즉, 아침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거다, 오늘은 뭘 하고 싶은가를. 마르다 콤플렉스를 치유하는 길은 의외로 간단하다.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등 두드리시는 예수의 손길이 따뜻하구나. 

/ <활천>, 2008. 6월호.